(葆光의 수요 시 산책 45)
아이들에 대하여
가슴에 아기를 안은 한 여인이 말했다. 우리에게 아이들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말했다.
그대의 아이는 그대의 아이가 아니다.
아이들은 스스로를 그리워하는 큰 생명의 아들과 딸들이니,
아이들은 그대를 거쳐서 왔을 뿐 그대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또 그대와 함께 있을지라도 그대의 소유가 아니다.
그대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으나, 그대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생각이 있으므로.
그대는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은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아이들의 혼은 내일의 집에 살고 있으므로. 그대는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조차 갈 수 없는 내일의 집에.
그대가 아이들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을 그대와 같이 만들려고 해서는 안 된다.
생명은 결코 뒤로 물러가지 않으며, 어제에 머무는 법이 없으므로.
그대는 활이며, 그대의 아이들은 살아 있는 화살처럼 그대로부터 쏘아져 앞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활 쏘는 자인 신은 무한의 길에 과녁을 겨누고, 자신의 화살이 더 빨리, 더 멀리 날아가도록 온 힘을 다해 그대를 당겨 구부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활 쏘는 이의 손에 구부러짐을 기뻐하라.
그는 날아가는 화살을 사랑하듯이 흔들리지 않는 활 또한 사랑하기에.
- 칼릴 지브란(1883-1931), 『예언자』, 류시화 옮김, 무소의뿔,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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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아이는 그대의 아이가 아니다.” “또 그대와 함께 있을지라도 그대의 소유가 아니다.” 칼릴 지브란의 시는 지지난 주에 「선과 악에 대하여」를 소개했으나, 5월의 시로 이 시 한 편을 더 소개합니다. 5월은 가정의 달이고, 어버이날, 스승의날, 성년의날, 부부의날도 있으나 뭐니 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어린이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다른 시편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지난주 시편을 올리고 난 어느 날이었던가요, 언뜻 들었습니다. 아마 누군가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는 중에 제게 들려온 소리였지 싶은데, “뭐하고 노나요?” “시간이 없어서 못 놀아요.” 시간이 없어서 못 노는 아이들이 생긴 건 꽤 되지요. 그런데 그렇게 듣고 지나쳤는데 나중에 다시 이 말이 환청처럼 자꾸만 들려 왔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못 놀아요.” “시간이 없어서 못 놀아요.” “시간이 없어서 못 놀아요.” 우리 어린 시절에도 잘 놀기만 했던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없어서 못 놀지는 않았지요. 작년에 <아무도 모른다>(2004), <걸어도 걸어도>(2008),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어느 가족>(2018) 등 가족 드라마를 많이 만든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새 영화 <괴물>을 개봉했습니다. 이 영화의 OST는 작곡가이자 피아노 연주가인 사카모토 류이치(1952-2023)가 만들었으나 아쉽게도 영화 개봉 전에 고인이 되었지요. 이 영화는 미나타의 엄마인 사오리와 미나타의 담임 선생인 호리, 그리고 미나타와 요리의 세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그 첫 번째 시점의 이야기는 “돼지 뇌를 이식한 인간은 인간일까 돼지일까”, “괴물은 누구게”라는 두 개의 질문으로부터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기이하죠. 보는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으나 저는 이 영화를 아동 학대와 학교 폭력을 겪는 아이들의 성장 드라마로 보았습니다. 이 영화에서 직접적인 학대와 폭력의 피해자인 요리와 함께하면서도 자신에게 올 어떤 압력을 피하려고 어쩔 수 없는 거짓말을 하게 되는 미나타는 구원이라고도, 환생이라고도, 부활이라고도, 신생이라고도 할 수 있을 어떤 탈출을 요리와 함께 꿈꿉니다. 종말론을 떠올리게 했던 ‘빅 크런치’는 있었을까요. 미나타와 요리의 어쩔 수 없는 거짓말로 인하여 학교와 사회에서 괴물 아닌 괴물들의 많은 소동극이 벌어지는데, 30여 년 민원 부서에서 근무하다 퇴직한 저는 민원과 친절도 소비 상품이 되어버린 신자유주의의 풍경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씁쓸했습니다. “몇몇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건 행복이라 부르지 않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걸 행복이라 부르는 거야.” 미나타의 행복해지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말에 대한 교장 선생의 이 대답은 상투적으로 들리면서도 좋았던 건 제가 이 영화를 나름 긍정적인 시선으로 보아서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누가 괴물이었냐구요. 괴물이 누구였는지는 밝힐 수 없지만, 누구나 괴물이 될 수 있다는 상투적인 답변은 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대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으나, 그대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그대가 아이들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을 그대와 같이 만들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 당연한 시인의 당부를 당연하게 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는 한 괴물이 되지는 않으리라는 답변도 함께 드리겠습니다. (20240508)
첫댓글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칼릴 지브란, 이 불멸의 시인의 언어를! 보광님 덕분에.
그대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으나, 그대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생각이 있으므로.
우리는 자연환경도 생각도 아이들의 미래 자산을 차용해 쓰는게 안타까워요.
보광님 덕분에 잠시 쉬면서 생각해 보는 시간 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