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등학교를 만 4살에 입학했다. 1950년 대 시골학교에 아버지가 학교 선생님이셨고 교사 사택이 학교 바로 앞에 있었다. 집에서 딱히 할 일이 없던 어린 나는 짜박짜박 걸어서 아버지가 수업하시는 교실로 놀러가곤 했다. 제일 앞줄 가운데가 내 자리였다. 아버지는 내가 수업 시간에 반응하는 것을 지켜보고, 또 그 때 그런 시골에는 유치원 따위가 없었으므로, 그래서 그냥 놀리느니 차라리 정식 입학을 시킬까 생각하셨던 것 같다. 법적으로는 만 6세 이상이어야 하지만 교사인 아버지의 판단이 그러했으니 여차저차 위법 조기취학을 하게 된다.
아이가 똑똑해서 그렁저렁 진도를 따라가고 성적도 괜찮았다. 통지표에는 체육을 제외한 전 과목 평어가 ‘수 수 수....’였으니까. 하지만 급한 밥이 체한다고, 미상불 중고교에 진학해서야 감당 못할 뒤탈이 나기 시작했다. 알다시피 청소년 시기는 심신의 성장속도가 엄청 빠르기 때문에 두세 살 아래로 쳐진 내 나이로는 드센 동급생들 사이에서 버텨 내기가 힘에 부쳤다. 그리고 설상가상, 한창 대입에 몰두해야 할 고교 2, 3학년 때 때늦은 사춘기가 찾아와 버렸다. 그 통에 술 담배는 남보다 일찍 배웠다. 결국 재수, 삼수를 거치며 국민학교(그 당시 명칭을 따른다)를 조기 입학한 프리미엄을 통째로 날리고 겨우 한 지역대학에 들어가게 된다.
지금 《그 집 앞》 이야기를 하자는데 서두부터 옆길로 샜다. 단도직입, ‘그 집’은 내가 연정이란 걸 처음 느낀 한 여학생이 자취하던 집을 말한다. 이애는 국민학교를 같이 다녔던 아이다. 한 학년이 대(竹)반, 솔(松)반, 딸랑 두 반이라 육년간 같이 한 반이 될 확률이 반반인데, 내가 급장을 하면 지는 대개 부급장을 했다. 졸업 후 우연히 같이 마산으로 진학했다. 걔는 마산여중, 나는 마산중. 무슨 얄궂은 하늘의 조화인지 걔가 자취하는 집이 하필이면 내 사는 동네, 우리 집 바로 아래였다. 등하교 길이면 걔 집을 지나가야 했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소가 닭 보듯 했다. 그런데 어느 때쯤인가 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러면 가슴이 동동 뛰고 얼굴에 열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생각도 점점 자주 났다. 이윽고 연심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 집으로 바로 가는 큰길 말고 걔 집 뒤로 돌아가는 골목길이 있었다. 까치발을 해서 담 너머로 보면 자그만 뜰이 있고 걔가 자취하는 방이 보였다. 걔 모습을 혹시 볼 수 있을까 일부러 그 뒷골목으로 돌아 집으로 가곤 했다. 그 무렵,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 마냥 음악시간에 한국 가곡 《그 집 앞》을 배운다. 내 심금의 울림이 두 배, 세 배 크게 맥 놀았다.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되 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
오늘도 비 내리는 가을 저녁을
외로이 이 집 앞을 지나는 마음
잊으려 옛날 일을 잊어버리려
불빛에 빗줄기를 세며 갑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2uizXzOHVA
가사의 한 줄, 한 자, 한 획이, 마치 이은상 그 어른이 내가 이럴 걸 미리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어쩌면 그렇게도 그때 내 처지, 내 심사와 적확하게 맞아 떨어졌을까? 내가 종종 그 골목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서 있을 것까지도? 온 몸이 비에 젖어 걔 방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에 스치는 빗줄기를 하염없이 바라볼 것까지도? 필시 이은상 그 분도 나와 똑같은 홍역을 치뤘음이 명명백백하다는 쪽에 이번 주에 산 내 복권을 건다!
알다시피 고금동서의 숱하고 숱한 예술작품들이 청춘남녀간의 사랑을, 그 중에도 첫사랑을 무슨 대단한 낭만으로, 지고지순의 드라마로 온갖 심미적이고 탐미적인 필설을 동원해서 미화하고 있지만, 정작 현실에서 그 지경을 치러내야 하는 당사자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한 마디로 천재지변이다. 연모하는 대상이 낭만이고 드라마일 수는 있겠지만, 연모하는 주체로서는 온 청춘과 한 인생을 ‘한 방 블루스’로 날릴 수 있는 절체절명의 외줄타기이다. 특히 선제적이고 적극적인 리더쉽을 발휘해야 할 사내자식 쪽이 미욱하고 숫기 없는 미련 곰탱이일 때 이 사내와 그 로맨스의 총체적인 상황은 갈 지(之)자, 지리멸렬이 된다. 천하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불세출의 극작가 세익스피어가 장치한 세심한 플롯과 내러티브, 캐릭터 부여가 있기에 가능했다. 반면 우리 같은 필부필부, 갑남을녀의 현실은 대부분 헛다리짚기, 나 홀로 헛물켜기, 예상하고 계획했던 시나리오가 통째로 어그러지고 빗나가기, 나아가 동네 창피 내지 집안 망신, 심하면 가출 내지 자진(自盡)으로 귀결된다. 이런 ‘경우 없는 경우’를 치러 내었던 수많은 유경험자들은 다들 무릎을 치며 빙그레 쓴웃음을 짓고 계실 것이다.
바라옵건대 이 세상 모든 암컷수컷들, 생식을 본능으로 하는 육체를 빌어 세상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그들이 치러 내야하는 불가항력의 업보(業報)가 부디 덜 가혹하기 바란다. 나아가 종족 번식을 위해 무성생식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와 지난한 공력이 필요한 유성생식을 하게 된 우리 인간의 노고도 서로 더불어 보살피자. 말 나온 김에 여성들에게 부탁한다. 짝짓기 직후 암컷에게 잡아먹히는 몇몇 수컷 곤충들의 비애가 인간류에게도 드물지 않다는 점을 배려해 주십사고, 같은 매질이라도 먼지가 덜 날리는 비 오는 날 패 달라고.
그해 봄, 소풍을 갔고 반별로 손수건 돌리기 오락이다, 점심시간이다, 보물찾기 등등이 끝나고, 당시 소풍 풍경의 대강이 그러하듯, 소풍이 파하기 전 전교생을 한 자리에 모아 반별 대항 장기자랑대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 어쩌다 우리 반 대표로 노래를 부를 처지가 되었다. 사회자이자 심사위원회 위원장이신 음악 선생님께 주저주저 적어낸 곡목은 《그 집 앞》. 그때쯤 마악 진공관식 흑백 TV가 시장에 깔리면서 이름하여 대중문화가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하는 초입이었고, 대중가요로는 남 진, 나훈아가 한창 인기몰이를 할 때였다. 그러니 모처럼 일탈이 허용될 수 있는 야외행사의 선곡 치고는 참 생뚱맞았다. 그나마 지방 명문 학교의 범생들이 청중이라 야유를 받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변성기 때라 웅웅대는 저음으로 불렀다. ‘비교육적인’ 유행가가 아닌 명곡을 부른 소이(所以)가 가당(可當)했는지, 아니면 한 소녀를 연모하는 절절한 마음이 하늘에 닿았는지, 상을 하나 받기는 받았다.
한 해, 또 한 해, 수년의 세월 속, 부평초처럼 속절없이 정처 없이 물결 따라 흘러갔다. 앞서 언급했듯 재수, 삼수에도 아무 소득 없이 원치 않는 대학을 다니던 첫해 봄이었다. 방황은 길고 혹독했다. 대학은 그 지역 유일한 대학이라 선택했고 학과 선택도 수위 아저씨에게 제일 경쟁률이 높은 학과가 어느 과냐고 물어 선택했다. 수면제를 한꺼번에 많이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늘 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는 땅만 보고 다녔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다니는 게 취미였다. 그해 유독 봄비가 많이 내렸다. 그날도 비에 흠씬 젖어 집으로 들어서니 대문간에 하얀 엽서가 한 장 떨어져 있었다. 한동안 소식이 궁금했던 ‘그 집’의 그 소녀였다. 빗물에 글씨가 번져있어 가까스로 읽을 수 있었다.
“윤범아, 보렴. 지금 이 엽서를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호텔 이층 베란다에서 쓴다. 어제 같이 혼인식을 올린 그 사람은 아직 방에서 자고 있다. 윤범아, 너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이렇게 되어 정말 미안하구나. 용서해다오......”
‘그 집 앞’, 마산시 완월동 완월초등학교 앞을 지나는 산복도로의 오르막이 막 끝나는 그 언저리, 지금 ‘그 집’은 도시계획으로 도로에 편입되어 흔적도 없고, 코스모스 같던 그 소녀는 지금쯤 어느 하늘 아래선가 머리 희끗한 노년으로 화평하게 잘 늙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야 내 속도 화평하다.
“응답하라, 나의 질풍노도 그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