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오와 로사리오
교회는 성모님께 수많은 이름을 드렸으며, 우리는 여러 가지 호칭으로 성모님께 기도드립니다. 성모님께서도 또한 몸소 여러 가지 당신의 호칭을 우리에게 일러 주셨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 두 가지만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루르드에서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호칭은 하느님의 세상 구원 계획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성모님은 은총 가운데에서 잉태되었습니다. 성모님은 은총의 어머니,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시기로 또한 이 세상 한 가운데에서,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희망의 표지가 되시기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성모님의 품에서 우리는 정말 편안해집니다. 악과 사탄과 싸움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마리아는 창세기에 나오는 여인, 승리의 표지입니다.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창세기 3, 1-5)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라는 호칭은 우리를 은총과 구원의 세계로, 그리고 하느님과 성모님의 아드님 예수님에게로 이끌어 줍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하느님의 선포입니다. 우리는 이 호칭에서 드러나는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을 것입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는 레지오가 매우 좋아하는 성모님의 이름입니다.
성모님은 파티마에서 세 명의 아이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몸소 또 다른 이름을 주셨습니다. 성모님은 ‘나는 로사리오의 모후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이것은 성모님께서 로사리오 기도를 드린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 말씀은 성모님이 루르드와 파티마, 그리고 다른 여러 곳에서도 우리에게 분명하게 해주셨으며,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로사리오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성모님의 존재와 정체가 예수님의 신비 속으로 수렴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가 성모님의 태 안에서 잉태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하늘나라에서 함께 계시는 현재, 그리고 영원까지, 마리아에게는 예수님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복음 속에 등장하는 성모님은 당신 아드님의 신비 속으로 완전히 빠져 들어갑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루카 2,19) 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깊이 새기고 숙고하는 것은 그 모든 일에 대해 단순히 생각해 보는 게 아니라, 그 모든 일이 완전하게 당신의 삶속으로 형상화되게 하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예수님을 발견했을 때에도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 51) 이 말씀에서 보듯이 성모님처럼 우리 주 그리스도의 신비를 기도하고, 그 신비를 사는 사람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성모님만큼 로사리오를 기도하고, 로사리오를 사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조차 성모님은 가장 완전하게, 가장 깊이 있게 로사리오를 살고 계십니다. 성모님은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신비를 세세한 부분까지 바라보고 계십니다. 성모님은 예수님과 관계되는 것은 하나도 잊지 않으십니다. 성모님은 전능하신 분이 당신께 하신 위대한 일들을 분명하게 알고 계십니다. 성모님은 당신 안에 있는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이 세상을 구원하려는 아드님의 사랑의 열매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성모님의 마음과 가슴 속에는 완전한 복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로사리오를 통하여, 성모님은 당신의 예수님 체험을 우리와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성삼위의 삶 속으로 참여하고자 하십니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로사리오 기도로 초대하고 또 초대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로사리오 기도는 우리의 삶을 복음과 성삼위에게로 이끄는 부드러우면서도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로사리오가 레지오 영성의 핵심이라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닙니다. 레지오의 정신이 마리아의 정신이며, 마리아는 로사리오의 모후이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로사리오를 모든 레지오 회합의 필수 요소로 만드신 분은 성모님 당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렇게 하여 예수를 레지오의 중심이 되게 하셨습니다. 로사리오 기도는 단순히 지성적인 일이 아니라, 마음과 가슴을 하느님께로 올리는 것입니다. 로사리오 기도는 성모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 안에서 우리에게 드러내신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쉽고도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로사리오에 관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씀으로 로사리오에 관한 이 고찰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로사리오는 성모님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한 것으로, 매우 아름다운 관상기도입니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바오로 6세께서 지적하셨듯이 이러한 관상적인 요소를 빼버린다면 로사리오는 그 의미를 잃어버릴 것입니다. “관상이 없다면, 로사리오는 영혼이 없는 육체와 같습니다. 단순히 기도문을 염경하는 것은, 기도문을 기계적으로 반복함으로써 예수님의 가르침을 망칠 위험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느님께서 들어 주시는 줄 안다.’(마태 6,7) 라고 하셨습니다. 로사리오 암송기도는 조용한 리듬과 여유가 필요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로사리오 기도를 드리는 동안 주님과 가장 가까이 사셨던 성모님의 눈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 주신 주님의 신비를 묵상하게 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 신비들의 심오한 의미가 드러납니다.”(교황 바오로 6세)
바오로 6세의 이 심오한 통찰을 잠시 숙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황의 이 말씀은 로사리오의 특징, 즉 로사리오가 그리스도 중심의 관상의 한 형태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비드 맥그리거 신부-꼰칠리움 영적지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