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고의 가치, 컴패션> 배철현
- “낮은 인문학” 中
이 책은 좀 특이한 것이 서울대 교수 8인이 서울 남부교도소 재소자들을 위하여 인문학 강의를 한 것을 모은 것인데요, 이 프로그램은 강의를 한 교수나 재소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대학강단을 넘어 인문학 강의를 시작한 원조는 미국 사회비평가 ‘얼 쇼리스’가 1995년부터 시도한 <클레멘트 코스>입니다. 노숙자, 빈민, 죄수들에게 정규 대학 수준의 인문학 강의를 한 결과 그 어떤 경제적 지원이나 복지 프로그램보다 자립과 사회복귀율이 높았다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5년 노숙자를 위한 성공회대학교의 “성 프란시스 대학” 코스가 있었다고 하네요. 오늘은 그 내용 중 서울대 종교학과 배철현교수의 글을 한번 보겠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건너야 할 강, 그 죽음의 강을 건널 때, 우리는 무엇을 가져가야 할까? 조금은 비루할지언정 그래도 감동이 있는, 나만의 ‘사랑’이 담긴 ‘명품의 시간’이어야 하지 않을까?”
◉ 순간을 영원으로 포착하라.
인간은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한줌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아는 유일한 동물입니다. 자신의 유한함을 인식하는 인간은 상상력과 호기심을 통해 “문명”을 이룩했으니, 인간은 유한함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신의 흔적이 사후에도 기억되길 바라면서 ‘문명’을 남긴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존재하면서도 그 시간과 공간이 덧없이 사라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난 과거를 회상해보십시오. 우리의 과거가 아무리 화려하고 멋지다 할지라도 혹은 아무리 불행했다 할지라도 지금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찰나가 아니던가요? 우리가 수십 년 후, 이 순간을 기억한다 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 역시 여전히 찰나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요?
성경의 전도서는 고대 이스라엘의 최고 전성기를 구가한 솔로몬왕이 남긴 단상을 적은 것인데, 3자 1절에 보면, “모든 일에는 다 그것을 행해야 할 알맞은 때(zeman)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우주의 순환에 적당한 때(eth)가 있다.”
여기서 솔로몬은 인간의 유한한 시간을 두 가지로 표현했는데, 고대 히브리어 ‘제만’과 ‘에트’가 그것입니다. ‘제만’은 개인의 삶에서 어떤 일을 시도하고 달성해야 할 시간을 의미하고, ‘에트’는 사계절의 흐름과 같이 우주와 자연의 순환주기로서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을 질적으로 다른 두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일상적인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라 하고,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신이 이미 예정한 시간을 ‘카이로스(Kairos)’라고 구분해서 불렀습니다.
◉ 예술이란 일상을 특별하게 만드는 기술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크로노스’를 ‘카이로스’로 바꿀 수 있을까요? 일상적인 순간을 특별한 순간, 신이 개입하는 순간으로 만드는 솜씨를 ‘예술’이라고 합니다. ‘예술’을 뜻하는 영어 단어 ‘아트(Art)’는 아주 오래된 유럽의 어근 ‘르타(Rta)’에서 유래했습니다. 서양문헌 중 가장 오래된 문헌 중 하나인 힌두교의 <베다>에 등장하는 르타는 “우주와 그 안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의 작동을 지배하고 조절하는 자연질서의 원칙“을 뜻합니다. 르타는 자연과 사회의 도덕, 그리고 의례가 바르게 작동하는 원동력입니다.
이러한 르타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의 명령을 “다르마(Dharma”라고 하며, 개인에게 주어진 명령을 “카르마(Karma)”라고 합니다. ‘아트’란 시공간에 갇혀 있는 유한한 인간이 그것을 초월해 자신에게 주어진 최선을 선택하고 추구해 ‘영원’을 만들려는 솜씨이며, 이것을 추구하는 사람을 ‘아티스트’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티스트는 자신의 삶의 최선을 알려고 노력하고 보통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을 서슴지 않고 걸어가기에 우리를 감동시키며, 우리가 또한 그런 삶을 살도록 유도하고 전염시키는 일을 합니다.
◉ 타인 중심의 공감능력, “컴패션(compassion)”
어떻게 하면 멋진 삶, 예술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우리는 순간을 영원으로 멋있게 만든 예술가들은 성인(聖人)이라고 부릅니다. 성인들은 우주의 소리를 귀로 듣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주위사람들에게 입으로 전하고 말한 것을 행동으로 옮긴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좀처럼 감동받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메마른 삶에 충격을 주어 삶의 방향계를 새로 설정하게 해준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2005년 우연히 신문에서 오스트리아에서 온 소록도의 두 수녀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글을 읽은 저는 감동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사의 제목은 “올 때 소리없이 왔으니, 갈 때도 말없이 떠납니다”였습니다. 오스트리아 수녀인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한국에 온 것은 1962년으로, 당시 대한민국은 에티오피아보다 못하는 후진국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20대 중반의 금발머리와 파란 눈을 가진 두 수녀가 한국인들도 금기시하는 ‘문둥병’ 환자들의 섬, 소록도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들은 왜 자신들이 살던 편안한 오스트리아를 놔두고 듣고 보지도 못한 한국, 그것도 소록도를 찾아온 것일까요? 이유는 신문에서 한센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환우들이 한국이란 땅에서 집단수용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어도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두 수녀는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느낀 것입니다. 한센병 환우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는 “컴패션”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인문학적인 소양을 통해서 이해하는 단계를 넘어, 그들의 삶 전체를 온 몸으로 느끼는 ‘컴패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최고의 인문학적 소양은 이질적인 문화에 대한 암기나 이해가 아니라, 바로 자신을 없애고 타인을 내 삶의 중심으로 삼는 ‘컴패션’입니다.
소록도에 도착한 두 수녀는 오스트리아에 의료품과 지원금을 신청하였고, 전염병이 아니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장갑도 끼지 않은 채 정성껏 43년을 하루같이 보냈습니다. 이들은 또한 자신들의 선행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극히 꺼려서 수백 개의 감사장과 공로패를 되돌려 보냈다고 합니다.
◉ 마지막에 가져가야 할 “명품 가방”
더욱더 충격적인 것은 두 수녀가 오스트리아로 돌아가기 하루 전날에야 소록도 병원 측에 이별 통보를 했다는 것입니다. 소록도 주민들은 20대 처녀에서 70대 할머니가 된 금발 수녀들을 ‘할매’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이미 전라도 할매가 되어 있었습니다. 두 수녀는 주민들에게 아픔을 준다며 거창한 이별 대신 달랑 편지 한 장을 남겼습니다. 편지에는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하며, 저희들의 부족함으로 인해 아프게 해드린 일에 대해 이 편지로 미안함과 용서를 빕니다.“ 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른 새벽에 아무도 모르게 섬을 떠났습니다 이 수녀들의 짐이라곤 43년 전에 가져온 다 해진 검은색 가방 하나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낡은 가방은 세상의 어떤 명품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는 명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안에 값진 이야기와 감동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감동은 전염성이 있어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영적인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이들의 가방이야말로 진정한 명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이들이 43년 동안 소록도에서 봉사하면서 사람들에게 “성당에 나오세요” 라고 권유하거나 전도를 했을까요? 제 생각에 그들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한센병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모 마리아였기 때문입니다. 사지가 녹아버린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였기 때문이지요.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그들이 상정한 신을 자신들이 만든 종교설에 가두어 놓고 가끔 보러 갑니다. 하지만 ‘장소’의 종교가 역사를 통해 얼마나 타락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삶의 중심에서 주위로 밀어내고 이웃을 내 삶의 중심으로 위치하게 할 때 가장 인간다운 것입니다.
어떻게 들으셨나요? ‘시간’에 대한 제 생각, 두 수녀의 검은 가방 이야기를. 우리가 마지막으로 건너야 할 강, 그 죽음의 강을 건널 때 우리는 어떤 가방을 가져가야 할까요? 두 오스트리아 할머니처럼 인생을 ‘호모 카리타스 (Homo Caritas)’ 즉, 이웃의 희로애락을 내 희로애락으로 여기는 사람으로 살면서, ‘컴패션’이라 하기에는 보잘것없지만, 그래도 감동이 있는 나만의 ‘검은 가방’을 가져가고 싶지는 않으신지요.
오늘은 출발점이 특이한 인문학 강의를 들어 보았습니다. 저자는 미국의 클레멘트 코스처럼 노숙자나 범죄자 등 사회 낙오자들에게 다시 한번 사회에 진입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기술을 가르치거나 복지제도에 의한 보장도 중요하지만 인문학을 공부하게 하여 세상을 살아갈 본연의 마음자세와 태도를 갖추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강의 중 첫 번째로 시간에 대한 정의를 여러 가지로 하고 있는데, 히브리어에서는 시간을 "제만"과 "에트"로 나누고 개인이 뭔가를 이루어야 할 의미있는 시간을 제만이라고 한다 하였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일상적인 시간인 크로노스와 운명의 시간 카이로스로 질적인 의미로 나누고 있었네요. 저자는 일상적인 크로노스를 의미있는 카이로스를 바꾸게 하는 것이 "아트" 즉 예술의 힘이라고 합니다.
오늘 제목처럼 강의중 가장 중요한 것은 "컴패션"입니다. 컴패션은 사전적인 의미로 "동정, 연민,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중심적으로 태어납니다. 나의 발에 꽂힌 가시가, 타인의 생명을 위협하는 병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뛰어 넘어, 소록도에 온 두 오스트리아 수녀님처럼 타인의 아픔을 진심으로 공감하는 능력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삶의 가치라고 말합니다.
꽃다운 20대에 이름도 모르는 나라, 너무나 후진국인 한국에 들어와 모두가 외면하는 한센병 환자를 돌보고, 아무런 대가나 칭찬도 거부하고 43년의 세월을 보낸후 70대가 되어 홀연히 고향으로 떠난 그들은 진정 인류가 추구해야 할 지선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를 눌러 보세요. 배철현 교수의 종교학 명강의를 볼수 있어요]
http://www.youtube.com/playlist?list=PLXsgXFEWpVUx6aAmKQNYC4S89VLfn-K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