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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시감상
가흥참 / 김종직
可興站 金宗直
嵯峨鷄立嶺(차아계립령) 우뚝 솟은 저 계립령이여!
終古限北南(종고한북남) 예로부터 남북을 가로막았네
北人鬪豪華(북인투호화) 북인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다투는데
南人脂血甘(남인지혈감) 남인들은 기름과 피를 짜는구나
牛車歷鳥道(우차력조도) 우마차가 험난한 길을 지나가니
農野無丁男(농야무정남) 들판에는 장정 남자가 없네
江干夜枕藉(강간야침자) 밤이면 강가에서 서로 베고 자노니
吏胥何婪婪(이서하람람) 아전들은 어찌 저리도 탐학한가?
小市魚欲縷(소시어욕루) 시장에선 생선을 가늘게 회치고
茅店酒如泔(모점주여감) 모점에는 술이 뜨물처럼 하얀데
醵錢喚遊女(갹전환유녀) 돈 거두어 노는계집 불러오니
翠翹凝紅藍(취교응홍람) 머리꾸미개에 연지를 발랐네
民苦剜心肉(민고완심육) 백성들은 심장을 깎는 듯 괴로운데
吏恣喧醉談(이자훤취담) 아전들은 방자히 취해서 떠들어 대네
斗斛又討嬴(두곡우토영) 또 두곡의 여분까지 토색을 하니
漕司宜發慚(조사의발참) 조사는 의당 부끄러울 일이로다
官賦什之一(관부십지일) 관에서 부과한 건 십분의 일인데
胡令輸二三(호령수이삼) 어찌하여 이분 삼분을 바치게 하나?
江水自滔滔(강수자도도) 강물은 스스로 도도히 흘러서
日夜噓雲嵐(일야허운람) 밤낮으로 구름과 남기를 부는데
帆檣蔽峽口(범장폐협구) 돛과 돛대가 협곡 어귀를 가리어
北下爭驂驔(북하쟁참담) 북쪽에서 내려와 다투어 실어가니
南人蹙頞看(남인축알간) 남인들의 얼굴 찡그리고 보는 것을
北人誰能諳(북인수능암) 북인들이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감상〉
이 시는 세곡선(稅穀船)의 운반을 소재로 하여 북쪽에 비해 피해를 당하는 남쪽 지방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시격(詩格)』에 김종직의 문재(文才)에 대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젊어서부터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높았고 시를 더욱 잘 지었는데, 정심하고 넉넉하며 세속의 구덩이에 빠지지 않아 근대의 시조(詩祖)로 추앙된다. 성종이 친서로 칭찬하기를, ‘문장과 경제(經濟)가 아울러 훌륭하다 말할 수 있겠다.’ 하였다
(自少以文章名世(자소이문장명세) 尤長於詩(우장어시) 精深醞藉(정심온자) 不落俗人窠臼中(불락속인과구중) 推爲近代詩祖(추위근대시조) 我成廟御書褒之曰(아성묘어서포지왈) 文章經濟(문장경제) 可謂雙美(가위쌍미)).”
이 외에도 『성소부부고』에는 김종직의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점필재(佔畢齋)의 글은 요체는 깨달았으나 높은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으니 최립(崔岦)이 그를 가장 업신여겼다. 그의 시는 오로지 소식(蘇軾)·황정견(黃庭堅)에게서 나왔으니, 고전을 비평하는 사람이 작게 보는 것도 당연하다고 하겠다. 우리 중형은 일찍이 그의 시를 말씀하기를, ‘학 울자 맑은 이슬 내려 맺히고, 달 뜨자 큰 고기 뛰어오르네’라 한 구절은 결코 성당(盛唐)의 시에 뒤지지 않으며, ‘가랑비 오는데 중이 장삼을 꿰매고, 찬 강에 나그네는 배 저어 가네’와 같은 구절은 심히 한담(閑淡)한 맛이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대체로 맞는 말씀이다
(佔畢齋文(점필재문) 竅透不高(규투불고) 崔東皐最慢之(최동고최만지) 其詩專出蘇黃(기시전출소황) 宜銓古者之小看也(의전고자지소간야) 仲兄嘗言鶴鳴淸露下(중형상언학명청로하) 月出大魚跳(월출대어도) 何減盛唐乎(하감성당호) 如細雨僧縫衲(여세우승봉납) 寒江客棹舟(한강객도주) 甚寒澹有味(심한담유미) 斯言蓋得之(사언개득지)).”
〈주석〉
〖可興(가흥)〗 남한강 상류 창(倉)의 소재지. 〖站〗 역마을 참, 〖嵯峨(차아)〗 우뚝 솟음. 〖鳥道(조도)〗 좁은 산길. 〖干〗 물가 간, 〖婪〗 탐하다 람, 〖縷〗 잘게 썰다 루, 〖泔〗 뜨물 감, 〖醵〗 추렴하다 갹, 〖翠翹(취교)〗 고대 부인의 머리꾸미개 장식의 하나. 〖凝〗 엉기다 응, 〖紅藍(홍람)〗 국화과로, 이것으로 연지를 만듦.
〖剜〗 도려내다 완, 〖斛〗 휘(10말) 곡, 〖討〗 찾다 토, 〖嬴〗 남다 영, 〖漕司(조사)〗 부세(賦稅)의 독촉 징수와 출납(出納)·상공(上供) 등의 일을 관장한 기관임.
〖噓〗 불다 허, 〖嵐〗 남기 람, 〖帆〗 돛 범, 〖檣〗 돛대 장, 〖峽〗 골짜기 협, 〖驂驔(참담)〗 서로 따름.
〖蹙〗 찡그리다 축, 〖頞〗 콧마루 알, 〖諳〗 알다 암
산행즉사 / 김시습
山行卽事 金時習
兒捕蜻蜓翁補籬(아포청정옹보리) 아이는 잠자리를 잡고 늙은이는 울타리를 고치는데
小溪春水浴鸕鶿(소계춘수욕로자) 작은 시내 봄물에 가마우지가 목욕하네
靑山斷處歸程遠(청산단처귀정원) 푸른 산 끝난 곳에 돌아갈 길은 멀지만
橫擔烏藤一箇枝(횡담오등일개지) 등나무 한 가지 꺾어 비스듬히 메고 가네
〈감상〉
이 시는 산길을 가다 지은 것으로, 김시습의 산수벽(山水癖)과 은자(隱者)로서의 한가로운 정서를 잘 보여 주는 시이다.
산길을 가다 보니 아이는 잠자리 잡느라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늙은이는 오래되어 허물어진 울타리를 고치는데, 앞개울의 작은 시내에 봄물이 녹은 곳에는 가마우지가 고기를 잡기 위해 자맥질을 하고 있다. 저 멀리 푸른 산이 끝난 곳에 갈 길이 멀리 뻗어 있지만, 방랑벽이 있는 그에겐 그 먼 길이 멀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어서 지팡이 삼고자 등나무 한 가지 꺾어 등에 비스듬히 메고 간다.
김시습(金時習)은 「유감촉사 서정명부(有感觸事 書呈明府, 어떤 일에 느낌이 있어서 시를 지어 사또께 바친다)」라는 시에서 “산수에 벽이 있어 시로 늙었다(벽어산수노어시(癖於山水老於詩)).”라고 한 것처럼, 평생을 산수에서 노닐면서 시를 지었다. 조선에서 산수벽(山水癖)이 가장 깊었던 시인은 전기에는 김시습(金時習), 후기에는 김창흡(金昌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권별(權鼈)의 『해동잡록』에 김시습에 대한 간략한 생평(生平)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본관은 강릉(江陵)이요, 자는 열경(悅卿)이다. 조금 자라자 말을 더듬어 말은 잘할 수 없었으나, 붓과 먹을 주면 그 생각을 모두 글로 썼다. 세조 때에 세상을 달갑지 않게 여겨 벼슬하지 않고, 거짓으로 미친 체하여 중이 되어 승명(僧名)을 설잠(雪岑)이라 불렀다. 스스로 그의 호(號)를 동봉(東峯)이라 하고 또는 청한자(淸寒子) 혹은 벽산청은(碧山淸隱)이라고 하였다. 만년에 환속(還俗)하여 죽었는데, 「매월당력대년기(每月堂歷代年紀)」와 『금오신화(金鰲新話)』가 있어 세상에 전한다
(江陵人(강릉인) 字悅卿(자열경) 稍長(초장) 口吃猶不能言(구흘유불능언) 以筆墨與之(이필묵여지) 則皆書其意(칙개서기의) 我光廟朝(아광묘조) 玩世不仕(완세불사) 佯狂出家(양광출가) 號雪岑(호설잠) 自號東峯(자호동봉) 一曰淸寒子(일왈청한자) 一曰碧山淸隱(일왈벽산청은) 晩年還俗而卒(만년환속이졸) 有梅月堂歷代年紀(유매월당력대년기) 金鰲新話行于世(금오신화행우세)).”
〈주석〉
〖山行卽事(산행즉사)〗 『매월당집』에는 「도점(陶店)」이라고 되어 있음. 〖蜻蜓(청정)〗 잠자리. 〖籬〗 울타리 리,
〖鸕鶿(로자)〗 가마우지. 〖擔〗 메다 담, 〖烏藤(오등)〗 등나무 지팡이.
각주
1 김시습(金時習, 1435, 세종 17~1493, 성종 24):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 5세 때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후일 중용하리란 약속과 함께 비단을 하사받아 오세신동(五歲神童)이라 일컬어졌다. 과거준비로 삼각산(三角山) 중흥사(中興寺)에서 수학하던 21세 때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대권을 잡은 소식을 듣자 그 길로 삭발하고 중이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났다. 31세 되던 세조 11년 봄에 경주 남산(湳山) 금오산(金鰲山)에서 성리학(性理學)과 불교에 대해서 연구하는 한편,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다. 그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 속에서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한 채 기구한 일생을 보냈는데, 그의 사상과 문학은 이러한 고민에서 비롯한 것이다.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얻은 생활체험은 현실을 직시하는 비판력을 갖출 수 있도록 시야를 넓게 했다. 그의 현실의 모순에 대한 비판은 불의한 위정자들에 대한 비판과 맞닿으면서 중민(重民)에 기초한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상을 구가하는 사상으로 확립된다. 그의 저작은 자못 다채롭다고 할 만큼, 조선 전기의 사상에서 그 근원을 찾아보기 어려운 유·불 관계의 논문들을 남기고 있다. 이 같은 면은 그가 이른바 ‘심유천불(心儒踐佛)’이니 ‘불적이유행(佛跡而儒行)’이라 타인에게 인식되었듯이 그의 사상은 유불적인 요소가 혼효되어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는 근본사상은 유교에 두고 아울러 불교적 사색을 병행하였으니, 한편으로 선가(禪家)의 교리를 좋아하여 체득해 보고자 노력하면서 선가의 교리를 유가의 사상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후대에 성리학의 대가로 알려진 이황으로부터 ‘색은행괴(索隱行怪)’ 하는 하나의 이인(異人)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제 / 김시습
無題 金時習
終日芒鞋信脚行(종일망혜신각행) 온종일 짚신으로 발길 닿는 대로 가노라니
一山行盡一山靑(일산행진일산청) 한 산을 걸어 다하면 또 한 산이 푸르네
心非有想奚形役(심비유상해형역) 마음에 생각 없으니 어찌 몸에 부림을 받으랴?
道本無名豈假成(도본무명기가성) 도는 본래 이름 없으니 어찌 거짓으로 이룰쏜가?
宿露未晞山鳥語(숙로미희산조어) 간밤 이슬은 마르지 않아 산새는 우는데
春風不盡野花明(충풍부진야화명) 봄바람은 끝없이 불어와 들꽃이 아름답네
短筇歸去千峯靜(단공귀거천봉정) 짧은 지팡이로 돌아가니 봉우리마다 고요한데
翠壁亂煙生晩晴(취벽란연생만청) 푸른 절벽에 자욱한 노을이 저물녘에야 갠다
〈감상〉
이 시는 준상인(峻上人)에게 준 시의 하나로, 앞 시와 마찬가지로 산수벽(山水癖)을 보여 주는 시이다.
짚신 신고 발길 닿는 대로 종일 걸으니, 산 하나를 지나면 또 다른 산이 나타나지만 그 산이 싫지 않다. 마음에 공명(功名)이나 이록(利綠)에 대한 집착이 없으니 육체의 부림을 받지 않고 노자(老子)의 말대로 도는 이름할 수 없으니 억지로 깨닫고자 하지도 않는다. 간밤 내린 이슬이 마르지 않은 채 울어 대는 산새나 부단히 불어와 핀 들꽃은 내 마음을 끌리게 한다. 짧은 지팡이를 짚고 가노라니, 모든 산은 조용한 가운데 푸른 절벽에 머물던 자욱한 안개가 생겨났다가 저녁이 되니 맑게 갠다.
이 시에 대해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에서,
“동봉 김시습은 5살 때 벌써 기이한 아이로 소문났다. 세종임금이 동봉을 불러 「삼각산」시로 시험해 보고,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그 뒤 동봉은 미친 사람 흉내를 내고 중이 되어 산중에서 살았다. 동봉이 지은 시가 대단히 많은데, 모두 입에서 나오는 대로, 손에서 쓰이는 대로 지었다. 흥취만을 풀어낼 뿐이요, 일찍이 퇴고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경지가 높아서 보통 사람이 미칠 수가 없다. 그의 「무제」는 다음과 같다. ······도를 깨친 자가 아니면 어찌 이런 말을 하겠는가
(金東峯時習五歲以奇童名(김동봉시습오세이기동명) 英廟召試三角山詩(영묘소시삼각산시) 大奇之(대기지) 後佯狂爲髡(후양광위곤) 居山中(거산중) 所賦詩極多(소부시극다) 皆率口信手(개솔구신수) 止遣興而已(지견흥이이) 未嘗留意推敲(미상류의추고) 然所造超越(연소조초월) 有非凡人所可及(유비범인소가급) 其無題詩(기무제시) ······非悟道者(비오도자) 寧有此語(영유차어))?”
라 하였다.
〈주석〉
〖無題(무제)〗 『매월당집』에는 「증준상인(贈峻上人)」으로 되어 있음. 〖芒鞋(망혜)〗 짚신. 〖信脚(신각)〗 발 닿는 대로 감. 〖形役(형역)〗 몸이 구속되거나 사역당하는 것으로, 공명(功名)이나 이록(利綠)에 끌리거나 지배당하는 것을 이름.
〖道本無名(도본무명)〗 『노자(老子)』에 “도라 할 수 있는 도는 항상 된 도가 아니고, 이름 부를 수 있는 이름은 항상 된 이름이 아니다. 무명은 천지의 시작이요, 유명은 만물의 어머니이다(道可道(도가도) 非常道(비상도) 名可名(명가명) 非常名(비상명) 無名天地之始(무명천지지시) 有名萬物之母(유명만물지모)).”라는 말이 보임.
〖晞〗 마르다 희, 〖筇〗 지팡이 공, 〖翠〗 비취색 취
득통감 / 김시습
得通鑑 金時習
諸史紛紛立意乖(제사분분립의괴) 여러 역사 어지럽게 뜻 세운 것 어긋났는데
宋朝涑水辨參差(송조속수변참치) 송조의 속수 선생 차이점을 변별했네
勸懲揮筆明如日(권징휘필명여일) 권고와 징계의 붓 휘두르니 밝기가 해와 같고
衮鉞措辭謹亦佳(곤월조사근역가) 곤월의 말 쓰니 근엄하고도 아름답네
天下幾經吳魏晉(천하기경오위진) 천하 사람들 몇 번이나 오·위·진 시대를 겪었는가?
民生多被犬狼豺(민생다피견랑시) 민생들이 개·이리·승냥이 피해를 많이도 받았겠지
漢唐隋業規模大(한당수업규모대) 한·당·수의 왕업 규모 컸지만
那及虞庭庶尹諧(나급우정서윤해) 어찌 순임금 조정의 백관들 화락함에 미치겠는가?
〈감상〉
이 시는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얻어 보고 지은 시로, 민생(民生)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그의 역사관(歷史觀)을 읽을 수 있다.
사마광(司馬光)은 역대 왕조의 입의(立意)의 어긋난 점을 드러내고 차이점을 변별하여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붓을 휘두르니, 해와 같이 밝고 포폄(褒貶)의 말도 근엄하면서 아름답다.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와 한(漢)·당(唐)·수(隋) 등의 왕조가 교체하는 변혁기에 민생(民生)들은 개·이리·승냥이 같은 군주들에게 받은 피해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한·당·수 등 규모가 큰 나라도 순(舜)임금이 통치하던 시절 조정의 백관(百官)들의 화락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김시습은 오세신동(五歲神童)으로 유명한데, 「본전(本傳)」에 이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열경(悅卿)은 난 지 여덟 달 만에 능히 글을 읽을 줄 알았다. 말은 더디었으나 정신은 민첩하여 입으로 읽지는 못하였어도 뜻은 모두 통하였다. 세 살에 유모가 맷돌에 보리 가는 것을 보고 또렷이 읊기를, ‘비는 안 오는데 우렛소리는 어디에서 울리는가? 누런 구름이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 하니,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겼다. 세 살 때에 그 할아버지에게 묻기를, ‘시는 어떻게 짓습니까?’ 하니, 할아버지가, ‘일곱 글자를 이어 놓은 것을 시라고 한다.’고 대답하였더니, ‘그렇다면 일곱 자를 엮을 테니 첫 글자를 불러 보시라.’고 하였다. 할아버지가 춘(春) 자를 부르자, 곧 응하기를, ‘봄비가 새 휘장 밖으로 내리니 기운이 열리도다’ 하여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다섯 살에 시를 짓기에 능하니, 세종이 그 말을 듣고 승정원으로 불러,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에게 명하여 임금의 뜻을 전하고 사실인지 아닌지 묻는데, 안아 무릎 위에 놓고 이름을 불러 이르기를, ‘네가 시구를 지을 수 있느냐?’ 하니, 곧 응하기를, ‘올 때 포대기에 쌓인 김시습’ 하였다. 또 벽 위의 산수도(山水圖)를 가리키면서, ‘네가 또 지을 수 있겠느냐?’ 하니 곧 ‘작은 정자와 배 안에는 어떤 사람이 있는고?’ 하였다. 그가 지은 시와 글이 적지 않다. 곧 대궐로 들어가 아뢰니 전교(傳敎)를 내리기를, ‘성장하여 학문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기용하리라.’ 하며, 크게 칭찬하고 비단 30필을 주고 제가 가지고 가라고 하였더니, 드디어 그 끝을 이어 가지고 끌고 나가므로 사람들이 또한 기특하게 여겼다.
(悅卿離胞八月(열경리포팔월) 能知讀書(능지독서) 語遲而神警(어지이신경) 口不能讀(구불능독) 而意則皆通(이의칙개통) 三歲乳母碾麥(삼세유모년맥) 朗然吟之曰(낭연음지왈) 無雨雷聲何處動(무우뢰성하처동) 黃雲片片四方分(황운편편사방분) 人神之(인신지) 三歲謂其祖曰(삼세위기조왈) 何以作詩(하이작시) 祖曰(조왈) 聯七字謂之詩(연칠자위지시) 答曰(답왈) 如此則可聯七字(여차칙가련칠자) 呼首字可也(호수자가야) 祖呼春字(조호춘자) 卽應曰(즉응왈) 春雨新幕氣運開(춘우신막기운개) 人嘆服(인탄복) 五歲能作詩(오세능작시) 我英廟聞之(아영묘문지) 召致于政院(소치우정원) 命知申事朴以昌(명지신사박이창) 傳旨問虛實能否(전지문허실능부) 以抱置膝上(이포치슬상) 呼名曰(호명왈) 汝能作句乎(여능작구호) 卽應曰(즉응왈) 來時襁褓金時習(내시강보김시습) 又指壁上山水圖曰(우지벽상산수도왈) 汝又可作(여우가작) 卽應曰(즉응왈) 小亭舟宅何人在(소정주댁하인재) 所作詩文不少(소작시문불소) 卽入啓(즉입계) 傳曰(전왈) 待年長學成(대년장학성) 將大用之(장대용지) 大加稱嘆(대가칭탄) 賜帛三十段(사백삼십단) 使之自輸(사지자수) 遂各綴其端(수각철기단) 曳之而出(예지이출) 人亦奇之(인역기지))”
〈주석〉
〖乖〗 어그러지다 괴, 〖涑水(속수)〗 사마광(司馬光)이 산서성(山西省) 속수(涑水) 사람이므로 사마광을 말함.
〖參差(참치)〗 일치되지 않거나 모순됨. 〖袞鉞(곤월)〗 고대 곤의(袞衣)를 주어서 기리고, 부월(斧鉞)을 주어서 징계했다는 것에서 포폄(褒貶)을 이름.
〖豺〗 승냥이 시, 〖虞〗 순임금의 성 우, 〖庶尹(서윤)〗 백관(百官). 〖諧〗 화합하다 해
유산가 / 김시습
遊山家 金時習
山家秋索索(산가추색색) 산속 집 가을 되어 쓸쓸한 채
梨栗落庭除(리률낙정제) 배와 밤 뜰에 떨어지네
秫熟堪爲酒(출숙감위주) 찰벼 익어 술 담글 만하고
菘肥可作菹(숭비가작저) 배추는 살쪄 김치 담글 만하네
飢鷹號老樹(기응호노수) 굶주린 매는 늙은 나무에서 울어 대고
羸犢嚙荒墟(이독교황허) 여윈 송아지는 거친 터에서 씹어 대네
日晚喧鷄犬(일만훤계견) 날이 저물자 닭과 개 짖어 대니
前村過里胥(전촌과리서) 앞마을에 아전이 들렀나 보네
〈감상〉
이 시는 「유관동록(遊關東錄)」에 수록된 시로 산속의 집에 거처하면서 지은 것인데, 산촌 백성들의 어려운 삶을 주변 묘사를 통해 사실적으로 그려 내고 있다.
1연과 2연에서는 산속 집은 가을이 되어 쓸쓸한 채 텅 빈 뜰에 배와 밤이 떨어지고 있고, 찰벼가 익어 술을 담그기에 적당하고 배추도 잘 자라 김치를 담글 만한 산속의 풍요로운 가을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3연에서는 굶주린 매는 고목에서 배가 고파 울어 대고 있고, 비쩍 여윈 송아지는 거친 터에서 무엇인가를 씹어 먹고 있다. 앞에서 보여 준 풍요로운 광경과는 사뭇 달리 매와 송아지의 굶주린 모습을 통해 고통받고 있는 백성들의 삶을 대비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4연에서는 날이 저물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닭과 개가 짖어 대는 것을 보니, 앞마을에 세금을 독촉하는 아전이 왔나 보다고 노래하고 있다.
김시습(金時習)은 산속 마을에 거처하면서 가을의 풍요로움을 누려야 할 판에 아전들의 세금독촉에 힘겹게 살아가는 백성들의 삶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주석〉
〖除〗 뜰 제, 〖秫〗 찰벼 출, 〖菘〗 배추 숭, 〖菹〗 겉절이 한 채소 저, 〖鷹〗 매 응, 〖羸〗 여위다 리(이),
〖犢〗 송아지 독, 〖嚙〗 물다 교, 〖喧〗 떠들썩하다 훤, 〖胥〗 아전 서
영산가고 팔수 / 김시습
詠山家苦 八首 金時習
其六(기육)
一家十口似同廬(일가십구사동려) 한 가구 열 식구 한집에 사는 것 같은데
丁壯終無一日居(정장종무일일거) 장정들 결코 하루도 집에 있질 못하네
國役邑徭牽苦務(국역읍요견고무) 나라와 고을 부역 괴로운 일로 끌려다니니
弱男兒女把春鋤(약남아여파춘서) 약한 남자 아녀자들이 봄 호미를 잡았네
〈주석〉
〖徭〗 부역 요, 〖把〗 잡다 파, 〖鋤〗 호미 서
其七(기칠)
一年風雨幾勞辛(일년풍우기로신) 한 해의 비바람에 몇 번이나 고생해도
租稅輸餘僅入囷(조세수여근입균) 조세 바친 나머지만 겨우 광에 넣네
巫請祀神僧勸善(무청사신승권선) 무당은 신에게 제사 청하고 스님은 시주하라 권하니
費煩還餒翌年春(비번환뇌익년춘) 비용 많아 명년 봄엔 다시 굶게 된다네
〈주석〉
〖囷〗 곳집 균, 〖巫〗 무당 무, 〖還〗 다시 환, 〖餒〗 주리다 뇌, 〖翌〗 다음날 익
〈감상〉
이 시는 「유금오록(遊金鰲錄)」에 수록된 시로, 산속 집에서 겪는 부역과 조세의 고통을 노래한 것이다.
첫 번째 시는 한 가구에 열 명의 식구가 같은 집에서 사는 것 같은데 힘이 센 장정들은 하루도 집안일을 돌보지 못하고 있다. 왜일까? 나라의 부역에다 마을의 부역까지 겹쳐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보니 그렇다. 그러니 봄이 와서 농사를 준비해야 하는데, 어린 사내아이나 노인인 남자, 아녀자들만이 호미를 잡고 일을 하고 있을 뿐임을 노래하고 있다.
두 번째 시는 한 해 동안 온갖 비바람을 맞으며 힘들여 농사를 지었지만, 추수를 하고 나서 조세로 바치고 나면 남은 약간의 곡식만을 창고에 보관할 수 있다. 그런데다 무당이 신에게 제사 지내야 한다고 곡식을 청하고, 스님은 시주하라고 하니,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많아 창고에 있는 조금의 곡식만으로는 내년 봄에는 올해처럼 다시 굶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읊고 있다.
김시습(金時習)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민생(民生)들의 삶의 모습을 보고 많은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산문인 「애민의(愛民義)」에서,
“『서경』에 이르기를 ‘백성은 오직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견고하여야 나라가 편안하다.’ 하였으니, 대저 백성들이 추대하고 그것으로 살아간다는 것으로, 비록 임금에게 의지한다 하더라도 임금이 왕위에 올라 부리는 것은 진실로 오직 서민들이다. 민심이 돌아와 붙으면 만세 동안 군주가 될 수 있으나, 민심이 떠나서 흩어지면 하루를 기다리지 않아도 필부가 된다. 군주와 필부의 사이는 약간의 차이가 날 뿐이 아니니,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곡물창고와 재물창고는 백성의 몸이요, 의상과 관과 신발은 백성의 가죽이요, 주식과 마실 것과 반찬은 백성의 기름이요, 궁실과 거마는 백성의 힘이요, 공물과 조세와 도구는 백성의 피다. 백성들이 십분의 일을 내어 위를 받드는 것은 천자로 하여금 그 총명함을 써서 나를 다스리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임금은 (백성들이) 음식을 올리면 백성들이 나와 같이 음식을 먹는가를 생각하고, 옷을 바치면 백성들이 나와 같이 옷을 입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바로 궁실에 거처함에 있어서 백성이 편안히 지내는 것을 생각하며, 수레를 모는 데 있어서 백성의 화목한 경사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너의 옷과 너의 음식은 백성의 기름이다.’ 하였다.
평상시에 바치는 것도 불쌍히 여기고 민망히 여길 만한데, 어찌 망령되이 무익한 일을 일으키며, 힘써 노력을 번거롭게 시켜 백성들의 때를 빼앗아 원망과 탄식을 일으키고, 조화로운 기운을 상하게 하여 하늘의 재앙을 부르며 흉년에 절박하게 하며, 사랑하는 어버이와 효성스런 자식들로 하여금 서로 보전할 수 없어 유랑하여 흩어지게 하여 도랑에서 엎어져 죽게 할 수 있겠는가? 아! 상고의 성한 때에는 임금과 백성이 하나가 되어 임금의 힘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노래를 짓기를 ‘우리 많은 백성들이 밥을 먹게 함은 그대의 법이 아님이 없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임금의 법칙에 순종하게 되었네.’라 하였고, 말을 지어 이르기를 ‘해가 나오면 일을 하고 해가 들어가면 쉬는데, 임금의 힘이 나에게 무엇이 있단 말인가?’ 하였다
(書曰(서왈) 民惟邦本(민유방본) 本固邦寧(본고방녕) 大抵民之推戴而以生者(대저민지추대이이생자) 雖賴於君(수뢰어군) 而君之莅御以使者(이군지리어이사자) 實惟民庶(실유민서) 民心歸附(민심귀부) 則可以萬世而爲君主(칙가이만세이위군주) 民心離散(민심리산) 則不待一夕而爲匹夫(칙불대일석이위필부) 君主匹夫之間(군주필부지간) 不啻豪釐之相隔(불시호리지상격) 可不愼哉(가불신재) 是故倉廩府庫(시고창름부고) 民之體也(민지체야) 衣裳冠履(의상관리) 民之皮也(민지피야) 酒食飮膳(주식음선) 民之膏也(민지고야) 宮室車馬(궁실거마) 民之力也(민지력야) 貢賦器用(공부기용) 民之血也(민지혈야) 民出什一以奉乎上者(민출십일이봉호상자) 欲使元后用其聰明(욕사원후용기총명) 以治乎我也(이치오아야) 故人主進膳(고인주진선) 則思民之得食如我乎(칙사민지득식여아호) 御衣(어의) 則思民之得衣如我乎(칙사민지득의여아호) 乃至居宮室(내지거궁실) 而思萬姓之按堵(이사만성지안도) 御車輿(어거여) 而思萬姓之和慶(이사만성지화경) 故曰(고왈) 爾服爾食(이복이식) 民膏民脂(민고민지) 平常供御(평상공어) 可矜可憫(가긍가민) 豈可妄作無益(개가망작무익) 煩力役(번력역) 奪民時(탈민시) 起怨咨(기원자) 傷和氣(상화기) 召天災(소천재) 迫飢饉(박기근) 使慈親孝子(사자친효자) 不能相保(불능상보) 流離散亡(유리산망) 使顚仆於溝壑乎(사전부어구학호) 嗚呼(오호) 上古盛時(상고성시) 君民一體(군민일체) 不知帝力(부지제력) 則爲之謠曰(칙위지요왈) 粒我蒸民(입아증민) 莫匪爾極(막비이극) 不識不知(불식부지) 順帝之則(순제지칙) 爲之語則曰(위지어칙왈) 日出而作(일축이작) 日入而息(일입이식) 帝力何有於我哉(제력하유어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