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오징어게임은 가라 오백나한 납신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오징어게임은 비켜라-한국의 다음 주자는 나한이다.’(시드니모닝헤럴드) 지난해 12월부터 호주 시드니 파워하우스 박물관에서 열린 한국 관련 전시회가 누적관람객 23만명을 돌파하는 인기를 끌며 막을 내렸다고 합니다. 국립춘천박물관이 소장한 고려시대 나한 석조상 50여점을 출품한 ‘창령사터 오백나한’ 전시입니다.
2001년 강원 영월군 남면 창원2리 주민이 사찰을 조성하기 위해 경작지를 다지다가 발견한 오백나한상. 정면상이 대부분이지만 대화를 하듯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거나, 생각에 잠겨 턱을 괴고 있거나 바위 뒤에서 살짝 고개만 내민 나한상 등 팔인팔색이다. / 국립춘천박물관 제공
‘오징어게임은 가라-나한이 납신다’는 제목을 단 호주 일간지인 시드니모닝헤럴드는 “나한전은 2022년 가장 아름다운 전시 중 하나”라고 소개했는데요. 신문은 “병약한 아내가 산비탈을 지나기만 하면 몸이 좋아져 이곳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절을 짓다가 오백나한상을 발견했다”는 비하인드스토리까지 소개하면서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나한상이 코로나19로 지친 호주 관객들에게 힐링의 시간을 선사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디 오스트레일리안’은 “우리의 고통과 세속적인 애착이 오백나한의 평화로운 명상을 방해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라고까지 평했습니다.
“호주인들에게도 힐링의 시간을 선사”
‘창령사터 나한상’은 2018년 9월부터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첫선을 보인 바 있는데요. 특별전은 이듬해(2019) 3월까지 연장될 만큼 인기를 끌었고, 국립중앙박물관의 ‘2018년의 전시’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춘천박물관 전시는 전국의 국립박물관이 2018년 1년간 주최한 특별전을 대상으로 관내외 전문가(내부 20명·외부 16명)와 관람객 만족도 등을 종합평가한 결과 관내외 전문가들의 압도적인 점수를 받아 단연 1등으로 꼽혔습니다. 종합점수 1위의 특전으로 ‘서울순회전’(2019년 5월 29일~6월 13일 국립중앙박물관)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참 신기한 일 아닙니까. 21년 전 철저하게 파괴된 절터에서 무참하게 훼손된 채 나타난 ‘오백나한’이 어째서 국내는 물론 외국인들에게까지 친근한 이웃처럼 다가가 성찰과 위안을 준다는 걸까요.
지금으로부터 21년 전인 2001년 5월 1일이었습니다. 강원 영월군 남면 주민 김병호씨는 창원2리의 소유지에 암자를 지으려 경작지 평탄작업을 벌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이곳은 ‘무덤치 절터’로 알려진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사람 형상의 석상이 하나둘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김병호씨는 그렇게 수습한 조각상 100여점을 천막하우스에 보관했고, 그중 상태가 좋은 6점은 임시로 가설된 암자 안에 봉안해놓고는 유물 출토 사실을 관계 당국에 신고했습니다.
이후 강원문화재연구소의 긴급 발굴조사가 시작됐습니다. 거기서 ‘창령(蒼嶺)’이라 쓰인 명문기와를 발견했는데요. “영월 석선산(배거리산)에 창령사가 있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사가 눈에 걸렸답니다. 이곳이 바로 창령사터였던 거죠.
강원 영월군 남면 창원2리 주민이 암자를 만들기 위해 경작지 평탄작업을 벌이다가 사람 형상의 석상들이 줄줄이 묻힌 것을 발견했다. 절터에서는 총 317점의 나한상이 발굴됐다. 그 중 완형은 64점이었다. / 김보상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제공
불상은 왜 목이 잘렸을까
본격 발굴결과 모두 317점의 석상이 확인됐으며, 그중 완형은 64점이었습니다. 나머지 250여점은 머리와 몸체가 분리된 채 발견됐습니다. 몸체는 135점, 머리는 118점이었습니다. 일부 석상은 열에 노출된 채 확인됐고, 이 석상을 모신 금당 또한 화재로 폭삭 내려앉은 모양새였습니다.
1998년인가요. 한 개신교 신자가 제주도 원명선원에 봉안돼 있던 불상 750여점과 삼존불을 훼손한 예가 있었죠. 숭유억불을 내세운 조선에서도 누군가 창령사 석상을 훼손하고 아예 불에 태웠을 가능성이 짙습니다.
더구나 그 당시에는 사찰로 몰려가 불상을 태우거나, 깨뜨린 유생을 ‘영웅’으로 대접하는 분위기가 있었거든요.
<성종실록> 1489년(성종 20) 5월 11일자는 “유생 이벽 등이 인수대비(성종의 어머니)가 정업원(출가한 왕실 여인들이 머물던 사찰)에 내린 불상을 태워버렸다”는 기사를 실었는데요. 이때 인수대비가 “그 자를 엄벌에 처하라”고 아들 성종에게 권하자 성종은 “유생이 부처를 물리치는 것은 상을 주어야지 죄를 줄 수는 없으며, 더구나 임금이 내간(아녀자·인수대비)의 말을 듣고 그럴 수 없는 일”(<국조보감>)이라며 일축했답니다.
또 1568년(선조 1) 성여신(1546~1632)이 경남 산청 단속사에서 거접(居接·사찰 등을 빌려 행하던 글짓기 행사)하던 중에 동료들과 함께 불교 책판을 불태우고, 오백나한상과 사천왕상의 목을 잘랐답니다. 성여신은 근처에 살던 남명 조식(1501~1572)에게 불상 훼손과 불판 소각 사실을 자랑삼아 알렸습니다. 마침 조식의 집을 방문한 수우당 최영경(1529~1590)은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우리(성여신과 최영경)가 너무 늦게 만났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2002년 경기 양주 회암사가 불에 탄 흔적과 무참하게 잘린 채 흩어져 있던 불상의 조각들이 발견됐는데요. 명종(재위 1545~1567) 때 잠깐 전성기를 누리던 절이 든든한 후원자인 문정왕후(1501~1565)의 죽음과 함께 유생들의 파괴행위로 폭삭 무너져 버린 겁니다. 창령사 석상과 금당의 운명도 비슷한 길을 걸었을 겁니다.
‘개성파’ 나한상
궁금증이 생기죠. 창령사터에서 무더기로 출토된 석상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오백나한상입니다. ‘나한’은 ‘arhan’이라는 말을 음역한 ‘아라한(阿羅漢)’의 줄임말이랍니다.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성자를 가리킨답니다. 부처의 제자로 뛰어난 수행 끝에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을 일컫는답니다.
왜 오백나한일까요. 석가모니가 입적한 뒤 가섭을 비롯한 제자 500명이 모여 석가모니의 생전 말씀을 경전으로 만들었는데, 그때 모인 500명을 ‘오백대아라한’이라 했답니다. ‘깨달음을 얻은 불제자’로 일컬어진 나한은 점차 재앙을 물리치는 신통력을 갖춘 존재로 인식됐고요. 후대 사람들은 나한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제작해 숭배했습니다.
사실 다른 부처나 보살상은 ‘엄근진(엄하고 근엄하고 진지하다)’이면서도 온화한 표정을 갖고 있죠.
이 불상들을 만들 때 특별히 얼굴로 구별 짓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예컨대 석가모니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미륵불 등은 수인을 지은 손과 팔의 모습으로 구별한답니다.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등도 옷이나 손에 든 물건으로 구별합니다. 얼굴 특징이나 표정을 다르게 제작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나한상은 다르죠. 천의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포즈 또한 파격적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불상을 하나만 제작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오백나한상을 만드는 데 똑같은 패션에 똑같은 얼굴로 만들어 설치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한상의 경우는 각 인물의 개성을 살려 제작한답니다.
한가지 포인트는 나한상의 얼굴이 다른 불상들에 비해 좀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는 겁니다. ‘나한’이라는 존재가 대승불교 이전, 즉 석가모니와 가까이 있던 성자들을 가리키기에 아무래도 인도인의 이미지를 좀더 강하게 표현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창령사터 오백나한상에서 보이는 다양한 표정. 일상의 희로애락을 표현했다. / 국립춘천박물관 제공
그런 이국적인 이미지를 희석시키는 것이 익살이라는데요. 경북 영천 은해사 거조암과 강릉 보현사의 나한상은 물론이고, 국립대구박물관 소장의 청동 및 금동나한좌상과 동국대박물관의 목조 및 소조나한상, 동아대박물관의 석조나한좌상 등은 뭔가 의도적이라 할 만큼 얼굴에 유머가 넘칩니다.
창령사터에서 확인된 오백나한상의 얼굴은 어떨까요.
정면을 바라보는 상이 대부분이지만 대화하듯 옆면을 바라보거나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거나, 생각에 잠겨 있거나 바위 뒤에서 살짝 고개만 내민 나한상들도 있습니다. 위로 치켜뜨거나 아래로 내리뜬 눈, 지그시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빠진 눈, 화두 해결을 위해 고뇌에 빠진 눈, 잔뜩 화가 나서 째려보는 눈 등 다양한 시선 처리가 돋보입니다.
양 입술을 위로 올려 가볍게 웃거나 입꼬리가 내려가 침울한 표정으로 슬픔에 잠긴 나한상도 있습니다. 일상의 희로애락을 나한상으로 표현했습니다. 당대의 조각가가 오백나한상을 한곳에 봉안할 때 전체적인 배치와 구성까지 고려한 것이겠죠.
‘나를 닮은 불상’
놓쳐서는 안 될 창령사 오백나한만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불상의 ‘엄근진’한 표정도 아니고, 다른 나한상처럼 ‘이국풍 얼굴’도 아니라는 겁니다.
2018년 열린 국립춘천박물관의 특별전 제목에 ‘당신의 마음을 닮은~’이라는 수식어가 괜히 붙은 게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때 박물관 전시실 입구에 들어가 일렬로 전시해놓은 나한상들을 바라보는 순간 무장해제되고 말았습니다.
친근한 이미지의 창령사터 나한상. 길거리 어디에선가 본 듯한 인상이다. / 국립춘천박물관 제공
어디선가 보았던 친척이나 친구, 이웃집 사람의 얼굴 같은 느낌…. 때로는 어린아이 같은 웃음을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울기도 하고, 또 때로는 수줍거나 슬픈 표정을 짓고…. 한구 한구 돌아볼 때마다 꼭 이 나한상과 꼭 닮은 누군가를 찾게 됩니다.
그뿐이 아니고요. 나와 비슷한, 아니 나보다 ‘조금’ 못생긴 것 같은 나한상과 꼭 사진을 찍고 싶어지죠.
왜 그렇게 친근한가 했더니 얼굴전문가인 조용진 한국형질문화연구원장의 해석이 그럴듯합니다. 창령사 나한상의 얼굴 크기가 대략 12㎝인데, 이것이 절묘하다는 겁니다.
“조각가가 작업할 때의 동작 거리가 약 60㎝인데, 그 60㎝에서 시세포가 밀집돼 있어 빛을 가장 선명하고 정확하게 받아들이는 황반에 맺히는 얼굴 크기는 약 12㎝이다. 즉 안구의 시축(물체로부터 동공 중심을 지나 망막의 황반에까지 뻗는 가상의 곧은 선)이 약 25㎜이므로 여기 황반의 직경 5㎜에 알맞은 크기(5분의 1)는 60㎝ 거리에 있는 12㎝(5분의 1)가 된다. 즉 60㎝ 거리에 두고 12㎝의 얼굴상을 조각할 때 가장 에너지 소비가 적게 된다. 이 거리에서는 얼굴 전체가 한눈의 시야에 들어간다. 정보 착란의 염려도 없다.”
그러니 나한상의 얼굴을 편안하게 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오징어상’의 미덕
얼굴 크기도 그렇지만 그 형태도 친숙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창령사 나한상의 얼굴 특징은 매우 한국적이라는데요.
아닌 게 아니라 인위적으로 솟은 것은 깎아내고 튀어나온 것은 밀어넣었으며, 패어 들어간 것은 메워 일부러 최대한 평평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솟은 코는 볼과 이마의 높이로 낮아지고, 눈자위와 입술 부분은 살짝 올라와 패인 골을 메웠습니다.
좋은 말로 ‘부족한 곳은 채워주고 넘치는 것은 덜어준다’고 할 수 있는데요. 들어갈 때는 확실히 들어가고 나올 때는 확실히 나온, 뚜렷한 이목구비의 다비드상과는 천양지차죠. 뭐 시쳇말로 전형적인 ‘오징어 얼굴’이 아닐까요.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창령사 오백나한은 입자가 굵은 화강암을 다듬어 제작했죠. 그러니 조각이 쉬웠겠습니까. 창령사 오백나한의 일부에 입술을 붉게 칠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분석해보니 붉은색 안료, 즉 연단(鉛丹·Pb₃O₄)이었음을 확인했습니다. 창령사 오백나한상은 물론 대부분의 불상에서, 붉은색의 흔적이 보이는데요. 화강암 불상에 생동감을 불어넣기 위한 채색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화강암 재질의 약점은 세월이 흐를수록 심해지는 풍화작용이죠. 오백나한상은 시간이 흐를수록 비바람에 깎이고 다듬어져 더욱더 뭉그러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불상의 얼굴 모습들. 부처나 보살상은 이처럼 ‘엄근진’이면서도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경우가 많다. 얼굴에서 뚜렷한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 부처나 보살상은 수인을 지은 손과 팔의 모습, 옷이나 손에 든 물건 등으로 구별한다. 불상을 제작할 때 얼굴 특징이나 표정을 다르게 제작하지는 않는다.
사회학자인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창령사 나한상은 세월이 흐르면 결국 얼굴도 신체도 알아보기 힘든 돌로 돌아갈 것”이라면서 “돌로 돌아가는 나한상이야말로 실은 부처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뜻”이라고 나한상에 철학을 가미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오징어 얼굴’이 바로 창령사 나한상의 ‘미덕’ 아닐까요.
창령사 오백나한상 하면 제 입맛에 꼭 맞는 비유가 있습니다. 이진경 교수가 인용한 글인데요.
마침 평생 돌에 먹줄을 긋고 불상을 새겼던 석공이 설악산 신흥사 오현 선사(1932~2018)에게 이런 말을 했답니다.
“스님, 평생을 돌에 걸었는데 이제 보니 헛것이었네요…. 이젠 눈을 감고 이 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천진한 동불(童佛)들이 놀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저 암벽에는 마애불이, 그 옆 바위에는 연등불이, 그 앞 반석에는 삼존불이…. 젊었을 땐 눈을 뜨고 봐도 나타나지 않아 먹줄을 그어야 했는데….”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무뎌진 창령사 오백나한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봅니다. 그 안에서 혹시 부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