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춘[李子春]-1315~1361.-환조(桓祖/환왕)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은 전주 이씨로 공식 부인은 최한기의 딸 최씨 부인이다.
이내은장과의 사이에서 이원계를 낳았고 김고음가와의 사이에서 이화를 낳았다.
이내은장은 일단 이름이 네 자리이기 때문에 한산 이씨 이색 가문과의 친연성은 낮다고 판단된다.
이색과 이자춘, 이성계는 대립만 한 것이 아니라, 한때 정책적으로 협력하기도 하였다.
이성계의 4대조 이안사가 전주 한옥지구 오목대 경기전 기자촌에서 완산주의 관기를 두고
지방관과 다투다가 개성 서울에서 금부도사가 잡으러 오니 170여 가구를 이끌고
삼척을 거쳐 함주[함흥]로 배를 타고 서해, 남해, 동해를 돌아 달아나서
말과 목축으로 몽골에 전투마를 팔아 부호가 된다.
이 시기는 충선왕이 요녕성 심양에서 심양왕으로 재직하는 시기였다.
이안사는 완산주[전주] 한옥 지구 기자촌에서 200가구를 거느리는 대호족에 속해 있었다.
이안사의 조부가 이린으로 고려 무신시대(의종), 명종 때 이의방의 동생이었다.
이성계의 6대조(현조부)가 이린이다.
-{현조부(6대조)=[현조, 고조, 증조, 조부모, 부모, 나, 자식] 현조학생부군신위}.
이내은장은 이자춘의 부친 이춘 가문에 속해 있거나 현지에서 숙여진이 야인족화된 여진족들이
이춘 가문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여진족이 사용하던 성씨인 네자리로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
여진족의 야인족화된 이름에다가 성씨만 고려 성씨를 사용했다는 말이다.
전주에서 이안사를 따라 올라간 가문에 속해 있던 다른 이씨와 여진족 사이에서
이내은장이 태어났다는 반증이 된다.
여진족들은 네자리의 성과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네자리 이름을 쓴다는 것은 오랑캐에 해당하는데
이내은장이 이색과 친족이었다는 말은 어폐가 있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숙여진족은 몽골, 동진, 고려, 조선의 토벌로 일본 동경[도쿄]으로 들어가서
대부분이 네 자리의 성씨와 이름을 사용한다. [현재 일본인의 성과 이름은 네 자리]
조부 이춘이 영흥 쌍성총관부 조휘의 손녀 딸과 결혼하면서
천호장이 되어 세습하면서 이자춘, 이성계로 이어지는데,
이자춘의 가문 안으로 여진족 이지란[퉁두란 500호], 주매, 금고, 시첩목아, 허난두,
최야오내 등 숙여진족[야인족] 10여가문이 휘하로 들어온다.
이들은 대개 300여호에서 500여호를 거느린 여진족 세력가들이었다.
이자춘은 가문 안으로 들어온 이내은장과의 사이에서 이원계를 낳긴 하였으나,
최한기의 딸 최씨 부인과 정식으로 결혼한 것이다.
즉, 정식 결혼하기 전에 가문 안에 있었던 이내은장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자 이원계는
문관으로 진출하지만, 고려시대는 서얼 차별 보다는
호족 가문을 더욱 중시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또한 장자였기 때문에 고려 관료로 진출하는데 수월하였다.
고려는 가문을 더욱 중시하는 호족제도였고 가문에 속한 가노 출신들도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서는 능력만 되면 중앙에 진출하는 게 더 이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춘이 인정하는 이자춘의 정식 결혼은 최한기의 딸인 영흥 최씨 부인과 결혼한 것이다.
호족제도가 살아 있는 고려시대에는 가문의 안녕과 가문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정식 결혼은 급이 맞고 이해 관계가 맞는 가문끼리 정식 결혼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것은 가문이 위기에 빠졌을 때 공동 대응하여 살아남기 위한 풍습과도 같았다.
이내은장은 이름이 네자리이기 때문에 귀족 가문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성과 이름이 두자리이거나 세자리여야 진짜 고려인 순수 혈통이란 말이다.
이내은장은 전주인 이씨와 여진족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으로 보이며
여진족의 야인족화 된 10여 가문이 이춘의 휘하로 들어왔다가 섞이면서 태어나,
이름을 이내은장으로 지은 것이다.
李內隱藏[이내은장]을 한자 풀이하면 "안에다 은밀하게 감춰 놓고 태어난 이씨"라는 뜻이다.
그 당시에는 이름을 지을때 그녀의 출신 배경과 사연을 한자로 압축하고 대신하여
지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곡해되지 않아 신뢰성이 높다.
李內隱藏은 이자춘이 가문안에 살던 내은장이라는 여인을 집안에 은밀하게 숨겨 놓고
사랑을 나누던 사이였기 때문에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으로 강력하게 판단된다.
이원계가 이성계의 조선 창업을 반대하고 고려 정권을 추종하여 음독 자결로 죽게 된다.
그래서 이원계에 대해 지나치게 왜곡해서 남길 경우라면 역사에 뭐하러 남기겠는가?
그냥 흔적을 지우고 역사에서 지워 버리면 해결되는 일이다.
용비어천가가 과장은 있지만 전체적으로 맞는 말이다.
조작성에 의심을 가지고 보려고 해도 과장은 있으나 전체적으로 틀린 경우는 적었다.
백제시대 때 네자리 이름을 사용하여 그 흔적이 오랜 동안 남아있을 경우도
생각해 볼 수가 있지만 백제 멸망후 신라시대 때는 모두 성씨를 김씨, 박씨, 이씨,
최씨, 정씨, 손씨, 배씨, 설씨 등으로 개성하여 바꾸고 세자리, 두자리 이름으로 바뀌기 때문에
백제시대 흔적이 남아 있어서 가노들이 성과 이름을 네자리로 사용했을 경우는 결코 없었다.
신라가 멸망할 때도 살아남기 위해 왕건의 고려 방식으로 많은 제도와 풍습을 바꿔,
전향했다는 사실을 주지 시켜 살아남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심지어 묘비명도 고려식으로 바꾸고, 漢 [한나라한, 한수한]을 韓 [나라한]으로 바꿔 살아 남는다.
왕건의 성과 이름이 두 자리였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아 고려시대 때
두 자리도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조선시대 때는 같은 이름이 많아서 왕의 이름이 단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이름으로
지어야 했으므로, 두 자리를 주로 사용하게 되고, 왕족들만이 사용하게 되었다.
양반이 두 자리를 사용하게 되면 왕족의 피를 이어받았거나 그에 합당한 사유가 있어야 했다.
자칫 불순한 의도가 엿보이지 않고 허락을 받아야만 두 자리로 지을 수가 있었다.
삼국시대, 고려시대 까지만 해도 성씨를 하사 받았다는 의미는
외거노비나 가노[솔거 노비]에서 평민 이상으로 벗어나게 되었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대호족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이원계 같은 인물은 관료로 진출하여
귀족으로 올라서는 방법도 쉬웠다.
고려시대는 서자 (귀족vs 평민], 서얼 [귀족 vs 천민]출신도 능력만 되면
관료로 진출하기 용이하였다.
[환관도 거세 없이 궁에서 일했으며 결혼할 수가 있었음.
이로 인해 환관들의 횡포로 무신정변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도 함]
이자춘과 최한기의 딸 영흥 최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이성계가 태어나고
태조의 부인은 신의왕후 한씨이다.
이방원은 정도전을 치기 위해 조영무 등을 여주, 이천, 전주로 내려 보내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며 제1, 2차 왕자의 난을 거쳐 태종으로 등극하였다.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의 직계 가문은 "종"(태종>세종,문종,단종..)으로 시작되고,
후궁의 자식이나 형제 가문이 왕위로 오르게 되면 다시 새롭게 시작하여 "조"(세조)로 시작해서
종으로 이어진다.(선조, 인조, 영조, 정조...)-[태조는 건국자만 사용함].
세종은 개혁을 단행하고 태평성대 시대를 개막시킨 왕에게 문무 백관으로부터 부여받은 왕호 명칭임.
[수양대군 세조 역시 세종의 그것을 갖고 싶어서 반정 세력들이 세조라고 사후 올리는 것임].
-원나라 세조 역시 징기즈칸과 같이 부족장 회의(쿠릴타이)를 거쳐 몽고 황제에 오른 것처럼
원나라를 건국하여 새로운 시대를 개막시켰으므로 만조백관에게 인정받게 하려고
뭉케 황제와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고 반정세력들이 사후에 짓는 것임.
당나라는 이세민이 형식상 아버지인 이연(고조)을 내세워 건국했기 때문에
이연이 물러나지 않자 반 겁박하여 밀어내고 당 황제에 올라서 태종이 된 것이었다.
그래서 이연을 태조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다.
태조는 자신이 직접 주도하여 나라를 건국했을 때 사용하는 정치, 군사, 역사 용어이고
고조는 이연 자신이 직접 주도하여 국가를 건국한 것이 아니므로, 국가 건국의 시조로서는
인정해 줄 수가 없고, 이세민이 주도하여 건국한 당나라의 가계 시조(고조)로서만
인정해 준다는 뜻이다.
그리고 태종은 국가 정치체제를 마련하고 법령과 통치체제를 구축하여 반석 위에
올려놓은 왕에게 부여하며 정치, 군사, 역사, 시조까지 모든 사직을 잇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후금(청태조) 아이신 자오뤄(애친각라-요녕성 무순시 신빈, 심양시) 누루하치,
청태종 홍타이지-심양, 북경].
발해의 왕 대조영(고왕) 역시 태조가 되지 못하는 것은
그의 부친인 대중상의 후 고구려가 먼저 존재했고 말갈 6 부족이 고구려와 재건 운동 기반이며
대중상이 발해 건국의 토대를 닦아놨기 때문에 대조영이 태조가 되지 못하고
고왕으로 남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제2대 무왕 (대무예)이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뭔가를 보여줘야 했기 때문에
산동성 등주시를 공격하여 세력권에 넣고 대신라 무역을 통제하게 되었던 것이다.
[산서성 양천시에서 보장왕의 손자 덕무를 당나라에 조공하는 조건으로 유일하게
고구려국으로 정식 인정하고 있었고, 안승의 후 고구려인 익산 금마 보덕국이 존재했으므로,
말갈 6 부족이 선뜻 발해국 건국에 호의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임.
무왕이라는 왕호가 발해국의 정식 왕으로 인정해준다는 뜻이 있고, 공식적인 왕통을 이어가도록
만들어준다는 의미가 들어가 있는 왕호 임].
고조보다는 고왕이 국가 건국에 더 많은 기여를 했기 때문에 고왕이라고 높이 올린 것임.
그래서 고왕은 발해와 무왕의 가계 시조로서 당연히 인정하고
국가 건국에서는 절반만 인정해준다는 뜻.
만년 사직을 이을 국가 정치토대를 닦은 문관 왕은 태종, 무관 왕은 무왕.
성종은 태조, 태종, (세종/ 세조)에 이어 모든 성과를 쓸어담아 개혁 작업으로 큰 업적을 남기거나
특정 사건에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큰 성과를 냈을 때 부여하는 사후 왕호.
[몽고 태조 (징기즈칸), 태종 (우구데이칸),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원나라 성종 (테무르)으로 이어지는
정통성을 잇겠다는 뜻임.
고려 성종-993년 강동 6주 획득/ 서희 담판].
조선 성종은 계유정난의 공신 한명회가 자기 딸을 왕후로 앉혀 놓고 야당을 무시하고
무소불위 권력으로 짓는 것임].
이자춘이 환조(환왕)인 것은 조선을 개국하는 가계시조로서 당연히 인정하고,
이성계가 환국의 단군조선까지 역사를 이어가겠다는 의미가 있는 것임.
p/s
만약 려말 선초 아메리카의 인디언 부족들이 한반도로 피신해 들어왔다면,
려말 선초인들은 인디언들에게 어떻게 이름을 지어 주었을까?
려말 선초인들 역시 인디언 부족들처럼 그 사람의 출신 배경과 환경, 신체적 특징을 보고
이름을 지어주었으리라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영화 케빈 코스트너의 "늑대와 춤을"에서도 나오듯이, 인디언 부족과 마찬가지로
려말 선초 인이라면 "주먹 쥐고 일어서" 양에게 이렇게 지어 주었을 것이다.
려말 선초인으로 완전히 받아들였을 경우에는
"권악기[拳握起]"-"주먹 쥐고 일어서"
려말 선초 인으로 받아들이긴 하였으나 약간 배격 책을 써서 외국인이라는 것을 느끼게 할 경우에는
권악의기[拳握之起/권악지기]또는
권악이기[拳握以起/ 以起拳握/이기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