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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떠날 때 아름다운 청백리 – 창흥군 성하종
“그 소식 들었어? 뭘? 우리 목민관이 가신대
Oh No 이 일을 어쩐다.
나으리가 못가시게 나라님께 호소하세”
“인조반정 이후 강계부사로 부임한 성하종은 부민을 검소하고 다정하게 보살폈습니다. 임기가 긑날 무렵 그에 감명받은 백성들이 나라에 쌀 200섬을 바치며 붙잡은 이 일화는 전임과 영전 등 이동이 많은 연초에 떠날 때가 아름다운 관리의 모습으로 좋은 귀감이 될 듯합니다”(2018 국민권익위원회 ‘알려라 권익 툰’에서)
<고려와 조선 시대 청백리 공직자들의 이야기>
위 글은 고려와 조선 시대의 청렴淸廉)·근검勤儉)·경효敬孝) 등으로 이름을 남긴 공직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역사 속 염근리 이야기’(국가기록원) 책에 소개된 조선시대 청백리 창흥군 성하종 편에 실린 내용이다. 일반적으로 사후에 선정된 이는 청백리 살아서 선정된 이는 염근리라 불렀다.
#청백리(淸白吏)란?
淸白吏란 선비사상과 더불어 생겨난 청렴한 공직자를 지칭하는 말로서 조선시대에 특별히 국가에서 선발되어 청백리안(淸白吏案)에 명단이 올랐던 사람들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와 마찬가지로, 조선시대 사람들 또한 공직에 있는 모든 이들이 항상 백성의 모범이 되기를, 또한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현혹되지 않고 백성을 위한 진정한 봉사자로 남아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인자(仁者)는 인을 편안히 여기고 지자(知者)는 인을 이롭게 여긴다.”라는 공자의 말씀에 빗대어 “청렴한 자는 청렴함을 편안히 여기고 슬기로운 자는 청렴함을 이롭게 여긴다.”라고 했다.
청렴은 예나 지금이나 공직자에겐 최고의 덕목이다. 조선왕조 5백년 동안 청백리는 불과 218명, 2년에 한 명도 안 될 정도로 극소수에게만 주어졌었다. 그러니 청백리로 선정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짐작케 한다. 청백리 정신은 국가발전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특히 경제는 부정부패가 없는 나라일수록 더 튼실하고 빠르게 성장하고 발전한다. 그 이유는 청렴한 공직자가 많은 나라일수록 국민은 공무원과 정치인들을 신뢰하고 그들이 펼치는 정책과 호소에 박수로 화답하며 적극적으로 동참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청백리 정신이야말로 공직자가 가져야 할 최상의 덕목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부패한 공직자가 없는 사회, 청백리 정신을 실천하는 공직자가 넘쳐나는 사회가 바로 선진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무관(武官) 성하종은 누구인가?
성하종(1573, 선조6~ 1645,인조23)의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자는 이술(而述)이다. 조선 성종때의 문신.학자로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증)사헌부 대사헌 창녕군 성담년의 6대손이다. 증조는 사직서영(社稷署令) 성예원(成禮元), 할아버지는 예조참판 성수익(成壽益)이고, 아버지는 성택선(成擇善), 어머니 성주이씨(星州李氏)는 충의위(忠義衛) 이광균(李光均)의 딸이다. 관찰사 성호선(成好善)의 조카이다. 임진왜란때 피난 중에 아버지가 회양(淮陽)에서 돌아가고, 여러 번 문과에 응시하였으나 거듭 실패하자, 이에 붓을 내던지고 활을 잡고 무과(武科)에 응시하여 1603년(선조36) 급제하였다.
#나으리가 못가시게 나라님께 호소하세
보통은 관리가 임기를 마치고 떠날떼 신도비를 세워주는 것이 상례이거늘 이직(離職)을 만류하는 경우는 아주 드문일이다. 더욱이 쌀 200석을 거두면서 까지....
선생은 형조좌랑, 군기시 첨정, 훈련원 부정을 거쳐 갑산부사, 길주목사, 함경도 병사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1633년(인조 11년) 강계(평안북도)부사로 있으면서 인근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이름을 떨쳤다.
이때 청백한 목민관으로 근무했던 생생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인조 11년)>에 ‘강계부사 성하종은 청렴 검소하고 자상한데, 임기가 만료되어 교체되게 되었다. 고을 사람들이 자진해서 2백 석의 쌀을 바치고 1년을 더 유임시켜 줄 것을 애원하므로 평안도에서 이 일을 아뢰니, 임금이 유임을 허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어떤 사건으로 해주에 유배되었다가 1634년(인조 12년) 사면을 받고 공주에 살았는데, 선생의 생활이 죽도 끊일 수 없었고, 사는 곳은 비바람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청빈하게 살았다고 전한다.
<성하종의 유임을 요구하는 상소문> <함경북도 강계군 지도>
조선왕조살록 인조 11년(1633)
#청백리에 녹선되다.
무신년(戊申年, 1608년 광해군 즉위년)에 완평(完平) 이 상공(李相公) 원익(元翼)이 추천하여 장관(將官)이 되었는데, 얼마 아니 되어 이 부인(李夫人)이 졸(卒)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그의 집상(執喪)이 예에 맞는다고 일컬었다. 복제를 마치자 다시 장관이 되었다. 이때 혼조(昏朝, 광해조(光海朝))는 뇌물로 정사가 어지러웠으나 성공(成公) 홀로 초연히 스스로를 지켰다. 그러므로 6년 동안 쓰이지 못하였다. 병진년(1616년 광해군 8년)에 비로소 대정현감(大靜縣監)이 되니 제주(濟州)의 속현(屬縣)이다. 본래 보장(寶藏)의 굴(窟)이라 일컬었으나 공은 조금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섬 백성들은 더욱 그 은신(恩信)에 감복하였다.
인조 대왕(仁祖大王)은 안으로는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방비(防備)를 튼튼히 하여 큰 공을 이루고 인재를 추천, 진출케 하고 또 청백리(淸白吏)를 뽑게 하였다. 선생은 1636년(인조14년) 김상헌, 김덕함, 이안눌, 김시양과 함께 청백리로 선정되었고, 창흥군(昌興君)에 봉해졌으며, 오위도총부 부총관이 되었다.
선생의 청렴한 성품은 <조선왕조실록(인조대왕 행장)>에 ‘인조는 깨끗한 몸가짐이 있는 신하들에게는 문득 칭찬하고 숭상하여 포상하였다. ~ 이원익은 벼슬이 재상에 올라도 초가집에서 곤궁하게 산다하여 경기도에 명하여 기와집을 지어 주게 하고 베 이불과 흰 요를 내렸고 ~ 성하종도 청렴하고 신중하여 여러 번 벼슬을 옮겨 북병사가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양민들 처형을 중지시키고, 귀양간 죄인을 보살피다
1624년(인조 2년) 이괄이 난을 일으켰을 때 진압군의 장교로 있었는데, 당시 상관이 반란에 가담했던 이괄의 군사들을 모두 죽이려 하자 강력히 반대하여 말하기를“위협에 못 견뎌 따른 자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미 수괴(首魁)는 처형되었는데 어찌 함부로 죽여서야 되겠습니까?”하니, 상관이 깨닫고 사형을 중지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섬 백성들은 더욱 그 은신(恩信)에 감복하였다.
1613년(광해군5)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서 영창대군(永昌大君)과 그 외조부 김제남(金悌男)이 죽음을 당하고, 그 부인 노씨(盧氏)가 경내(境內)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는데, 이때 인심은 두려워하여 감히 돌보는 자 없었으나 공은 아침저녁으로 문안하고 옷과 식량이 끊이지 않게 하였으며 필요한 것이 있으면 이에 응하는 소리의 반향처럼 하였다.
노부인은 늘 탄식하며 말하기를, “다른 사람은 모두 나를 죄인의 가족으로 보는데, 이분은 유독 어떠한 사람이기에 이런단 말인가?” 하였다. 그리고 정온(鄭蘊)ㆍ송상인(宋象仁)ㆍ이익(李瀷)공이 모두 직언(直言)을 하다가 유배(流配)되었는데, 사람들은 곧 후명(後命, 사약(賜藥)이 있을 것이라고 일컬었으나 공은 성심을 다하였고 말이 시사(時事)에 미치게 되면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사람들은 몹시 위험스럽게 여겼으나 공의 몸가짐은 태연하였다. 공이 교체되어 돌아가게 되자 노부인은 울면서 “내 누구를 의지한단 말인가? 나는 이제 죽을 것이다.”하였다.
정ㆍ송ㆍ이 3공(公)도 옷깃을 잡고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려 소매를 적시었고 모두 송행시(送行詩)를 남겼다. 정온의 시서(詩序)에 ‘백성들이 부모처럼 사랑하여 성문(城門)에 비를 세웠고, 그 앞을 지나는 자 눈물을 흘린다.’는 내용이
었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 구원
1636년(인조14년) 12월 13일 오랑캐의 기병(騎兵)이 도성(都城)을 핍박하자 임금은 파천(播遷)을 하였다. 하루 앞서 공은 전라 수사(全羅水使)에 제수되었다. 정신없이 하직(下直)을 고하고 떠났는데, 길에서 행재소(行在所)의 명으로 수졸(水卒)을 정돈시켜 배에서 떠나 활과 칼을 들고 육로(陸路)를 통하여 들어와 시위(侍衛)하라 하고, 또 명령을 바꾸어 주사(舟師)를 이끌고 강화(江華)로 가라 하니, 공은 밤에 본진(本鎭)으로 달려가 수졸을 거느리고 배에 올라 해로(海路)를 따라 북상(北上)하였는데, 여러 번 큰바람이 일어 배가 자주 뒤집힐 뻔하였다.
그러나 도착하니 강화는 이미 함락이 되었다. 이때 백성들은 섬으로 도망치고 얼어죽거나 굶주려 죽는 자가 줄을 이었다. 공은 싣고 간 식량을 나누어주고, 부모 없는 어린것들을 배 안에 수용하여 목숨을 유지한 자가 많았다. 본진으로 돌아오자 큰 난리를 치른 뒤라 인심은 쉽사리 흔들렸다. 더욱 인(仁)과 은(恩)을 다하여 변방의 백성들을 어루만졌다.
그런데 조정에서 강화에 늦게 도착하였다는 책임을 물어 한 자급(資級)을 강등시키고 제주 목사로 이동시켰으며, 교체되어 들어와 다시 부총관(副摠管)이 되었다가 나아가 양주(楊州)와 남양(南陽)을 다스렸다.
#함경도 병마절도사 재직중 별세
1643년(인조 21년) 다시 함경북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북방 방어에 크게 공헌하였는데, 그 때에도 청렴했던 선생의 일상이 <조선왕조실록(인조 21년)>에
‘북병사 성하종이 임지로 떠나기에 접견하여 임금이“함경도로 가는 길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수령들은 다 무신으로서 청렴하고 간소한 자가 적은데, 그대는 본래부터 청렴한 지조가 있으니 그들의 모범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에 공은 감읍(感泣)하여 목숨을 다 할 것을 생각하였다. 부임하자 더욱 성심을 다하여 어루만지니 군민(軍民)은 조금도 해를 보는 일이 없었고 염치가 진작되어 북방의 집집마다 웃음이 일었으나 공은 병이 들었다.
1645년(인조 23년) 함경도 경성(鏡城)에서 병으로 인해 7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선생의 부음이 알려지자 임금은 슬퍼하며 특별히 예장(禮葬)을 명하였으나 대신들이 그동안 관례가 없다고 하여 부의(賻儀)와 조제(弔祭)할 것을 명하고 병조판서를 증직하였다. 성품이 인후하고,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으며, 관직생활에 충직하고 청렴하여 칭송을 받았다.
공의 묘소는 당초 충북 청원군 금호리 산47번지였으나 현재 대전광역시 유성구 둔곡동 산12번지로 이장하였다. 配:정부인 성주李씨 合封, 配:정부인 보성吳씨 양경공 묘 좌변(성종국 종손 설명)
#함경도 경성 청덕사에 제향
우암 송시열이 선생의 신도비(神道碑)문을 썻다.
“공(성하종)의 성품이 인후하고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고 우애로 형제들을 대하였으며, 관직에서나 가정에서 생활에 충직하고 청렴하여 칭송을 받았다. 또 어떤 사람이 일찍이 공에게 말을 팔았다. 그런데 얼마 아니 되어 말이 죽어버려 그 값이 일금(一金)도 못되었다. 그러나 공은 그 값을 돌려주었다. 이는 비록 작은 일이나 역시 공의 일단(一端)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활 쏘고 말 타기에 전념하는 것은 호탕한 자나 좋아하는 일, 스스로 무인이라 말하는 자는 법도를 따르지 않는다네.
그러나 공은 그렇지 않아 단정하고 정직하였다네. 어버이 섬기기에 효를 다하여 부드러우면서도 공손하였다네. 관원이 되어서는 깨끗하고 지조가 있었다네. 공이 어찌 알아주길 바랐으리오? 임금께서 공을 알아보았다네. 포상은 거듭 가해져 빛이 되었고 드러나게 되었다네. 길이 천만년 동안에 구름과 물과 같이 희리.”라고 새겨져 있다.
함경도 백성들이 경성(鏡城)에 선생의 공적을 찬양하여 생사당(生祠堂, 지방관 등의 선정을 기리어 백성들이 그 사람이 살아있을 때부터 받들어 모시던 사당)을 세웠는데, 선생의 사후에 북방의 백성들이 제향을 지내고, 그 사당의 이름을 청덕사(淸德祠)라고 하였다.(출처: 淸白吏, 이술(而述) 성하종)
공은 한갓 무변(武弁)으로서 대현(大賢)과 같이 선발되어 명성이 일세에 진동하였으며, 특별히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고 창흥군(昌興君)에 습봉(襲封)되었으며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이 되었다.
#영원한 공직사회의 귀감
‘청렴’은 내 스스로 지키는 세상과의 약속이다. 후한 양진楊震의 사지(四知) 일화를 보면
“중국 후한 양진楊震이 동래태수로 부임하는 중 창읍에 이르렀을 때다. 깊은 밤 양진에게 창읍령 왕밀王密이 몰래 찾아왔다. 왕밀이 양진에게 황금 10근을 바치며 ‘밤이 깊어 아무도 알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양진은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네가 아는데(사지四知) 어찌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하며, 왕밀을 내쳤다.”고 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7조 제1항에서는‘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진다’공무원에게는 법률로 직무 범위를 규정하여 국가 기능의 공정을 해하는 행위를 제한하고 있다.
또한 정부는‘부정청탁 금지 및 공직자의 이해충돌 방지법’일명 김영란 법을 제정하여 공직자윤리법 등 기존의 법이 갖고 있는 한계를 보완하고 부패 방지와 공직윤리 확보를 위한 핵심적 틀로서 이해충돌 방지를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공직사회 부패는 없어지지 않고 관행처럼 고착화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세계 각국의 반부패 정도를 평가하는 2020년도 ‘부패인식지수 평가’에서 우리나라가 61점을 받아 세계 33위를 기록하고 있다. 부패인식지수는 국가별 공공·정치부문에 존재하는 부패 수준을 평가하는 대표적인 지표이다. 우리나라는 GDP 세계순위가 11위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다.
국가 발전의 초석은 공직자의 국민에 대한 봉사 정신과 청렴성에서 시작된다. 공무원이 직무를 소홀히 하거나 국가권력을 배경으로 하여 사적인 이익을 취하게 된다면 그 결과는 국가 운용의 질서를 파괴하여 국가 발전을 가로막는 큰 요인이 될 것이다.
떠날 때 아름다운 목민관!
성하종 선생의 청백리 정신은 두고 두고 우리 공직사회의 귀감이 될 것이다.
<글쓴이 : 성범모(대종회보편집장, 전 문경대학교 겸임교수, 경제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