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을 건축하라
2013. 12. 25(성탄감사예배) 누가복음 2:14
한국사람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아직 영어가 서툰데 운전을 하고 가다가 그만 사슴과 부딪치는 사고가 났다. 어떻게 할지 몰라 당황하는 이 부부를 위하여 경찰차가 와서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물었다. 그런데 아직 영어가 서툰 이 부부는 경찰에게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다 드디어 용기를 내어서 사건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MY CAR 루돌프 꽝 사슴이라는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아 MY CAR 루돌프 꽝 이라고 설명을 했던 것이다. 그때 눈치가 빠른 경찰이 그 말을 듣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산타 ARE YOUR OK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삶에는 ARE YOUR OK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십니까? 하고 물으면 잘 살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냥 산다고 하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죽지 못하여 산다고 대답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다니지 않는 사람들의 대답이 아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다. 제가 여러분에게도 질문을 해 보겠다. 2013년을 어떻게 사셨습니까? 아마 우리 중에도 많은 사람이 잘 살고 있습니다고 대답하기 보다는 그냥 살지요가 아니면 죽지 못해서 삽니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왜 우리의 삶에 평화와 만족이 없겠는가? 하나님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곧이어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하였다. 이 땅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는 소원이 우리의 삶이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그러한 삶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뻐서 찬송하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면서 감격하는 그러한 삶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진 뜻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불행하게 살고 싶어하는가? 우리도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그러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것이다. 사실 올 한 해도 우리는 이 행복을 가지기 위하여 어떨 때는 이를 깨물고 참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땀을 흘리며 일을 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행복합니다 하고 대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 우리에게 행복과 평강이 없겠는가? 다하라 요네꼬라는 분이 쓴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는 책이 있다. 4남 3녀의 다복한 가정에서 막내로 태어난 요네꼬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런데 18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요네꼬는 그 외로움을 이기기 위하여 몸부림을 친다. 도서관에 박혀서 열심히 책도 읽어보고, 소위 말하여 타락이라는 것도 해 보았다. 그런데 그 외로움을 이길 수 없었던 요네꼬는 결국 자살을 결심하고 철로위에 서게 되었다.
이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요네꼬는 병원에서 눈을 떴다. 그런데 몸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두 다리가 잘려져 있었고, 왼팔도 없었다. 그리고 오른손도 손가락이 3개만 남은 중증 장애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자기 몸으로 아무 것도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 요네꼬는 이러한 자신을 가족이 고통가운데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 더 싫었다. 그래서 죽기 위하여 수면제를 하나씩 모으고 있었다.
그런데 그 병원에 신학지망생인 아끼도시라고 청년이 병원선교를 위하여 날마다 방문하였다. 그리고 아끼도시는 누구나에게처럼 전도지를 침상에 놓아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끼도시가 해맑은 미소를 머금고 요네꼬에게 과자를 건네주었다. 어제 요네꼬를 생각하면서 과자를 만들어 봤어요. 하면서 전도지를 놓는 그 자리에 과자를 놓았다. 그 과자를 본 요네꼬는 수면제를 꺼내 놓고 울었다. 그때 요네꼬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나는 당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당신을 믿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저 사람들처럼 살아 볼 수 있다면 살고 싶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한 요네꼬는 자신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다시 자살을 할 것이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가 깨었는데 머리위에 전도지가 있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 말씀을 읽는 순간 자신에게 손가락 3개가 있다는 것이 감사하였다. 그리고 그 손가락 3개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를 생각해 보았다. 글씨를 써 보았는데 서툴지만 글씨를 쓸 수가 있었다. 책장도 넘길 수가 있었다. 또 단추도 끼울 수가 있었다. 오 된다. 되네. 손가락 3개로도 할 수 있는 것이 있네!!!
그러면서 요네꼬의 삶은 조금씩 변화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끼도시를 통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고 사랑을 나누다가 결국 둘이는 결혼을 하여 2명의 아이를 낳아 지금은 목사님 사모님으로 살고 있다.
양쪽에 의족을 하고 사모로서의 사역을 감당한 후 집에 들어오면 의족과 의수를 다 뗀다. 그리고 아이들과 방바닥을 뒹굴면서 노는 것이다. 비록 다리는 없고 또 팔도 없지만 요네꼬는 정말 행복하게 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요네꼬는 자기와 같이 외로움과 우울증으로 자살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꿈을 주는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힘내세요. 하나님은 나 같은 장애인도 사랑합니다. 당신이 귀한 것을 잃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남은 것이 있습니다. 당신 자신은 여전히 이렇게 존재하잖아요. 당신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면 삶은 황홀할 것입니다.
이것이 요네꼬가 삶이 힘들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남기는 메시지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요네꼬가 가지는 행복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건강할 때는 자살을 결심하고 기차철로에 멍하니 서 있던 그녀가 어떻게 양쪽 다리와 왼쪽 팔을 잃은 후에는 행복을 말하는 행복전도사가 될 수 있었겠는가? 사실 우리는 행복을 소유와 연관을 시킨다. 그래서 재산이 많으면 행복할 줄 알고 열심히 재산을 모으고 사는 것이다.
그런데 행복은 거기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좋은 침대는 돈으로 살 수 있지만, 숙면은 살 수 없고, 좋은 집은 돈으로 살 수 있지만, 행복한 가정은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행복은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시편 23편 2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시 23: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동물들 중에서 누워서 자는 동물은 거의 없다. 사자와 호랑이와 같이 강한 동물은 누워서 잔다. 왜냐하면 잠자는 사자와 호랑이 콧털을 건드릴 동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자와 호랑이가 아닌 초식동물들은 거의 다 웅크리고 잔다. 그래서 사나운 맹수가 올 때 언제든지 도망을 할 수 있는 그런 긴장된 자세를 가지고 자는 것이다.
그러면 양은 어떤 자세로 잠을 자겠는가? 급한 일이 생기면 동물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강한 동물은 보고 뛴다. 그러나 약한 동물은 뛰고 본다. 그런데 뛰고 보는 동물도 2종류로 나눌 수가 있는데, 빨리 빠른 동물은 조금 뛴 후에 본다. 그러나 빨리 느린 동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는 것이다. 양은 3번째이다. 보고 뛰는 동물이 아니라, 뛰고 볼 수도 없는 그렇게 약한 동물이 양인데 어떻게 양이 누워서 잘 수 있는가? 양은 늘 불안과 초조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양을 하나님이 누이시는 것이다.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이 양의 목자가 되어주셔서 안위하여 주실 때 양은 참된 평화와 행복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양과 같은 자들이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아무리 나를 강하게 만들어 평안을 누리려 해도 긴장과 초조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부족함 없는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어서 나를 인도하여 주실 때 그때 참된 평화와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저와 여러분의 삶에는 목자가 있는가? 사실 평안이라고 하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샬롬이고, 헬라어로는 에이레네이다. 이 말은 로마가 말하는 평화의 로마(Pax Romana) 와 차이가 있다. 로마가 말하는 평화는 무력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전세계를 통치하였던 로마는 식민국가들의 반란이 있었다. 그때 로마는 내란을 수습하기위하여 군대를 파송하여 반란군을 처참하게 진압을 한다. 그리고 로마는 평화가 도래했다고 팍스 로마나를 외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평화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시편 23편을 중심으로 설명하면 하나님이 목자가 되어서 나를 푸른 초장 맑은 시냇물가로 인도하여 주십니다는 확신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고, 나는 그의 기르시는 양이 되어서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평화가 샬롬이고 에이레네가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경이 말하는 평화는 힘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관계로 이루는 것이다. 오늘 본문도 그러한 관점에서 보시기 바란다. 본문은 천사들의 찬양이다. 지금 천사들은 목자들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행하실 놀라운 일을 노래하고 있는다. 본문을 한번 읽어보기 바란다.
(눅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만약 이 찬양을 1절과 2절로 나누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가 될 것이고, 2절은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구분해 놓고 보면 1절과 2절이 댓구가 되고 있다.
지극히 높은 곳/땅, 하나님/기뻐하신 사람들, 영광/평화
그런데 1절에 있는 내용과 2절에 있는 내용이 예수님의 오심으로 인하여 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잘 알려주는 찬송이 주는 평화이다. 에베소서 2장을 중심으로 작곡이 된 찬송을 한번 불러보기 바란다.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우리의 평화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우리의 평화
염려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니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니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리고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면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나님과 우리의 막힌 담을 허물어 주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어 주시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하여 주신 것이다.
지금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평화를 누리고 있는가?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된 평화를 누리는 은총이 있기를 축원한다.
이제 말씀을 맺는다.
건축이라는 스킷드라마가 있다. 젊은이들이 난파선을 타고 가다 무인도에 도착하였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젊은이들은 섬의 한 모퉁이에 있는 건축자재를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건축 자재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토의하였다.
한 젊은이는 이 섬에서 한동안 살아야 할 것 같으니 아무래도 집을 지어야 한다고 제안하고, 믿음이 좋은 한 젊은이는 청교도를 본받아 교회를 먼저 지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때 한 젊은이가 나서며 가까운 곳에 다른 섬이 있으니 그 섬의 원주민들이 공격해 올 것을 대비하여 담을 쌓자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담을 쌓기 시작하였다.
공사가 한창이던 어느 날, 낯선 청년 한 명이 수영을 해서 이 섬으로 오자 그를 붙잡았다. 그리고 너는 누구냐하고 묻자 체포당한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나는 이 섬과 저 섬을 함께 소유한 주인 추장의 아들이오. 건축 자재는 내가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두 섬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고 준비한 것인데, 당신들은 다리 대신에 담을 쌓고 있군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젊은이가 저 놈이 수상하다, 저 놈을 죽여라고 외친다. 그러자 다른 젊은이들이 달려들어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 천둥번개가 치면서 불이 꺼지고 장내는 잠시 어두워진다. 그리고 다시 불이 켜졌을 때 무대 중앙에는 십자가가 서 있고, 섬을 헤엄쳐 온 사람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면서 남긴 멘트가 반복해서 들려온다.
나는 다리를 놓고자 했는데, 당신들은 담을 쌓았습니다.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어떤 사람은 그것으로 담을 쌓고 자기만을 보호하려 하고 어떤 사람은 다리를 놓아서 소통하려 한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같은 재료로 담을 쌓고 살았는가? 다리를 놓고 살았는가? 우리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다리를 놓아 소통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제 하나님과 소통하며 평화를 누리는 사람은 이땅에 힘들고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자들과 다리를 놓아 소통의 문을 열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의 삶에는 하나님의 평화의 은혜와 역사가 충만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