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전 4: 6 분수를 넘어서 - 살전 4: 8 저버리는 자
살전 4: 6 분수를 넘어서 -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 (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 )
분수를 넘어서라는 말은 탈선과 외도(外道)를 가리킨다.
형제를 해한다는 말은 문맥상 성적인 탈선과 외도로 다른 형제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을 말한다. 성도가 이러한 잘못에 떨어지지 말아야 할 이유는 이 모든 일에 대해 주께서 보응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징벌은 무섭다.
경건한 다윗이 자기의 충성된 신하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고의적으로 전쟁터에서 죽게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음죄와 살인죄 때문에 다윗의 집에 칼이 떠나지 않을 것을 선언하셨다.
하나님의 징벌은 무서웠다.
다윗의 가정에는 오빠가 이복 여동생을 강간하고, 동생이 이복형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고, 아들이 아버지를 반역하는 일까지 일어났다(삼하 11장 이하).
범죄로 인하여 다윗이 치룬 대가, 즉 그가 받은 훈련은 매우 혹독하였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은 참으로 두려운 것이다.
1] 이 일에
혹자는 '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라그마티'(*)는 상업적 용어로서 '장사', '거래'를 의미한다고 본다(Lenski).
또 혹자는 '프라그마티'를 '법률적인 문제'로 해석한다(Baltensweiler). 그 근거로는 당시 아테네(Athens)와 그 밖의 다른 그리스 도시들에서는 여자가 상속자(heiress)가 될 때 그녀와 가장 가까운 친척 중에 한 명이 그 재산과 가문을 지키기 위해 결혼을 요구할 수 있었다.
이때에 종종 법적인 소송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전후 문맥상 본 절의 '프라그마티'가 오직 한 가지 일만을 가리키는 단수임을 생각할 때, 이것은 성적인 관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Thomas, Bruce, Morris).
2] 분수를 넘어서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르바이네인'(*)은 '경계선을 넘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혹자는 '결혼이라는 허락된 경계선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Jerome).
이와 같이 본문은 '결혼'이라는 영역을 벗어나서 성적인 범죄를 짓는 것을 말한다.
3]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에 대해
Ⓐ 이웃의 아내를 성적으로 범하는 행위이다(Schmithals).
Ⓑ 결혼하지 않은 여인을 범하는 행위이다(Thomas).
그러나 결국 두 견해 모두 형제인 이웃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임을 감안한다면, 본 절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러한 행위를 하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아내를 취하지 말라고 함이다.
본 절을 위의 말에서 따로 생각하여 이것을 분쟁으로 취리(取利)하지 말라는 뜻이라는 학자가 있다(Dibelius).
그러나 이 견해는 이 부분의 문맥을 잘 살피지 못한 데서 생긴 오해이다. 7절의 '부정하게 하심(음행에 관한 것)이 아니라'란 말은 분명히 본 절의 결론이다.
본 절의 내용도 부정한 일 곧, 간음을 경계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 '이 일에'란 말은 위에서 말한바 성적 교제를 가리킨 것이다.
4]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성적인 문제에 관한 윤리적인 지침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이미 그들에게 구두(口頭)로 교훈한 것이었다(2: 11).
그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그들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께 합당한 것'이 되기를 권면하였다(2: 12).
여기 '미리 말하였다'는 것은 장래 심판이 이르기 전에 그가 경고한 것을 가리킨다.
5]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
'이 모든 일'의 이것은 3-6절에 말한 음란한 죄들을 가리킨다.
'신원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디코스'(*)는 명사로서 '공의(公義)를 행하는 자', '행악자를 심판하는 자'의 뜻을 갖는다.
* 롬 13: 4 -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KJV는 이를 '보수자'(報樹者, avenger)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심판은 당장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파루시아'(parousia) 즉 그의 강림 때 실현된다.
* 시 94: 1 - 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어 주소서.
* 시 98: 9 -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 미 5: 15 - 내가 또 진노와 분노로 순종하지 아니한 나라에 갚으리라 하셨느니라.
* 나 1: 2 -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 롬 12: 19 -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 고전 4: 5 -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 살후 1: 8 -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본 절을 잠 6: 27-35과 비교해 보라.
* 잠 6: 27-35 - 27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야 어찌 그의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28 사람이 숯불을 밟고서야 어찌 그의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 29 남의 아내와 통간하는 자도 이와 같을 것이라. 그를 만지는 자마다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30 도둑이 만일 주릴 때에 배를 채우려고 도둑질하면 사람이 그를 멸시하지는 아니하려니와 31 들키면 칠 배를 갚아야 하리니 심지어 자기 집에 있는 것을 다 내주게 되리라. 32 여인과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자라. 이것을 행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며 33 상함과 능욕을 받고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게 되나니 34 남편이 투기로 분노하여 원수 갚는 날에 용서하지 아니하고 35 어떤 보상도 받지 아니하며 많은 선물을 줄지라도 듣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금생과 내세에 사람들의 죄를 그의 공의의 법대로 보응하신다.
살전 4: 7 거룩하게 하심이니 -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
하나님께서 사람의 음란과 불결에 대해 보응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불러 구원하심이 그를 부정(不淨)하게 하심이 아니요 그를 거룩하게 하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향과 하나님의 부르심의 방향은 분명하다. 그것은 죄인을 죄로부터 거룩케 하는 것이지, 죄와 부정(不淨)과 불결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과 부르심에 합당하게 거룩하고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멸시하고 저버린다면, 우리는 사람을 저버린 것이 아니요 우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린 것이며 그 잘못은 매우 크다.
여기에 사람의 죄의 심각성이 있다. 죄는 비록 인간관계의 죄라 할지라도, 그 성격상 하나님께 대한 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법을 어긴 것이기 때문이다. 죄는 하나님의 권위와 명예에 대한 도전이며 침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 대해 보응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이다.
1]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혹자는 바울이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동기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초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고 한다(Morris).
'부르심'의 헬라어 '에칼레센'(*)은 능동태로서 그리스도인으로의 회심은 인간의 결단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행위임을 시사한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의 초기 서신에 잘 나타나 있다(2: 12. 5: 24).
* 살후 2: 14 -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2]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부정'(*, 아카다르시아)의 언급은 6절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한 바가 상업적 문제가 아니라 성적 문제였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개역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으나 '부정' 앞에 있는 전치사 '에피'(*)는 '... 에로'의 뜻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을 나타낸다. 갈 5: 13에서는 '자유를 위하여'(unto liberty, KJV), 엡 2: 10에는 '선한 일을 위하여'(for good works, KJV)에 이 단어가 목적을 나타내는 전치사로 사용되었다.
* 갈 5: 13 -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 엡 2: 10 -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거룩' 앞에 있는 전치사 '엔'(*)은 '... 안에'의 뜻으로서 이미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거룩함 안에 거하는' 즉 '성화되어가는 성도들로 부르심을 입었음'을 나타낸다.
* 롬 1: 7 -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 고전 1: 2 -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서 불러내신 것은 부정(不淨)을 행케 하기 위함이 아니요 성경생활을 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벧전 1: 15에 말하기를,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하였다.
살전 4: 8 저버리는 자 -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
그의 성령이라는 표현은 요한일서 4: 13에도 나온다.
* 요일 4: 13 -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성령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시는 영이시며, 또한 성령께서는 거룩한 영이시다.
성령께서는 거룩한 영이시기 때문에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 거룩한 생각과 거룩한 감정과 거룩한 의지를 주신다. 우리의 몸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의 거룩한 생각과 마음의 원천이시다.
1]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저버리다'의 헬라어 '아데테오'(*)는 '취소하다', '무시하다'를 의미한다.
* 갈 3: 15 -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혹자는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데살로니가를 떠난 후에, 영지주의자들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성윤리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버리라고 주장하였을 것이라고 한다(Schmithals, Paul and Gnostics, PP. 157, 158).
바울은 이에 대해 자신의 가르침을 버리는 것은 자신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리는 행위라고 반박한다.
7-8절은 범죄자가 형벌을 면할 수 없음을 확언한다.
거룩한 생활을 명령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거룩하지 못한 자는 곧 하나님께 죄를 범한 자이다. 그러므로 비록 그 범죄 사실이 사람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아시고 그것을 벌하신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의 음행 죄를 회개하며 말하기를,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라고 하였다(시 51: 4). 다윗이 회개한 음행 죄는 곧, 다른 사람의 아내와 간통하고 또 그 남편을 죽인 사실이었는데 어찌하여 "주께만 범죄"했다고 하였는가?
그의 말은 얼른 보면 그릇된 말 같으나 원칙상으로는 이 말이 참말이다.
Ⓐ 하나님만이 무죄자이시니 원칙상으로 말하면 하나님만이 인간의 죄를 정하시고 또한 형벌을 실시할 수 있다(Augustine).
Ⓑ 인간의 유죄(有罪)를 선고하는 참된 법률도 하나님에게서 유래(由來)한 것이기 때문에 범법자는 원칙상으로 하나님만을 반역한 것이다.
Ⓒ 예수님께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 28)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범죄자는 사람의 보응을 받음보다 결국 하나님의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니 두려운 일이다. 히 10: 31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