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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장점을 길러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수행하는 것은 마음이 일을 하는 것이다. 몸이 하는 일이 아니고 대상이 하는 일이 아니라 마음이 하는 일이다. 여기에서는 사념처를 수행한다. 사띠빠타나 수행은 신념처, 수념처, 심념처, 법념처를 말하는데 신, 수, 심, 법은 네 가지 대상을 말한다.
따라서 수행을 할 때에는 대상 쪽과 마음 쪽을 모두 알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수행을 하는 마음이다. 대상이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수행하는 것이다. 수행하는 마음이 바르지 않고 나쁜 마음이라면 그것은 수행한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마음을 가장 중점적으로 말한다.
대상은 이미 있는 것이다. 신념처 수행에서 몸의 감각은 이미 있다. 수념처 수행에서 마음의 느낌은 항상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있는 것이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수념처 수행에서 언제나 한 가지는 존재한다.
마음에는 항상 좋은 마음, 나쁜 마음들이 일어나고 있다. 신념처 수행에서 나타나는 3가지 마음, 좋아하는 마음, 싫어하는 마음,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마음을 관찰한다면 심념처가 된다. 대상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마음 쪽을 보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탐심, 진심, 치심으로 수행한다면 수행한다고 말할 수 없다. 얻고 싶어 하고 되게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탐심으로 수행한다고 말한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못마땅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화로써 수행한다고 한다. 치심은 더욱 좋지 않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무조건 하는 것을 어리석음으로 수행한다고 한다.
생각하고 싶은 데로 생각해서 수행하는 것을 어리석음으로 수행한다고 말한다. 들은 것이 없는 사람은 어리석음으로 수행할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을 하기 전에 이론적으로 많이 들어두어야 한다.
그리고 모르면 알기 위해서 물어야 한다. 수행의 원리를 이론적으로 많이 들어두어야 한다. 그리고 모르면 알기 위해서 물어야 한다. 수행의 원리를 알고 있어야 수행하는 것이 쉬워진다.
지혜에는 들어서 아는 지혜, 생각해서 아는 지혜, 수행을 해서 얻는 지혜가 있다. 들은 것이 없는 사람은 생각하는 것도 잘못 생각하게 되고 하는 것도 잘못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바르게 들어 두어야 한다.
그리고 바르게 생각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수행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들어서 아는 지혜와 생각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수행을 바르게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수행을 해서 얻는 지혜가 난다.
이 센터에서 무엇 하나를 얻겠다는 마음으로는 수행하지 말라. 내가 수행을 할 줄 알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수행하라. 수행을 바르게 하면 결과는 자연스럽게 따라 온다. 너무 많은 것을 원하지 말라. 수행을 하는 만큼, 수행을 할 줄 아는 만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원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몸과 마음이 힘들게 수행하지 말라. 너무 집중해서 수행하지 말아야 하고 억제하면서 수행하지도 말아야 한다. 일어나는 것을 일어나지 않게 해서는 안 되고 일어나지 않은 것을 일어나게 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너무 애를 써서 수행을 하면 저녁이 되면 힘이 들어서 수행을 하지 못하게 된다.
왜 힘을 써서 수행을 하는가? 욕심이 있기 때문에 애를 써서 수행을 하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기 때문에 수행하면서도 그 습관대로 애를 써서 하려고 한다. 원하면 애를 써서 수행하고 못마땅해도 애를 써서 집중해서 수행하려고 한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에도 애를 써서 집중해서 수행한다.
여기에서는 편안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수행을 해야 한다. 그러나 관심을 가져야 하고 항상 해야 한다. 힘을 써서 수행하기보다 생각할 줄 아는 지혜로써 수행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 많은 힘이 필요하지 않다. 지금 앉아 있는 자신을 알 수 없는가? 앉아있는 것을 알기 위해서 얼마나 힘을 써야 하는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면 바로 알 수 있다. 어려운 것은 항상 알아차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수행이 습관이 되어야 할 수 있다. 실제로 내가 해야 하는 것은 계속으로 알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대상을 분명하게 보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림이 이어질 수 있도록 애를 써야 한다.
자기 자신을 아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알려고 해서 아는 것과 질문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을 하면 사띠가 있는 것이다. 내 몸에 대해서, 내 마음에 대해서 생각을 한다면 이미 알아차림이 있는 것이다. 집중을 해서 아는 사띠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사띠가 된다.
지금 자신의 머리에 어떤 느낌이 있는가? 머리에 대해서 생각을 하면 마음이 어디로 가는가? 머리로 간다. 다리에 대해서 생각을 하면 다음이 다리로 간다. 마음에 대해서 생각하면? 무릅에 대해서? 마음 상태가 어떠한가 하고 물으면 마음상태에 대해서 바로 알 수 있게 된다.
지금 마음이 어떤가? 귓밥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어느 귀밥쪽으로 마음이 가는가? 양쪽 귀에 다 마음이 간다면 알아차림을 잘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집중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귀를 알 때 한 쪽 귀만을 안다. 사띠의 힘이 약할 때도 한 가지를 알고 난 뒤에 다른 것을 알게 된다.
사띠가 좋은 사람은 한 순간에 많은 대상을 알게 된다. 대상을 보기 위해서 노력하지 말고 사띠가 좋아지도록 노력하라.
지금 앉아있는 자신에 대해서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지금 눈을 뜨고 있는데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수행하는 것을 쉽게 생각하라. 수행한다는 것은 6문에서 일어나는 것을 아는 것이다. 사띠를 두는 것은 바깥을 향하던 마음을 안으로 돌리는 것이다. 나 자신을 보는 것이다. 6근에서 일어나는 것을 ‘일어났구나’ 정도로 알아주면 된다.
보이면 보이는 줄 알면 된다. 들리면 들리는 줄 알면 된다. 보이는 것이 보이는 줄 아는데 있어서 집중할 필요가 있는가? 없다. 그래서 집중하지 말라고 한다. 알면 된다. 아는 것은 편하지만 집중을 하게 되면 아주 힘이 든다.
대상은 이미 있는 것이다. 단지 마음에 힘이 생기게 노력하라. 마음가짐이 바르고 사띠가 이어질 때 마음의 힘이 좋아진다. 사띠보다는 견해가 바른 것이 더 중요하다. 몸에서 일어나는 것,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자연의 이치라고 알아야 한다.
뜨겁고 차가운 것도 자연의 이치일 뿐이다. 자연의 이치라는 말은 나의 것도 아니고 남의 곳도 아니고 사람도, 중생도 아닌 단지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을 말한다. 추운 것이 사람인가? 차갑고 뜨거운 것이 사람인가? 뜨겁고 차가운 것은 단지 뜨겁고 차가운 것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자연의 이치일 뿐이다. 이 이치를 알게 되면 다른 것에 모두 적용시킬 수 있다.
보이는 형상, 들리는 소리, 모든 것이 다 자연의 이치다. 마음이 일어나는 것, 생각이 일어나는 것도 모두 자연의 이치일 뿐이다. 견해가 바르게 되어야만 수행하기가 쉬워진다.
몸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내 몸이라고 생각하면 견해가 잘못된 것이다. 일어나는 모든 것은 자연의 이치일 뿐이다. 일어나는 모든 것은 대상일 뿐이라고 알고서 봐야 한다. 대상이라고 하는 것은 알아지는 모든 것을 말한다. 좋다, 나쁘다고 생각하지 말고 대상이다, 자연의 이치다고 알아야 한다. 소리가 들리면 들리는 것일 뿐이다.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사람도 아니고 나도 아니다. 일어나는 것은 그냥 일어나게 내버려 두라.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연의 이치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픈 것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나쁘다고 생각하면 진심이 일어나고 좋다고 생각하면 탐심이 일어날 것이다.
아픈 것을 자연의 이치로, 대상으로 알게 되면 마음이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마음에 진심이 없을 때 수행을 할 수 있게 된다. 어떤 대상에 대해서 좋아하는 마음이나 싫어하는 마음이 생겼다면 그 대상은 바른 대상이 될 수 없다.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 마음을 바꾸어주고 거기에서 생긴 느낌을 봐야 한다.
마음을 볼 때 느낌을 통해서 마음을 보면 쉽다. 자기에게 마음이 있는가? 마음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마음을 어디에 가서 볼 것인가? 마음을 어디에서 찾으려고 하지 말라. 마음은 어느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집중해서 보지 말라고 한다.
마음이 무엇인지를 우선 알아야만 마음을 볼 수 있다. 마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어디에 가서 마음을 볼 것인가? 마음은 지혜가 있는 사람만이 볼 수 있다. 이해해야만 볼 수 있다. 몸은 정해서 볼 수 있지만 마음은 장소가 없기 때문에 정해서 볼 수 없다.
마음은 일어났을 때 알 수 있고 작용할 때 알 수 있다. 마음을 사람들이 안다. 그렇지만 한 번도 봐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디에서 어떻게 봐야할 지를 모른다.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 자기가 생각한다는 것을 안다면 마음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즐겁고 슬픈 것을 안다면 마음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하고 싶어 하고 가고 싶어 하는 것을 안다면 마음을 아는 것이다. 어떤 곳에 마음을 두는 것도 마음이 일을 하는 것이다. 마음이 일을 한다면 그것을 알 수 있다.
사띠를 두고 있는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가? 알 수 있다. 처음에는 몸을 보는 것이 쉽다. 그래서 몸을 보는 것에서 시작해서 해야 한다. 몸과 마음을 모두 알아야 한다. 수행하는 시간은 아침에 깨어나서 저녁에 잠들기 전까지 해야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고 난 뒤에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알 수 있는 만큼 알도록 자꾸 노력해야 한다.
여기에는 자신을 알기 위해서 왔다. 자기 자신을 보는 일만 하면 된다. 다른 이를 봐야 하는가? 자기 자신을 봐야 하는가? 로바로서는 절대로 수행하지 말라. 그냥 그대로 꾸준하게 해 나가면 된다. 수행을 너무 성급하게 잘 하려고 하지 말라. 평생 동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성급하게 할 필요가 없다.
수행하는 것이 아주 능숙해졌을 때는 힘을 써서 할 수도 있다. 능숙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힘을 써서 수행하지 말도록 하라. 그렇기 때문에 차분하게 수행을 하고 관심을 가지고 이어지게 수행하면 된다. 처음 수행하는 사람들은 2,3일 만에 수행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다.
수행한다고 하면 힘을 써야 한다고 생각해왔었기 때문에 수행을 힘써서 하려고 할 것이다. 애를 써서 집중을 하게 되면 한 가지만 알게 된다. 힘을 쓰지 않고 집중하지 않고 보게 되면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자기 자신에게 자주 묻게 되면 사띠가 들어오게 된다. 지금 무엇을 알고 있는가 하고 물어보라. 수행을 해 가면서 인터뷰를 통해서 조금씩 알아가게 될 것이다. 생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속상해 하지 말라.
처음 하루, 이틀은 생각이 아주 많을 것이다. 생각이 사라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각이 일어난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알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다. 없애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계속적으로 알도록 하라. 계속적으로 아는 것을 본다고 말한다.
눈을 뜨고 수행을 할 수 있으면 좋다. 수행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눈을 뜨던지 감던지 수행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눈을 뜨면 사마디가 사라지기 때문에 눈을 뜨고는 수행할 수 없다고 한 수행자가 있었다. 눈을 뜨면 사마디가 사라진다면 그 사람의 사마디는 좋다고 말할 수 없다.
눈을 뜨거나 감거나 항상 수행할 수 있어야 사마디가 좋은 것이다. 사띠가 이어지고 견해가 바르면 사마디가 생긴다. 집중한다고 해서 사마디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집중하면 머리가 아파지고 목이 뻣뻣해진다.
수행할 때 몸과 마음이 힘이 든다면 자신의 마음가짐을 다시 점검해 주어야 한다. 수행할 때 명칭을 붙일 필요는 없다. 명칭은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 필요한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 때는 명칭이 필요하지 않다. 천천히 할 필요도 없다.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걸으면서 수행하면 된다. 성급하지 않으면 된다. 성급해지면 사띠가 좋아지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잊지 않는다면 사띠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마디는 집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요한 마음을 말한다. 원하는 것이 없고 못마땅한 것이 없으면 사마디가 있는 것이다. 견해가 바르면 사마디가 있다. 노력은 끈기 있게 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집중해서 힘써서 하는 것이 아니다.
신심은 자기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믿는 것이다. 지혜는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것, 견해가 바른 것을 말한다. 관심을 가지는 것도 지혜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만 거기에 지혜가 있게 된다.
관심을 가지면 지혜롭게 하게 된다. 조사하는 것도 지혜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말한 사띠, 사마디, 노력, 신심, 지혜 이 5가지를 사용해서 수행해야 한다.
좌선할 때와 같이 경행할 때도 ‘내가 지금 무엇을 알고 있는가?’ 하고 자신에게 물으면서 알도록 하라. 걸을 때 걷는 줄 알면 된다. 걷는 것을 알게 되면 대상은 저절로 생기게 될 것이다. 들리는 것, 생각하는 것, 보이는 것, 느낌들이 드러날 것이다.
한 대상에 집중하게 되면 다른 대상은 알지 못하게 된다. 한 대상에 너무 오랫동안 집중하지 말라. 위빠사나 수행의 목적은 지혜가 나는 것이다. 지혜가 나기 위해서는 많은 대상을 알아야 하는데 집중하면 많은 대상을 알 수 없다.
지혜가 생기기 위해서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한다. 사마타 수행을 통해서는 지혜가 생길 수 없다. 대상이 없어서 한 대상을 잡으려고 하면 한 대상을 잡돼 오랫동안 그 대상만을 보려고 하지는 말라. 좌선을 할 때 다리가 아프면 이것도 자연의 이치일 뿐이라고 생각해주고 마음이 편안해지면 그 느낌이 더해지는 지, 덜해지는 지를 보도록 하라.
마음이 아픔에 반응하지 않을 때는 아픔을 봐도 된다. 마음에서 아픔을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그 싫어하는 마음을 봐야 한다. 어떤 목적으로 아픔에 해해서 사띠를 두어야 하는가? 알기 위해서 사띠를 두어야 한다.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 사띠를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아픔이 있을 때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기 위해서 보는 것이다. 대상과 마음이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보는 것이다.
사띠를 두는 목적은 아는 지혜가 생기게 하기 위해서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계속해서 관찰하는 것이다. 일상 생활중에 무엇을 하던지 항상 사띠를 두고서 해야 한다.
공양을 할 때는 6문이 모두 일을 한다. 눈은 음식을 본다. 소리도 들린다. 냄새도 있다. 맛도 있다.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도 있다 마음도 일어난다. 공양을 할 때는 이 여섯 가지 대상들이 모두 나타난다. 이것들을 알면서 공양을 하도록 하라.
보이는 것과 보는 것에 대해서도 수행을 해 보라. 보면 보는 줄 아는 것이 어려운가? 보이는 것과 보는 것이 어떻게 다른가? 보이기 때문에 보는가? 보니까 보이는가? 로바로서 본다면 보기 때문에 보인다. 지혜로서 볼 때는 보이기 때문에 본다. 집중을 하면 보는 것이 되고 집중을 하지 않으면 보이게 된다.
들리는 것과 듣는 것도 동일한 원리이다. 보는 것과 듣는 것은 집중을 하는 것이다.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은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다. 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들리고 보려고 하지 않아도 보인다. 집중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마음이 과거에도 가지 않고 미래에도 가지 않고 현재에 있으면 된다.
사두!사두!사두!
2011.3.19.
_(자료제공/쉐우민숲속)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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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공부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두 ~사두~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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