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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어천서각공방 원문보기 글쓴이: 우광성
8. 유연전후서 柳渆傳後敍
문충공文忠公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편찬한 유연전柳渆傳은 대략 다음과 같다.
유연柳渆의 자는 진보震甫로, 대구大丘 사람이다.
아버지 유예원柳禮源은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세 자식이 있었는데, 유치柳治과 유유柳流, 유연이다.
유유는 글을 잘 짓고 유연은예법을 좋아하여, 모두 마을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유유의 처는 같은 마을 사람 무인武人 백거추白巨鰍의 딸이고,
유연의 처는 참봉參奉 이관李寬의 딸이다.
유연의 누이는종실宗室 달성령達城令 식에게 시집을 갔는데, 먼저 죽었다.
둘째 누이는 같은 고을의 선비 최수인崔守寅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 누이는 진주晉州 선비 하항河沆에게 시집을 갔다.
또 사촌 매부가 있는데 전현감前縣監 심륭沈嶐이다.
유유가 일찍이 산에 들어가 책을 읽다가 홀연히 돌아오지 않으니,
아버지 유예원과 아내백 씨가 “미쳐서 달아났다.”고 말했다.
이 말이 집 밖에 나갔는데, 아버지와 아내가 그 말이 맞다고 하니,
마을 사람들은 의심하지 않고 그 말을 믿었다.
오직 유연만이 홀로 만날수 없음을 슬퍼하면서 울었다.
5년 후에 아버지 유예원이 죽자, 유연이 상복을 입고 여막을 지켰다.
이듬해 임술년壬戌年에 첫째 누이의 남편인 식이 유연에게 편지를 써서 이렇게 말했다.
“해주海州에 채응규蔡應珪란 사람이 있는데, 진실로 너희 형이라고 들었다.
그러니 네가가서 맞이해 오는 것이 좋겠다”.
유연이 편지를 받고 하인을 뽑아서 형을 맞이해 오게 하였다.
그런데 하인은 그냥 돌아와서 “유유가 아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여름에 다시 식이 해주에 사는 채응규가 형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편지를보내왔다.
유연이 다시 사람을 보내어 형을 맞이해 오게 했는데,
거듭 그냥 돌아와서 이전처럼 “유유가 아니었습니다.”고 말했다.
다음 해인 계해년癸亥年 겨울 식이 하인 삼이三伊를 유연에게 보내면서
“전에 채상사蔡上舍가 부리던 사람이 처를 데리고 우리 문중에 도착했는데 진짜 유유였다.
네가 와서 만나 보거라.”라고 했다.
유연은 급히 먼저 하인을 보내고 자신은 그 뒤를 따라갔다.
하인이 식의 집에 도착하여 채응규蔡應珪를 찾아뵙는데,
채응규는 식과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인을 마당에 엎드리게 하고 재촉하여 곤장을 준비해 놓고 혀를 차면서 이렇게 말했다.
“네놈이 유연과 몰래 도모하여 먼저 해주에 도착해서 오히려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들려고 했으니, 하인으로써 주인을 잊으면 그 죄가 마땅히 죽음에 이른다” .
이에 하인은 두려워하면서 “저의 주인께서 오래지 않아 도착하실 겁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라고 했다.
식이 거짓으로 만류하는 척하니, 채응규가 “동생이 오기를 기다리겠지만,
너를 결코 가만두지 않겠다.”라고 했다.
며칠이 지나자 유연이 도착했다. 유연은 곧바로 채응규가 있는 곳으로 가니,
채응규는 옷깃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심히 아파서 엎어져 있는 척하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유연의 자字인 진보震甫를 부르면서 가까이 앞으로 오더니
돌연 유연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너를 보니 놀랍고 감격해서 눈물이 절로 흐르는구나.
나는 병이 깊은데도 너를 보니 좀나아지는 것 같다.
그런데 너만 홀로 얼굴색이 변하지 않으니 형제간의 정이 어찌 그리도인색하냐?”
유연이 당황해하면서 물러나왔다. 생각해 보아도 어디에서 온 인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에게 대책을 물었다.
이때 식과 사촌 매부인 심륭沈嶐이 서로 입을 맞추어 진짜 유유라고 하면서 의심할 것 없다고 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마땅히 관가에 고발해서 판결을 내야 한다고 했으며,
어떤 사람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서 온 집안사람들을 만나게 해서, 함께 시험해야 한다고 했다.
유연은서척庶戚 김백천金百千의 말을 따라, 모두 데리고 대구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팔거八에 도착하니, 부인 백 씨가 그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집안사람을 모두데리고 무리를 지어 마중을 나왔다.
남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담장처럼 둘러서서 목을길게 빼고 서서 바라보았다.
그런데 부인 백 씨에게는 시집올 때 데리고 온 노비가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 속에서 채응규가 오는 것을 보고 있다가 꾸짖어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서로 짜고서 우리 주인인 척감히 이곳에까지 왔느냐?”라고 했다.
그러니 온 고을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
채응규는 얼굴색이 흙빛으로 되었고 행동이 이상해졌다.
유연이 하인을 꾸짖고 도리어채응규를 맞이했다.
채응규는 유연의 아들 이름을 부르면서“별 일 없었느냐?”라고 했다.
관가에 도착하니, 고향 사람 우희적禹希績과 서형徐泂, 조상규趙祥珪 및
유연의 매부夫최수인崔守寅, 서족庶族인 홍명洪明 등이 죽 둘러 앉아 있다가
“당신은 누구요?”라 묻자,채응규는 “내가 유유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부사府使 박응천朴應川이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돌아가면서 유유가 맞냐고 물었는데,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유유가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다시 채응규에게자리에 있던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키면서
“이들은 모두 너의 고향 친척과 고향 사람이니, 이 사람이 누구이고,
저 사람이 누구인지 말해 보거라.”고 했다.
그러자 채응규는 고개를 숙인 채 누구인지 전혀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곧바로 마당으로 끌고 내려가 삼목三木의 형틀을 갖추면서 이렇게 말했다.
“옷을 갈아입었거나 얼굴이 수척하게 변해, 친구라도 비록 너를 알아보지 못할지 모르겠지만,
네가 만약 진짜 유유라면 어찌 네가 친구들을 알아보지 못하느냐.
지금이라도 네가사실대로 자백하거라. 혹여 네 말이 사실이라면,
아니라고 한 사람들은 마땅히 관의 형벌로 다스릴 것이다.”
이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궁색하여 어떤 사람은 유유라고도 했고,
어떤 사람은 채응규라고도 했다. 말이 섞이면서 갈피를 잡을 수 없어 혼란한 상황이 되었다.
샘(泉)
얼마 있다가 채응규의 첩 춘수春守가 하소연하며 이렇게 말했다.
“제 남편은 불행하게도 병이 들었으니,
관가의 감옥에서 풀어주셔서 저희 집에서 보호할수 있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에 부사 박응천은 관가의 노비인 박석朴石의 집에 가 있는 것을 허락했다.
5일이 지나과연 채응규는 첩 춘수와 함께 도망쳤다.
관가의 노비인 박석이 채응규의 첩 춘수를 쫓아가 잡았는데,
채응규는 이미 달아나서 그 자취를 알 수 없었다.
유유의 아내였던 백 씨는 이 일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밤낮으로 울면서 감사에게 이렇게 하소연하였다.
“제 남편이 성품이 좋지 않은 동생 유연을 두었습니다.
재물을 탐해서 진짜 유유인 것을거짓이라고 하고, 형을 묶어서 관가의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로써 저를 유연에게 시집가게 하려고 음흉한 화를 입혔습니다.
제 남편은 본래 미친병이 들어서 잡아 가둘수록 그증세가 더욱 심해집니다.
다행히 태수께서 풀어주셔서 병을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연에게 뇌물을 받은 사람이 죽이고서 그 자취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바라건대, 유연의 죄를 따지시어 제 억울함을 풀어주십시오”.
감사가 본관本官에게 명령해서 유연과 춘수, 박석을 잡아 가두었다.
이에 유연의 아내인 이 씨가 하소연을 하니, 감사는 이렇게 말했다.
“도망간 사람은 유유가 아니라, 바로 채응규이다. 또 도망간 것을 보면 채응규가 맞다.
나도 또한 유연의 억울함을 안다. 다만 유유의 아내 백 씨가 하소연을 그만두지 않으니,
일의 형편상 할 수 없이 그렇게 한 것이다. 조사를 마치면 마땅히 바로잡힐 것이”다.
유유의 아내 백 씨가 유연과 춘수, 박석을 이웃 고을로 옮겨 가둘 것을 요청하여,
마침내그 사람들을 현풍玄風으로 옮겼다.
이 일이 임금에게 보고되기도 전에 간관諫官이 이에대해 이렇게 논하였다.
“유유가 떠돌아다니면서 어려운 생활을 했기에, 그 모습이 비록 변했다고는 하지만,
말과행동은 진실로 유유였습니다.
그 동생이 형수를 빼앗고 재물을 차지하려고 형을 협박하여 관에 고발을 했습니다.
부사는 마땅히 유유와 유연을 함께 가두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먼저 동생의 하소연을 믿고서 오직 형만 가두었으니,
이미 형벌을 다스리는 체통을 잃었습니다.
또 이어서 유연의 옥사가 일어나 형을 죽이고 인륜을 어지럽힌 죄가 지금 발생했습니다.
그 마을 모든 사람들이 이를 분하게 여기고 꾸짖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청컨대,유연을 잡아 법대로 다스리고 아울러 응천應川 군수도 파직시키십시오”.
그러자 임금도 그렇게 하라고 했다.
이때 유연이 장차 옥사獄事에 나가려 할 때,
식과 심륭이 도모하여 몰래 김백천에게 “유연이 도착하면 우리들도 또한 마땅히 국문鞠問을
당할 것인데, 너는 어떻게 말하려 하느냐?”라고 몰래 물었다.
이에 김백천은 “내가 본 바로는 유가 아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식과 심륭은 “너와 유연은 함께 목을 베이게 될 것이다.”라 하니,
김백천이 “그렇다면 장차어떻게 말을 할까요?”라고 했다.
식과 심륭은 “우리들이 같은 말을 한다면, 목숨을 보존할수 있을 것이다.”라고 종용했다.
이해 갑자년 음력 3월 11일에 유연을 잡아들이라고 삼성교좌三省交坐 심통원沈通源에게
명을 내려 옥사를 다스리게 했다.
유연이 신문訊問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루는 신의 매부 달성령達城令 식이 신에게 편지를 보내왔는데,
‘집의 하인 삼이三伊가일 때문에 해주海州에 갔었다.
그 고을에 채응규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들고서 유유가아닌가 생각했는데,
가서 보니 진짜 유유였다.’라고 했습니다.
신과 유유의 아내인 백 씨가 의논해서 하인을 뽑아 백 씨의 편지와 유유가 입을 의복을 보내어,
해주로 가게 했습니다. 그런데 신의 형이 아니었습니다.
또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은 채응규라고 하기에, ‘너희들은 삼이三伊가 잘못 전해들은 말을 듣고서
멀리까지 오느라 고생했다’라 하면서 백씨 편지에 답장을 써 주고 되돌려주었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두 차례나 했습니다.백 씨 집에 이미 형의 편지가 있었지만,
신은 백 씨에게서 형의 편지를 구해 보지 못했기에 부탁한 말도 이미 잊어버렸습니다.
신은 한양에 와서 이른바 신의 형이라고 하는 사람을 찾아보니,
형과 같지 않은 점이 3가지가 있었습니다. 신의 형은 약한 사람이고 키는 본래 작은데,
지금 그 사람은 키가 컸습니다. 신의 형은 얼굴이 작고 누렇고, 마맛자국이 있고 수염이 없는데,
지금 그 사람은 얼굴이 넓적하고 검붉으며 수염이 많았습니다.
신의 형은 목소리가 마치 부인의 목소리 같은데, 지금 그 사람의 목소리는 크고 우렁찼습니다.
3번이나 시험해 해 보았으나, 마음속으로 진실로 의심이 되었습니다.
대구로 함께 내려오던 길에 팔거八에 이르러서 거짓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어,
그를 묶어서 관가에 압송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아내인 백 씨를 만나게 되었는데, 백 씨는 화를 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임술년壬戌年 이후에 하인이 다시 갔다 올 때에 형수가 문득 편지를 보냈는데,
채응규의답장을 통해 유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 번 식의 말을 더 믿고서, 혹시형 유유가 아닐까 하는 마음이 가득 있었기에,
제가 추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났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마을의 친족들과 대면하게 하여 그 거짓임을 분별했습니다.
감사를 뵙게 되었기에 형수가 마땅히 몸소 관가에 가서 보고 결정하는 것이 옳은데,
그렇게 하지 않고 지금 이처럼 급하게 화를 내십니까?’
이에 백 씨는 ‘만일 거짓이라면 어찌 진실이라고 속일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에감사가 백 씨에게 명령하여 직접 와서 살펴보라고 했지만,
거절하고서 나오지 않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안사람과 마을 사람들이 모두 유유가 아니라고 하는데,
제가 선비 집안 사람으로 어찌어떤 사람인지도 모를 사람과 더불어 얼굴을 대하겠습니까’?
채응규가 도망을 가니, 그 뒤에 백 씨가 도리어 신이 형을 죽였다고 얽어서
먼저 표적으로삼고, 식과 심륭 두 사람이 멀리서 목소리를 더하여,
마치 소리에 메아리가 있고 형체에그림자가 있는 것처럼 해 반드시 옥사를 일으키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또한 이유가 있습니다.
대개 식은 신의 아버지에게 특별히 좋은 논을 받았으며,
신이 아버지에게 사랑 받는 것을싫어했습니다. 심륭은 신의 큰어머니의 사위인데,
일찍이 큰아버지가 집의 재산을 그 큰어머니에게 주면서, ‘당신이 만일 아들이 없으면,
유예원의 아들로 하여금 뒤를 잇는 게좋겠소.’라고 했기에,
심륭은 항상 재물을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신을 시기했던 것입니다.
지금 식과 심륭 두 사람이 번갈아 암컷과 수컷이 창화唱和하듯 하며
괴롭히고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이에 추국推鞫을 맞은 관리가 유유가 어떻게 집을 나가게 되었는지 물었다.
유연은 “사람들이 유유가 미쳤다고 말을 하지만, 사실은 미친 것이 아닙니다.
저희 집안에 변고變故가있어서 어쩔 수 없이 집을 나가게 된 것입니다”라. 고 했다.
계속해서 달성현達城令 식에 대해 심문審問을 하니, 식은 이렇게 말했다.
“신이 유유를 찾은 것은 아닙니다. 유유가 신의 집에 왔는데,
그 모습이 이미 변했기에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앉아서 오랫동안 집안일에 대해 얘기하다가, 작은 집안일에 대해 말을 하는 것을 보니,
문득 대답하는 것이 들어맞았으며, 말씨와 행동거지가 진실로 유유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유연이 와서는 서로 부둥켜안고 통곡을했습니다.
병이 들었다고 하면서 자리를 옮겼는데,
마침 벽에 아버지가 써 놓은 글을 보고서 또한 서로 보고서 통곡을 했습니다”.
심륭은 이렇게 말했다.
“식이 그 아들 경억慶億을 시켜 와서 말하기를, ‘유유가 집에 왔다.’고 하기에,
신이 가서보았습니다. 그 모습이 이미 변했기에 그가 유유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집안일을 빠짐없이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또 식 등이 유유라고 말을 하기에,
신 또한 그렇게 믿었습니다.”김백천 또한 똑같은 말을 할 뿐 다른 말이 없었다.
채응규의 첩인 춘수春守는 이렇게 말했다.
“신은 남편 유유를 따라서 일찍이 태복천太僕川 가에 살았습니다.
식과 그 아들 경억이 와
서 보고서는 ‘진실로 유유다.’라고 말했습니다.
심륭과 김백천도 ‘진짜 유유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유연이 오게 되어 유유와 저의 아들 정貞과 백白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기에,
신만 홀로 이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유가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서 바로 감옥으로 갔는데,
감옥을 나와서 병을 치료하고 있었습니다. 신이 마침 밤중에 화장실에 가려다가 들어가서 보니,
등불은 꺼져 있었고 그곳에 유유도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유연이 몰래 죽여서 옥사獄事가 일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추국推鞫을 맡은 관리가 임금에게 갖추어 이렇게 말했다.
“식과 심륭 및 김백천은 다 진짜 유유라고 하니, 이 사람이 유유인 것이 명백합니다.
그런데 유연만 홀로 유유가 아니라고 하면서, 길에서 포박하여 관가에 고발을 했고,
몰래 죽이고서 그 자취를 감추려 한 것이 명백합니다. 청컨대, 곤장을 치십시오” .
42대의 곤장을 맞자, 마침내 거짓으로 자백했다.
조사가 끝나서 장차 형벌을 확정지으려하는데, 유연이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신은 이미 형을 죽인 죄를 지었으니, 죽는 것이 마땅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국가가형벌을 제대로 시행하는데 끝내 누가 될까 두렵습니다.
달성령達城令이 거짓으로 나라를속여 신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바라건대,
1년만 신을 가두어 두고, 채응규와 신의형의 자취를 찾은 후에 신의 죄를 분명히 정해 주시면,
신은 원망이 없겠습니다. 만약 신이 죽은 후에,
진짜 유유가 나타난다면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올 수 없습니”다.또 이렇게 말했다.
“국문하는 관리와 신은 본래 개인적인 원한이 없는데, 어찌 이와 같이 하십니까” ?
심통원沈通源이 화를 내며 나졸羅卒에게 머리를 잡고 입을 때리라고 하면서,
“독하기가이와 같으니, 형을 죽인 것이 사실이겠구나”.라고 하였다.
이때 기대항奇大恒이 그 자리에 있다가, “법전法典에 입을 때리는 형벌도 있는냐?”라고물으니,
사건을 캐묻는 관인 홍인경洪仁慶이 “형을 죽인 큰 죄인인데,
일의 처리가 대단히소홀하고 바쁘게 결말을 내니, 형벌을 진행하는 체통이 어떠한가”?라고 했다.
이에 심통원이 “대단히 나쁜 놈인데, 어찌 애석해 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했다.
기대항이 홍인경을 지목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지금 유연의 하인인 석몽石夢도 함께 거짓으로자백하여, 결국 유연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유연이 죽을 때 그의 나이27 세였다.
유연이 대구의 감옥에 있을 때, 그 아내에게 편지를 썼는데 다음과 같다.
“아, 아내 이 씨가 나를 좇아 멀리 와서, 가난한 살림에 일만 했는데,
나는 천지 간에 지극한 원한으로 감옥에 갇힌 지 수 개월이 되었다.
이치상 다시 살아나갈 수 없을 듯하네. 당신에게 내 유언을 남기니,
생각하면 할수록 아득하기만 하네.
식과 심륭, 백 씨와 채응규의 모함이 능히 온 나라 사람들의 마음과 눈을 가리고
덮어 이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구나. 내 한 몸이야 걱정할 것이 없지만,
그러나 내 부모님의 혼령을 생각하면, 오장이 찢어지는 듯하네. 돌아보건대,
오직 저 식 등의 간악한 진상을 당신또한 분명히 알 것이네.
지금 내가 말한 것은 터럭만큼도 거짓이 없으니,
당신은 이 편지를 가지고 서울에 가서 나의 지극한 원통함을 씻어주시게.
생각해보면, 재앙의 뿌리는 재산 때문이네. 당신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별급別給과
숙모의 문건을 관에 알리고서 없애버리시게. 이렇게 해도 오히려 사실이 밝혀지지 않으면,
천지신명과 부모님의 혼령이 위아래에서 밝게 비출 것이네. 당신은 밤마다 기도를 드려,
하늘이 도와 채응규를 잡아 저승에 있는 내 혼을 달래주기를 바라네.
정신이 어지럽고 기운이 없어 다 쓰지 못하“네.
이 편지 끝에는‘ 집 늙은이는 거짓 죄를 입은 사람이네.[家翁無辜人’란] 다섯 글자가 있었다.
주변에서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슬퍼하였다.
유연이 이미 죽었으나 나라의 여론은 끝나지 않았다. 장령掌令 정엄鄭淹이 경연經筵의
자리에서 유연의 억울함에 대해 말했다. 이에 영의정領議政 홍섬洪暹 또한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신이 유연의 옥사獄事를 국문鞠問하는 자리에 참여했었는데,
마음속으로는 억울함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능히 유연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청하건대, 다시 실상을 조사하도록 해 주십시오.”
그러나 그 일이 다시 행해지지 못했다.
16년 뒤인 기묘년己卯年 겨울에 수찬修撰 윤선각尹先覺
【윤선각이 지금은 이름을 국형國馨으로 바꿨다.】이 경연에서 이렇게 아뢰었다.
“지난 경신년庚申年에 신이 순안현順安縣에서 거지 한 사람을 만났는데,
이름이 천유용天裕勇이었습니다. 천유용은 글에 능하여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어린이들을 가르쳐먹고 살았습니다. 신은 그와 함께 여러 달 동안 절에 있었는데,
영남의 산천과 선비들의이름을 능히 잘 말했습니다.
또 스스로 말하기를 기유년己酉年에 영천永川에서 본 시험에 나그네 자격으로
시험에 응시했기 때문에 합격자의 이름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졌다고 합니다.
신이 그로 인해 ‘그렇다면 남쪽의 선비일 텐데, 무슨 이유로 이곳에까지 왔는가?’라 물었는데,
그 사람은 묵묵히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 신이 박장춘朴長春을 만났는데, 천유용에 대해 말을 하자,
박장춘은 크게 놀라며‘그 사람이 분명이 유유다. 그때 나 또한 시험에 떨어졌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뒤 갑자년甲子年 신이 또 개천군价川郡의 산사山寺에 있을 때 천유용에게서 편지가왔고,
대구에서 유연이 유유를 죽이고 무거운 벌을 받았다는 소문이 계속 들렸습니다.
신은 의아해하면서 ‘내가 천유용의 편지를 받았는데, 이 사람이 만약 진짜 유유라면,
서쪽으로부터 남쪽으로 와서 동생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그 사이의 날짜가 얼마나 되기에 이렇게 옮겨갈 수 있을까?’라고 말했습니다.
이때부터 신은 서쪽에서 오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천유용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신이 마땅히 궁구하여 물어보았다면 그 사람이 유유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니 유연의 억울함을 풀어 주어야 합니다”.
이에 법부法府에서 천유용을 잡아 들였다.
유연이 죽은 뒤로 부인인 이 씨는 어렵게 궁벽한 마을에 살면서,
매일 새벽이면 문득 향을피우고 하늘에 기도하면서 남편의 억울함을 씻어주기를 바랐다.
하루는 꿈에 유연이 갑자기 찾아와, “내 형이 왔다.”라고 했다.
이 씨는 잠에서 깨어나 울면서 “아, 신령이시여, 그징표를 주십시오.”라고 했다.
다음 날 저녁에 천유용이 법부法府에 나아가니,
이 씨가 이 소식을 듣고 곧바로 관가에 가서 이렇게 하소연하였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인 유연이 식과 재물을 다투었다는 이유로 지극한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 미망인인 제가 땅에 머리를 조아리고 하늘에 부르짖어
그 억울함을 씻어내고자 해도 방법이 없었습니다. 지금 진짜 유유가 나타났다고 하니,
삼가 유연이 죽을 때 남긴 말을 올립니다.”
그러니 유유가 이르러, “신은 천유용이 아니라, 진짜 유유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자신의 아버지의 이력과 친족과 하인 및 평소에 교유했던 사람들을 모두 말했는데,
의심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집을 나간 이유를 물었더니, 유유는 이렇게 대답했다.
“결혼한 지 3년이나 되었는데도 아직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가업을 잇는 것이 박복하다고 질책하시면서
자신 가까이에 있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서쪽 지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이후에 소식이 끊어져 동생의 죽음을 듣지 못했습니”다.
이에 달성령達城令 심륭沈嶐과 같은 동네에서 어릴 적부터 친했던 정자正字 김건金鐽,
생원生員 한극감韓克諶 등으로 하여금 자세히 살펴보게 하니,
모두 다 말하기를 진짜 유유라고 했다.
이에 의금부義禁府에서 채응규와 그의 첩 춘수의 자취를 찾게 했는데,
채응규를 장연長淵에서 찾았다. 해주海州에 도착하려면 5리 정도의 길이 남았었는데,
채응규는 스스로 목을 베어 죽었다. 또한 춘수를 해주에서 찾았는데, 와서 이렇게 말했다.
“채응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유유라는 이름을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임술년壬戌年에 달성령이 하인을 시켜 와서 채응규를 보고 ‘유유이구나.’라 고말했습니다.
백 씨도 또한 사람을 보내서 그런 뜻을 전해왔습니다.
못(池)
계해년癸亥年 봄에 채응규가 한양에 가서 3달을 머물다가 돌아와서는,
문득 스스로 유유라고 했습니다. 이해 겨울에 채응규가 첩과 함께 한양에 갈 때에
‘달성령이 우리를 맞아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한양에 도착하니 달성령 부자가 과연 수차례 와서 끊임 없이유유에 대해 물었습니다.
채응규가 이 때문에 삼이三伊와 백 씨의 노비 및 달성령 부자 등이 말한 것을 외우게 되었습니다.
그 외운 것에 백 씨 본가 한 집안의 일이 모두 다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옷가지도 싸 왔는데, 이때 어떤 사람이 열어보았고, 달성령 또한 몰래,
‘네가 스스로 유유라고 말해라. 나 또한 유유라고 말을 할 것이다. 누가 능히 구별할 수 있겠는가?
만에 하나라도 백 씨가 보고 의심한다면, 곧바로 도망치면 된다.’고 했습니다.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어떤 사람은 ‘물가의 보리밭을 유연이 감히 독차지 할까?’라는 말을 했고,
또 ‘내 아내와 집안의 재산을 유연이 홀로 차지할 수 있을까’라? 고 말을 했습니다.
하루는 식의 아들 경억이 와서 ‘심륭과 김백천이 의심하여 믿지 않아,
내일 심륭과 김백천을 우리 집에 오게 했다.
너는 또한 방문해서 식사할 때에 하인인 흔개欣介에게 밥상을 들고 들어오게 하라.
너는 흔개를 보면 곧바로 그를 가리키며 이 사람이 흔개인데, 예전에는나와 허여許與했는데,
형은 나를 잊었는가라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심륭 등에게 경억이시킨 대로 했더니, 앞서 의심이 얼음이 풀리듯 사라졌습니다.
대구로 돌아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문에 남편이 붙잡혔다 하니,
달성령이 승상 심통원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제가 본부의 관청에 보냈던 것까지 함께 보냈습니다.
박응천朴應川으로 하여금 또 하인과 말을 주게 했고,
심륭이 또한 그 친척 형에게 부탁해서 장악원掌樂院의 벼슬을 살게 해서 한 심복心腹을 얻었습니다. 저를 따라 대구에 도착했는데, 채응규가 박석朴石의 집에 구류되어 있었습니다.
3일이 지났을 때, 갑자기 밤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채응규가 일어나 보니편지를 들고 들어와 주위를 둘러보고는 편지를 주면서
‘내가 또한 이러한 계책을 마련했으니, 너는 빨리 돌아가거라.’라고 했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니, 달성령 집안의하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편지의 내용이 뭐냐고 물었더니, 편지 내용은 일이 이미 발각되었으니
빨라 도망가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제가 울면서, ‘당신이 도망가면 저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라고 물으니,
채응규는 저를 야단치면서 ‘두려워할 것 없네. 만약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하면,
당신은 다만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 될 걸세.’라고 했습니다.
그때 제가 용인현龍仁縣에 도착했는데,
여관집의 늙은 주모가 식의 아들 경억의 편지를전해 주었는데,
‘유연이 바야흐로 그 형을 죽였다는 것으로, 아버지인 식 또한 옥사를 당하고 있으니,
너는 마땅히 말이 같아야 한다. 죄를 면하는 것은 말을 같게 하느냐 다르게하느냐에 달려 있다.
’라고 했습니다. 옥사가 끝나고서는 저는 해서海西 지방에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녔습니다.”
이에 이 씨가 편지를 올려 식과 심륭 및 백 씨의 죄를 낱낱이 진술하면서,
법에 따라 논하기를 청하였다. 대관臺官 또한 유연을 국문鞠問할 때의
추관推官과 낭관郎官이 말했던것을 그대로 말했다. 그러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
이 일의 담담관은 유유를 그 아버지의 상에 달려가지 않은 죄를 물어
용강龍岡으로 유배보냈고, 식은 감옥에서 매 맞아 죽었고, 춘수는 목매어 죽었다.
이보다 앞서 유유가 바야흐로 감옥에 있을 때에,
조정의 논의에 “백 씨가 고향에 있으면서옥사를 멀리서 보는 것도 옳지 않다.”란 것이 있었다.
그래서 백 씨가 소문을 듣고 한양으로 오니,
유유가 감옥에서 나와 곧바로 백 씨가 우거하고 있던 곳으로 가서 그 자리에 서서 꾸짖어,
“네가 이전에는 채응규란 놈을 나로 알았고, 내 동생을 죽였구나.
뒷날 내가 유유가 아니라고는 말하지 말라.”라고 했다.
말을 마치고 옷깃을 떨치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백 씨는 “내 남편이다.
예전에도 나에게 상상도 못할 말을 하더니, 오늘 또 그렇게 말을 하는구나.”라고 했다.
유유가 용강으로 유배를 갔다가, 유배 기간이 다 차서 대구로 돌아왔고 돌아온 지 2년 후에 죽었다. 그때에도 백 씨는 오히려 근심 없이 지내고 있었다.
유유는 끝까지 백 씨와 개인적으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백 씨가 양자로 들인 춘수의 아들을 관가에 고소했다.
춘수의 아들 정貞과 백白은 채응규를 따라 대구로 가 백 씨 집안에서 지낸 지 이미 10년이었다.
유유의 옥사가 일어나자, 백 씨는 춘수의 두 아들 정과 백을 묶어서 관에 고소할 때,
“지금 들으니 진짜 유유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채응규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정과 백을 국문하기를 청했습니다.”라고 말을 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국문하지 않고 그냥 놓아 주었다.
임진왜란 이후에 재상 이원익李元翼이 금오문金虎門 밖에 집을 짓고
이 씨와 문을 서로이어 수레를 멈추고서, 그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서는
그 억울함에 마음 아파했다. 마침 임금께서 병이 들었을 때,
나와 함께 날마다 대궐로 들어가 생활을 같이했는데, 나를위해 말하고 또 말하기를
“말을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이 일이 없어지지 않기를 바라네.”라고 했다.
그래서 그 집안에 전해지는 것을 모두 취하여 속히 가져오게 하여 글을 짓게 하면서
“이일이 만약 글로 이루어지면, 지극히 원통한 일이지만 가히 씻을 수 있고,
관청의 교훈도세울 수 있을 것인데, 그대는 어찌 도모하지 아니하는가”?라고 했다.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민, 유연의 억울함도 슬프고,
백 씨에게 먼저 유유인지 확인하러 관가에 가게 하지 못한 것도 애석하고,
식이 끝내 바른 형벌을 받지 못한 것이 거듭 한스럽다.
당시에는 법망이 성글어서 심륭만이 그 법망에서 빠져나갔다.
그렇지만 불행 중에도다행스러운 일이 있으니,
윤선각尹先覺이나 이원익李元翼 같은 사람들이 유연의 일에 대해 앞 시대와 뒤 시대에
말하여 좌우가 되지 않았다면 유연에게 천리마를 따라갈 수 있는행운이 있었다고 한들 또한 어찌
당시에 드러나서 후대에 전해질 수 있었겠는가.
세상에서는 유유가 어질지 못한 자식으로 아버지를 버리고 도망갔으니
인륜을 버린 것이라고들 한다.
도망갔다가 어떻게 다시 오겠는가, 세상에 어찌 아버지 없는 나라가 있겠는가.
그래서 옛날에는 어진 자식은 아버지의 명에 따라 죽었었다.
주자朱子는 “의리상 마땅히 도망가서 피해야 했다면, 이것도 예를 갖춘 것이다.”라고 했으니,
설령 유유가 어찌할 수가 없어서 아버지를 버리고 멀리 갔다고 하지만,
진공자晉公子가 진秦나라에 있을 때에, 천하에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어찌 그냥 지나쳐서 자취를 감추고 실마리를 숨겨서 동생을 억울하게 죽게 했던가.
권 모權某가 그대를 방문하여 일찍이 “젊었을 때에도 여러 번 유연을 혼인하는 자리에서 만났는데, 키가 작으나 정신은 굳세고 강개함을 좋아했다.”고 했다.
재앙에 걸린 이후에 유연의 처는 마음을 다해 기도하고 고하면서,
흰 머리가 될 때까지 하루같이 그 일을 반복했다.
그래서 종친들은“ 참혹한 재앙에 잘 대처했다”.라고 했다.
만력萬曆 35년 정미丁未에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오성부원군鼇城府院君이항복李恒福 짓다.
벗곷(梨花)
유연은 교남嶠南의 한 선비이다.
살고 죽는 것에 있어 세상에 어떤 것에는 무게를 두고 어떤 것은 가볍게 여기겠는가.
그러나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공이 유연의 행적이 사라지지 않기를 백사 이항복에게 부탁했으며, 백사 이항복 공은 유연의 행적을 가려 전기傳記를 지었다.
생각건대, 유연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했다면, 예로부터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오직 유연만을 거론하겠는가? 그런데 유연만을 언급한 것은 어째서인가?
아, 유연은 절개 있는 선비이다.
처음에는 채응규의 일에 의심할 만한 점이 많았다.
그런데 식의 편지가 두 번 세 번 연거푸 와서 진짜 그 사람이 유연이라고 생각을 했다면,
유연은 한양에 갔을 때, 과연 자신의 형이라 생각해서 반드시 서로 손을 부여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평소에 알지 못한, 다른 사람이 한 자리에 있었는데,
그 사람은 갑자기 자신이 형이라고 하면서 유연을 동생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유연은 그때 무슨 마음으로 그 사람을 묶어서 관가에 보내어, 법의 심판을 받게 했는가.
강직하고 정직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어찌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유연은 이에 정신을 가다듬고 이상한 점을 드러내지않고 그와 더불어 고향에 돌아왔으니,
어찌 고향까지 오는 동안 아무런 생각이 없었겠는가.
아마도 자신이 형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취하고자 한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이것은인륜人倫과 관계된 일이라, 자신이 한 번 남의 입에 오르는 고난과 어려움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팔거八에 도착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쳐다보고 여러 사람들의 객관적인 판단이 있었다.
유유의 부인인 백 씨가 시집올 때 데리고 왔던 노비가 그들을 꾸짖자,
유연의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졌다면, 얼마나 많은 날 분한 마음을 쌓아왔던 것일까.
백 씨로 하여금 직접 가서 유유인지 확인하게 했다면,
곧바로 자신의 마음에 의혹이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을 묶어 관가에 고발하여,
생각하기도 싫은 재앙에 걸려들게 되었으니,
이것은 주위의 변화하는 기미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사람들에게 경계가 될 만하다.
그러나 이 억울한 옥사가 어찌 유연 한 사람에게만 관련된 것이겠는가.
무릇 형을 죽인다는 것은 천고千古의 극악極惡한 짓이요,
형벌로 처벌하는 것은 한 시대의 공정한 법 집행이다. 살펴보건대,
한 시대의 공정한 법 집행으로 천고의 극악한 짓을 한 사람을 처벌하는데,
실로 그 사이에 조금의 개인적인 마음이 간여하게 된다면,
이것이 나라에서 관청을 설치하고 법을 만든 의도이겠는가.
바야흐로 어두운 밤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할 때에,
채응규와 그의 첩 춘수가 함께 도망쳐흔적을 감추었다.
그러나 이미 춘수가 잡혔다면 그 일을 꼼꼼히 살펴보고, 일의 진실을 알았어야 하는데,
도리어 손을 뒤집듯 그 일의 진실을 거꾸로 만들고 말았다.
하물며 또한백 씨가 유연이 그 형을 죽이고 그 흔적까지 감추었다고 하면서,
유연을 고소까지 했다면,마땅히 그 흔적을 찾는 것은 오직 춘수에게 달려 있었던 것이다.
만약 춘수가 진실로 채응규의 자취를 알지 못했고,
유연이 형을 죽인 것으로 의심했다면 남편을 위해 억울함을 풀어주려는 마음이 생겼을 것인데,
어찌하여 백 씨보다 뒤에 와서 밤중에 어둠을 틈 타 도망을 갔단 말인가.
춘수를 잡아다가 실상을 조사해야 한다는 것은 어린 아이들도 마땅히 아는 것이리라.
그리고 감사와 수령도 이러한 생각을 하지 못했으니,
어찌 옥사를 다스리는데, 이같이 어리석은 생각을 갖고 있었단 말인가.
하물며 삼성三省이 추국할 때에도, 그것을 지켜본 당랑堂郞과 하인들이 많았는데도,
오히려 쉽게 흰색을 검은색으로 바꾸어 버리고, 옥을 돌로 둔갑시켜,
억지로 옥사를 만들어 그 당시에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손놀림을 멋대로 집행했다.
조정과 관청도 도리어 재물을 탐내어 옥사를 일으킨 자에게 희롱당한 꼴이 되었으니 슬프구나.
하늘의 도가 바뀌었지만, 나라의 여론與論은 끊이질 않았다.
마침내 죄인이 억울하게 죽은 것임을 알고 16년이나 지난 뒤에 그 억울함을 씻어 주었다.
그러나 식은 곤장을 맞다죽었고, 심륭은 요행히 형벌에서 벗어났으니,
이 두 사람에 대해서 뜻 있는 선비가 분함을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한다.
“백 씨의 죄는 식과 심륭에게 이용당한 데에 있다. 어째서 그런가?
식과 심륭의 계책은 재산을 다투는 데서 나왔다. 그러나 백 씨와 관련된 일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다. 한 남자의부인으로 하늘에서 부여받은 일에 있어 조금이라도 정성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이것은 인륜人倫을 어긴 죄인이 된다.
하물며 고소하여 거짓말을 했으며 하늘이 주신 동생을억울하게 죽게 했으니,
백 씨의 죄는 재물을 다투고 사람을 속였다는 데에만 그치지 않을것이다.
채응규는 바닷가에 살면서 스스로 유유가 아니라고 하면서 편지를 써서 돌려보냈는데,
백 씨가 이 편지를 받았으니, 어찌 부인이 되어 평소에 전혀 알지 못한 사람과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단 말인가. 만약 채응규가 보낸 편지를 받고, 그 사람이 유유라고 생각했다면,
그 사람을 묶어 관가에 끌고 갔을 때에 진실로 곧바로 관가에 가서 그 사람을 보고 자신의
남편인지 분별하는 데도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거꾸로 옥사를 멀리서 바라보며걱정하지도 않았었다.
감사가 직접 와서 살펴보라고 했을 때에도 오히려 이를 거절하고가지 않으면서
‘집안사람들과 마을 사람들이 모두 유유가 아니라고 하는데,
내가 선비의자식으로 어찌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얼굴을 마주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으니, 도대체 어떤 의도가 있었단 말인가.
묶이어 감옥에 있을 때라도 가서 남편인지확인해 보았다면 재앙을 면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얼굴을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으면서,
그 사람이 도망친 이후에 오히려 상복喪服을 입고 억울함을 하소연하면서 반드시
그 원수를 갚고자 한 것은 또한 어떠한 마음에서 나온것인가?”
이 옥사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반드시 “유연의 죽음은,
식이 재물을 다투려는 음흉한 계략에서 시작되었고, 채응규의 간악함에서 이루어졌으며,
벼슬아치의 손에서 결판났다.”고들 한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이 일은 온전히 백 씨 때문이다.
진실로 백 씨는 채응규에게서 편지를 받고 하지 말아야할 의심을 쌓아 두지 말았어야 했다.
선비의 자식이라고 하면서 마땅히 남편인지 분별해야 할 때에 분별해야 했으며,
억지로 말도 안 되는 상복을 입으면서,
죄 없는 동생을 죽음에 빠트리려고 의도하지 않았다면 식의 모략과 채응규의 간사함이
어떻게 시행될 수 있었겠는가? 또한 벼슬아치가 장차 어떻게 처리했겠는가?
그래서 ‘유연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은 마땅히 백 씨의 죄를 밝히는 데 있다.’라고 한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백 씨에 대해또 무어라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유유가 집을 나가고 5년이 지나 그 아버지 유예원이 죽었다.
해를 넘긴 이듬해 임술년壬戌年에 식이 편지를 보내 채응규가 유유라고 말을 처음 꺼
냈고, 다음 해인 계해년癸亥年에 식이 채응규를 데리고 와서 유유라고 했다.
그 사이 세월이 불과 6~7년이고, 다른 사람을 가리켜 동생에게는 형이라고 했고
부인에게는 남편이라고 했다. 또 한 시대의 눈과 귀를 가리어 끝내 옥사에 얽어매어,
극단적인 형벌로 사람을처벌했으니, 어떻게 이런 일이 세상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백사 이항복 공이 유연에 대해 전기傳記를 쓴 것은
그 의도가 유연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세상의 변고變故가 끝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것이리라.
또 윤선각尹先覺과 이원익李元翼이 앞 시대와 뒤 시대에 유연의 일에 대해 말하여 다행히
당시에 드러나게 되어, 그 사이에 심오한 뜻을 덧붙인 것이다.
뒷날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옥사를 판결하는 데 있어 겉으로 드러난 말 밖의 뜻을 찾게 된다면,
조심하면서 세밀하고 신중하게 처리하는 작은 효험이 있을 것이다” .
.... 우하영의 천일록 - 잡록 하 중에서 ...
첫댓글 감사합니다. 귀중한 자료글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