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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4-20회
진부령-DMZ트레일(진부령초소-칠절봉입구-적계삼거리-둥글봉쉼터-종점)-향로봉
20221030
1. 진부령 가는 길
향로봉 탐방 버스가 잠실역에서 새벽 5시에 출발하기에 전날 밤 일찍 잠들었다. 그러나 향로봉에 오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떠 깊이 잠들지 못했다. 새벽 3시 30분 잠에서 깨어나 준비를 마치고 4시 20분 집을 나섰다. 호출한 택시를 타고 잠실역에 도착하니 4시 45분, 버스에 오르며 안도한다. 늦잠을 자게 되어 버스를 놓치게 되지 않을까, 택시가 잡히지 않아 출발 시각을 어길까, 걱정한 것이 말끔하게 해결되어 상쾌한 마음으로 지정좌석 23번에 앉았다. 버스는 5시를 조금 넘겨 출발한다. 천호동과 상일동을 지나서 버스가 양양고속도로로 들어섰는지도 모르고, 잠이 몰려온다. 긴장이 풀어지고 간밤에 잠을 깊이 이루지 못한 때문인지 잠이 몰려왔지만 깊이 잠들지 못했다. 6시 37분쯤 홍천 화양강휴게소에 버스가 멈추어 잠시 휴식을 취했다. 휴게소 뒤편에서 화양강(홍천강)을 살피니 아침 안개가 그득히 피어나 마을과 주변의 산에 수묵화를 그린다. 그윽하고 신비한 수묵화 풍경은 평화롭다. 평화, 우리 모두가 소망하는 평화, 그 평화의 풍경이 화양강을 흘러가고 있다.
7시 45분 버스는 진부령미술관 앞에 도착했다. 들뜬 마음이 자꾸 설렌다.
2. 향로봉 탐방
진부령미술관 옆에서 육군 장교 임 소령님의 안보교육과 당부 말씀을 들은 뒤 7시 55분 출발, 진부령초소로 향한다. 진부령초소(향로봉1초소) 앞에 DMZ트레일 이정목과 DMZ트레일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DMZ트레일 종점까지는 12.2km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4.3km를 더 걸어야, 그리고 그리던 향로봉에 도착한다. 마음이 흥분되어 정신이 혼란스럽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대원들의 꼬리에 붙어서 앞으로 내닫기 시작한다.
진부령초소-추모쉼터-전망쉼터-칠절봉 입구-적계삼거리-故김칠섭 중령 추모비-바다쉼터-둥글봉쉼터-DMZ트레일 종점
원래 현 위치에서부터 백두대간의 끝자락인 향로봉 산 중턱에 위치한 칠절봉(1,172m)의 구간을 '칠절로'로 명명하여 불러오다가, 2004년 11월 19일 새벽 짙은 안개 속에서 고압선에 감전된 부하의 생명을 구하고, 장렬히 산화한 을지부대 향로봉대대 故김칠섭 중령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살신성인의 투철한 군인정신을 본받기 위해 舊 칠절로 구간을 故김칠섭 중령이 산화한 지점까지 '칠섭로'로 명명하게 되었습니다.
칠절봉 잔서리가 온 산야를 뒤덮은 새벽의 짙은 안개 속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있던 부하를 구하고 유명을 달리한 을지용사 김칠섭! 고인의 자랑스런 이름은 우리 을지부대원 모두의 가슴 속에 활활 타오르는 영원의 불꽃으로 을지부대 역사와 함께 할 것입니다.
2005. 6. 6. 을지부대장 소장 김운택
뒷면에 '산사랑&숲사랑'이 적혀 있다. 이곳에서 추모쉼터 2.9km, 서화리초소 16.4km이다.
마산에서 진부령으로 이어진 백두대간 산줄기가 진부령에서 왼쪽으로 이어지고 있고, 그 아래 DMZ트레일이 조성되어 있다.
故정진구 병장은 국방부 제1321부대로 전입 후 향로봉 근무지인 제7928부대로 보직되어 근무하였으며 1989.3.3. 작전근무(도보기동) 수행 중에 칠섭로에서 탈진과 설화로 인하여 순직하였습니다.
故정진구 병장님이 남긴호국·애국·순국 정신을 보여준 고인의 넋을 기르기 위해서 추모비를 세우다.
왼쪽에 전망쉼터가 있으며 앞쪽으로 백두대간 마루금이 이어지고 있다.
전망쉼터에 오르고 싶지만 맨 꼬리에서 허겁지겁 따라가는 꼴이라서 전망쉼터를 그냥 통과한다.
칠절봉 2.8km라고 적혀 있지만 실제로는 1km 정도 떨어져 있는 듯. 백두대간은 칠절봉을 거쳐 향로봉으로 이어진다.
칠절봉 입구를 거쳐 DMZ트레일을 구불구불 돌아오른다.
백두대간 마루금은 왼쪽 봉우리에서 칠절봉으로 이어지는 듯.
DMZ트레일 진부령초소 7.9km 지점으로, DMZ트레일 종점까지 4.3km가 남아 있다. 왼쪽으로는 서화리초소 8.5km 거리이다.
진부령초소-적계삼거리는 칠섭로, 적계삼거리-향로봉은 향로로라고 명명되어 있다.
그 아래 고성군 간성읍 흘리마을이 보인다.
중앙에 솟은 산봉이 칠절봉인 듯.
DMZ트레일 종점까지 2.3km가 남아 있다.
故김칠섭 중령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앞에 보이는 산봉이 둥글봉일까?
살신성인의 귀감 故김칠섭 중령의 숭고한 넋을 기리며
故김칠섭 중령님께서는 육군 을지부대 예하 향로봉대대 작전장교로서 2004년 11월 19일 안개가 짙은 새벽녘에 대대전술 훈련 철수를 위해 무전기를 해체하다 고압선에 감전된 부하를 끌어안아 생명을 구하시고 당신의 안위를 돌볼 틈 없이 장렬히 산화하셨습니다. 전우의 고귀한 생명을 내 몸보다 아끼신 살신성인의 투철한 군인정신은 우리 을지부대 용사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영원토록 자랑스런 을지부대 길칠섭 중령님! 당신의 이름을 떠올리며 숭고한 영혼을 기리기 위해 을지부대 전장병의 정성과 마음을 모아 이 추모비를 세웁니다.
2005년 6월 6일 을지부대 장병 일동
앞에 보이는 산봉이 둥글봉인 듯.
바다쉼터에 오르면 동해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는데, 대원들을 따라가기 바쁘고 안개 때문에 그냥 통과한다.
왼쪽 뒤 구름 속에 숨은 마산봉에서 진부령으로 내려온 백두대간이 오른쪽 뒤 칠절봉으로 이어지는 것이라 가늠한다.
적계삼거리와 故김칠섭 중령 추모비 있는 곳이 가늠된다. 왼쪽 뒤 구름 속에 설악산 대청봉 능선을 가늠한다.
사스래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둥글봉쉼터 앞으로 향한다. 앞쪽에 향로봉을 가늠한다.
DMZ트레일 종점을 지나 짙은 안개가 몰려오는 향로로를 따라간다.
해발 1,296m의 향로봉은 함경남도와 강원도 도계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금강산, 국사봉, 설악산, 오대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허리를 이루는 산이다. 서쪽으로 큰까치봉, 작은까치봉, 건봉산, 향로봉, 둥글봉, 칠절봉, 매봉산 등이 향로봉과 연봉을 이루고 있고, 향로봉이 그 주봉이다. 인제에서 진부령을 넘어 간성에 이르는 국도 서쪽이 향로봉의 맥으로 산세가 험한 산중의 산.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은 몽우내골, 제추골, 성황골, 암자골 등의 계곡을 이루고, 북쪽으로 흐르는 지류는 북천北川이 되어 동해로 흘러든다. 또 서쪽으로 흘러 동해로 들어가는 남강南江의 수원水源이 되는 계류와 남쪽으로 북한강 수원의 하나가 되는 계류로 각각 흘러내린다.
향로봉은 남한에서 가장 추운 지대로 8월 평균기온은 17.5℃이며, 2월 평균기온은 가장 낮아 영하14.5℃이나 절대최저기온은 영하20℃ 이하이다. 11월~4월까지 눈이 내리는데 남한에서 대표적으로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이다. 식물분포는 인접한 설악산과 비슷하며 정상부는 주목, 신갈나무, 갈참나무 등이 우세하다. 신갈나무의 군락이 형성된 곳은 도토리를 주식으로 하는 곰과 멧돼지의 서식처로 유명하다. 이 일대는 깃대종 산양, 멧돼지, 노루, 오소리, 너구리, 족제비, 하늘다람쥐 등이 관찰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산정 일대는 민간인통제선 북방에 속하는 지역이며 최전선의 요지이다. 부근에 설악산국립공원, 진부령 알프스스키장, 통일전망대 등 관광명소들이 가까운 곳에 있으나, 교통이 불편하고 군사상의 요충지이므로 일반인이 접근하기 힘들다.
향로봉 전투는 한국전쟁 당시 양양과 간성을 탈환하고 계속 북진 중에 있던 아군 수도사단과 11사단이 대곡리에 지휘소를 두고 아군 주저항선상의 요지인 향로봉과 둥글봉을 공격하여 인제-고성 간 도로를 확보하는 한편, 중동부전선에서 퇴각하는 북한군과 중공군의 퇴각을 엄호하려 했던 북한군 13사단 주력 부대 간에 벌어졌던 치열한 전투현장이다. 그 후 아군은 만 2년간 89회에 걸쳐 되풀이된 적의 집요한 공격을 끝내 물리치고 이 고지를 사수했다.
-고성문화원 이선국
아! 향로봉 남강은 옛산 옛물이로되 눈보라 내리치던 처참한 싸움터에 쓰러진 전우들의 모습은 간 곳이 없도다.
- 제3군단장 소장 오덕준
여기 태백준령에 우뚝 선 향로봉, 통일을 염원하며 관망대를 세우다.
- 1988년 12월 26일 보병제12사단장 소장 박세환, 제52연대장 대령 홍무일, 제1대대장 중령 오만수
새 천년을 맞이하여 을지부대 전 장병은 이곳 향로봉에서 조국수호를 다짐하며
- 2000년 1월 1일 사단장 소장 박승춘
11시 48분 향로봉에서 출발하여 하산한다.
적계삼거리-진부령초소는 故김칠섭 중령을 기리는 칠섭로라고 명명되고 있다.
왼쪽은 DMZ트레일 인제군 서화리초소 방향이다.
고성군 간성읍 진부리 일대는 산림유전자 보호구역이다.
칠절봉 2.8km라고 적혀 있지만 실제는 1km 거리라고 한다.
故정진구 병장을 추모하는 추모비가 추모쉼터에 새로이 세워져 있다.
왼쪽이 백두대간 마루금이다.
왼쪽의 백두대간 줄기는 진부령을 거쳐 마산봉으로 이어진다.
맨 뒤에 백두대간 마산봉 줄기, 그 앞에 백두대간 진부령 산줄기, 그 아래 흘리길, 그 아래가 진부령로이다.
3. 진부령
향로봉 탐방을 마치고 진부령미술관 앞으로 나왔다. 백두대간 진부령 표석이 있는 곳까지 가서 백두대간 진부령-향로봉 구간 탐방을 마치기로 한다. 그리고 진부령미술관 오른쪽 언덕에 세워져 있는 진부령 표석과 향로봉지구 전투전적비 그리고 택당 이식의 진부령유별시비를 다시 만났다. 그 위 진부령전망대에서 내려보는 진부령 고갯길이 꼬불꼬불 아름답다. 단풍은 제철을 지나 말라가고 있어 슬픈 여운이 뚝뚝 떨어진다. 진부령로로 내려와 마산봉으로 이어지는 흘리길 갈림목에서 일정을 마친다.
진부령 미술관 오른쪽 언덕에 진부령 표석, 진부령로 아래에 백두대간 진부령 표석이 세워져 있다.
고성지방에서 영서쪽으로 통하는 관문은 진부령(陳富領)이다. 진부령은 수성지 기록에 의하면, "영서로 통하는 소로가 매우 험하고 좁아서 1632년(인조10년) 관에서 모집한 역승(役僧)이 처음 개통한 고개인데, 통행이 적고 비교적 순탄한 길이어서 통행이 용이하나 겨울에는 눈으로 길이 막힌다."라고 적혀있다. 표고는 520m로 굉장히 높은 고개는 아니지만 진부령의 가을은 온 산과 계곡이 불이 붙은 듯 온통 붉게 불든 단풍으로 유명하다.
- 고성문화원
이곳에 고성군 간성읍 진부리 마을이 있었으나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진부령은 오랜 옛날 동서를 잇는 유일한 오솔길로 보부상이 넘나들던 길로서 기록에 의하면 1631년 간성현감 택당 이식께서 우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개설하였다고 함. 그후 1930년에 차량 1대가 겨우 넘을 수 있는 비포장 지방도로로 보수관리하여 오다가 1981년 국고 46호선으로 승격, 6년여 공사 끝에 1987년 9월 20일 2차선 도로로 확포장되었으며 1989년 영상(嶺上) 도로 측면에 위치한 향로봉지구 전투 전적비를 이전하면서 이 표지석을 세움.
1989년 8월 18일 고성군수
1957년 7월 15일 간성읍 흘리 산1-81번지에 6.25 당시 향로봉지구 전투를 기리는 전적비를 설치하였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전적비가 노후됨에 따라 1973년 9월 29일 최초의 위치에 다시 건립하였으나, 진부령도로 확포장으로 교통에 불편을 주어 1989년 8월 이 자리에 이전보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맹호 수도사단 용사들은 단기 4284년 5월 7일부터 동년 6월 9일까지에 걸쳐 양양과 간성을 탈환하고 계속하여 설악산으로 진격하였으나 패주하던 적은 중동부 요충지인 인제를 방비하기 위하여 설악산과 향로봉 일대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괴뢰 제5군단 예하 제 11, 12, 13사단을 증원하여 우리 수도사단 및 제11사단에 89회라는 희유의 반격을 기하여 왔었으나 도처에서 연전연승을 자랑하는 용사들은 그 반격을 격퇴 분쇄하고 설악산 및 향로봉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는 오늘의 광범위한 중동부일대를 수복하는데 혁혁한 공훈이 되었으며, 전 장병들의 영웅적인 전투는 높이 찬양되었다.
이 지구에서 장렬하게 호국의 신으로 산화한 전몰장병의 명복을 빌며 자손만대에 길이 그 위훈을 전하고자 여기에 전적비를 세우고 이를 기념한다.
단기 4290년 7월 15일 제3군단 세움
西行正値北風時(서행정치북풍시) 한양으로 승차되어 가는 길 북풍이 불고
雪嶺參天鳥道危(설령참천조도위) 눈 덮이어 음산한 영마루 새도 넘기 험한 길
自是人情傷惜別(자시인정상석별) 이제 인정에 마음 아픈 이별을 하네.
君來饑我我留詩(군래기아아유시) 그대들 배 주리며 따라왔는데 나는 이별시를 남기네.
문정공(文靖公) 이식(李植) 선생의 자(字)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 또는 택구거사(擇癯居士)요, 조선조 사대(四大) 문장가이고 한문학의 태두이며 덕수(德水)인이다. 광해2년 문과에 급제하여 많은 화관을 두루 거쳐 형조, 예조, 이조판서에 오르고 대제학을 네 번 역심하였으며, 선조실록 개수와 광해일기를 수정하여 영의정에 특 증(贈)되고 여주 기천서원, 경성 화곡서원, 지동 부연사에 배향되었고 택당집 외에 많은 저서를 저술하였다. 1631년(인조9년) 8월에 대사간 재임시 인조대왕의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숭함이 고례가 아님을 주장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서 간성현감으로 좌천되어 임지에 부임하여 낙후된 소읍이라고 소홀히하지 아니하고 감사에게 청하여 관아와 사원을 보수하고 자혜성경으로 피폐된 민심을 수습하고 향학을 장려하기 위하여 양사재(養士齋)를 창건하고 유생을 모집하여 강학에 힘쓰는 한편 개간사업을 장려하여 소득증대에 기여했다. 당시 진부령의 도로는 한사람씩 다니는 소로길마저도 유실되어 통행이 두절되는 등 통행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승려와 군민을 동원하여 우마차가 다니는 길을 확장하여 내륙지방과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므로써, 산업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간성지(杆城誌)를 발간하여 인구현황, 행정구역을 알리는 등 많은 자취를 남기였다. 1633(인조11년) 1월, 부제학을 제수 받아 떠날 때에 간성 군민들은 치정을 못잊어 눈 덮인 진부령까지 따라와 전송하니 선생은 인정에 못잊어 유별시를 남기였다. 조정에 돌아가서 영동치정의 폐단인 태강실신(㑀講失信), 전결자각 /(田結自覺), 역졸급(驛卒給田), 여정도산(餘丁逃散)을 상소하여 폐단을 없게 하였으며, 유생들이 조정에 출사를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선생이 떠난 후 군민들은 거사비를 세우고 경택제를 지어 강학을 하였으며, 선생이 하세하자 군민들은 은공을 못잊어 해물을 취합하여 부의하고 부인이 하세할 때도 이와 같이 하였다. 이에 360여 년이 지난 후 고성군청과 고성문화원에서는 선정사역(善政史歷)과 치자와 치민의 정을 잊지 못하여 진부령 개설사 및 당시 군민의 정성이 담긴 유별시와 기문을 돌에 새기어 후대에 전하고자 이 비를 세우노라.
2006년(丙戌) 10월 24일 고성군수 咸炯仇, 고성군문화원장 黃鍊仁
금강산 건봉사 가는 고갯길, 곱게 물든 단풍이 말라가고 있다.
진부령(陳富嶺)은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와 고성군 간성읍 흘리를 잇는 고개. 도로명은 진부령로. 광복 후부터 6.25 전쟁 전까지는 북한으로 넘어갔으나, 6.25 전쟁 이후 남한에서 수복하였다. 모 공병단에서 확장 공사를 하였으며,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그 건설공로를 치하하여 세운 비석이 있다.
해발고도는 520m로, 태백산맥을 넘는 강원도 고개들 중 가장 낮다. 과거 미시령터널 개통 전에는 폭우나 폭설이 왔다 하면 미시령이 가장 먼저 통제되고, 한계령이 통제되어도 진부령은 통제가 안되는 경우가 많았다. 인근 군부대가 눈이 오기 시작하면 항상 제설을 하기 때문이다. 주변에 군부대가 많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미시령에 터널이 생기기 전에는 폭우 또는 폭설로 한계령, 미시령이 다 통제 당할 때 가장 마지막까지 차가 다닐 수 있는 고갯길이었다. 물론 여기까지 통제 당하면 진짜 폭설 중에 최악의 폭설이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또한 민간인이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고 자동차 도로로 된 고개 중 가장 북쪽에 있다.
인제와 고성의 경계라고는 하지만, 정확한 군 경계는 진부령 정상이 아니라 남쪽에 있는 군계교다. 진부령 정상에 있는 흘리가 고성군 간성읍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 경계 자체가 애매한 편이라 정상에 있는 진부령미술관은 인제군 소속이다. 평창군 진부면과는 상관없고, 흘리 위에 간성읍 진부리가 있다.
-나무위키
4.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피어린 40리 향로봉길
향로봉 전투의 개략을 살펴 보면 이렇다. "향로봉 전투는 국군이 1951년 5월 7일부터 6월 9일에 걸쳐 양양과 간성을 탈환하고 계속하여 설악산으로 진격하였으나 패주하던 적은 중동부 요충지인 인제를 방비하기 위하여 설악산과 향로봉 일대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국군에 반격을 기하였다. 이에 아군 수도사단과 11사단이 대곡리에 지휘소를 두고 아군 주저항선상의 요지인 향로봉과 둥글봉을 공격하여 인제-고성 간 도로를 확보하는 한편, 중동부전선에서 퇴각하는 북한군과 중공군의 퇴각을 엄호하려 했던 북한군 13사단 주력 부대 간에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951년 8월 18일부터 1951년 8월 27일까지 대한민국 국군과 미군이 향로봉 북쪽의 924고지(향로봉 서북쪽 7km)와 884고지(924고지 북쪽 3km)를 탈취하는 전투를 벌여 수도사단은 23일 924고지를 차지하였고, 제11사단은 4번에 걸친 뺏고 빼앗기는 격전 끝에 8월 27일 884고지 일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그후 국군은 2년간 89회에 걸쳐 되풀이된 적의 집요한 공격을 끝내 물리치고 이 고지를 사수했다." 향로봉 전투에서 수많은 국군과 적군의 사상자들이 흘린 피가 흘러서 향로봉 능선을 피의 능선이라 이른다고 한다.
이런 비극의 역사를 지닌 향로봉으로 간다. 피비린내의 향로봉 지구 백두대간 아래를 따라간다. 백두대간 마루금 아래로 닦인 전술도로(작전도로)를 DMZ트레일이라 명명하여 이 트레일을 따라서 향로봉으로 오른다. 곳곳에 쉼터가 마련되어 있고, 국군 병사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출발할 때는 날씨가 가을 날씨의 전형처럼 쾌청하였다. 날씨가 쾌청하니 피어린 능선의 아픔을 밀어내고 마음이 덩실거렸다. 멀리 동남쪽으로 마산봉과 병풍바위봉이 구름 속에서 손짓한다. 그 서남쪽으로 구름 속에 가린 설악산 대청봉 능선을 어림한다. 우리 국토의 아름다운 산줄기가 향로봉 지구를 감싸고 있다.
단풍은 시기를 지나 말라가고 있고 가을 꽃들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미국쑥부쟁이 꽃들이 몇 곳에서 하얗게 빛날 뿐 다른 꽃들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에 팥배나무 열매들이 나무들 사이에서 붉은 빛을 곱게 빛내고 있다. 피의 능선에서는 저 고운 빛도 핏빛처럼 보이는 것만 같다. DMZ트레일은 진부령초소에서 故김칠섭 중령 추모비가 있는 곳까지를 칠섭로라 이르고, 그곳에서 향로봉에 이르는 길은 향로로라 이른다. 故김칠섭 중령은 향로봉대대 작전장교로, 군사작전 훈련을 끝내고 안개가 짙은 새벽녘에 무전기를 해체하다 고압선에 감전된 부하의 생명을 구하고 자신은 장렬히 산화한 살신성인의 군인이라고 추모비에 적혀 있다. 추모비가 세워진 곳에서 사고가 발생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칠절로라 일컬어지던 길을 김칠섭 중령의 투철한 군인정신을 기리는 칠섭로라고 명명하였다고 한다.
선두 대원들이 쫓기듯이 바삐 걷는다. 앞서서 빠르게 걸으니 뒤를 따라가는 대원들은 연쇄적으로 빨라질 수밖에 없다. 맨 꼬리를 따라가는 탐방객도 뒤처지지 않으려고 온힘을 쏟는다. 그러다 보니, 두리번거리며 살피고, 주변 지형을 익히고 전망하는 즐거움을 온전하게 느끼지 못할 뿐더러 들러보고 싶은 곳에서 잠깐의 휴식도 취할 수 없다. DMZ트레일에는 강진구 병장의 추모비가 있는 추모쉼터, 전망쉼터, 적계삼거리쉼터, 향로봉쉼터, 바다쉼터, 둥글봉쉼터 등의 여러 쉼터가 조성되어 있는데 그들 중에서 전망쉼터와 바다쉼터에 올라보고 싶었다. 전망쉼터에서는 분명히 아름다운 풍경을 전망할 수 있을 것이고, 바다쉼터에서는 동해 바다를 전망할 수 있을 것이다. 안개가 피어오르고 구름이 일어나고 있어 투명한 전망을 기대할 수 없었지만 두 곳에 올라 쉼과 전망을 즐길 여유도 없이 헉헉거리며 앞선 대원들을 따가기에 급급했던 것이 지금도 아쉽다.
사스래나무가 군락을 이룬 둥글봉 아래를 지나면 둥글봉쉼터, 그 앞에서 선명하지 않지만 향로봉이 보인다. 하얀 색 건물은 어디서나 향로봉의 표지가 되어준다. 설악산에서 그 하얀 색 건물이 있는 향로봉을 그리움으로 가늠하였는데, 이제 그 하얀 색 건물에 가까이 다가왔다. 언제나 그리움으로 가슴을 물들이던 향로봉의 하얀색 건물, 그곳이 저기 숨어 있다. 보물이 숨겨진 비밀의 숲으로 다가가듯 가슴에 물결을 일으키며 DMZ트레일 종점을 지났다.
민통선을 통과하여 안개 속을 걸어 하얀 색 건물로 바싹 다가섰다. 맑은 날 설악산에서 그리고 병풍바위봉에서 보던, 해맑은 그 빛이 아니라 잿빛의 거대한 둥근 공이 공중에 떠있다. 철조망 너머로 높이 솟은 거대한 잿빛 공을 철조망 바깥에서 올려본다. 안개비가 내리고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는 듯 가슴이 떨린다. 누군가 등을 떠미는 듯 나는 쫓기듯 그리움의 흰색 건물을 벗어나서 향로봉 헬기장에 올라와 있다.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리운 마음의 하얀 등불이 무서움으로 타오르는 것 같았다. 내가 어디에 있는가? 그리움으로 동경하고 애타게 북녘 백두대간을 잇고자 하는 그 향로봉에 오지 않았는가. 나는 향로봉 정상으로 올라갔다.
방금 전까지 가슴을 무겁게 억눌렀던 무서운 것들이 흩어졌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향로봉의 향로 조형물이 희부연하다. 진부령초소에서 이곳까지 40리의 길, 피어린 40리 향로봉 길을 걸어 향로봉 정상에 섰다. 피어린 능선의 정상에서 승전의 환호가 울려퍼지는 듯, 승전의 환희 속에 비가가 솟아오르는 듯. 이곳에서 북녘으로 더 이상 갈 수가 없다. 이은상은 고성 명호리 휴전선 마지막 지점에서 휴전선 철조망 마지막 쇠말뚝을 붙들고서 이렇게 절규했다. "길이 끝났다네 더 못간다네 병정은 총 들고 앞길을 막네/ 저리 비키오 말뚝을 뽑고 이대로 북으로 더 가겠소/ 바닷가 모래 위에 주저앉아 파도도 울고 나도 울고."(이은상의 '피어린 육백리' 중에서) 백두대간 남쪽 최북단 향로봉에서 나는 이렇게 절규하지도 않았고, 외마디 소리도 지르지 않았다. 오직 백두대간 휴전선 남쪽의 최북단에 서보았다는 성취감에 가슴이 벅찼으며, 짙은 운무에 덮인 향로봉 너머의 북쪽 백두대간을 이어서 금강산을 넘어 백두산 장군봉까지 갈 수 있는 평화와 통일의 그날이 어서 다가오기를 간절히 바랐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