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양양소출생, 거주지:
전주 양양소-고산
운동-진산
장구동- 고산
저구리, 처형지
: 전주
풍남문밖.
1801년 9.17(양력
10.24). 능지처사,
윤지충의 동생,
매약(賣藥)으로
생계 』
(한국천주교회사 2, 한국교회사연구소, 100~101쪽)
『尹持憲 프란치스코는
우리 최초의 순교자들 중 하나인 尹持忠
바오로의 아우였다.
형이 죽은 다음 그는 고향을 떠나 高山 고을 저구리로
가서 살며 진심으로 천주교를 계속 신봉하였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자기의 책을 감추어 둔 곳을 댔고, 특히
이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그가 신앙에 꾸준하였는지를 의심하게 되었다. 형벌이
심하여 그는 (柳)觀儉이
진술한 것처럼 교우들이 서양 배를 불러 오려고 하였다는 자백을 하게 되었다. 그가
처형 당할 때에 (尹持憲)프란치스코는
38세였다.
그의 아내는 巨濟島로 귀양가서 1828년에
죽었다. 그의
세 아들도 여러 섬으로 귀양갔는데, 그
중 하나는 오늘까지도 살아 있다는 말이 있다.』
(한국천주교회사 上. 샤를를 달레. 한국교회사연구소간행 531쪽)
*유항검, 유관검, 윤지헌, 이우집
공통 신분 :
儒業
(천주교전주교구사1.211쪽)
『죄인 윤지헌은 윤지충의
아우로서 제 형이 법복(法伏)된
뒤에도 끝내 잘못을 뉘우쳐 고치지 않고, 또
유항검 형제와
더불어 부동해 빠져들어가 사학을 고취하여 인도하고 주문모를
높이 받들었으며, 몰래
이역(異域)과
통하여 서양인에게 서찰을 주어 전후 세 차례나 큰 선박을 나오도록 청한 음모와 흉계에 난만하게 참섭하였으니,
모역동참죄로써
결안하였다
“도내의
사학 죄인 유항검 형제와
윤지헌,
이우집은 요사하고
황탄하여 스스로
윤기(倫紀)를
끊고 그들의 무리들을 불러모아 호남지방의 거물 괴수 노릇을 하였는데, 최창현,
황사영, 윤지충,
이존창 무리와
서로 손을 맞잡고 주문모를 아비처럼
섬겨 맞이하여 여러 날 머물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편지를 받아 북경의 천주당에 들여보내고, 사상(邪像)과
이른바 영세할 때 쓰이는 성유(聖油)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들이
모의한 바 ‘신부
1인으로는
그 형세가 매우 고단하니, 반드시
하나의 큰 선박을 서양 나라에서 맞아들여 그 교를 이 나라에 널리 선양하고자 한다.’라고
하였으니, 허다하게
주무한 자취가 지극히 간교하고 흉악하였습니다. 따라서
빠른 속도로 사람들을 불러 유혹하여 수삼군입(數三郡邑)의
반이 오랑캐와 짐승으로 화하였고, 그
무리가 퍽 많아지고 있습니다. 청컨데,
왕부(王府:의금부)로
하여금 죄인을 나치(拿致)해서
엄중히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여 해당 율을 시행하게 하소서.”』
-전라감사 김달순의 장계(狀啓)-1801.4.25. 2차 심문후 임금에게 이 사건을 의금부에서
다루도록 청하는 글 중에서
•윤지충(尹持忠)은
해남(海南)
윤씨로 그의 6대
조부(祖父)는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이고, 증조부는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이다.
•그는
실학의 가풍을 이어받았고, 25세
되던 1783년
진사가 되었다. 그는
유항검과 이종사촌간이며, 정약전
형제들과는 고종사촌간이고, 이승훈은
그의 고종사촌 매형이 되며, 이벽은
사돈이다. 이러한
환경이 그가 천주교를 접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全州市史’에서
.윤지헌의 가족도 모두 체포되었는데
그의 처 유종항은 거제도로 귀양가서 1828년에 죽었고, 아들 종원(15세), 종근(13세), 종득(4세)은 각각 제주도, 흑산도, 해남의 노(奴)로 보내졌고, 딸 영일과 성애는 각각 경흥과 벽동의 비(婢)가 되었다.
전북 완주군 고산 저구리 마을(당시 교우촌)
↑윤지헌이
유항검 등에게서 신부 영입을 위한 여비를 받고 있다. 그림/탁희성 화백
『윤지헌(尹持憲)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1764년 전라도 진산(현, 충남 금산군과 논산시 지역)에서 학문으로 이름 있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순교한 윤지충 바오로가 그의 형이다.
윤
프란치스코는 1789년에 형 윤 바오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에 앞서 윤지충 바오로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어 인척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서 읽어 보고 오랫동안 그 내용을 탐독한 끝에 신앙을 받아들였다. 윤
바오로는 1787년에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윤 바오로는 가족과 친지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아우 윤 프란치스코와 함께 열심히 교회의 가르침을 실천해 나갔다.
1791년에
형이 순교하자,
윤 프란치스코는 더 이상 고향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그는 가족을 데리고 진산을 떠나 전라도 고산의 운동(현,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런 다음 교회 서적을 베껴 읽으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고, 자신의 이름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에
입교시켰다.
또 1795년에는
고산의 운동을 방문한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성사를 받았으며, 이후에는
교회의 밀사인 황심 토마스를
북경에 파견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윤
프란치스코의 교회 활동이 관청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의 옥에 갇혔으며,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이때 그는 이미 드러난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입 밖에 내지
않았고,
다음과
같이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았음을 확인해 주었다.
“평소에 좋아하던 천주교 교리를 끊지 못하였고, 고질병처럼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있으니, 오로지 만 번 죽겠다는 말씀만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 천당 지옥의 이치를 굳게 믿은 탓에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당시
박해자들은,
교회
밀사가 북경을 왕래한 이유를 알아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에
윤 프란치스코는 조정의 명에 따라 동료들과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포도청과 형조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윤지헌 프란치스코는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그리고 의금부에서 마지막 문초를 받은 뒤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였으며,
다시
전주로 이송되어 1801년 10월 24일(음력 9월 17일)에 능지처참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7세였다. 그가 순교한 뒤, 고산에 갇혀 있던 아내와 가족은 모두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
윤지헌
프란치스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인터넷 ‘지혜의 샘(북방선교기도회)
http://jwisdom.or.kr/index.php?mid=story_124&page=4&document_srl=5547
.『윤지충의 입교시기에 대해 다블뤼 주교의 기록에 따르자면, 1784년 겨울 서울 김범우 집에서 서학서를 구경한지 2~3년이 지난 뒤 정씨네 집안(약전과 약용형제를 말함)에서 천주교에 관련된 책을 본 후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1786년에서 1787년 사이에 마재로 가서 약전.약용 형제를 방문하고 그들을 통하여 천주교 서적들을 탐독한 후에 천주교를 믿게 된 것 같다. 아울러 윤지충의 가문인 해남 윤씨 윤선도의 집터가 현재의 명동 성당 앞에 있고, 윤선도의 집 바로 뒤에 정씨 형제의 아버지인 정재원이 한양에서 벼슬살이를 할 때 살던 집이 있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즉 윤지충과 정씨 형제들은 지척의 거리를 두고 만날 기회가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약전의 아우이자 약용의 형이었던 약종은 자신이 천주교를 믿게 된 것이 1786년 3월의 일이었다고 하였다. 아마 윤지충도 비슷한 시기에 정약전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윤지충은 유항검과도 밀접한 관계를 지닌 인물이었다. 즉 유항검의 어머니와 윤지충의 어머니가 같은 권씨로 친자매였다. 결국 이들은 이종사촌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유항검. 윤지충. 권상연은 같은 전라도 전주와 진산에 거주하는 친척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유항검은 윤지충에게서 교리 서적을 빌려 보고는 이를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해서 권일신을 찾아가 교리를 배워 신앙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따라서 유항검보다 먼저, 또는 유항검과 비슷한 시기에 윤지충도 유항검이 신주와 조상 제사에 대해서 품었던 것과 유사한 문제에 직면하였을 것이고, 이에 대해서 자신의 입장도 정립하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295쪽) .호남의 진산에 사는 윤지충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그는 해남 윤씨 가문의 일원으로서 윤선도(1587~1671)의 6대손이었다. 그리고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삼형제의 외조부였던 윤덕렬의 친손자로서, 약전 형제들과는 고종사촌간이었다. 윤지충의 외가는 안동 권씨 가문이었다. 그래서 같은 진산군에는 외삼촌 권세학의 아들 권상연이 살고 있었다. 윤지충은 1759년생이며, 권상연은 1750년생이었으니, 권상연이 윤지충의 외종형인 셈이다. 사건이 나던 해에 윤지충은 32살이었고, 권상연은 41살이었다. (292~293쪽) .정약종의 사위 황사영 .황사영:서울 아현거주 회장 -'성학이 고명한 사람' -양반 중의 최고의 남자 신자'로 인정하고 존경함. .지방에서는 전라도의 유항검.관검 형제와, 윤지충의 동생인 윤지헌 등이 지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충청도에서는 이존창이 비록 배교를 되풀이하고 옥에 갇혀 있기는 했지만 밀사 파견에 관여하는 등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한국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간행). 3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