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원 삼국지>의 출간이 갖는 의미
조 성 면(인하대 강의전담교수, 문학평론가)
<박태원 삼국지>가 돌아왔다! 반세기를 넘긴 두 세대만의 극적인 귀환이다. 다시 쓰기(re-writing)와 리메이크가 <삼국지>의 텍스트 논리라고는 하지만, 강력한 원본성을 지닌 걸작의 출현에 이제 시뮬라크르들은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앞으로 <삼국지>의 판도가 한바탕 크게 요동을 치게 될 것 같다.
장구한 텍스트의 형성사가 보여주듯 <삼국지>는 통상의 문학작품들처럼 천재적 개인에 의한 창작물 즉 단일한 작가의 개념을 전제로 축조된 작품으로 보기 어렵다. 진수(233~297)의 정사 <삼국지>와 배송지(372~451)의 <삼국지주> 등의 공식적인 기록물들을 비롯하여 민간에서 떠돌던 설화들, 당대의 변문, 송대의 화본, 원대의 잡극, 그리고 <전상평화삼국지> 등을 거쳐 <삼국지>가 연의(演義)로 완결, 집대성된 것은 나관중(생년미상~1398)에 이르러서이다. 1644년경 이것이 다시 모종강(毛宗崗)에 의해 각종의 한시와 회평(回評)이 첨가된 120회 장편 장회소설로 재구성,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지>의 원형이 만들어지게 된다. 여기에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 1892~1962)에 의해 근대적 대하소설로 재창작되면서 마침내 <삼국지>가 복수의 텍스트들로 분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판본사(textual history)의 관점에서 <박태원 삼국지>는'한국어판 삼국지 현대화'의 종착점이면서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경우, <삼국지>는 목판본과 활자본 등 다양한 형태로 유통되다가 1904년 박문서관에서 펴낸 <수정 삼국지>를 기점으로 근대식 활판본들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이후 한동안 딱지본 형태의 이야기책 시대를 이어오다가 양백화(매일신보, 1929. 5. 5~1931. 9. 21)와 한용운(조선일보, 1939. 11. 1~1940. 8. 20)에 와서 의고적인 편역과 언해의 단계에서 확실하게 벗어나 근대적인 텍스트로 분화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박태원(1909~1986)의 손을 거치면서 오늘날의 우리가 <삼국지>라고 생각하는 현대적인 '한국형 삼국지'가 탄생하였다.
그러면 이른바 <박태원 삼국지>의 판본사적 획기성과 의미는 무엇이며, 그것은 왜 중요한가.
우선 <박태원 삼국지>는 그 자체가 작은 문학사이며 현대사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그의 문학적 여정과 한국현대문학사의 파란곡절이 투영돼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걸작은 코에이(KOEI) 사(社)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삼국지 시리즈>를 즐기는 오늘날의 유저들이 읽어도 좋을 만큼 빼어난 가독성과 동시대성 그리고 순도 높은 완성도를 지닌 '작품'이기도 하다. 박종화(1901~1981)ㆍ김동리(1913~1995)ㆍ황순원(1915~2000)ㆍ김구용(1922~2001)ㆍ황석영(1943~)ㆍ이문열(1948~) 등 한 시대를 풍미한 대표 작가들의 텍스트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박태원이 처음으로 이룩하고 도달했던 '삼국지 한국화와 현대화'라는 압도적 성취에서 좀더 묵직한 존재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더구나 남북의 화해와 교류협력이라는 지난 시대의 성과들이 보수의 논리 앞에서 크게 훼손되고 또 다시 대결적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현 국면에서 박태원이 1964년 북한에서 완결지은 <삼국지>가 다시 출판된다는 이 문화사적 사건은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다.
<박태원 삼국지>가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41년 4월 월간 <신시대>에 <신역 삼국지>란 이름으로 연재되면서부터이다. 일부 고서 애호가들이 이것보다 앞선 1938년 박태원이 박문서관에서 <삼국지>를 펴냈다는 주장을 펴고 있으나 근거 없는 주장이며, <박태원 삼국지>의 서막을 연 <신역 삼국지>도 1943년 1월 모종강본의 <제57회 와룡선생은 시상군에서 주유를 조상하고 봉추는 뇌양현에서 고을을 다스리다>에 해당하는 대목을 연재하다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박태원은 1945년 전3권 분량으로 추정되는 축약본 <삼국지>를 '박문서관'에서 펴낸 바 있다. 1950년에는 정음사에서 다시 <삼국지>를 번역ㆍ출간하던 중 박태원의 월북으로 중단의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사장 최영해의 뚝심으로 속간되었으니, '최영해 삼국지'는 바로 <박태원 삼국지>의 후신이었던 것이다. 이른바 독자들 사이에서 <박태원 삼국지>의 은유로 통용됐던 정음사의 최영해 본 <삼국지>는 '제1권 도원결의'를 시작으로 단기천리ㆍ삼고초려ㆍ적벽대전ㆍ조조집권ㆍ관공현성ㆍ팔진도법ㆍ공명출사표ㆍ대성귀천ㆍ천하통일 등 총10권 분량으로 1955년 완결되었다. 탁월한 모더니스트가 보여준 유려한 미문에다 서슬 퍼런 냉전시대 월북 작가 박태원의 작품을 읽을 수 있다는 대리만족감과 위반의 즐거움으로 인해 1960년대의 독자들에게 최영해 본 <삼국지>는 기대 이상의 각광을 받았다. 박태원의 월북으로 사라져버릴 뻔했던 걸작을 문화인식과 뚝심으로 이어간 정음사 사장 최영해는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의 아들이다.
그런 '최영해 삼국지'는 독자들의 각별한 사랑과 아쉬움 속에서 1959년, 1970년, 1979년 판과 쇄를 달리하면서 80년대 중반까지 계속해서 출판되었다. 이번에 깊은샘에서 새롭게 펴내는 <박태원 삼국지>는 그가 1959년 북한의 국립문학예술서적출판사에서 번역, 출판하기 시작하여 1964년 조선문학예술총동맹출판사에서 총 6권 분량으로 완결된 판본을 저본으로 한 것으로 '삼국지 마니아'들이 반세기 이상 기다려왔던 <박태원 삼국지>의 결정판이며, '한국판 현대 삼국지'들의 좌장격인 진짜 원본의 복원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럼에도 한국근대문학을 전공한 연구자들이나 박종화와 최영해를 찾아서 읽을 정도로 내공이 심후한 '삼국지 광팬'이 아니라면, 21세기의 젊은 독자들에게 <박태원 삼국지>는 다소 낯설지도 모르겠다. 특히 박태원 문학을, 경성거리를 배회하던 식민지 지식청년의 고독한 산책길과 갑오년 농민군들의 뜨거운 함성으로 기억하는 독자들에게 '박태원'과 '삼국지'는 뜻밖의 조합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태원 삼국지>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란 첨단 모더니즘과 <갑오농민전쟁>이란 웅장한 민중적 대하소설 사이의 낙차를 메우는 교량형의 작품이면서 <갑오농민전쟁>의 밑바탕이 되는 미완의 가작 <군상>의 탄생을 예비하는 것이니, 작품사적 의미 또한 결코 간단하지 않다. 여기에<삼국지>를 한국문학사상 최초로 신문에 연재한 바 있었고 동양 고전에 해박했던 양백화(1889~1944)에게 전수받은 단단한 한문 실력에 한국 모더니즘문학을 이끌었던 탁발한 문장력이 뒷받침되고 있으니 그야말로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겠다.
그래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요컨대 선구적 모더니스트이자 진보적 문학이념의 길을 선택한 그의 <삼국지> 번역 자체가 바로 그러하다.
뜻밖에도 우리는 그 해답의 단초를 <삼국지>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 모더니즘을 대표하던 이태준(1904~미상)이 골동품과 기명절지(器皿折枝)들을 만지던 상고주의자(尙古主義者)였고, 정지용(1902~1950) 역시 한시에 능통한 고전주의자였으니 모더니즘과 고전은 그 내부에서 이처럼 강력한 심미적 친화력과 정신적 유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삼국지>는 고전주의자였던 모더니스트들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매력적 대상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삼국지>를 처음 연재하던 1940년대 초반은 고전이나 역사 속으로 도피하는 것 이외에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암흑의 시대가 아니었던가. 뿐인가. 어떤 점에서 <삼국지>는 정처를 잃은 진보적 문학인이 의지처요,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던 것이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충과 의리 등과 같은 유교적 이념에 기초한 <삼국지>의 핵심적 세계관, 즉 촉한정통론(蜀漢正統論)이나 옹유반조(擁劉反曹) 등이 근대의 정신과 길항하는 시대착오적인 낡은 이념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오해이며 단견이다. <삼국지>의 주인공인 유비 삼형제의 면면을 보자. 탁현의 촌구석에서 돗자리를 만들어 팔던 유비, 저자거리에서 돼지를 잡아 팔던 장비, 탐관오리를 징치하고 수배를 피해 강호를 떠돌던 낭인 관우가 도원에서 결의를 맺고 군사를 일으킨 것은 일종의 민중적 봉기에 가깝다. 오직 웅지와 삼척검에 의지하여 몸을 일으킨 유비 삼형제에 대한 독자들의 열광과 지지는 부패한 정치권력과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민중적 항의와 분노가, 그리고 새로운 사회와 신분상승에 대한 열망의 심미적 표현인 것이다. 비록 종교적 외피를 쓰긴 했으나 농민들의 봉기로 볼 여지가 있는 황건적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라든지 유비 삼형제가 보여주는 투철한 근왕주의나 한실재건 같은 복벽주의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오늘날의 관점을 무리하게 소급하여 적용한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유비 삼형제의 근왕주의와 애민주의는 전근대가 도달할 수 있었던 최고의 민중주의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삼국지>를 민중문학으로, 정치적인 오락물로 읽어내는 방식은 단견이요, 일방적 관점일 수 있다. 요컨대 <삼국지>는 낙척불우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는 인생의 지혜를, 삶이 무료한 이들에게는 재미를, 경영인들에게는 탁월한 전술과 지략을, 그리고 새로운 시나리오와 콘텐츠가 필요한 크리에이터들에게는 원천소스를 제공해주는 등의 다양한 맥락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 언제라도 자신의 처지와 관점에 따라 맥락을 달리 하여 읽을 수 있는 이 다성성(多聲性)과 풍부한 내포야말로 <삼국지>가 시대와 계층을 초월하여 반복해서 읽히게 되는 원동력일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에서조차 실전되었다고 하는 희대의 걸작 <박태원 삼국지>가 유족들과 깊은샘출판사의 수년에 걸친 끈질긴 노력과 열정으로 이렇게 다시 감격적으로 복간되는 것을 한국문학 전공자의 한 사람으로서 기쁘게 환영한다. 아울러 중국문학 전문 번역가로서 온라인에서 삼국지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송강호 선생과 이른바 <삼국지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여 <한국어판 삼국지 번역의 실상과 전모>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준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기초학문연구단> 소속 연구원들께도 감사를 드린다. 모쪼록 '현대 한국어 삼국지 판본'들 가운데서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이 명품 <삼국지>가 독자들에게 새로운 기쁨이 되고, 더 나아가 박태원 연구는 물론 남북 간의 문화 교류 및 협력과 상호 이해의 물꼬를 트는 새로운 전기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