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聾巖先生墓碣銘
【前面大字】崇政大夫行知中樞府事 贈諡孝節公聾巖李先生之墓 配貞夫人安東權氏祔右 【碑 文】 故孝節公聾巖李先生歷事三朝蔚爲名臣以嘉靖乙卯六月十三日卒訃聞于朝上震悼謂廷臣曰李賢輔屢召不來今則已矣予甚慘恒其賻贈有加以是年八月葬于禮安縣北龍頭山乾坐原厥後宗嗣頗不振人或謂大賢之後宜昌而若此甚非天理九代孫祥熻萬熻等遍議京鄕諸先達積誠經紀乃於正宗辛亥卜地于安東才山縣淸凉南麓始改葬焉距乙卯始葬寶二百三十八年也及啓壙棺柩髹㯃如新旌翣桋幣及挽軸三十四度遺衣三稱宛然俱在卒完襄殆神明佑之也舊有碑碑重不可遠移仍竪于汾江院新阡義不可無碣更議新斲以其文託不佞竊惟先生立朝本末出處大節具在退陶老先生所纂狀及忍齋洪太學士舊碑文不容更贅略述生平踐歷與夫遷奉事實以志其槩焉先生諱賢輔字棐仲永川之李也曾祖諱坡義興縣監贈兵曹參議祖諱孝孫通禮門奉禮贈吏曹參判考諱欽麟蹄縣監贈左參贊妣贈貞夫人安東權氏護軍謙女以惠莊王丁亥七月二十九日生燕山乙卯進士戊午登文科內而校書正字藝文館檢閱待敎奉敎成均館典籍司成司諫院正言司諫司憲府持平執義侍講院司書輔德司僕寺正軍器監正僉正繕工禮賓副正尙衣院判官戶曹佐郞參判刑曹正郞參議參判兵曹參知禮曹參議佐郞承政院同副右副承旨弘文館副提學同知中樞府使知中樞府事外而永川榮川郡守密陽安東大丘府事忠州星州牧使慶州府尹慶尙監司此其履歷也先生雅尙謙退引年乞骸者屢任寅春始辭病東歸上引見特賜金犀帶錦袍以褒寵之命吏護行搢神傾朝出餞自是家居十四年中廟嘉其恬退因本秩守知中樞府使仁廟奬其抗疏忠直陞資憲明廟因大臣請尙節義陞正憲又特擧尊年之典陞崇政知樞常帶如故此盖異數也先生行誼之高德業之盛立朝而聖明恃如蓍龜在野而一代仰若山斗況以退陶之大賢書牘唱酬之際極致尊敬至有登門質業永供灑掃之語卽此而先生之德望可知也已後生何敢一辭贊焉先生娶安東權氏忠順衛孝誠女生六男一女長碩樑夭次文樑察訪次希樑縣監次中樑觀察使次季樑縣監次叔樑進士師傳女適節度使金富仁后娶順興李氏生二男閏樑判事衍樑銘曰史直傳誨萊戱曾養大賢特書列朝寵章余言奚贅仰止彌長浩㤼衣履載遷吉崗玄和如新神佑孔彰幽隧永完福祿無彊曰有雲仍孝思是將奚斲新珉懿德愈光天長地久君子之藏 崇祿大夫前行兵曹判書兼 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事 韓致應 謹撰 ■ 농암선생 묘갈명 고 효절공 농암 이 선생이 역사 삼조(三朝)하여 울연히 명신이 되었다. 가정 을묘 6월 13일에 졸하고 부고가 조정에 들리니 임금이 놀라 슬퍼하시고 조신에 말씀하되 “이현보가 여러 번 불러도 오지 아니하더니 지금은 그만이라. 내가 심히 비통하고 놀랍도다. 그 부의를 더 주어라.” 이 해 8월에 예안현 도곡 선영 및 건좌(乾坐)에 장사하였더니 그 뒤에 종사가 자못 부진하게 되니 누가 이르되 대현의 뒤가 당연히 창성할 것인데 이와 같으니 심히 천리가 아닌 것 같다.
9대손 상흡(祥熻) 만흡(萬熻)등이 널리 경향 제 선달에 의론하고 많은 경영을 쌓아 이에 정종 신해 10월 초 길일에 안동 재산현 정자동 자좌로 이장하니 가정 을묘에 처음 장사시대로 말하면 237년이었는데 관곽의 칠이 새롭고 명정 삽 체백 및 만사 34와 유의 세 불이 완연히 있었으며 마침내 완전히 양례하였으니 자못 신명이 도운 듯하다. 비가 있었으나 후중하여 멀리 운치할 수 없어 분강본원에 옮겨서 세우고 신산에 묘갈이 없을 수 없어 다시 의론하여 세우고 그 글을 나에게 부탁하거늘 가만히 생각하매 선생의 입조 본말과 출처 대절이 퇴도 노선생이 지은 행장과 홍 태학사 옛 비문에 갖추어 있으니 다시 쓸데없이 덧붙여 할 수 없고 대략 평생 이력과 면례 사실을 지어 그 대체의 요점이나 기재하노라.
선생의 휘는 현보(賢輔)요 자는 비중(棐仲)이요 호는 농암인데 영천인이라. 증조의 휘는 파(坡)인데 현감 증(贈) 병조참의요, 조의 휘는 효손(孝孫)인데 통례문 봉례에 증 이조참판이요, 고의 휘는 흠(欽)인데 인제현감에 증 좌참찬이요, 비는 정부인 안동권씨 호군 겸(謙)의 따님이다. 혜장왕 정해 7월 29일에 나시다. 연산 을묘에 진사하고 무오에 문과에 올라, 안으로 교서 정자 예문관검열 대교 봉교 성균관전적 사성 사간원정언 사간 사헌부지평 집의 시강원사서 보덕 사복시정 군기감정 첨정 선공 예빈부정 상의원 판관 호조좌랑 참판 형조정랑 참의 참판 병조참지 예조참의 좌랑 승정원 동부 우부승지 홍문관 부제학 동지중추부사 지중추부사이고, 밖으로는 영천(永川)․영천(榮川)군수 밀양․안동․대구부사, 충주․성주목사 경주부윤 경상감사가 그 이력이다. 선생이 본 뜻이 겸허하여 인년(引年) 걸퇴를 여러 번 하다가 임인년 봄에 비로소 병으로 사양하고 동으로 돌아오니 임금이 불러보시고 특히 금서대 금포를 주시어 포총하시고 영이에 명령하여 호행케 하셨고 대신들이 모두 조정을 비우고 나와 전별하였다.
이로부터 집에 14년을 거쳐하셨으며 중종께서 그 편안히 물러가심을 가상하여 지중추부사를 주시고 인종께서 그 소를 올린 충성을 장려하여 자헌대부로 승진시키시고 명종께서 대신의 청으로 절의를 숭상하여 정헌대부로 승진시키셨고 또 존현의 전례로 특별히 숭정대부로 승진시키시고 지중추 직위는 늘 가지게 하시니 대개 특이한 수(數)이시다.
선생의 행의의 높음과 덕업의 성함은 조정에 들어가서는 임금이 시귀와 같이 믿었고 재야에서는 일대가 태산북두와 같이 우러렀다. 하물며 퇴도의 대현으로도 편지와 시의 화답할 때 가지끈 존경하여 등문질업(登門質業) 영공쇄소(永供灑掃)의 말씀이 있게 이르니 곧 여기에 선생의 덕망을 알 수 있다.
후생이 한 말이라도 찬양할 수 있을까? 배위는 안동권씨 충순위 효성(孝誠)의 따님이다. 6남1녀를 낳으니 석량(碩樑)은 요수하고 문량(文樑)은 찰방 다음 희량(希樑)은 현감 다음 중량(仲樑)은 관찰사 다음 계량(季樑)은 현감 다음 숙량(叔樑)은 진사 사부요 여(女)는 절도사 김부인(金富仁) 다음 순흥 이씨는 2남을 낳았으니 윤량(閏樑)은 판사 다음은 연량(衍樑)이다.
명(銘)에 말하기를, 사어(史魚)의 곧음이며 부열의 가르침이요 노래자의 희롱이며 증자의 기름이다. 대현이 특서하셨고 열조(중종 인종 명종)가 사랑의 글이었다. 넓은 겁계를 지내어 의리(衣履)가 이에 좋은 산에 옮김이라. 관구가 새로움과 같으니 신명이 도움이라. 묘소가 길이 완전하리니 복록이 무강하리라. 자손의 효심으로 이 일을 하였다. 이에 새 비를 세우노니 큰 덕이 더욱 빛나리라. 하늘이 길고 땅이 오래도록 군자의 무덤이다. 숭록대부 전행병조판서겸 판의금부 지경연춘추관사 한치응은 삼가 짓다.
영천이씨 농암종택 모년에 한치응이 지은「농암이선생묘갈음기명(聾巖李先生墓碣陰記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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