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골제국의 제2인자(4駿 중 한명)
한민족의 무칼리 장군
동북아정복의 명장이 된 고구려 후손
글 /구종서 (정치학박사, 언론인, 역사소설가)
무칼리 장군, 금나라 정벌은 그대가 맡아라
칭기스칸은 1211년 금나라를 침공할 때의 군사력은 금군 65만, 몽골군은 7만 명이 조금 넘었다. 칭기스가 직접 지휘한 몽골군은 금나라 수도 중도(中都, 지금의 北京)를 3년 동안 포위 공격한 끝에 항복 받았다. 금이 항복하자 칭기스는 군대를 남겨둔 채, 철수하여 몽골로 돌아갔다.
그러나 중국의 정벌이 끝난 것은 아니다. 금의 제8대 황제 선종(宣宗)은 남쪽 카이펑(개봉)으로 수도를 옮겨 몽골에 대한 재도전을 서두르고 있었다. 수도 중도를 벗어나면 금의 장수들이 군벌(軍閥)을 만들어 스스로 영주(領主)가 되어, 영토의 대부분을 자기들 마음대로 다스리면서, 몽골군에 저항하고 있었다. 몽골군은 저항을 계속하는 군벌들을 찾아 토벌전을 계속했다.
몽골로 돌아갔던 칭기스는 항복했던 금나라가 남쪽으로 천도했다는 보고를 받고 분개했다.
“항복한 금나라가 남천(南遷)한 것은 나와 우리 몽골에 대한 배반이다. 이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칭기스는 다시 중국으로 와서 정벌전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때 칭기스가 믿는 동이족(東夷族) 출신의 장수 무칼리(Muqali, 木花黎)는 동북방 정벌을 맡아, 만주 땅을 점령하고 다시 돌아왔다. 그는 선조의 나라였던 고구려의 옛 영역을 되찾아 칭기스의 몽골령으로 만들어 놓고, 중도 근처에 와서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칭기스가 중국정벌 때문에 나라를 비우고 없는 틈을 타서, 몽골 안에서는 바이칼호 남쪽 주변에 살고 있던 호전적인 삼림지대 부족들이 반 칭기스 음모를 꾸며, 반란을 일으켜 독립을 계획하고 있다는 급보가 도착했다.
칭기스는 중국의 정벌을 무칼리에게 맡기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귀국키로 하면서, 철수 전날 무칼리와 참모들을 불렀다.
“국내가 불안하여 나는 이제 귀국한다. 우리가 금나라 황궁을 포위 공격하자, 금의 황제 선종은 항복하고 항복문서를 써주면서 배상도 충분히 내놓았다. 그러나 내가 귀국하자 선종은 정부를 이끌고 남쪽으로 도망해, 계속 저항할 모양이다. 중국은 땅이 넓고, 인구가 많다. 선종을 잡고 땅을 정복하려면, 시일이 많이 걸린다. 앞으로 중국의 정벌은 무칼리 국왕, 그대가 맡아서 행하라.”
“예, 폐하.”
<▲초원을 지나는 몽골인의 일반적인 모습. 몽골초원에 가면 이런 전통적인 몽골인
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오늘날엔 모터 사이카를 탄 신식 몽골인들이 많아지고 있다.>
동북아에 익숙한 고구려족 출신의 명장
칭기스는 1206년 몽골 초원을 통일한 뒤, 대몽골제국을 세우면서 공로자들을 대거 표창했다. 모든 유공자들은 천호장·만호장에 임명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무칼리에게는 10개의 천호대(千戶隊) 군사를 지휘하는 군사령관 격의 만호장(萬戶長)에 임명하면서, 특별히 임금 칭호인 ‘귀옹’(guyong, 구용.國王)이라는 직위를 덧붙여주었다. 그것은 무칼리가 몽골제국에서는 칭기스칸 다음의 최고위자요 실력자이고, 칭기스가 가장 인정하는 신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칭기스가 계속했다.
“나는 몽골군 24천호(2만 4000명)와 중국에서 새로 편성한 거란-한족 군단 20천호(2만명)를 두고 간다. 무칼리 장군, 그대가 이 군대를 맡아 점령된 화북지방을 관리하고, 미점령지를 정복해 나가라. 도망한 금나라 선종 황제도 추격하여 잡아 없애라.”
“명령대로 수행하겠습니다.”
“예, 폐하. 내가 그대에게 이런 중대한 일을 맡기는 것은, 그대가 솔랑가스(Solangas, 高麗) 계열 출신이므로, 이 동방의 민심과 사정을 잘 알 것이기 때문이다. 동이족인 그대는 고려와 여진·중국을 잘 알아서, 이 지역의 정벌과 관리를 무난히 처리해 나갈 것으로 믿는다. 크든 작든 사사건건(事事件件) 일일이 나에게 보고할 필요는 없다. 그대가 알아서 스스로 결정하여 행하라.”
“감사합니다, 다칸(Dakhan, 大汗, 황제의 뜻) 폐하.”
지금도 몽골인들은 한국을 ‘솔롱고스의 나라’라고 부른다. ‘솔롱고스’라는 몽골어는 원래 <무지개>의 뜻이다. 고려라는 한자를 직역하여 ‘높은 데서’(高) ‘빛난다’(麗)고 하여, 고려를 높은 하늘에서 빛을 내고 있는 <무지개>에 비유했다.
<▲과거 몽골의 산림부족이 살았던 바이칼 호수지역의 집터 유적지. 이 지역 부족들은 칭기스칸의 점령과 통일에 저항
하던 보수적인 집단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러시아 땅이 돼있다.>
고구려 멸망 후 몽골로 이주한 무인가의 후손ㅡ무칼리
칭기스는 배석한 참모 장수들을 향해서 말했다.
“나는 지금부터 중국에 대한 나의 모든 권한을 무칼리 국왕에 위임했다. 앞으로 중국에서 무칼리 장군이 내리는 명령은 곧 이 칭기스칸의 명령이다. 그대들은 무칼리 국왕의 명령과 지시를 나의 명령과 지시로 알고 절대 복종하여 수행하라.”
“예, 폐하. 염려 마십시오.”
“그리 하겠습니다, 폐하.”
무칼리가 고려족(高麗族)이라는 것은 당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 무칼리를 고려인이라고 확실하게 기록한 것은 몽골역사 연구가인 펠리오트(Pelliot)다. 그는 불어판 저서 <칭기스칸의 전쟁사> (Historie des Campagnes de Gengis Khan)에서, 무칼리가 한국계 출신의 고려인(Corean)이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무칼리의 선조는 고구려(高句麗)에서 장수직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668년 신라(新羅)와 당(唐)나라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고구려가 멸망하자, 고구려인 대부분은 고구려 영토였던 만주 땅에 그대로 남아 당나라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나 고구려의 고위직 귀족, 특히 무인직을 맡고 있던 사람들의 일부는 신라로 갔고 일부는 몽골이나 기타 지방으로 흩어져 살았다. 그때 무인직을 맡았던 무칼리의 선조들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이나 신라를 피해, 기후가 비슷한 몽골지방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몽골의 자연스러운 어린이들의 모습. 몽골이 북위 48도(울란바타르 기준)의
북쪽이지만, 여름의 낮 기온은 북위 37도 수준의 한국과 차이가 없다. 그러나
밤이면 한 여름에도 얼음이 얼 때가 잦다.>
야전에 능한 천하무적의 철차장수
무칼리는 원래 몽골과 만주의 접경지대에 있었던 잘라이르(Jalayir)의 부족장 자무카(Jamuqa) 진영에 속해 있었다. 자무카는 어려서는 칭기스의 친구였고, 커서는 동맹자였다. 그러나 그들이 성장하면서 천하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다가, 끝내는 정적으로 바뀌었다. 그때 무칼리는 이미 맹장으로 소문나 있었다. 그러나 자무칸의 잇단 패배로 정세가 불안해 지자, 무칼리는 자무카 진영에서 이탈하여 몽골의 왕족인 주르킨(Jurkin) 족으로 옮겨가 있었다.
주르킨은 칭기스를 임금으로 추대한 세력이다. 그러나 몽골이 원수의 나라 타타르를 공격할 때, 주르킨 족은 칭기스의 출전명령을 거부하여 참전하지 않았다. 불복종을 참지 못하는 칭기스는 타타르를 격파하고 돌아온 뒤에는, 몽골군을 보내 주르킨 족을 쳐서 섬멸했다. 그때 주르킨의 사령관직에 있었던 무칼리는 칭기스에 발탁되어 몽골군의 장수가 됐다. 무칼리는 그후 칭기스와 함께 전쟁에 종군하면서, 싸울 때마다 무공을 세운 천하무적의 명장이 됐다. 그는 쇠로 만든 마차부대를 지휘한 기갑부대(機甲部隊)의 지휘관이었다. 그 때문에 칭기스는 무칼리를 ‘철차장수’(鐵車將帥)라고 불렀다.
몽골이 금나라를 공격할 때, 양국의 운명을 결정한 대회전(大會戰)이 야호령(野狐嶺)에서 벌어졌다. 그때 무칼리는 결사대를 이끌고 금나라 정예군을 격파하여, 야호령 전투를 승리로 이끈 선봉장이었다.
무칼리는 덕성이 높아 사람을 설득하고 끌어드리는데도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칭기스는 무칼리의 이런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중국정벌의 대임(大任)을 맡길 정도였다.
칭기스칸의 스승이자 몽골제국의 부황제
칭기스는 중국정벌을 무칼리에게 맡기고 귀국하여, 북부 산림부대 부족들의 반란을 진압했다. 반란을 분쇠하고 돌아온 장수들을 불러 위로하는 자리에는 칭기스의 참모들이 모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칭기스가 말했다.
“수고들 많았다. 그대들이 내란을 진압하여 제국을 안전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무칼리가 중국정벌을 맡아주어, 내가 귀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정벌에 공이 크고, 내전진압을 가능하게 해준 무칼리 국왕은 나에겐 항상 천군만마(千軍萬馬)다. 무칼리 장군을 태사국왕(太師國王)으로 추대한다. 그를 존경하고 받들어야 한다. 이 진급발령을 무칼리 장군에게 알려라.”
칭기스는 지금까지 지방 영주국(領主國)의 임금수준의 부황제(副皇帝) 격이었던 좌익 만호장(동몽골-동북아 담당) 무칼리를 국가와 황실의 스승으로 올려주었다. 칭기스의 인사 관례에서는 최상의 대우였다.
무칼리가 중국정벌에 전념하고 있을 때, 칭기스는 1219년 맘 놓고 중동 정벌에 나섰다. 칭기스가 중동의 회교제국 코라슴(Khorasm) 원정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무칼리는 데리고 있던 아들 보로(Boro, 勃魯)를 보내 칭기스를 따라 종군케 했다. 칭기스는 보로를 아껴 곁에 두고 자기 아들처럼 보호했다.
<▲중국정벌을 끝내고 정복왕조 대원제국(大元帝國)을
세워 100년간 중국을 지배한 쿠빌라이(忽必烈)의 초
상. 쿠빌라이는 제5대 몽골 황제가 되어, 고려와 강화
조약을 맺고 삼별초를 멸망시킨 칭기스칸의 손자다.>
53세에 전쟁터에서 순직하다
중동에서 4년간 뜨거운 사막전을 벌인 끝에, 1223년 칭기스는 호라즘을 점령했다. 그때 그는 61세였다. 칭기스가 전쟁을 승리로 끝내고, 한가한 마음으로 쉬고 있을 때 급보가 전달됐다.
“뭐? 무칼리가 죽었다고?”
“예, 폐하.”
“중원을 빨리 평정해야 할 이 어려운 때, 나보다 8살 아래인 그가 벌써 죽다니? 무칼리가 죽은 과정을 상세히 말해보라.”
“중국의 지방 평정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던 무칼리 국왕이 연안성(延安城)을 공격하다 실패한 뒤, 고심이 컸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국 군벌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아 각지에서 반란과 항전이 계속되어, 무칼리 장군은 잠도 못자고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남정북벌(南征北伐) 동전서투(東戰西鬪)를 계속하다가, 출정 중에 병이 들어 행군 도중에 사망했다고 합니다.”“전장에서 순국했구나. 과로사다. 무칼리의 도움으로 나는 내란을 진압하고, 이곳 호라즘까지 원정할 수 있었다. 더구나 데리고 있어야 할 아들 보로까지 내게 보내주었다. 그런 무칼리가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나를 두고 먼저 죽었다니?”
그때 무칼리는 53세(1170-1223)였다. 눈물이 없던 칭기스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다가 말했다.
“빨리 보로를 불러라.”
무칼리의 아들 보로가 달려왔다. 칭기스는 보로에게 부친의 사망 소식을 알려주고 말했다.
“보로 군. 네 아버지 무칼리 태사국왕은 참으로 훌륭한 장수요, 명장이며 애국자였다. 그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몽골을 통일하고 정복전쟁을 벌여 오늘의 세계제국(世界帝國)을 건설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순직했으니, 네가 중국으로 가서 부친의 대임을 맡아 수행토록 하라.”
칭기스는 무칼리가 맡고 있었던 중국정벌군 총사령관 직을 보로에게 주어 중국으로 보냈다.
몽골 정복왕조의 기초를 닦은 것은 무칼리 부자
중국에서의 보로의 활약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그러나 그가 부친의 임무를 물려받아, 중국정벌군 총사령관으로서 몽골군을 지휘하여 중국 정복전쟁을 성공적으로 계속한 것은, 전후 과정으로 보아 분명하다.
칭기스의 사망 후에도 몽골은 중국정벌전을 계속하여, 1234년 금을 멸망시키고, 1279년에는 양자강 이남의 남송까지 점령했다. 이런 중국정벌을 완성한 것은 칭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Khubilai, 忽必烈)다.
쿠빌라이는 몽골의 제5대 황제가 되어, 중국 점령지에 원(元)이라는 정복왕조를 세워, 97년간 중국을 지배했다. 이런 몽골족 정복왕조의 기초를 사전에 쌓아놓은 사람이 바로 칭기스의 수장(首將)이었던 고려족의 장수 무칼리-보로 부자다.
무칼리는 사람들이 잘 알지못하는 인물중 하나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