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써 얻는 복이 많다 하겠느냐?” “그렇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써 얻는 복이 매우 많사옵니다.”
淸峯:한계가 있는 유루의 복이므로 유상(有相)한 것이기 때문에 많다 한 것이다. 그러나 복이란 실다움이 없는 것으로 많다 하는 표현은 무한대의 사량할 수 없는 큼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체 법계 중생이 본래 무한량의 복덕을 구족하고 있으므로 범, 성의 분별마저 없는 것이다.
규봉:相을 떠나므로 顚倒됨이 없는 보시를 행한 인연으로 샘이 없는 복을 이루어서 두 가지 장애를 떠나니 이미 거꾸로 뒤바뀐 것이 아니므로 복이 많다 하는 것이다. (2)는 반대로 해석하고 순리로 해석한 것이다.
須菩提야 若福德이 有實이라면 如來不說得福德多이나 以福德無故로 如來說得福德多하니라
“수보리야! 만약 복덕이 실다움이 있는 것이라면 여래가 그 얻은 복덕이 많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나 복덕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므로써 여래가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淸峯:칠보로 보시하여 얻은 복은 유루의 복이라 샘이 있어 다함이 있으니, 불과를 얻어 항상하고 상락아정하는 공덕과 비교도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유상(有相)의 것은 주고 받음이 있으므로 많고 적음을 논할 수 있으나 무루의 공덕은 복으로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덕이라면 많다는 말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번뇌 만상을 여의고 본성(本性)을 요달하여 갖추어진 것을 확인한 것일 뿐, 얻을 것은 유루의 복이요, 무루의 공덕은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무제의 지은 복을 달마가 “공덕이 하나도 없다” 한 뜻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이니, “무상주 보시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에 쫓아 잘못 알지 말지니 양무제가 지은 유위의 복은 유루인 인과의 복이요, 부처를 이루는 무위의 공덕과는 같지 않기 때문이다. 공덕은 정혜를 닦아 증득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요, 이 공덕은 영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무루 공덕(새지 않는 공덕)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시로 얻은 인연복은 실다움이 없는 것이므로 허망한 인과의 복으로 윤회를 받는 것이다.
만법의 실상이라 하는 것은 형상 있는 모습인 유상도 아니고 아예 없는 무상도 아닌,
논리적으로 유상 아님도 아니요 무상 아님도 아닌(四句非)
일체 차별적인 형상을 여읜 보편 평등한 일체법의 실체의 모습인 것이다.
따라서 일체의 있는 그대로의 실제 모습이므로 실다운 상(實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말로써 설명할 수 있음을 여읜 것이라는 것이다.
4구(四句:一,異,有,無)를 여의고(떠나고) 나면 그에 따르는 백가지 아님(百非)은 저절로 단절되는 것이다.
그 백가지 부정적 논리(일체논리의 부정)인 백비는 4구(네 가지)의 부정의 논리를 벗어난 것이 아닌 것이니, 사구백비를 정리하면,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써 얻는 복이 많다 하겠느냐?” “그렇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써 얻는 복이 매우 많사옵니다.”
淸峯:한계가 있는 유루의 복이므로 유상(有相)한 것이기 때문에 많다 한 것이다. 그러나 복이란 실다움이 없는 것으로 많다 하는 표현은 무한대의 사량할 수 없는 큼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체 법계 중생이 본래 무한량의 복덕을 구족하고 있으므로 범, 성의 분별마저 없는 것이다.
규봉:相을 떠나므로 顚倒됨이 없는 보시를 행한 인연으로 샘이 없는 복을 이루어서 두 가지 장애를 떠나니 이미 거꾸로 뒤바뀐 것이 아니므로 복이 많다 하는 것이다. (2)는 반대로 해석하고 순리로 해석한 것이다.
須菩提야 若福德이 有實이라면 如來不說得福德多이나 以福德無故로 如來說得福德多하니라
“수보리야! 만약 복덕이 실다움이 있는 것이라면 여래가 그 얻은 복덕이 많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나 복덕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므로써 여래가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淸峯:칠보로 보시하여 얻은 복은 유루의 복이라 샘이 있어 다함이 있으니, 불과를 얻어 항상하고 상락아정하는 공덕과 비교도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유상(有相)의 것은 주고 받음이 있으므로 많고 적음을 논할 수 있으나 무루의 공덕은 복으로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덕이라면 많다는 말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번뇌 만상을 여의고 본성(本性)을 요달하여 갖추어진 것을 확인한 것일 뿐, 얻을 것은 유루의 복이요, 무루의 공덕은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무제의 지은 복을 달마가 “공덕이 하나도 없다” 한 뜻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이니, “무상주 보시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에 쫓아 잘못 알지 말지니 양무제가 지은 유위의 복은 유루인 인과의 복이요, 부처를 이루는 무위의 공덕과는 같지 않기 때문이다. 공덕은 정혜를 닦아 증득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요, 이 공덕은 영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무루 공덕(새지 않는 공덕)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시로 얻은 인연복은 실다움이 없는 것이므로 허망한 인과의 복으로 윤회를 받는 것이다.
만법의 실상이라 하는 것은 형상 있는 모습인 유상도 아니고 아예 없는 무상도 아닌,
논리적으로 유상 아님도 아니요 무상 아님도 아닌(四句非)
일체 차별적인 형상을 여읜 보편 평등한 일체법의 실체의 모습인 것이다.
따라서 일체의 있는 그대로의 실제 모습이므로 실다운 상(實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말로써 설명할 수 있음을 여읜 것이라는 것이다.
4구(四句:一,異,有,無)를 여의고(떠나고) 나면 그에 따르는 백가지 아님(百非)은 저절로 단절되는 것이다.
그 백가지 부정적 논리(일체논리의 부정)인 백비는 4구(네 가지)의 부정의 논리를 벗어난 것이 아닌 것이니, 사구백비를 정리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