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서 달지(縣西 達池: 聞慶 永順) 출생으로 1315년(충숙 2) 원나라의 괴과(魁科)에 급제하여 금자광록대부 병부상서 겸 집현전태학사(金紫光祿大夫兵部尙書兼集賢殿太學士)에 이르렀다.
고려로 돌아올 때 원나라 황제 순제(順帝)를 하직하면서 ‘고려에서 거두는 세공을 대폭 줄여 달라 청하니 순제는 이를 허락하고, 공복(公服) 한 벌을 하사하며 이별을 아쉬워하였다’ 한다.
귀국하여 축산부원군(竺山府阮君)에 봉해지고, 조선건국 후 명나라에서도 이 예(例)에 따르니 이 공을 치하하여 태조(太祖)는 다시 축산부원군에 봉하였다. 그는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인 용주서성화천(龍州西省火川)으로 내려와 청원정(淸遠亭)을 짓고 자연을 벗 삼아 자적(自適)하였다.
또한 명필이었으니 법주사에 있는 자정국존보명탑비문(慈淨國尊普明塔碑文)이 지금도 남아 있다.
문과(文科) 중에 갑과(甲科)를 말하며, 장원(壯元)한 사람을 괴방(魁榜) 또는 장원랑(壯元郞)이라고 하였다. 문과(대과)에는 초시·복시·전시가 있었는데 3년마다 1회 실시하는 고등문과시험이었다.
초시는 서울과 각 도에서 생원·신사·성균관유생 및 양반 자제 200명을 선발하였고 복시는 초시합격자가 응시하여 서울 예조에서 초장은 사서오경, 중장은 시·부·표, 종장은 대책으로 시험을 보아 각각 11명씩 총 33명을 선발하였다.
전시는 왕 앞에서 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으로 복시합격자의 등급을 결정하였다. 합격자 모두에게 관리로 임용되는 것이 보장되었으며 갑과 1등 급제자는 장원급제라 불렸고 종6품의 참상관이 되었다. 갑과 2·3등 급제자는 참상관인 정7품에 임명되었고, 을과 급제자는 정8품, 병과 급제자는 정9품의 관리가 되었다. 현직 관리자가 갑과의 수석을 하면 4등급, 갑과 2·3등 급제자는 3등급, 을과 급제자는 2등급, 병과 급제자는 1등급씩 올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