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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가 주님을 영접합니다. / 2016년 12월 25일 주일 예배(성탄절)
본문 / 시편 41:1-13, 누가복음 2:8-20
옛 이야기 중에 ‘부자를 혼내준 사또’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고을에 권력을 매수하여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등을 쳐 재산을 축적한 부자 영감이 있었습니다. 이 고을에 부임하게 된 사또는 일부러 허름한 옷을 입고 백성들의 고충을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한 주막에 들른 사또는 부자 영감에 대한 원성이 자자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길로 사또는 부자 영감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노자가 떨어지고 배가 고파 찾아왔습니다. 제발 거절하지 마시고 자비를 베푸시기 바랍니다’ 부자 영감은 사또의 행색을 훑어보더니 ‘젊은 놈이 사지가 멀쩡하여 어디서 구걸을 하는 게냐. 애들아, 이놈을 몽둥이로 쳐서 보내거라’ 사또는 냉수 한 사발은 고사하고 얻어맞고 쫓겨났습니다.
며칠 후 부임한 사또는 가장 먼저 부자 영감 집을 찾아갔습니다. 화려한 관복을 차려입고 신관 사또가 나타나자 부자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환영하였습니다. ‘아이고 나리, 제가 찾아뵈려고 했는데, 이렇게 먼저 찾아 주시는 영광입니다’ 부자는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음식을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사또에게 귀한 술을 권하자 사또는 그 술을 받더니 관복에다 들이 부었습니다. 상에 차려진 음식을 먹지 않고 관복 주머니에 쑤셔 넣었습니다. 부자는 너무 놀라고 당황하여 ‘제가 뭐 잘못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또는 ‘영감은 내가 아니라 이 관복을 보고 대접한 것이니 그래서 옷에 술을 따랐을 뿐이오.
내가 몇 일전 허름한 옷을 입고 밥 한 그릇을 구걸할 때는 몽둥이로 쫓아내지 않았습니까.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영감은 나를 대접한 게 아니라 이 옷을 대접한 것이니 이 관복이 먹어야 되지 않겠소’
대감 죽은 데는 안가도 대감 말이 죽은 데는 간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세상을 지배하는 것과 그들이 숭배하는 것은 힘이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법도 말입니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엄격하지만 힘 있는 부자에게는 맥을 못 춥니다. 억울하면 성공해라는 말은 타락한 인간이 세상에서 무엇을 향해 가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으로 산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사람들이 아파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 자리를 비우면 힘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소원은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즉 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을 떠난 타락한 인생의 목표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오늘은 성탄절이며 올 해의 마지막 송년주일입니다. 성탄절이 연말에 있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성도는 성탄을 맞이할 때마다 다시 오마 약속하신 주님의 재림과 역사의 종말을 준비하게 됩니다. 세월이 화살처럼 신속히 지나 올 해의 끝자락이 된 것처럼 주님의 재림도 사람이 생각하지 못하는 때 갑자기 임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성탄을 맞이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믿음이 있는 가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천 년 전 과거로 돌아가 유대인이 된다면 예수님의 초림을 기뻐하고 그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믿고 따르는 제자와 성도의 자리에 설 수 있을까요? 아니면 예수를 부인하고 대적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세의 제자라고 주장하는 종교인들의 자리에 설까요? 지금 하나님 앞에 서있는 그 모습이 주님의 초림과 재림을 맞이할 모습이 될 것입니다. 과연 누가 주님의 재림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을까요?
이 시간 시편 41편과 누가복음을 통해서 그 믿음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먼저 시편 41편은 다윗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기 위해 쓴 지혜시입니다. 다윗이 41편을 저작하게 된 배경에는 쓰디 쓴 인생의 체험이 있었습니다. 인간으로서 가장 서럽고 슬프고 비참할 때가 언제입니까? 제 경험으로는 병들어서 아픈데 사람들에게 버림까지 받을 때입니다. 몸이 건강할 때 버림 받는 것도 견디기 힘든 고통인데 병까지 들어 몸도 마음도 연약한 중에 사람들에게 외면까지 받는다 해 보십시오. 그 서러움과 비참한 고통은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를 보고 ‘그 병은 못 고치는 병이라 얼마 살지 못할 거라’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가까게 잘 지내던 친구가 제 사정을 곡해하고 다니며 외면할 때는 그 배신감에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기도 열심히 한다더니 교회가 왜 그러냐는 선배들의 조롱은 비수처럼 날아왔고 어떤 목사님이 돌아서 가는 제 등 뒤에 대고 ‘목사님이 병주머니라 교인들이 싫테’ 라고 말할 때는 꼭 확인사살을 당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자비라고는 조금도 없는 인간아, 그게 지금 나한테 할 소리냐. 강도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을 보고 레위인과 제사장들은 그냥 모른 척 지나갔다는데 그들이 오히려 선하다. 당신들은 와서 악담을 퍼붓고 내 주머니까지 뒤지고 가는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건강과 재산을 잃고 아주 힘없는 사람이 되었을 때 따뜻한 위로와 사랑으로 덮어줄 사람이 있습니까? 반대로 여러분은 내게 전혀 도움이 안 되고 내 도움만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위로와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까?
세상의 힘을 갖고 있을 때와 없을 때 그 사람을 대하는 인간들의 태도는 너무나 다릅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은 세상의 힘을 숭배하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쉽게 무시하고 우습게 여깁니까? 왜 그럴까요? 그가 세상의 힘을 숭배하는 타락한 죄인이기 때문이며 여러분은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의 힘 즉 마귀의 힘을 숭배하는 그 타락한 인생에게 더 이상 공격과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그 보다 강한 세상의 힘을 가져야 할까요? 상대보다 강력한 세상의 힘을 소유하게 된다면 하루 아침에 전세는 역전이 될 것입니다.
인정받고 사랑받기 원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 누가 나를 업신여기면 고통스럽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두려워 철저하게 자신을 힘 있는 자로 세상에 나타내려 합니다. 나 무시하지 마. 이러는 겁니다. 무시당하고 싶지 않으면 오늘부터 태권도 학원이라도 다니시기 바랍니다.
저는 목욕탕에 갈 때 마다 무서운 사람들을 만납니다. 이 동네에는 몸에 문신한 사람들이 왜 이리 많습니까? 저도 등에다 예수님이라도 그리고 다녀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나 우습게보지 마. 무서운 사람이야 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다윗은 신정국가의 왕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최고의 힘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십니다. 그런 다윗을 향해 감히 대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에게 복종합니다. 신하들과 백성들은 그를 존경하며 충성을 맹세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늙고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을지도 모르는 병이 들어 아주 연약함에 떨어졌습니다. 왕권을 지키지 위해서는 그 자리에 건강하게 앉아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병이 들어 자기 몸을 가눌 수 없게 되면 왕의 권세를 발휘할 수 없는 힘없는 자가 됩니다.
시편 41편은 다윗이 병상에 누워 아주 연약하고 힘없는 한 사람이 되었을 때 겪게 되는 타락한 인간들의 배신에 대한 탄식이 배경입니다. 본문 5절에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그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의 이름이 언제나 없어질까 하며” 사람들은 다윗이 병이 들어 눕게 되자 위로는 고사하고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세상은 살벌한 곳입니다. 힘의 소유의 경중으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는 순간까지 그 힘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힘이 약해지거나 사라지면 짐승들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물어뜯습니다. 타락한 세상은 인간이라는 동물이 사는 정글과 같습니다.
6절과 7절에서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널리 선포하오며.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하나같이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헤하려고 꾀하며” 자리에 누워 있는 다윗을 병문안을 하러 온 사람들이 그 마음에 ‘꼴좋다. 이제 당신의 시대로 다 갔어. 얼마나 살려나’ 이런 악의를 품고 와서는 가증스럽게 다윗을 위로하는 척하며 쾌유를 빌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밖에 나가 사람들에게 악담을 늘어놓습니다. 다윗이 병이 든 것은 그가 하나님께 죄를 짓고 그 때문에 저주를 받는 것이라 떠벌리고 다녔습니다.
8절에서 “이르기를 악한 병이 그에게 들었으니 이제 그가 눕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하오며” 악한 병이란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육체의 치명적인 질병뿐 아니라 억울한 비방이나 중상모략으로 인한 다윗의 심리적 고통까지 말합니다. 심각한 질병으로 힘을 잃은 다윗을 타락한 인생들은 그 상처에 하나님의 저주까지 퍼부었습니다.
9절에서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가까운 친구란 식사를 함께 할 정도로 서로 우애를 나누는 사이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식사를 같이한다는 것은 서로 마음을 터놓고 동고동락하는 혈육을 나눈 형제처럼 친밀한 관계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발꿈치를 들었다는 것은 주인이 평소에 돌보던 짐승에게 뒷발로 차이는 어처구니없는 일처럼 철썩 같이 믿고 신뢰하던 친구가 연약해지자 갑자기 돌아서서 자신을 모함하고 몰아내는 일에 앞장서더라는 것입니다. 제가 인생의 쓴 맛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세상의 힘을 잃게 되면 즉 연약해질 때 누가 친구인지 그때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힘을 숭배하는 세상에서 힘없고 연약한 자로 추락했을 때 그의 백성들은 어떤 자들로 드러났습니까? 이 질문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연약해진 다윗을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곧 이천년 전 유대 땅에 연약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를 향한 성도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천하고 약한 인간의 몸을 입고 낮아지셨습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에 관하여 예언하기를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에도 예수님은 연약한 아기인 것도 모자라 그 모습이 비참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셨는데 왜 편안히 누울 빈방 하나 없습니까? 12절에 “너희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말씀합니다. 여관 방 하나 없어 마구간에 태어나 말의 먹이를 담아 주는 그릇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누워 계십니다.
그런데 그 분이 누구랍니까? 11절에서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말씀합니다. 천하고 연약한 인간의 몸을 입고 편안히 누울 방 하나 없어 말 똥 냄새 펄펄 나는 마구간의 구유에 누워계신 이 아기가 너희들을 구원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다. 이것이 너희에게 전하는 구원의 기쁜 소식 복음이다 전하는 그 말씀을 누구 믿겠습니까?
여러분은 믿으셨겠습니까? 허름한 거지 옷을 입고 가서 내가 이 고을에 부임할 신임 사또입니다. 지나가는 길인데 밥 한 끼 줄 수 있겠소 했다면 부자 영감은 정성스레 대접했을까요? 아마 몽둥이에 맞아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렇게 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다 선포했을 때 이스라엘 교회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분노하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너 같은 게 그리스도면 내가 하나님이다 이랬던 겁니다.
왜 교회와 성도들은 예수님의 고백에 분괴한 것입니까? 사실 그들은 성도라는 이름만 있지 실상은 그들은 세상에 속한 자 즉 마귀의 권세 아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지배하는 건 세상의 권세와 힘입니다. 그들에게 연약하고 천한 인간 예수는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 눈에는 그리스도는 세상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강력한 왕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손에 못 박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께 거기에서 내려와 네 자신을 구원하면 즉 능력 있는 자라면 그 땐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정하겠다는 겁니다. 우리 손에 죽는 하찮은 인간이 무슨 그리스도냐? 그러나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위해 죄인들에 의해 죽어야 합니다.
왜 예수님은 세상의 권세를 잡은 강력한 왕으로 오지 않으셨을까요? 영화 슈퍼맨을 보면 슈퍼맨은 초능력을 갖고 지구에 옵니다. 그는 하늘을 날 수 있고 총을 맞아도 끄떡없습니다. 탈선하는 기차도 구해낼 수 있습니다. 그는 악한 무리들로부터 지구를 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뭡니까? 날기는커녕 걷지는 못하는 아기 예수로 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을 로마의 식민통치로부터 해방시키지도 않으셨습니다. 물질적으로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조합이나 구제 기관이나 노하우를 제공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종교적으로 부패한 이스라엘 교회를 개혁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왕으로 오셨다면 타락한 인생들이 바라던 일들이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타락한 세상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그 타락한 세상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잃은 양을 찾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면 이 타락한 세상에서 구원받을 성도들은 힘이 지배하는 타락한 세상의 그 가치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라는 결론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될 때 육신으로 살던 삶을 회개하고 주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강한 능력과 권세로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었다면 그 힘 앞에 육신에 속한 자들이 반응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보이는 힘을 숭배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뺨을 맞고 채찍에 맞고 못에 찔려 죽으셨습니다. 세상의 힘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런데 그 힘없고 가난한 예수님의 그 은혜에 믿음으로 화답하는 아주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이 찾고자 하는 택한 성도들입니다.
다윗이 병이 들어 연약하고 가난한 자가 되자 인생들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건강하고 힘이 있을 때 함께 식사를 나누고 제사를 드리며 국사를 논했던 친한 친구가 사실은 친구가 아니라 원수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연약함과 낮아짐을 통해 그 주변의 인생들안에 감추어져 있던 것들을 드러내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보다 더 연약하고 아주 형편없는 가난한 사람이 된다면 친구가 과연 그 때도 친구로 남아 있을까요? 전혀 친구가 될 것 같지 않던 사람이 친구가 되지는 않을까요?
결국 세상에서 힘없고 가난한 성도의 친구가 되어 줄 분은 가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본문 시편 1절에서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말씀합니다.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는 가난한 자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은 반드시 사랑으로 하나가 됩니다. 늙고 병든 다윗을 죽을 때까지 돌본 사람은 아비삭이었습니다. 다윗이 병상에 누워 있을 때 부자들은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반역을 일으키지만 가난한 여자 아비삭은 끝까지 다윗의 시중을 들며 함께 했습니다. 그녀가 부자였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여자였다면 죽음을 앞둔 늙은 왕의 후궁의 자리가 영광이 되겠습니까? 아비삭은 다윗이 심히 늙고 연약할 때 이스라엘 사방에서 가장 아리따운 여자로 뽑힌 여자입니다. 그녀의 외모가 늙고 힘없는 다윗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녀의 아름다움은 가난한 자를 끝까지 돌보는 그 마음이 가난한 아리따움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골고다 언덕까지 따라가 가슴을 치며 울던 사람도 그 몸에 향을 바르기 위해 무덤으로 달려가던 여인들도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천년 전 가난한 모습으로 마구간에 초림하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도 밤에 밖에서 양을 치던 가난한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부자였다면 그 밤에 편안히 집에서 쉬고 있었을 것입니다. 종들을 부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밤에 자기 양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욕심 많은 일 중독자들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양 한 마리라도 짐승에게 잃으면 큰 타격을 받는 가난한 목자들입니다. 가난한 아기 예수를 가난한 목자들이 영접하고 기뻐하던 그 역사적인 날이 바로 오늘 성탄절입니다.
그리고 다시 세상에 오실 재림 예수님을 믿음과 기쁨으로 영접할 성도들도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입니까? 돈, 재산 즉 타락한 인간들이 만든 세상의 가치와 그 기준이 되는 물질의 많고 적음에 대한 질문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을 물질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어떤 성도도 목사님이 돈 없다고 무시한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돈 있는 부자라고 알아주는 구나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 외모를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힘과 그 가치와 종교적인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것은 믿음의 가치관을 갖고 세상을 사는 성도의 기본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를 찾으십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의 소유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세상에서 부자 즉 힘 있는 자가 되는 것이 소망인데 예수님은 가난한 자로 오셨고 가난한 자만이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는 인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졌습니다. 가난한 목자들은 아기 예수를 그리스도 믿고 영광을 돌렸습니다. 가난한 아비삭은 늙고 연약한 왕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가난한 마음과 심령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한 것입니다.
재림하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원하는 성도는 반드시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가난한 사람입니까? 다윗은 시편에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합니다’ 기도합니다. 신정국가의 왕이 하나님이 주신 물질적인 풍요가 모자라 가난하고 궁핍하다 궁상을 떠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왜 풍요와 번영의 무대에서 하나님 나는 가난하고 궁핍합니다. 하소연하는 것일까요?
그 기도는 세상의 풍요를 원하는 간구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그 분을 원하는 성도의 호소입니다. 왜 다윗은 번영의 자리에서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할까요? 성도의 심령이란 세상의 물질적인 가치와 풍요로는 절대로 만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심령은 하나님으로만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으로 그 마음을 가득 채우길 원하는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언제나 나는 가난하고 궁핍합니다. 애원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주님과 그 은혜로 충만하게 해 달라는 사랑의 호소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 바로 당신을 원합니다. 이 고백이 심령이 가난한 성도의 간구입니다.
이 시대의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세상과 그 육체로 만족하길 원합니다. 그들은 세상을 사랑하는 부자들입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갈 수 없듯이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이미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 나라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속하여 그 힘을 자기 능력으로 삼아 숭배하는 교만한 자아 숭배자들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은 자신의 감정을 섬기며 그 육체의 뜻과 세상으로 만족하려하는 어리석은 부자는 아닙니까? 정말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다시 내 영혼을 찾아오실 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합니까?
가난, 궁핍, 빈곤 이란 말은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사는 인생에게는 용납할 수없는 말입니다. 그들은 부요, 번영, 풍요, 영화, 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타락한 인생들이 외면하는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원치 않는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타락한 인생들에게 예수는 건축자가 버린 쓸모없는 돌에 지나지 않지만 가난한 자들은 그 돌을 모퉁이 돌로 삼아 믿음의 집을 소망으로 짓고 있습니다.
자신의 자아와 물질과 세상을 사랑하는 부자는 결코 가난한 마음을 이해 할 수도 소유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결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어 텅 빈 마음을 소유한 가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 가난한 심령에 주님만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초림하신 아기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다시 오실 주님을 영접할 성도들입니다. 예수님은 그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자 영감이 마음이 겸손하고 가난한 사람이었다면 허름한 옷을 입고 구걸하는 사또를 영접했을 것입니다. 교만하고 어리석은 부자 성도는 지금도 그 연약한 형제를 멸시함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고 있지만 그들은 영원한 심판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에서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지극히 작은 형제가 곧 나, 예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와 그 믿음으로 고난 받아 심령이 가난한 성도 안에 이미 계시고 마음이 가난한 성도는 지극히 가난한 그 형제를 주님의 사랑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성도가 가난한 형제를 사랑함으로 그 가난한 형제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가난한 성도가 되어 가난한 모습으로 함께 계시는 주님을 영접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아기 예수로 오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