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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Neckless of Time-
14.보물찾기
“오랜만이야. 그간 잘 지냈어?”
“아, 나야 뭐.”
“근데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아이들 사이에서 간신히 세라프를 빼 온 그들은 5층 옥상에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쉬는시간에 물어보려 했지만 그조차도 세라프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대화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들사이엔 어딘지 모를 어색함이 물들어 있었다. 오랫동안 서로를 봐 왔었으면서 이제야 대화를 나누니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뭐, 여기까지 온 건....예전부터 이 곳을 한번 와 보고 싶어서 그런 것 뿐이야. 그리고 너에 대해서 궁금한 점도 있고.”
“...나에 대해서?”
난데없이 세라프가 데르나를 지목하자 데르나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세라프를 바라보았고, 세라프는 싱긋 고양이같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네가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등등등♡”
.......앙큼하게 끝에다가 ♡를 붙이는 건 뭐냐...왠지 저번에 봤을 때는 순수하게 보이고 그랬는데 왠지 지금 보니 상당히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게다가....데르나도 그 질문엔 곧바로 대답해 줄 수 있었다. 아니, 대답하지 않을 하등의 변명이나 이유같은 건 전혀 없었다. 자신은 머언 과거에서 왔으며, 어머니, 정확히 말해서 리프 일란시스라는 사람에게 마법을 전수받았고, 우연히 본 네클리스 오브 타임에 호기심을 갖고 마나스톤을 열심히 소비시킨(?)덕분에 여기에 오게 되었다는 것까지. 그러나 말을 해 준다면 무슨 사태가 벌어질지 몰라 그녀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었다.
‘....나중에 따로 알려 줘야겠다.’
세라프는 아틀란티스와 네클리스, 링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말해도 크게 상관은 없을 거라 단정한 데르나는 나중에 알려주겠다고 말하는 대신 어색하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대해 세라프는 그동안 인생을 살아온 숱한 경험을 통해 그것이, 나중에 밝히겠다는 것까진 모르지만 밝히기 곤란하다는 미소라는 걸 알아채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아, 참. 학교 소개 안 해 줬지? 내가 밥먹고 학교 소개시켜 줄게.”
.......그 침묵을 깨듯 해왕이 넌지시 세라프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데르나가 살짝 해왕을 째려보며 물었다.
“너, 나한텐 학교소개 해 주었어?”
“.......그러고 보니까 안 해 줬네...?”
“...나도 따라갈 거야. 알았지?!”
“어.”
“.....................왜 이렇게 간단히 승낙하는 거야?”
“왜? 승낙해 주는 게 이상해? 그럼 혼자 놀든지.”
해왕의 말에 데르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세라프는 이들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느낌에 기분좋은 미소를 지었다.
점심시간 후. 지하에서 화려한 식사를 마친 세라프와 데르나와 해왕은 해왕의 안내 하에 학교 구석구석을 나다니기 시작했다. 해왕은 열심히 설명했지만 세라프와 데르나는 별다른 감흥이 이는 눈치는 아니었고, 대신 그들은 남자들의 엄청난 시선을 받으며 순식간에 2,3학년 남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물론 1학년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그러는 동안 해왕은 자신의 등줄기로 날아오는 날카로운 시선들에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며 상당히 괴로워하는 표정이었다. 왠놈의 시선들이 이렇게 따가운지...덕분에 그는 1,2,3학년들의 공적이 되어 버린 기분이었지만 태연해지려 부단히 애를 썼다. 보라면 보라는 표정으로.
그러던 그들의 발걸음이 조금씩 무거워질 무렵.
“아, 도서실은 어디야?”
“응? 도서실?”
“응. 심심하면 책이나 빌려보고 싶은데...”
“우리 학교에 책을 보관하는 곳이 있긴 하지만...”
해왕은 말끝을 흐렸다. 그곳으로 데려다 줘도 될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는데, 그가 그렇게 고민하는 이유는 도서실을 개방하지 않는다는 것과 책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다는 것.....보다 이들이 억지로 그 곳에 들어가려고 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이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어떤 마법으로든 자물쇠를 따고 들어가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새 해왕의 발걸음은 도서실로 이동하고 있었다. 도서실은 특별실들이 모여 있는 5층, 오른쪽 방향으로 맨 끝 방향. 아, 아니다. 맨 끝은 음악실이었지. 그러고 보니까 도서실은 음악실 옆이었다.
터벅 터벅
“.....응?”
“....왜 그래?”
갑자기 해왕이 발걸음을 멈추자 데르나와 세라프도 우뚝 그 자리에서 멈추어섰다. 그리고 해왕은 앞에서 들리는 묘한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찰칵찰칵 하는 소리가 마치 자물쇠를 따는 소리 같았지만, 익숙한 철컥 소리는 바로 총알이 장전되는 소리였던 것이다.
‘......그 녀석들인가?’
해왕은 가만히 주먹을 말아쥐었고, 뒤에 서 있는 두 명의 여성을 향해 가만히 있으라는 듯한 손짓을 하고는 조용히 도서실로 향했다. 그리고 조용히 도서실과 계단 사이의 사각 지대로 숨어들어간 해왕은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뛰쳐 나갔다.
“이야아앗!”
“으와앗!”
콰당탕
“....................어라? 성진....?”
“으윽.....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아아, 미안 미안.”
자신이 넘어뜨린 의외의 인물을 보며 해왕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넘어져 있는 성진을 일으켜 세워 주었다. 이 얘가 왜 여기 와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을 가지면서.
“근데 여긴 무슨 일이야?”
성진이 옷을 툭툭 털며 넌지시 묻자 해왕은 싱긋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데르나랑 세라프랑 학교를 안내해 주는 중이지. 너는 왠 일로 여기까지 왔냐?”
“나는 도서실 한 번 들어가 보려고 했지.”
하면서 성진은 손가락을 들어 바로 옆 도서실을 가리켰다. 도서실은 얼기설기 얽혀 있는 창살로 굳게 잠겨 있었고, 성진의 손에는 조그만 총이 들렸는데 옛날에 봤던 것과는 훨씬 작고 사뭇 다른 모양이었다.(후에 안 사실이지만 H&K의 VP70이라는 이름의 권총이었다.)
“....이걸로 자물쇠를 부수고?”
“응. 그리고 문을 열고.”
“.......”
어떻게 학교에서 총을 쏠 생각을 하는지...이 녀석, 처음엔 그렇게 안 봤는데 상당히 과격한 스타일이다. 그러면서 그 미소는 또 뭐냐고.
그러는 동안 뒤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고, 해왕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데르나와 세라프였다.
“응? 성진 아냐. 여기서 뭐 할려고 했어?”
“여기 좀 들어가 볼려고.”
그제야 세라프와 데르나는 그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곳에 달려 있는 ‘도서실’이란 이름에 뭔가 찾고 있던 걸 찾았다는 듯 밝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뭐 잠겨있으니 별 수 있나...
“...해왕. 여기 도서실 맞아?”
“맞긴 맞지만...항상 잠겨 있어. 무슨 자료들만 있다는데.”
“...내가 열어 봐야지.”
“아니, 내가 열게.”
데르나가 나서기도 전에 먼저 세라프가 문에 가까이 다가갔다. 성진은 저걸 어떻게 여나 하는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고, 데르나와 해왕은 세라프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은근한 미소를 띄웠다. 기도할 때는 왜 이리도 순수하고 귀여워 보이던지. 그 뒤에 일어날 일을 모른다면 귀엽다고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그런 모습이었다.
“하나님, 저 자물쇠 좀 따 줘요.”
“...........”
“...........”
......상당히 말투가 건방져졌군.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그녀에게서 무형의 마나가 뻗어 나갔고, 그 마나가 자물쇠에 달라붙자 좌물쇠는 틱, 하는 소리와 함께 풀려 버렸다. 그러자 데르나는 기운차게 말하며 일행의 앞에 나섰다.
“열렸다. 가자.”
“좋아.”
데르나의 말에 세라프가 뒤를 따랐지만 해왕은 우리가 이래도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고, 한편으로 성진은 세라프의 이상한 마법을 보고 무척이나 놀라는 표정을 했다.
‘.....저걸 잘 이용하면 데르나에게서 네클리스와 링을 얻을 수 있을지도...’
“성진, 안 들어와?”
“응? 아...알았어.”
세라프의 말에 성진은 예의 그 미소를 띄워 보였다. 그러자 세라프도 마주 웃어 주고는 쏙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도서실. 높이는 교실보다 약간 높아 보였다. 갈색 책장 때문에 높여 보이는 걸까? 규모는 교실 한 칸 크기로 작은 편이었지만 사실 이 정도도 감지덕지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무렵 그들은 도서실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응? 이건... 어린왕자 아냐.”
“어린왕자? 동화야?”
“동화라고 하기엔 너무 절망적이지만....조금 긴 동화라고 할 수 있지.”
해왕의 말에 데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여기저기로 눈을 돌렸다. 철학, 역사, 윤리...문학.
“어디 보자....눈물을 짓는 새, 박달나무, 광장, 한국단편집, 타임시리즈 1.시간의 관, 2.메모리즈, 3.Neckless of Time.....?”
데르나는 한 귀퉁이에서 시리즈로 되어 있는 ‘타임’시리즈 중 Neckless of Time이라는, 검은색 책자의 금색 활자가 박힌 책을 하나 집어 들었다. 왠지 자신이 갖고 있는 목걸이와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때였다.
팔랑
톡
“.....?”
마악 책장을 넘길 무렵, 책에서 뭔가가 툭 떨어지며 데르나의 시선을 끌었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주웠다.
무슨 룬어같이 생긴 글자들만 빼곡한 쪽지였다. 마치 암호문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나마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숫자뿐이었고, 글자들은 일정한 규칙을 가진 듯 몇 개씩 똑같은 글자가 반복되어 있었다. 일행은 모두 그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게 뭐야?”
“나도 잘 모르겠어. 암호문 같은데...룬어인가?”
“아니, 내가 알기론 이런 룬어는 없어.”
데르나는 그렇게 말하며 종이쪽지를 쭈욱 훑어보다가 그나마 알아볼 수 있는, 숫자들을 주욱 나열해 보았다. 3,4,1,5,7..............
“...7만 빼고 전부 5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군.”
언제 왔는지 해왕이 다가오며 날카롭게 찔렀다. 7만 빼고라.....그 말을 듣던 데르나는 뭔가 스쳐간 것이 있다는 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7을 제외한 나머지는 층수를 이야기하는 건가?”
“예외가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으음......결국 그걸 써야 하나.”
그때 성진이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뭔가를 뒤적거렸고, 일행의 눈길은 다시 그 곳으로 쏠렸다. 성진이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검은색 손바닥 크기의 PDA였다.
“우와, 이게 PDA?"
“뭐, 그렇지.”
“근데 그걸 쓴다는 게 무슨 소리야?”
“으음.....뭐랄까.......암호 해독기 같은 거야. 일단 이 글자들을 숫자로 만든 다음에, 번역할 언어를 선택하고 음운의 반복을 통해 해독하는 거지. 그래도 완전하게 해독되지는 않겠지만 그런 대로 도움이 될 거야. 데르나, 그 종이 좀 줘 봐.”
PDA에 이런 걸 달고 다니네...해왕이 그렇게 생각할 무렵 데르나는 그에게 자기가 주운 종이를 건네주었고, 성진은 2~3분 동안 길다란 펜 같은 걸로 이리저리 긁적거리더니 뭔가 된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3층 아래 어학실, 4층아래 양호실, 1층의 큰 교무실, 5층의 장서실, 각층 왼쪽에서 7번째 교실...”
“우와. 그게 그렇게 돼?”
“안돼는 글자는 내가 끼워 넣었어. 상관없지?”
“물론이지. 그런데....”
“...왜?”
갑자기 해왕이 그렇게 말하자 세라프가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해왕에게 물어왔고, 해왕은 시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1시 58분이야.”
“....조금 있으면 종이 친다는 이야긴데.”
“다음 시간에 가 보지 뭐, 아, 그럴 게 아니라 쉬는 시간에 가 볼까?”
“좋지!”
그렇게 의견을 맞춘 넷은 교실로 걸어갔다.
쉬는시간.
“3층아래 어학실, 2층이라는 이야긴데..해왕, 2층에 어학실이 있어?”
“응. 마침 2층에 어학실이 있어.”
“좋아, 내려가자.”
쉬는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장서실에 들어갔던 일행은 다시 모여 새로 번역한 종이와 원본 종이를 들며 그렇게 이야기했고, 갈곳이 정해지자 일행은 교실을 나와 2층으로 거침없이 내려갔다. 사실 암호문이 해독되었기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글자가 해독되지 않았더라면 이 종이는 그냥 쓰레기통에 들어가 버렸을 테니까.
그러던 일행은 곧 어학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야. 근데 잠겨있는걸.”
“주변에 사람이 못 보게 가려 줘. 언락.”
달칵
데르나의 목소리에 해왕과 성진이 주변에서 그녀를 가려주었고, 그녀의 목소리에 따라 자물쇠는 달칵 소리를 내며 열려 버렸다. 그리고 이제 무방비 상태가 된 어학실로 네 명의 사람들이 유유히 들어섰다.
어학실은 언뜻 보기엔 컴퓨터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각 책상마다 모니터와 헤드셋이 달려 있었고, 본체와 키보드, 마우스만 없을 뿐 책상배열조차도 컴퓨터실과 흡사해 보였다.
“.....근데 데르나.”
“응?”
“이 넓은 곳에서 어떻게 종이를 찾아?”
...확실히 해왕의 말대로 장소가 너무 광범위했다. 보통 교실의 1.5배 크기에, 숨길만한 장소도 무한히 많은데 언제 다 뒤지며 들추어보며 주울 것인가...
‘내가 종이를 찾은 건 도서실 책갈피 사이. 그렇다면 아무래도 책갈피 사이에 끼여 있을 것 같은데....여기서 책이 있는 데라곤 저기 책장과 그리고.....’
“하나님, 저희가 찾는 물건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세요.”
또 다시 들려오는 낭랑한 세라프의 목소리에 데르나는 잠시 멍-하게 그것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머리를 통통 때렸다. 마법사가 마법으로 찾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니....
데르나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세라프의 두 손에서 모인 빛은 곧 교실의 가운데로 이동했다. 그리고 몇 번 그 빛은 허공을 맴돌다가 어느 한 곳으로 움직였는데, 그곳은 바로 책장 과 책장 틈 사이로 들어가 있는 낡은 필통으로 향했다. 그리고 일행은 거기서 뒤에 'ㅁ‘자가 새겨진, 앞내용은 똑같은 종이를 찾을 수 있었다.
“....'ㅁ‘?”
“잠깐, 장서실에 있는 건...‘ㅜ’자인데?”
“.....뭔가가 있나 보네. 일단 계속 가자.”
“그 다음은 양호실이야.”
그 말에 일행은 모두 양호실로 향했다. 양호실은 3층에 있었는데, 일행이 무턱대고 들어가려는 것을 보며 성진은 급히 그들을 말리며 말했다.
“잠깐, 양호실에 들어갈 구실이 있어야 하는데?”
“아, 그런가? 으음.....그럼....해왕, 아픈 척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머리아프다고 하지 뭐.”
“그래. 그러면 너랑 같이 들어가서 서치 마법으로 종이를 찾을게. 너희 둘을 그냥 여기서 기다려 줘.”
“알았어.”
성진과 세라프의 고갯짓을 보고 둘은 곧 양호실로 들어갔다.
양호실은 양호실답게 깨끗하고 산뜻한 이미지가 지배적이었다. 백색 레이스 커텐과 백색 시맨트 벽에 두 점의 그림이 방 안을 꾸미는 장식물의 전부였고, 어쩌면 삭막해 보일수도 있는 양호실 한 켠에는 길게 머리를 기른 한 여자선생님과 남학생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해왕은 남자답게 양호선생님-어쨋든 여자니까-에게 시선이 고정되었고, 데르나는 처음 들어오는 양호실 모습에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자, 이제 됐다. 가 봐라.”
“네. 안녕히 계세요.”
곧 남학생이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해왕은 당연하다는 듯 아까 그 학생이 앉던 자리에 가 앉았고, 선생님은 해왕을 보다가 그 뒤의 데르나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전학왔다는 그 마법사야?”
“네? 아, 맞, 맞는데요.”
갑작스런 물음에 데르나는 더듬더듬 대답했고, 양호선생님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데르나를 바라보았다.
자신도 대학 때에는 권위자라 불렸을 만큼의 아름다운 얼굴인데, 데르나를 바라보니 자신의 얼굴은 오히려 초라하고 볼품없기까지 느껴졌다. 물론 조금 과장한 말이지만, 마치 인간 얼굴의 황금비를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것보다 양호선생님의 시선을 사로잡는 건 ‘의사’라는 호기심에서 오는 마법사들의 몸 구조였다. 지금 양호 선생님은 그녀답지 않게 데르나를 해부해 보고 싶다는 징그런 상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기, 선생님. 저 머리가 아파서 왔는데...”
“응? 아아, 그래. 여자친구 잘 사귀어 두었네.....머리가 어떻게 아프니?”
묘한 여운과 함께 면담을 시작한 해왕과 선생님을 뒤로 두고 데르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다 숨겨두었을라나.....
‘......서치.’
데르나의 말과 함....아니, 생각과 함께 주변으로 마나가 퍼져나가자 해왕은 슬금슬금 밀어닥치는 마나의 파도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으나, 무엇을 적고 있던 양호선생님은 해왕의 그런 표정을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동안 데르나느 천천히 주변을 탐색해 나갔고, 익윽고 그녀의 얼굴은 뭔가를 찾았다는 희안이 감돌았지만 그조차 금방 사라져 버렸다. 하필이면 선생님 맞은편 책꽂이냐......그렇다고 보물찾기를 포기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데르나는 조심스럽게 선생님의 뒤쪽으로 돌아가 책꽂이 근처에 살짝 기대어 섰다가 뭔가 발견한 양 연기를 하면서 책을 들며 물었따.
“선생님, 저 이 책좀 봐도 돼죠?”
“으음....맘대로 하렴.”
별로 신경쓰지 않겠다는 말인 것 같았지만 선생님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해왕에게서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오히려 생생한 게 활기를 띄우고 있으니 이상하게 느껴질 만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자연히 그녀의 시선은 데르나에게 돌아가게 되었고, 그녀는 곧 데르나의 뜻을 알게 되었다. 종이쪽지를 들며 좋아하다가 책을 덮고 해왕을 톡톡 치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해왕이 양호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황급히 자리를 벗어나려 하자 선생님도 싱긋 웃으며 해왕을 보내주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었으니.....
“......그 종이, 지금은 사회에 나가 있는 한 여학생인 친구와 추억을 남기고 싶다면서 나에게 맡긴 거야. 이제는 까먹은 것 같지만. 나도 못 푼 암호문인데 너희들은 잘 풀어낸 것 같네?”
화들짝
순간 일행의 눈에 불이 번쩍이는 듯 했다. 알아채다니........그러나 그에 상관하지 않고, 오히려 선생님은 그런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나중에, 뭐 찾으면 나한테도 알려줘야 돼!”
“네, 네......”
데르나는 기계같은 목소리를 내곤 또 기계같이 양호실을 벗어났다. 기계의 행진은 결국 양호실 문이 닫히는 것으로 흐느적흐느적 풀어져 버렸고, 그 뒤에 재촉이는 듯한 성진과 세라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때? 찾았어?”
“으응....근데 양호선생님에게 들킨 것 같아.”
데르나는 그렇게 말하며 종이쪽지를 내보였다. 그 뒤에는 ‘ㅣ’자가 쓰여 있었다.
“.......미? 미로 시작하는 단어가 뭐가 있지?”
“무척 많지. 뭐.......나머지 뒤져보면 나오지 않을까?”
해왕의 말을 데르나가 능숙하게 받자 일행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고, 곧 다음 곳으로 이동했다.
다음에 가야 할 곳은 다름이 아니라 교무실이었다. 그것도 1층의 큰 교무실. 온갖 책상과 선반이 있고 학교 내에서 유일하게 두 개 교실을 합쳐놓은 크기의 교실을 쓰는 곳이었다. 이번에는 성진과 세라프가 한 조가 되어 들어갔고, 둘은 바깥에서 가만히 그들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
“............”
서로 붙어다니던 둘에게서 갑자기 한 바탕 싸운 연인처럼 서먹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특히나 데르나가 그런 증상이 더 심했는데, 그녀는 평소 대하던 때와는 다르게 해왕에게서 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
“........”
“.....데르나.”
“,,,,응?”
역시 먼저 말을 걸은 것은 해왕이었다. 그는 뭘 생각하는지 멍-하게 서 있다가 지금 이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에게 말을 건 것이었는데, 데르나는 약간 당황한 듯 대답해 주었다.
“저번에 나 병 걸렸을 땐 고마웠어.”
“아, 뭐. 그런 걸 갖고....”
“......”
“......”
...다시 한 번 침묵. 그러나 이번엔 데르나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아, 음, 전에 너 총 쏘던 거. 꽤 멋있더라.”
“아, 헤헷. 고마워.”
“.......”
“......”
또 다시 일어난 침묵. 그러나 이번 건 조금 길었는지 몇십 초가 지나도 서로 아무말이 없었다. 그러던 그 때.
“....데르나.”
“아, 응?”
갑작스런 부름에 데르나는 아까와 같이 당황하는 듯 대답했고, 데르나는 자신이 네클리스 오브 타임을 사용해서 몇 분전의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그러나 이어진 해왕의 말은 그녀로 하여금 오히려 자신이 미래로 날아간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우리, 본격적으로 사귀지 않을래?”
“..,뭐?”
“우리 한 번 사귀어 보자구.”
.....이게 무슨 청천벽력, 말 그대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같은 소리란 말인가. 게다가 오크가 드래곤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 같은 이 부자연스러움이란...?
‘잠, 잠깐. 사귀자면 친구 이상의 연인으로써 사귀자는 말이야? 그, 그런....난 아직 준비가...’
“....저, 저기, 해왕아. 나, 나중에 결정하면....”
“.....지금 결정해 주었으면 싶은데.”
그 말에 다시 한 번 나중에 알려주겠다고 말하려던 데르나는 해왕의 초롱초롱하고 다부진 그의 얼굴에 금방 입을 닫았다. 이, 이러면 어떻게 해야 되지? 승낙? 거절? 승낙? 거절? 으으윽.......!
드르륵
“후우, 힘들다. 여기 종이쪽........지......무슨 일 있었어?”
“어어? 아, 아무것도 아냐. 으윽, 해왕아.....”
“대답은.....?”
때마침 성진이 날 살리는구나, 했는데 해왕은 그에 상관없다는 듯 계속 대답을 요구했다. 그러자 성진과 세라프는 무슨 일인지 몰라 둘을 빤히 바라보았고, 이제 정말 벗어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데르나는 살짝 땀을 흘렸다. 그러나 그 순간....
댕댕댕댕
“.......아, 마침 종이 쳤네? 자자, 얼른 들어가자~! 나머지는 다음 시간에 해야지~!”
“어어? 야, 대답은~~!”
데르나는 서둘러 교실로 재빠르게 뛰어갔고, 해왕은 그런 그녀의 뒤를 쫓았다. 세라프와 성진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궁금해했고.
쉬는시간동안 특별실에 있는 모든 종이를 입수하는데 성공한 그들은 청소시간을 이용해 각층 왼쪽에서 7번째 교실에 가는 동안 갖은 고초를 당해야 했다. 변태같은 상급생들에게서 도망나오느라 정신없이 다니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의 묘한 시선을 받으며 쓰레기통을 뒤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그들의 몰골은 상당한 좀비(....)가 되어 있었고, 그들은 마지막 4층 교실을 끝으로 간신히 종이들을 모을 수 있었다.
“후아......죽는줄 알았네.”
“그러게.....그나저나 한 번 조합해 볼까? 8곳 다 가 봤지?”
“응. 순서대로 조합해 볼게. 으음.......”
“ㅁ, ㅣ, ㅅ, ㅜ, ㄹ, ㅅ, ㅣ, ㄹ......?”
“.....미술실?”
“미술실이라고?”
미술실....미술실이라면 위쪽인데....
“좋아, 가 보자.”
일행은 다시 그 곳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해왕의 얼굴은 도서실에 갔을 때처럼 어둡게 변해 있었다.
미술실. 미술실은 도서실과 같이, 이제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금지된 영역이 되어 있었다. 마음 연약한 남자 선생님이 한 학생의 비아냥에 목매달아 죽었다는 전설이 있는데,(선생님도 그렇지만 학생도 어지간히 했나 보다. 선생님을 죽게 만들 정도니....) 경찰이 조사하고 학생은 정학을 받았으며, 미술 선생님이 새로 바뀌면서 사건은 무사히 해결된 듯했다. 그러나 이번엔 새로 들어온 미술선생님이 차에 치여 죽고, 그 다음으로 들어온 선생님도 미술실에서 투신을 했는데 문제는 자살로 보이지도 않고, 뭔가에 집어던져지듯 그렇게 5층에서 밖으로 던져졌다는 것이었다. 결국 선생님의 죽음은 의문사로 남겨졌고, 그렇다고 아이들의 미술 수업을 그만둘 수도 없어서 미술실을 없애고 새로 부임한 미술 선생님에게 이 미술실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당부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미술실이 없어진 것도 아니었다. 소문을 들어본 적이 있는 인부들은 미술실을 철거하기를 꺼렸고, 티격태격하다가 임금을 올려주는 조건으로 철거를 시작했지만 인부들은 전부 철거 도중 석고상에 맞기도 하고 의자에 걸려 넘어지거나 해서 대부분 최소 전치 8주 이상의 진단을 받게 되었고, 미술실이란 미궁은 영원히 학교의 한켠을 차지한 채 그대로 방치되게 된 것이었다. 어쩌면 ‘해골이 돌아다닌다’느니 매일 마다 미친 과학자 목소리가 들린다느니 하는 과학실보다 더 음침하고 무서운 이야기였다. 왜냐면 현실성이 있으니까. 문득 아이들에게서 듣던 미술실 이야기를 떠올려 본 데르나는 식목일날 밤 과학실에서의 일이 생각나자 사시나무떨 듯 바르르 몸을 떨었다. 그 이유를 모르는 일행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지만.
“...다 왔어. 여기야.”
...해왕이 가리킨 그 곳. 정말 전설대로 미술실은 음침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도서실이나 어학실같이 철장이 얼기설기 쳐져 있었고, 자물쇠는 두 개씩이나, 그것도 앞문 뒷문 두 문에 각각 두 개씩 걸려 있었고, 외관상으로도 오랜 세월 묻혀있었던 흔적이 역력해 보였다. 창문가와 그 너머에 보이는 교실은 먼지로 뒤덮혀 있었고, 해왕의 말에 참담한 시선으로 고개를 돌리던 일행은 곧 세라프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하나님. 자물쇠 좀 따 주세요.”
...왠지 지금과는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 그러나 채 그런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달칵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열렸다.
“됐다, 들어가자!”
드르르륵 탁
저벅 저벅
“...후우, 이놈의 먼지.”
성진이 손바람을 저어 먼지를 가라앉히다가, 문득 어두워진 데르나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처음에는 발랄하게 들어갔던 세라프도 표정이 굳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평소에도 편한 분위기를 만들던 해왕도 얼굴을 굳혔다는 건데....
“......전설이 사실인 모양이야.”
“혈향이 감도는 영력이군.”
“....내가 지금 느끼는 게 영력, 맞지?”
“...정확히 네가 뭘 느끼는지는 모르지만 맞는 것 같다.”
성진을 제외한 모든 일행은, 마치 검붉은 액체가 홍수처럼 밀려와 자기를 묻어버리는 것 같은 기분에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눈을 가린 듯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성진은 자기도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남고 싶었는지 눈을 갸날프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의 눈에는 오직 먼지쌓인 미술품들만이 자리잡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나머지 일행이 지금 무슨 느낌을 받고 있다, 라고 말하면 성진은 더 이상 그 느낌을 알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라프는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따. 물론 모든 일행을 대신해서, 또 자기가 먼저 나섰으니 자기가 들어간다는 것 같았지만, 그녀의 얼굴엔 전혀 두려움이나 공포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차분하면서도 어딘가 상기되어 있다고나 할까? 그녀에게 얼마나 대단한 게 있는지는 모르지만 왠지 모르게 무모하단 생각도 드는 행동이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 백날 앉아있을 수도 없었다. 일행은 곧 세라프의 뒤를 따라갔다.
“대단한 기운이군.”
“사무친 한을 기반으로 다른 죽은 영까지 뭉쳐서 힘이 더해진 것 같아.”
안으로 들어갈수록 강하게 느껴지는 기운. 미술실 중앙에 다다르기도 전에 무딘 성진의 피부에도 오싹한 소름이 돋을 만큼 영력이 강해지자 일행은 슬쩍 마른침을 삼켰다.
“.........”
“.........”
“....되게 조용하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뜻밖에도 지금 가운데로 나아간 일행에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기를 2분 정도가 지나자 아예 긴장이 풀려 버린 일행의 머리엔 스멀스멀 다른 생각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지금이 몇 시일까, 미심쩍지만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세라프는 참 대담하군 등등......그 중 공통적으로 일행의 머리를 사로잡는 것은 바로 일행이 처음에 정하고 들어온 목적 때문이었다. 미술실 어디엔가 무엇이 숨겨져 있을 거란 생각.
“으음.....어디 있을라나~~♪”
....긴장감을 푸는 데에는 세라프의 밝은 목소리도 한몫을 했다. 왠지 모르게 발랄한 그녀와 있으면 두려운 중에도 마음이 풀리는 것 같은데......무슨 이유일까?
“어디 있는 거야?”
아무도 듣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주변을 향해 나직히 중얼거렸다. 그리고 일단 선반 근처부터 살펴보기 위해 그녀는 그곳으로 다가갔다. 찾는 물건을 알고 있다면 모를까, 물건이 뭔지도 모르니 서치 마법을 사용할 수도 없다. 결국 어쩔 수 없이 그들은 직접 육안으로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라프가 마악 책장에서 몸을 구부릴 때였다.
덜컹
“앗, 세라프!”
“안 쉘, 쉴드!”
철컥 타아앙
퍼어억 우수수수
갑자기 일행이 요란스럽게 소리를 지르더니, 데르나는 세라프에게 쉴드를 형성해 주었고, 성진은 이번엔 전혀 다른 총, USP나 VP70과는 사뭇 다른 데저트 이글을 들어 순식간에 세라프를 향해 떨어지는 석고상을 박살내 버렸다. 세라프도 그제야 긴장되는지 서둘러 그 곳을 벗어나 날카롭게 주변을 살폈다,
“...........”
“...........”
....구구궁
주변이 요란스럽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행의 앞, 교실 벽면에서부터 남루한 정장 차림의 안경을 쓴 한 남자가 나타났다. 헬쓱한 인상에 전에 아틀란티스에서 보았던 것처럼 끝으로 갈수록 흐려지는 모양이었고, 그에게서 뻗어나오는 영력에 일행은 조금씩 긴장하기 시작했다.
“.......내 미술실엔 무슨 일이지?”
허공에서 들리는 듯한 목소리. 낮은 톤에 어두운 목소리였지만 중량감은 느껴지지 않았고, 데르나는 말이나 걸어볼 요량으로 입을 열었다.
“저희는 학교에서 발견된 종이를 토대로 보물찾기 비슷한 걸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종착점인 이 미술실까지 오게 된 거죠. 당신이 예전에 투신자살했다는 선생님인가요?”
“......아니, 그 혼은 내 몸의 일부분이 되어 있고, 나는 맨 처음, 이 곳에 목을 맨 그 선생이다. 그리고....너희들의 용건은 그게 전부인가?”
“네. 이 미술실을 어떻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데르나의 확고한 의지가 담긴 말에 선생님으로 보이는 사내는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일행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는데, 전설이 사실이었다는 공포감과 귀신을 직접 보고 있다는 그 두 가지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라프는 그다지 큰 두려움은 느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너희들은 옛날 선배들이 놓고 간 종이를 발견하고 온 것이겠지?”
“....알고 계셨네요.”
“그래. 그 두 여자 선배들도 뭔가 알고 있었는지 처음으로 나를 발견했었지. 가끔씩 놀러와서 나에게 학교 사정을 알려주기도 했었어. 그들 중 한 명은.....누구의 딸이라고 했는데...잘 생각이 안 나는군. 그 둘은 상당히 정다웠지. 뭐랄까, 마치 수년 동안 같이 사귄 친구를 보는 것 같았지. 그리고 졸업할 때, 종이 8장을 가져온 아이에게 선물을 주라고 했었어. 다행히 너희들은 나를 발견할 수 있는 데다가 그리 두려워하지도 않는 모양이군.”
“잠깐만요. 선물이요? 그게 뭔데요?”
“선물이 뭐냐면 말야.....”
스스스스
다리가 보이지 않던 그 선생님은 뱀처럼 스멀스멀 다가오기 시작했다. 데르나는 두려움은커녕 결연한 의지가 다분한 표정이었다. 언제 와도 나는 너를 맞아줄 수 있다는 포용력도. 그러나 그때였다.
철컥 타앙
피아앙 팍
“꺄악! 뭐하는 거야, 성진~~!”
“으윽, 맞지도 않네.”
갑자기 위기를 느낀 성진은 선생님을 향해 총을 쏘았다. 그러나 총알이, 그것도 보통의 납을 사용하는 탄환이 귀신이 된 선생님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결국 총알은 선생님을 관통하고 뒤쪽 벽으로 날아가 박혔으니....
“,,,,,,역시 너희들은 날 해치려 온 거야. 그렇지?”
“네? 아, 아녜요! 저희들은.......!”
“이 자식들.......!”
선생님이 점점 화를 내는 것에 따라 주변의 집기들이 날카롭게 날을 세우며 허공에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데르나는 한 번 더 대화를 시도하려 했지만 해왕의 고갯짓에 어쩔 수 없이 막을 준비를 했다.
‘영력에 강한 마법이라면, 아무래도 고스트는 어둠 계열이니까....빛 속성으로....‘
“쳇, 먹어랏!”
슈아악
데르나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선생님의 손짓에 따라 석고상이 무지막지한 속도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데르나는 석고상을 보다가 살짝 주문을 외우며 세라프에게 메시지 마법을 시전했다.
“매직 미사일, 메시지!”
씨잉 씨잉
퍼퍽 팡 후두둑
‘세라프! 내가 널 보호해 줄 테니까 너는 저 선생님의 영력을 뺏어 버릴 정도의 공격을 준비해! 소멸시키지는 마!’
‘알았어. 조심해, 데르나!’
데르나의 마법에 세라프는 그렇게 대답해 주곤 곧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고,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는지 선생님은 석고상뿐만 아니라 조각할 때 쓰는 칼이라든가, 날카로운 촉 같은 것까지 동원해 그들을 공격했다. 데르나는 이번엔 매직 미사일로 막기엔 어렵다고 생각하며 방어 마법을 시전했다.
“안 쉘 랄 사울, 그라운드 쉴드!”
파파팡
퍼석 퍽 채앵
순식간에 반구형 쉴드가 무수히 생기며 벽을 이루자, 석고상과 조각칼들은 날카로운 소음을, 그리고 묵직한 파공성을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 때, 세라프가 마법이 완성된 모양인지 크게 주문을 외웠다.
“하나님, 하나님을 거스르는 모든 역된 무리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릴리브(Relieve)!"
쿠아아아
“으아악!”
세라프의 손 끝으로 백색 파동이 펼쳐지더니 이내 선생님을 감싸 돌기 시작했고, 선생님은 백색의 빛무리에 갇혀 괴로워했다. 그 모습이 측은해 보이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엔 다른 말이 없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영력이 빠져나가자 세라프는 손을 거두었고, 선생님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까 보여줬던 위압감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
“............”
“.....흑, 흐흑.....!”
.....공하헌 울음소리가 허공에 맴돌았다.
“...그래서 그렇게 된 거야. 지금은 어느 대학에 다니고 있을지......”
“그렇군요.”
데르나와 선생님, 아니 울음을 멈춘 선생님 사이는 무척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하긴 데르나가 나서서 선생님을 다독이니(뭐 건들 수는 없었지만.) 그것에 고마움을 느낀 선생님을 그녀를 따르게 된 것도 당연했지만, 성진과 해왕은 여전히 다가서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너희는 8장 종이를 다 가지고 있니?”
아까와는 다르게 부드러워진 목소리. 그 목소리에 데르나가 주머니에서 8장의 종이를 꺼내 내밀자 선생님은 눈가의 눈물을 닦고는 그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뭔가 검증하는 듯한 눈길. 이윽고 그 눈길이 지나가자 선생님은 저음으로 일행에게 싱긋 미소를 지어 주고는 투명한 손을 내밀어 한 곳을 가리켰다. 미술실의 제일 구석진 곳. 데르나는 그 곳에 다가가 뭔가를 뒤적거리더니 길다란 것을 꺼내었다.
“.......샤프?”
“그래. 오래되긴 했지만 아직도 작동하고 있고, 내 영력까지 더해져서 샤프심은 왠만해선 부러지지 않을 거야. 가져가.”
“네.......감사합니다.”
왠지 받는 측에서 마음이 얹잖아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때였다.
댕댕댕댕
“....아, 수업 시작한다.”
“얼른 가자.”
“그래. 그럼 선생님, 저희들은 이만.......”
“잠깐, 너희들.”
“......네?”
마악 미술실을 벗어나려던 일행은 갑자기 자신들을 부르는 그 목소리에 살짝 멈칫거렸다. 그러자 선생님은 싱긋 웃으면서 몇 마디를 부탁했다.
“그 아이들 대신......나에게 학교 이야기를 해 줄 수 있겠니?”
“......어려울 거야 없죠! 언제든 와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쓸쓸히 웃고 있는 선생님을 뒤로 한 채 일행은 교실로 뛰어갔고, 미술실 선생님은 잠시 그 자리에서 일행이 지나간 자리를 빤히 바라보다가 잠시 눈을 깜빡이는 사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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