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중 스승이 정말 필요할 때는 갈등 상황에서이다. 수행하다 보면 어느 단계에서 이렇게 해야 될지 저렇게 해야 될지 몰라 망설여지는 경우가 있는데, 스승의 지도 없이 자신의 판단에만 의지하다 보면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게 된다. 우리는 책이나 주위 사람들의 경우를 통해 올바른 스승을 만나 제대로 수행을 성취한 경우와 사이비 스승을 만나 부질없는 고생을 하거나 인생이 파멸에 이른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 중 가장 극적인 경우가 앙굴리마라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앙굴리마라는 원래 외도 수행자였으며 사람됨이 극히 순수하여 자기가 모시던 스승의 말이라면 전혀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따랐다 한다.
그런데 그 외도 스승이 앙굴리마라를 지극히 총애하자 이를 시샘한 다른 제자들이 스승에게 가서 앙굴리마라가 스승의 부인을 유혹하려 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아직 제대로 정화되지 않았던 그 스승은 이 말에 크게 분노해서 앙굴리마라를 파멸시키기 위해, 천 명의 사람을 죽여 천 개의 손가락을 잘라 오면 비법을 전해 주어 큰 도인을 만들어 주겠노라고 앙굴리마라를 유혹했다. 너무나도 순수한 신심을 지녔던 앙굴리마라는 스승의 이 말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이때부터 사람을 죽이기 시작해서 999개의 손가락을 모았다.
마지막 한 개의 손가락을 채우려고 앙굴리마라가 혈안이 되어 있을 때 부처님께서는 기원정사에서 깊은 선정에 드시어 세상을 살펴보시다가 그 상황을 아셨고, 그냥 두면 그가 자기 어머니마저 살해하여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음을 아셨다. 그래서 스스로 앙굴리마라를 찾아가서 그를 감화시켜 제자로 만드셨고 마침내 아라한의 경지에까지 이끄셨다. 앙굴리마라가 부처님을 만나지 못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릇된 스승의 잘못된 지도로 엄청난 고통을 당했으리라.
티베트불교를 라마교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라마’란 인도어 ‘구루’에 해당되는 말로 스승을 의미한다. 티베트불교 수행에 있어 스승의 위치는 가히 절대적이다. 티베트불교에서는 삼귀의가 아닌 사귀의를 한다. 맨 먼저 스승에게 귀의하고 그 뒤에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다.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야만 불·법·승 삼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게 그들의 기본적 사고방식이다.
티베트불교의 수행 역사를 보면 스승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가 까규파 조사들 중 한 분인 나로빠의 스승 틸로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스승 틸로빠를 만나기 전 나로빠는 나란다 대학의 총장이었다. 당시 인도에서 불교학의 중심지였던 나란다 대학의 총장이 되기 위해서는 외도들과 논쟁을 해서 그들을 굴복시켜야 했다. 나로빠가 나란다 대학 총장의 물망에 오르자 힌두교와 자이나 교도들 500명씩이 논쟁을 제기해 왔으며 나로빠는 이들과의 토론을 통해 그들을 모두 불교도로 개종시켜 버렸다. 말하자면 나로빠는 그 당시 전 인도를 통틀어 최고의 학승이었다. 이런 나로빠가 어느 날 다키니(밀법 수행자를 보호하고 인도하는 천녀)의 계시로 자신의 학문의 부질없음을 깨닫고 스승을 찾아나서 죽을 고생을 한 끝에 스승 틸로빠를 만난다.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이 나로빠를 스승 틸로빠는 어떤 방식으로 지도했던가? 어느 날 틸로빠가 나로빠를 데리고 높은 사원의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그리고는 나로빠에게 밑으로 뛰어내리라고 말했다. 왜 뛰어내려야 하는지 이유는 없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을 시험해 보는 것이다. 만약 나로빠가 뛰어내리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스승-제자의 관계는 바로 끝날 것이다.
나로빠는 뛰어내렸다. 뼈가 부러져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나로빠에게 다가온 틸로빠는 그의 상처를 치료해 주면서 “봐라. 육체란, 삶이란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이다.” 라고 말했다.
대학자 나로빠에게 무얼 가르쳐 줄 수 있을까? 그에게는 오직 궁극적인 경지에 도달한 스승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육체를 통한 직접적인 체험만이 필요했던 것이다. 틸로빠는 12년 동안 나로빠를 데리고 다니면서 12번에 걸친 이런 종류의 큰 시험을 통과하도록 했으며, 이런 과정을 통해 나로빠가 틸로빠에 대해 절대적으로 귀의하는 마음 자세가 됐을 때 자신의 깨달은 바의 정수를 전해 그를 대각으로 인도했다 한다.
불광 1월호 - 지산 스님 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