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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은 <현대시학> 03년 11월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편의상 원전에 있는 각주들은 생략하였습니다.
은유와 華嚴
이성희(시인, 한국해양대 강사)
1.대화
서구 근대 문명에 기초한 상상력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것은 이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푸념이 되었다. 그러나 상상력의 첨단에 서 있는 예술,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문학에서 새로운 상상력에 대한 모색이 과연 진지하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느냐 하는 데는 선뜻 긍정적인 대답을 하기가 무척 조심스럽다. 서구의 상상력과 어휘 내에서 이루어지는 그 수다한 해체나 재구성으로는 아무래도 한계의 돌파가 어려울 것 같다. 그것은 어쩌면 세계관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그 한계가 언어 이전의 생태계 혹은 생명계의 파국이라는 실재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상징계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실재계는 쉴 새 없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언어의 그물 너머로 밀려오곤 한다. 아니 언제나 언어 속에. 우리의 생명 속에 검은 구멍으로 넘실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동양 시학, 혹은 동아시아 전통적 정신과 상상력을 탐색해 보는 것은 매우 주요한 의의를 가진다.<이식론>에 대한 <내재적 발전론>을 주장하거나 뜬금없이 전통복고주의를 주장하자는 것이 아니다. 동아시아의 전통적 정신과 시학에 대한 모색은 차라리 새로운 세계의 비전을 위한 문학적, 시학적 탐색이다. 이는 문학사를 넘어선 문명사적인 함의를 가진다.
어휘는 상상력을 규정한다. 서구시학의 어휘를 가지고 시를 논하는 한 우리는 서구의 상상력을 넘어서기 힘들지도 모른다. 동아시아의 전통적 형이상학과 정신. 시학을 탐색한다는 것은 또한 새로운 어휘를 발견하고자 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 낡고도 새로운 어휘들을 새물에 풀어놓는 순간, 그것들은 살아서 생동하며 서구 상상력의 그물을 넘어서는 새로운 지평, 새로운 실재를 꿈꾸게 할지도 모른다. 본 글은 이러한 것들을 위한 작은 실험적 글쓰기이다. 그러나 본 글은 서구 시학의 어휘를 폐기하고자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서구와 동아시아의 대화의 시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대화를 통하여 기존 어휘의 재정립과 어휘의 내연 확대. 변성, 그리고 그것이 여는 새로운 지평을 더듬거리며 예감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글은 시학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은유>의 문제로부터 시작하고자한다. 그리하여 서구 수사학의 지평을 넘어서, 장엄한 華嚴 사상과 동아사아 고전의 미학 속에서 은유가 닿는 새로운 실재와 새로운 의미를 탐색하고자 한다.
2. 시와 은유
이탈리아의 작고 아름다운 섬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화<일 포스티노>는 시의 근원을 묻고 있는 영화이다. 어느날 대시인 네루다가 섬에 망명을 오게 된다. 그러자 대시인을 흠모하는 세계 각지의 여성들로부터 편지가 답지한다. 순박한 청년 마리오는 이 편지들을 네루다에게 전달하는 일을 맡게 되고, 네루다와의 만남을 통해 점차 시에 눈떠 간다. 마리오를 시의 세계로 이끈 것은 메타포, 즉 은유라는 화두였다.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마리오는 네루다에게 묻는다. <바다와 하늘과 비와 구름과...... 이 세상이 다른 것의 은유란 말인가요?> 이 질문에 네루다는 답변을 미룬다. 그는 결국 답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 답변은 영화 속에서 영상과 소리로 암시되고 있다. 이제부터 우리는 은유에 대한 수사학과 시학의 논의들을 거쳐서 다시 <일 포스티노>의 영상 속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그런 뒤 <일 포스티노>의 푸른 바다를 넘어가 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은유에 관한 가장 고전적인 정의를 내렸다. <은유란 유에서 종으로, 혹은 종에서 유로, 혹은 종에서 종으로, 혹은 유추에 의하여 어떤 사물에다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용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은유를 서로 다른 사물들의 유사성을 간파하는 능력으로 보였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야콥슨(Roman Jakobson)에까지 이어진다. 야콥슨은 그의 중요한 논문인 「언어의 두 양상과 실어증의 두 유형」에서 언어 기호의 배합 양식을 결합과 선택으로 나누고 있다. 결합의 축은 인접성에 의해 형성되고, 선택의 축은 유사성에 의해 형성된다. 그리하여 그는 결합의 축을 환유에, 선택의 축을 은유에 의해 배당한다. 그리고 이러한 두 양상을 그는 수사학을 넘어서 담론 일반을 조직하는 방식으로까지 확대한다.
윌라이트는 은유를 두 가지로 나눈다. 비교를 통한 의미의 탐색과 확대작용인 치환은유(epiphor)와 병치와 합성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병치은유(diaphor)가 그것이다. 치환은유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전통적인 은유라면 병치은유는 병치를 통해 새로운 자질과 새로운 의미가 탄생될 수 있다는 폭넓은 존재론적 사실에 바탕한다. 요소들의 새로운 결합 작용으로 존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김준오는 치환은유가 유사성과 동일성의 원리 위에 서 있는 반면, 병치은유는 비동일성의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서로 다른 사물들이 당돌하게 병치됨으로써 발생하는 새로운 결합이란, 사실은 표층에 드러나지 않았던 심층의 유사성이 드러난 것이라고 본다면 병치은유 역시 동일성의 원리에 근거하고 있는 셈이 된다.
서로 다른 것들의 심층에 놓여진 유사성, 혹은 동일성을 예지의 생물학자 베이트슨은 <패턴>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는 모든 자연의 사물들이 <서로 이어지는 패턴> 속에 있음을 발견한다. 이러한 패턴이 은유다. 그는 말한다. <은유, 그것은 이러한 정신적 상호연관성의 전체적인 피륙을 짜는 방법이거든, 은유는 살아 있음의 밑바닥 바로 그곳에 있는 거니까.>
莊子는 「至樂」편에서 무생물과 생물, 식물과 동물을 <낳는다〔生〕>는 말로 서로 이어놓고 있다. 오늘날의 생물학적 지식으로 볼 때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존재가 심층으로 이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일대 버라이어티이다. 존재의 대연쇄이며 존재의 무궁한 은유이다. 여기에서 은유는 인간의 언어를 넘어서 자연의 언어가 된다. 실재가 된다.
<일 포스티노>에서 마리오가 찾은 은유도 이와 유사한 <이어짐>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참으로 아름다운 시를 한 편 쓴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로 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언어로 된 것이다. 마리오는 그 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섬의 모든 풍경들이 가진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그는 그 아름다움을 네루다에게 보내기 위해 녹음기에 담는다. 그가 담은 목록은 다음과 같다. <촐랑이는 작은 파도/넘실대는 큰 파도/절벽에 불어오는 바람소리/나뭇가지에 이는 바람소리/아버지의 서글픈 그물/신부님이 치는 교회 종소리/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아내의 뱃속에서 박동하는 아기 심장소리>. 이 목록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병치은유들로 이루어진 시이다. 이들 속에는 숨겨진 심층의 유사성, 이어지는 패턴이 놓여 있다. 마리오는 그것을 발견한 것이다. 여기에서 은유는 숨겨진 연관성을 찾아내는 인식의 기능을 가진다. 쟈끄 마리땡이 시란 <사물들의 내면적 존재와 인간적 자기의 내면적 존재 사이의 상호 교통>이라고 말했을 때, 이 <상호 교통>이야말로 마리오의 은유이고 시이다. 그는 상호 교통을 통하여 무심한 풍경 속에서 자신의 삶과의 깊은 연관과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이어진다. 이 세상이 은유냐는 자신의 질문에 그는 일단 스스로 답을 찾은 것이다. 여기서 이제 실재는 은유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일성의 은유는, 근대 시학의 극복을 추구하는 구모룡에 오면 근대 시학의 핵심 원리가 되며, 그리하여 극복의 대상이 된다. 그에 따르면 은유는 다른 대상을 자기화하는 수사학이다. 즉 1) 자아중심주의 2) 동일성 3) 은유는 동일한 원리들의 다른 이름이다. 그것은 타자를 지배․소유하고자 하는 근대적 욕망의 수사학적 표출인 셈이다. 이러한 구모룡의 비판은 우리로 하여금 은유에 대한 재고, 혹은 은유를 넘어서는 것에 대해 꿈꾸게 한다.
3. 은유를 넘어서
구모룡이 비판하는 은유가 <세계의 자아화>라고 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자아>이다. 우리는 여기서 데카르트 코기토와는 다른 동아시아 고전의 정신 속에 표현된 자아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대 중국의 철학자 張岱年은 말한다. <서양 철학가들은 我와 非我의 분별을 <나의 자각>으로 여겼으며, 중국 철학가들은 아와 비아를 융합하는 것이 <나의 자각>이라고 여겼다.> 아와 비아를 융합하는 지각 속에 드러나는 자아는 타자와 분리된 폐쇄된 욕망의 중심점이 아니라 타자를 향하여 개방된 심령이다. 이는 자아를 비움으로써 우주의 음악소리를 듣는 莊子의 자아이다. 『노자』와『장자』속에서 수없이 만날 수 있는 <無己>, <忘我>, <喪我>등의 기표들이 바로 이런 자아를 말하고 있다. 동서양을 융합하는 정신을 보여주고 있는 옥타비오 파스는 성 요한의 <없음의 욕망>을 말하면서 내면적 빔의 경험으로부터 존재의 충만의 경험이 이어진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無心의 언저리를 건드리는 것...... 무심한 사람은 근대 세계를 부정한다. 근대 세계를 부정할 때, 그는 전체를 얻기 위해서 자신의 전체를 건다>고 말한다. <망아>의 자아(노장), <무심>의 자아(옥타비오 파스)는 타자를 소유하려고 하지 않고 전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세계를 자아화하려 한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로 대표되는 서양 근대의 자아를 <닫힌 자아>라고 한다면 이는 <열린 자아>라고 할 수 있겠다. 세계와의 이어짐을 표현하는 은유 역시 이러한 존재론적 층위에서 말한다면 <닫힌 은유>와 <열린 은유>로 구분할 수 있을 듯하다. 마리오가 발견한 은유는 열린 은유이다. 모든 아름다움을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네루다가 떠나버린 텅 빈 섬에서, 그 비움 속에서 비로소 그는 섬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구모룡이 비판하는 은유는 <닫힌 은유>이다. <열린 은유>는 세계 전체와 무한히 이어지는 패턴을 이루는, 그리하여 구모룡 자신이 은유의 대안으로 제시한 제유와 이어진다.
야콥슨은 제유를 환유와 같은 인접성의 범주에 두었다. 따라서 제유는 환유의 한 형태일 뿐이다. 르 게른은 환유를 <지시행위의 이동>으로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환유와 제유의 구분은 부차적이다. 제유란 전체 대신 부분으로의 지시행위의 이동일 뿐이다. 따라서 제유는 환유의 범주에 포함된다. 반명 구모룡은 환유를 기계론과 환원주의에 연관된 사유형태와 연관시키고 제유는 유기론적 사유와 연관시킴으로써 둘을 확연히 구분한다. 제유에 대한 이러한 견해 차이는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그 연유는 환유와 제유를 구분하기 위해 제시한 구모룡의 주장 속에 이미 나타나 있다. 그것은 수사학이나 언어학 이전, 세계관의 문제다.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양적 관계로 보느냐 질적 관계로 보느냐의 차이이다. 서구 근대 사유의 기본 전략인 요소론적 환원주의에 의하면 전체는 부분의 합이다. 여기서 전체와 부분은 양적 차이일 뿐 서로 인접해 있다. 반면 유기론적 세계관에서는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의 질적 차원의 변경이다. 부분과 전체는 결코 인접해 있지 않다. 유기론적 입장에서 볼 때 제유는 부분을 통해서 전체라는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네루다가 대답을 피한 마리오의 질문을 다시 한번 상기하자. 이 세상이 모두 은유라면 모든 것이 서로 유사성 속에 이어져 있다는 것이 된다. 모든 것이 서로 이어져 있을 때, 들에 핀 한 송이 들꽃이나 꽃잎에 맺힌 이슬방울 하나도 전 우주와 연결되어져 있을 터, 물방울 하나가 우주를 반영한다. 전우주로 이어진 패턴. 이것은 우주적 제유이다. 여기서 실재는 제유이다. 이것이 모든 제유의 형이상학적 토대이다. 이러한 제유의 형이상학은 동양의 오래된 유기론적 정신 속에 이미 꽃피어 있었다. 바로 華嚴이다.
4. 화엄
이러한 제유적 구조는 가장 수승한 동아시아 고전적 정신들의 공통된 근본 틀이다. 예컨대 장종위앤은 老莊의 우주를 조화와 창조성의 두 가지 운동의 양상으로 나누는데, 조화는 다양성〔多〕에서 일체성〔一〕으로 움직이고, 창조성은 일체성〔一〕에서 다양성〔多〕으로 움직이는 운동이다. 그리하여 그에 따르면 노장의 우주는 <모두는 모두 속에 있고 하나는 하나 속에 있음과 더불어, 모두는 곧 하나요, 하나는 곧 모두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유적 구조를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화엄 사상이다.
화엄 사상의 十玄緣起는 일체의 모든 존재가 무궁무진한 상호 관계와 이어짐 속에 있는 장엄한 우주를 보여준다. 하나는 전체에 들어가고 전체는 하나에 녹아 있다. 각 존재는 자기의 본래 면목을 유지하면서 전체와의 무궁한 관계 속에 놓여 있다. 이러한 우주의 모습을 화엄경은 인드라의 그물에 비유하고 있다. 제석천 인드라 신의 무한한 그물에는 그물코마다 구슬이 달려 있는데 이 구슬 하나하나는 모두 그물 전체를 비추고 있다. 하나의 존재는 우주 전체의 무궁한 존재들과 무궁하게 이어져 있는 것이다.
동양화의 정신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킴바라세이고(金原省吾)는 이러한 화엄의 연기와 예술에 대해서 재미있는 관점을 보여 준다. 그의 논의는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하나의 사물이 생기하는 데는 무량한 인연 가운데 하나의 緣이 주가 되고 다른 것은 잠재된 상태로 그대로 화합하고 있다. 여러 가지 연이 드러나고 숨는 관계는 이렇게 一緣이 상응하고 多緣이 불상응하는 상태에서 일체의 연이 드러나서 상응하는 全分相應의 상태까지 무한의 경우수가 있다. 따라서 하나의 물상은 다양한 물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연 중에 어떤 연이 드러나고 어떤 연이 숨는가에 따라 무한의 변화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관계에 따라 하나의 물상이 다른 어떤 물상이 될 수도 있다. 하나의 물상에서 전 우주의 관계를 보는 전분상응의 경지란 다름 아닌 깨달음의 경지이다. 예술은 하나의 사물을 대상으로 하여 그것에 드러난 하나의 연을 시작으로 숨어 있는 다른 무량연을 환기시키는 방법이다.
이상 킴바라세이고의 논의는 지금까지 우리의 논의에 대한 매우 유익한 그림을 제공한다. 일연이 상응하고 다연이 불상응하는 상태는 은유의 형태를 이룬다. 다양한 연의 드러나고 숨은 관계의 다양한 경우의 수는 하나의 물상에서 다양한 은유가 가능함을 보여준다. 은유란 이전에는 인식되지 못했던 사물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재의 한 단면일 뿐이다. 반면 하나의 물상 속에서 일체의 연이 상응하는 전분상응은 제유의 형태가 된다. 여기서 제유란 무궁하게 얽힌 은유의 전체이며, 화엄사상의 입장에서 볼 때 실재의 실상이다. 시는 은폐된 이 실재의 실상을 드러내고자 하는 근원적 욕망을 가진다. 제유에 특권을 부여하지 않았던 야콥슨도 시의 구체적인 분석 속에서 제유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시가 근원적으로 가지는 욕망을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바슐라르가 <시적 몽상은 우리에게 세계의 세계를 보여 준다. 시적인 몽상은 우주적인 몽상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세계, 아름다운 여러 세계로 열림이다. 그것은 자아에서 자아의 재산인 비자아를 준다.>라고 말할 때, 이는 전분상응의 화엄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시의 근원적 욕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5. 시와 화엄
동아시아의 고전적 비유법으로 『詩經』에서 출발하는 <比>와 <興>이 있다. <비>는 개념적 인식을 통하여 주로 失政을 비유하는 도덕적 직유이다. 반면 <흥>은 정감과 자연의 직접적인 융합을 추구하는 일종의 은유이다. 『文心雕龍』에서는 <글은 이미 다했으나 뜻은 남음이 있으니, 흥이다(文己盡而意有餘, 興也.)>라고 하였다. 뜻에 남음이 있는 것은 일대일 대응으로 끝나는 경직된 은유가 아니라 그것이 다른 잠재된 연의 가능성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시는 무엇보다 이러한 은유의 체험, 즉 이어짐의 체험이다. 그라나 동아시아 시학의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흥을 넘어선 깨달음이며, 일연상응을 넘어선 전분상응이다. 시의 목적이 단순한 감정의 표출이나, 도덕적 교화를 위한 효용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꺠달음임을 강조한 사람은 嚴羽(1197-1253)(엄원태가 아니고^^)이다. 탁월한 시론서인 『滄浪詩話』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저 선의 도는 오묘한 깨달음에 있고, 시의 도 역시 오묘한 깨달음에 있다(大抵禪道惟在妙悟, 詩道亦在妙悟)>. 깨달음이란 화엄사상의 견지에서 말하면, 한 존재가 자아를 포함한 무궁한 존재들과 전분상응, 무궁한 연결망 속에 있음을 명백히 보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무한한 경지로 나아감(進於無境)>과 <홀로 천지정신과 교류(獨與天地精神往來)>하고자 하는 장자의 정신과 다르지 않다. 「知北遊」편에서 장자가 道란 피나 돌피, 기와, 심지어 똥이나 오줌 속에도 있다고 할 때, 그는 가장 작은 존재 속에서 무궁한 우주 전체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선을 가진 자만이 <하늘의 퉁소 소리>, 우주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시나 다른 예술에서 장엄한 화엄을 드러내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첫째, 존재의 대연쇄, 은유의 무량 연결망을 모두 드러내는 방법. 둘째, 하나의 개체 존재를 통해 그 연결망을 환기시키는 힘이나 작용을 드러내는 방법이 있다. 첫째 방법은 인간의 언어나 상징체계로 온전히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실재의 실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법은 두 번째 방법이다. 그 힘은 셸링이 <사물의 힘을 있게 하는, 사물 안에 있는 창조적 생명>, <살아 있는 중심>이라고 말했던 것이며, 장종위앤이 노장사상에서 발견하고 있는 궁극적 힘인 道의 창조성, 엄우가 시의 최고 경지라고 주장하는 神이 그것이며, 동아시아 화론에서 말하는 氣韻生動의 기운이다. 그 기운을 얼마나 충분히, 그리고 어떻게 생동하게 표현하느냐가 문제다.
하이데거는 화면 가득 농부의 낡고 구겨진 신발 한 켤레만이 그려진 고흐의 그림에서 대지의 습기와 풍요로움을, 저물녘 들길의 고독을, 대지의 소리 없는 부름을, 노동의 고단함과 기쁨을, 생과 죽음의 전율을 감동적으로 냄새 맡는다. 화면에 덩그라니 놓여 있는 고흐의 신발 한 짝, 그것은 그러한 무궁한 연결망을 환기시키는 힘을 획득하고 있다. 만 가지 획을 다 담는다는 石懤의 一畵, 17음에 불과한 바쇼오(芭蕉)의 하이쿠가 가지는 고요함 속에 가없이 퍼져나가는 환기력!
6. 화엄과 생태계
은유와 제유의 시학이 화엄 사상과 접속될 때, 화엄은 시학을 새로운 지평으로 이끌고 간다. 시학이 새롭게 안내되는 곳은 생태계의 지평이다. 오늘날 생태학에 의해 밝혀지고 있는 생태계의 모습은 그야말로 화엄의 세계이다. 모든 것이 이어지고 상호 작용하는 重重無盡 무량연의 세계가 바로 생태계이다. 그곳은 서구 근대 문명의 모든 모순이 집약된 곳이기도 하다.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생태계의 파괴는 우리가 길들여져 있는 서구 근대 문명에 대해서 반성하기를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시학과 예술에게 새로운 언어와 상징을 요청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곳은 우리의 생명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실재계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우리는 하염없이 떠도는 기표들일 수 없다.
시는 오늘날 새로운 깨달음이어야 한다. 그것은 파괴된 우리네 생명의 근원에 대한 깨달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언어의 유희를 넘어 생명의 새로운 무량연과 무궁한 연결망과 그 연결망의 언어를 찾아야 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언제나 생명의 힘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시인 이성희
* 1959년 부산 출생
* 1989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 시집 <안개 속에 일박>
* 저서 <미술관에서 릴케를 만나다> 등
* 공저 <21세기 문학의 동양시학적 모색>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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