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생기의 우리학교 VOL.32 교원양성의 역사
(글 이상영)
- 조선사범전문학교 3기생 입학식(1955년 4월 10일, 후나바시) -
단기 강습에서 사범학교로
조선학교의 특징으로 교원양성을 목전에서 실시한다는 것을 들 수 있다. 현재 일본 각지에 있는 조선학교의 교원은 조선대학교에서 배출되는 것이 기본이지만, 그 전까지는 다양한 방법으로 교원이 양성되어 왔다. 각지에 있었던 사범학교, 조선고급학교의 사범과를 중심으로 민족교육 또 하나의 교원양성 역사를 알아본다.
오사카에 첫 사범학교
1945년 8월 15일 조국해방 후 일본 각지에 국어강습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던 시기, 그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원은 어떻게 양성되었을까.
같은 해 9월에 결성된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은 당시 교원 양성에 관해 ‘조선어에 소양을 가진 학생을 선정해 단기 강습을 받게 한 후 교재 발행과 동시에 각각 지방 본부로 파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당시는 본격적인 양성기관은 아직 없었고, 위와 같은 방법으로 절박한 상황을 해결했다.
조련은 1945년 12월 7일부터 13일까지 제1회 조선어강습회를 도쿄에서 개최하고, 15명을 수료시켜 도내 국어강습소로 파견했다.(「다큐멘터리 재일본조선인연맹 1945~1949」 오규상 지음, 岩場書店)
강습회의 강사로 조련문화부 차창인 이진규(李珍珪, 후에 총련중앙제1부의장), 작가인 이은직(李殷直), 임광철(林光徹, 후에 도쿄조선중고급학교교장)과 같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에 남아있다. 강습회는 도쿄지방의 교원으로 한정되었고 즉석, 단기간이었으나 민족교육의 역사 속에서 최초의 교원양성사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2회째는 1946년 7월15일까지 30명을 양성. 강습교과는 10과목. 그리고 3회째는 8월 20일~9월 11일까지 오사카에서 열려 30명을 양성했다. 위와 같은 강습회는 48년 초까지 27회 실시되었고 합계 1,265명이 참가했다.
독자적으로 노력한 지방도 있었다. 오사카에서는 1947년 9월, 오사카조선사범학교를 본부 내에 설립.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 역사 속에서 가장 빨리 설립된 교원양성기관이라 일컬어진다.
개교 1개월 후에 오사카부 본부 인근에 있는 시립소학교로 이전. 조선인 교원 외에 현역 일본인 교원이 강사가 되었고, 지방에서 오는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도 있었다. 이 학교는 1949년의 GHQ(연합군 총사령부)과 일본정부 당국에 의한 제2차 학교폐쇄까지 존속했다. 제1기생(약 40명, 수료기간 7개월), 제2기생(약 150명, 수료기간 1년), 제3기생이 교육을 받았다. 현안이었던 중앙 레벨의 교원양성 기관이었는데, 1947년 12월, 조련중앙사범학교가 창설되었다.(교장 이진규)
- 오사카 조선사범학교의 제2기 입학식(1947년 6월 1일) <조선학교의 전후사 1945~1972> -
중앙사범전문학교
1950년대,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민전) 시절에는 교원양성 기관으로서 조선인중앙사범학교가 설립되었다. 사범학교 설립은 민족교육의 최고 교육기관으로서 종합대학 건설사업의 일환으로 자리매김했다.
학교 이름은 <조선중앙사범학교>. 1953년 10월 22일, 도립 제6조선인소학교(도쿄도 오이타구)의 일부 시설을 빌린 형태로 개교했다. 이사장은 민전의장단 멤버인 윤덕곤(尹德昆 후에 재일본조선인 중앙교육회회장)씨, 교장은 이진규 민전중앙 문교부장이 역임했다. 1기생으로는 일본 전국 22개 도도부현에서 모인 51명(남성 30명, 여성 21명)이 입학했다. 기간은 1년으로 개교 2년째부터 교명은 전문학교로 바뀌었다.
개교 후 곧바로 교사가 산베츠회관(産別会館 도쿄 미나토구)으로 옮겼고, 12월에는 후나바시(船橋)에 있었던 조련초등학원의 교사로 이전했다. 2층 건물로 기숙사, 식당, 교원주택도 건설되었다. 총련 중앙부의장 등을 역임했던 이기석(李沂碩 83, 치바현 거주)씨도 이 학교에서 배운 한 사람이다. 이씨는 54년 5월, 제2기생으로 입학. 동급생의 대부분은 도쿄조고 4기생으로 지방에서는 30대, 40대인 사람도 들어왔다고 한다.
교과는 문학, 교육학, 심리학, 수학, 물리, 역사, 지리, 음악, 미술 등.
교원도 당대 일류들이 모여 있었다. 일본학교를 나온 이씨는 여기서 조선어를 기초부터 배웠다.
“학교 전체가 민족교육의 현장에 선다는 책임감과 열기로 가득했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이씨는 총련 결성의 해인 55년 3월에 졸업. 부임 한 곳은 하마마츠(浜松)의 학교였다.
56년 4월 조선대학교 창립에 의해 간부교원 양성기관으로서 사범전문학교는 그 역할을 마쳤다. 이 학교가 존재했던 것은 실질적으로 약 3년. 역사적인 전환기에 이 학교를 졸업한 인재들은 그 후 총련 활동과 민족교육의 융성기에 크게 공헌했다.
후나바시의 교사는 그 후 후나바시 조선초급학교로 새 출발. 이씨도 치바로 돌아와 이 학교에서 교무주임, 교장을 역임했다.
“사범학교에서 공부한 나날은 내 인생을 180도 바꾼 잊을 수 없는 경험. 그 학교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다.” (이기석씨)
- 후나바시 조선초급학교 교원시절의 이기석씨 -
조고에도 사범과 설립
1959년 12월 14일의 귀국선 제1차 출항 이후, 민족학교의 아동, 학생 수 급증에 교원 수가 따라갈 수 없게 되었다. 60년대에 들어서자 교원의 수요를 채우기 위해 도쿄, 오사카 등 각지의 조고에 3년제 사범과가 잇달아 만들어졌다.
학교법인 오사카조선학원의 이사를 역임하는 채성태(蔡成泰 71)씨는 오사카 조선고급학교 사범과 제2기생이다. 극빈가정에서 자라 일본의 소·중학교에 다녔던 채씨는 오사카조고에서 처음으로 민족교육을 받았다. 2학년이 된 62년, 오사카조고에도 사범과가 신설(68년까지 운영)되었다. 사범과에 진학하면 학비가 면제된다는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선택한 길이 채씨의 이 후 인생을 결정했다.
동기는 30명(여학생 23명, 남학생 7명)으로 교실은 하나. 당시 오사카조고에는 기숙사가 있었기에 서일본 전역을 대상으로 학생을 모집해 교토, 고베, 히로시마, 규슈의 여러 조고에서도 학생이 모여들었다. 사범과 전체는 100명 정도였다고 한다.
- 채씨가 재학당시의 오사카 조고 교사(위), 오사카 조고 사범과 2기생 학생들(아래) -
64년 3월에 졸업한 채씨는 와카야마 조선초중급학교로 부임했다. 사범과 졸업생의 부임 학교는 주로 초급학교였는데, 이 가운데는 부임 학교의 사정으로 중급부 교원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채씨도 중급부 1학년 담임이 되었다. 그 후 교원을 계속하는 한편 조선대학교의 통신학부에서 4년간 배웠다. ‘의리상 1년만’이라는 기분으로 시작한 교원이었는데, 후쿠시마, 오사카의 학교를 합쳐 20년간 교단에 섰다. 교단을 떠나서도 오사카에서 오랫동안 교육 현장에 있었다.
‘나에게 배운 아이들이 가장 행복하다고 학생들 스스로 생각해주는 교육을 하자’는 신념으로 걸어온 교원 인생이었다고 채씨는 회상한다.
조고 사범과는 60년대 중반 이후 서서히 그 역할을 다해갔는데, 그 후에도 1년제로 제도가 부활하는 등 형태를 바꿔 한동안 계속되었다.
*월간 <이어> 2017년 12월호에서
첫댓글 올해의 마지막편이겠네요.
과거의 내용을 살펴보니 제법 많은 자료가 누적된것 같습니다.
내년에는 (비매품으로) 상권 혹은 연작으로 한번 묶어냈으면 좋겠습니다.
고생많으셨습니다!!!!!!!!!
당시 학생 수의 증가를 교원 수가 따라가지 못했던 상황이 지금에 보면 부러운 시절이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