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
최 호 림
깊이 모를 동굴 같다
촛불을 켜면 더 어둡고
손을 휘저으면
허공의 실핏줄이 걸린다
다가설수록 미로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발자국들
무지갯빛 날개가 바람을 가른다
천의 얼굴이 구름 위에 뜨고
하루에 열두 번 더
몸살 앓는 꽃이다
아름답다
나이테
나무는 뛰지 않는다 중심에서 바깥으로 걸어가는 길이 둥글다 중심은 나이테의 시작이고 현재에 가까워지고 시작하는 점에는 갓 태어나는 아기울음소리 들린다 점차 나이가 들수록 중심에서 멀어진다 종소리가 사방으로 파문지듯 점점 커져 나무껍질 속으로 스며든다 나무가 걸어 온 흔적만큼 둥치는 굵어지고 견고해진다 인간의 1년은 나무에게 하루일수도 있고 한 시간일 수도 있어 백년을 훌쩍 뛰어 넘어서 천년을 사는 나무일수록 껍질이 다 품는다. 나이테가 사라지는 방식이다. |
성악설
고친다는 거
고치면 새것은 못 되어도
쓸 수 있다는 거
과거의 어느 때로 돌아간다는 거
돌아가서
현재에 쓸모가 있다는 거
고친다는 거
상처를 치유한다는 거
병든 곳을 제거한다는 거
물건이라면 고치는 것보다
새것을 사는 게 나을 수 있지만
그냥 버리기 아까워
고쳐 쓴다는 거
과거를 읽고 미래를 보고
현재를 안다는 거
그러나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거
고쳐도 변하지 않는다는 거
화두
강은 언제 잠자고
바다는 언제 꿈꾸는가.
나무는 언제 앉아 쉬고
길은 언제 일어나 걷는가.
며칠 자지 못했다고
수면제를 먹지 마라
극복의 기회를 잃는다.
두려움과 고통이 없다면
지혜의 깊이를 배우지 못 한다
차가운 손길은 얼게 하지만
따뜻한 마음은 봄날이 된다.
인내가 사랑을 낳고
모든 존재는 한 뿌리에서 왔다
별도 잊혀진다
세상에 뜬 별들
죽으면 잊혀 진다
그 크기와 밝기에 따라
금세 잊혀 지거나
서서히 잊혀 지거나
역사에 길이 남는 별들
몇 이나 될까
나머지는 별이라도
들러리처럼 빛나다 잊혀 진다
이름 없고 빛도 없으면
살아 있어도 잊혀 진다
이름 하나 남기려고
별이 된다 해도
죽는 순간부터 잊혀져간다
살아 있는 별도
잊고 사는 세상이다
밤을 읽다
무게 없이 자라는 어둠이다
남루도 쌓이고 쌓이면 저런 모습일까
사막을 달리던 낙타의 길이
아직도 끝없이 뻗어가는 밤
때때로 모래바람이 불고 간 수심에
매의 발톱이 할퀸 흔적을 따라
사라진 달을 향해 늑대가 운다
허공을 관통한 별들이 바닥을 치는 밤
적막이 중심을 딛고 우뚝 일어선다
숲은 말이 없고 새들을 잠재우는 밤
사방으로 나뭇잎들이 귀를 곧추 세운다
불빛 따라 날아든 까마귀 떼
창마다 부리를 부딪고 절벽으로 추락하고
거대한 강이 우주로 흘러가는 밤
시간의 발자국들이 영원에 사무치는 밤
신의 정원에서 툭 떨어진 열매가
발밑까지 굴러와 멈추고
꿈이 되지 못한 그림자가
사랑의 꽃으로 다시 피어나는 밤
어디서 보았던가
저 나그네의 익숙한 춤사위는.
하늘은 멀다
오늘은 두 편의 시가
나의 스승입니다
나보다 먼저 깨달음을 배웁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는 것이 들리고
느끼지 못한 것이 느껴지도록
나를 비우고
나를 읽으며
학문에 왕도가 없듯이
더 낮아진 자리에서
내가 알지 못한 세계를 향해
꾸준히 달려가다
산정에 선 순간
더 높은 산정이 손짓하는
그 위에 또,
하늘은 아득합니다
사랑의 방식
익숙한 나의 손으로
안부를 확인하며
당신을 열고 들어갑니다
매달린 열쇠꾸러미에서
당신에게 필요한 나는
방법이 바뀌어도
나만이 아는 통로
당신의 비밀 숫자를
하나씩 누르며 다가 섭니다
한 자라도 틀리면
거부하는 몸짓으로
당신을 지킵니다
언제나 내게 향한 문
때 없이 만나 열고 닫는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징
함부로 건들지 마라
입을 열면 다물 줄 모르고
울었다하면 그칠 줄 모른다.
목청이 터지도록
동네방네 소문 다 내고
말에 꼬리를 달고
울음에 날개가 돋아난다.
십 년 체증이 내려가도록
후련하도록 울어
크고 작은 소리를 기죽이고
소리 위에 군림한다.
침묵하면 무겁다고
모르는 소리 마라
한번 봇물 터지면
바닥이 보일 때까지
기진해 쓰러질 때까지
사무친 한을 쏟아내고
삼킨 울음 다 뱉어낸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허공
귀만 있고
눈과 입이 없기에
내 비밀을
다 숨겨둔다
천만년이 지나도
탄로 날 일 없다
고봉밥
가난한 시절의 부모는
자식들 배고플까 봐
돌아가시면서 고봉밥을 지어놓았네.
그런 부모 가진 자식들 행복했네.
우리 부모 어찌어찌 해서
고봉밥도 준비 못 하고
훨훨 불타 재 되어 날아간 뒤
아무 것도 남긴 것 없어
늘 배가 고팠네.
부모 모시고 살던 시대는
고봉밥 먹는 게 소원이었네.
자식이 없으면 부모가 아니지
더러 고봉밥을 차려놓아도
잡초가 대신 먹고 무성해졌네.
이제는 잘 사는 자식들 덕분에
밥걱정 안하고 편하게
수목장과 납골당으로 거처를 옮겨
때마다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네
어둠과 흰 지팡이
세상의 빛들이 베푸는
도움을 받을 수 없어
너무 미안하고
그래도
어둠과 흰 지팡이가
늘 곁을 지켜주어서
그지없이 고맙네
바람의 약속
길에서 옛 친구를 만나 지금은 바쁘니
다음에 술 한 잔 하자하고 헤어졌지만,
독도
천사들이 갖고 놀던 공깃돌
동해에 떨어져
아픈 새끼손가락이 되었네
펄럭이는 태극기 아래서
생떼 쓰는 일본의 근성
먹혀들지 않자
온갖 술수를 다 쓰네
도덕성이 바닥인 전범 국가
단 한 번도 사죄한 적 없는
그런 일본이 좋다고
쓸개와 간을 빼주는 친일파들
독도를 그냥 주고 싶겠지
가장 멀리 해야 할 나라에
한 마디 던진다.
냉수 마시고 정신 차려!
조국
친일파들이 살기 좋은 나라
팔면 돈이 쏟아지기에
매국노가 팔아먹다 남은 것들
헐값으로 다 팔아넘기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저 눈들, 저 입들, 저 집단들
애국자라 설치면서
헌신짝처럼 버리는 나라
위안부를 창녀로 팔아먹고
수탈과 착취를 지난 일로 팔아먹고
부추긴 분단을 권력에 팔아먹고
아직도 일본에 쓸개와 간을 내어주며
법과 원칙을 거짓에 팔아먹고
빚이 천문학적으로 늘어나
이름과 껍데기뿐인 나라를
자손에게 물려주려는가.
선열들이 지하에서 통곡하는데
낫
그대를 베기 전
나를 베라고
안으로 휘어졌습니다
사랑은 내 품으로
그대를 베어 안는 일
그대를 베려면
높이 처들어야 하지만
나는 언제나
나를 베어
그대를 지킵니다.
봄 마중
겨울을 지나 온 나그네가
메고 온 짐을 풀어놓자
각가지 꽃들이 쏟아진다
육신이 그리운 영혼의 눈빛이나
허공에 기댄 별의 그림자들
신의 발자국소리까지
몸 바꾸어 나타나는 순간
너도 나도 벌 나비가 된다
끌 수 없는 불이 타올라
강물을 태우고 수심을 밝히면
또 한 번 산천은 뒤척이며
황홀함에 자지러지고 만다
닫친 마음을 열면
성큼 다가서는 얼굴 가득
여린 바람이 그네를 타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좋아하는 색깔에 매달리는 동안
아름다움이 절정으로 치닫고
향기 또한 샘처럼 솟아난다.
앞산 일기
동산 같은 앞산을 마주한지
서른 몇 해를 지나는 동안
머리카락 빠지듯이 성글어진
앞산에도 다시 봄이 와
개나리, 벚꽃, 진달래, 아카시아가
얼굴을 드러내고 건재한 모습이다
산정에 레이더 기지 초소가 있어
산허리에 찻길을 닦은 지는 오래
그럭저럭 탈 없이 건강해 보이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앞산 지킴이라는 자생 단체가
마치 주인이라도 되는 듯 설치며
꼭대기까지 길을 더 넓히고
군데군데 쉼터를 만들고
평평하게 닦아 운동기구를 놓고
구석구석 성형수술을 한 것이
부끄럽게 속살이 다 드러나고
인간의 이기로 자연이 병이 들어
밤마다 몸살 앓는 소리가
환청이 아니 줄 알게 되었다
돌꽃
돌도 오래 살면
시들지 않는 꽃을 피운다.
화석처럼 박혀도
자생한 천상의 꽃이다
그 향기 천년을 간다.
돌 속의 꽃을 찾아 낸
놀라운 반가움도 꽃이다
바람이 스며들어
시작도 끝도 없는 물결무늬
붓 한 번 들지 않고
물감 하나 칠하지 않고
사계절 피어 있는 꽃
오로지 돌의 생각으로
세월의 그림자를 품은 꽃이다
벌 나비가 되어 보라
세상에 꽃 아닌 것 없고
깨닫는 순간 모두 꽃이다
더부살이
호미가 밭고랑의 숨통을 틔운다.
살기 좋은 콩밭에 들어서 고랑마다 자리 잡고 각자도생하며
식구가 늘어나 무성해진 풀밭에 날벼락 같이 날아든 소식하
나 밭주인이 벼르다가 오늘, 남의 밭에 더부살이 한 죄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고 잡초가 콩대보다 커서 밭의 영양분을
다 빨아 먹으면 잡초 밭 아닌가. 농부의 눈에 가시가 된 지
오래 느닷없이 몰려온 아낙네들이 고랑마다 들어 매서운 손
길로 뿌리 째 뽑아 칠 팔월 땡볕에 마구 던진다. 그동안 잘살
면서 남에게 해를 끼치고 손가락질 받는 잡초였다니.바람의
꾐에 씨앗을 퍼트린 잘못 지금 와서 뉘우친들 무슨소용인가.
달을 읽다
적막이 수심을 키우고 땅의 숨소리가 발밑을 적신다
달팽이 걸음으로 먼 길 걸어 온 나그네가 신발을 벗어 들고 강을 건너는 중이다
또렷한 이목구비 주름살 하나 없는 세월 같다
가까이서 보고 손을 내밀면 잡힐 듯
잠에서 깨어난 별들이 바닥의 눈을 꺼낸다
그림자를 버린 지 오래 옛날에 입은 옷 그대로 서방정토로 가는가 발자국마다 인간의 염원이 쌓여 있다
겨울나무
벌거벗어도 부끄럽지 않다 수치스런 짓을 하지 않았고 숨긴 죄가 없기 때문이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스스로 채찍질하고 뚝배기 같은 껍질이 되도록 혼신의 힘으로 살았다 한 걸음도 떼지 못한다고 함부로 말 하지 마라 붙박인 건 내 잘못이 아니라 신의 뜻인 것이다 잎을 키우고 열매를 달고 주어진 분수대로 살며 새들에겐 둥지를 햇빛과 바람에겐 쉼을 미물에겐 그늘을 하늘을 믿고 땅을 사랑하다가 가진 것 다 돌려주고 나니 한결 가벼운 몸과 맘으로 먼 길 떠날 수 있게 되었다
견본 인생 무슨 복을 타고나서 대궐 같은 집에 살며 건강한 음식만 골라 먹고 신수가 훤하게 빛나는가 고급 외제차를 타고 메이커 옷과 신발에다 명품을 걸치고 다니니 선남선녀가 따로 없다 이 세상에서 천국을 살면서 자식들 하나같이 돈으로 치장해서 눈이 부신데 감투만큼 술수의 머리를 잘 굴리고 입을 열면 거짓말뿐이고 할 짓 못할 짓 다 하고도 견고한 자리를 지키다니 놀랍다 무엇이 우리와 다른가, 그들의 가슴을 열어보니 텅 빈 무쇠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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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다
오른 팔과 왼 팔을 앞으로 뻗어
손톱끼리 서로 만나도록 하면
한 아름이 됩니다
둥근 것이 됩니다
둥근 원은
품어 안으면 생깁니다
부드러운 품이 됩니다
깍지라도 끼면 쉽게
놓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너를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껴안으면 하나로 느끼고
서로 심장을 내주어
두근거리는 사랑이 됩니다
우리의 힘
한 사람의 아픔이
한 사람만의 아픔이 아니고
한 사람의 슬픔이
한 사람만의 슬픔도 아닙니다
아픔은 저마다 갖고 있고
슬픔도 저마다 갖고 있지만
서로 나누고 짐을 더는
우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위로는 어디서 옵니까
서로의 형편이 되어보고
서로의 바닥을 딛고 서고
서로 눈높이를 맞추어
다가서는 아름다움입니다
불행 앞에 마주 서는 힘으로
세상을 헤쳐가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