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청도출신 조선후기 최고 관상가 박유붕(1806년 ~ ?)
박유붕(朴有鵬)은 조선 후기의 관상가이며 관료로 초명은 박정붕(朴廷鵬) 자는 남거(南擧) 호는 백운학(白雲鶴)으로 아버지 박희태와 어머니 경주 이씨 이익무의 딸 사이에서 1806년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원정리에서 태어났다.
박유붕은 조선 말에 살던 사람으로 그는 어려서 부터 관상을 보는데 소질이 있어서 성장하면서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운문사에서 일허선사(一虛禪師)로 부터 관상학의 교과서인 신상전편(神相全篇)을 사사 받았다.
관상 수업을 받겠다고 찾아온 박유붕의 관상을 살펴보던 일허선사는 박유붕의 두개의 눈으로는 남의 관상을 보는데 두가지 관상을 볼수 있다고 하면서 ''너는 애꾸가 되어야 정확한 관상을 볼수있다" 고 하였다. 일허선사가 자신에게 애꾸가 되어야 관상을 잘볼수 있다고 하자 박유붕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왼쪽 눈을 불로 지져서 애꾸로 만들었다.
일허선사로 부터 관상수업을 마친 박유붕은 청도에서 관상을 보면서 생활을 하다가 좀더 큰 돈도 벌고 기회가 되면 벼슬 길에도 나가기 위해서 한양으로 상경을 하였다.
한양 땅에 도착한 박유붕은 1859년 54살 때인 어느 날 운현방(운현궁)을 지나다가 우연히 열린 대문 사이로 마당에서 놀고있던 아이를 봤는데 이 아이의 관상이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결례를 무릅쓰고 운현방(운현궁)으로 들어가서 놀고있던 아이의 관상을 자세히 살펴보던 박유붕은 그자리에서 땅에 엎드리며서 큰 절을 올리고는 ''상감마마 문안인사 올립니다" 라고 하였다.
마당에서 일을 하던 하인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흥선군(興宣君) 이하응에게 작은 도령 명복 도령에게 상감마마라고 하면서 큰절을 올리는 사람이 있다고 아뢰었다. 하인의 말을 들은 흥선군은 하인에게 그사람을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
흥선군 앞에 불려온 행색이 초라한 애꾸눈 박유붕에게 흥선군이 자초지종을 물어보자
박유붕이 말하기를 지금 마당에서 놀고있는 도령님은 임금이 되실분으로 4년후에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하였다.
흥선군은 박유붕의 말에 반신반의 하면서 관상을 봐주었으니 복채를 줘야 하는데 흥선군은 당시에 돈도없는 궁핍한 생활을 하던 처지로 복채를 줄돈이 없으니 어찌하겠냐고 하였다.
그러자 박유붕은 제왕의 관상을 보았으니 적어도 3만냥은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흥선군은 자신의 아들이 임금이 될것이라고는 믿지않고 반신반의 하면서 그러게 하자고 하고는 약정서를 써주었다.
세월은 흘러서 1863년 12월 8일 철종이 후사를 남기지 않고 승하하자 신정왕후 조대비는 흥선군 이하응과 반나절이 넘는 긴 독대끝에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12살 이희(李熙 : 고종)에게 왕권을 물려주자 사람팔자 시간문제라고 대군
(大君)도 아닌 흥선군 이하응은 박유붕의 말대로 대원군(大院君)에 올랐다.
이하응의 둘째 아들 12살 이희가 왕위에 오르고 몇일 후에 박유붕은 흥선군으로 부터 돈을 받아서 싣고 오기 위해서 당나귀 4마리를 끌고 운현궁을 찿아가서 흥선대원군 이하응에게 약속했던 복채 3만냥을 받으러 왔다고 말하면서 약정서를 내놓았다.
박유붕이 찿아오자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박유붕의 지인지감(知人之鑑)에 탄복해서
자신의 책사로 삼고 운현궁 옆에 45칸 저택을 마련해주고 혜화문 밖의 돈암동에 수천평의 땅을 하사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박유붕은 흥선대원군의 책사로 발탁되고 흥선대원군의 시중을 들던 4인방인 천하장안(千河張安 : 천희연(千喜然), 하정일(河靖一), 장순규(張淳奎), 안필주(安弼周)과 함께 대원군의 심복으로 대원군을 모시면서 자신의 호인 백운학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대원군 이하응으로 부터 복채로 45칸 저택과 땅을 받은 박유붕은 다음 해인 1864년 대원군에게 자신이 죽은 후에 지방(紙榜)에 현고학생부군(顯考學生府君)이라는 신위만 쓰이는 신세를 면할수있게 벼슬 하나를 내려달라고 부탁을 하자 대원군 이하응은 박유붕을 경상도 울주군 언양현감으로 제수를 했다가 곧 경기도 화성의 남양부사, 장단부사등을 제수하고 내직으로 불러들이고 여러관직을 거쳤다.
1866년 3월 6일 선혜청낭청과 영주군수를 지낸 여흥 민씨 민치록의 여식 민자영을 왕비로 간택을 하면서 대원군은 박유붕에게 민자영의 관상을 보라고 하였다. 대원군의 명으로 민자영의 관상을 본 박유붕은 민자영이 왕비가 되면 장래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앞길을 막게 될 것이라고 여러번 반대를 했다. 박유붕이 여러번 민자영이 왕비가 되는 것을 반대하자 대원군은 박유붕에게 역정을 내면서 1866년 3월 21일 민자영을 왕비로 삼았다.
1868년 4월 10일 운현궁에서 귀인 이씨 영보당이 아들 완화군(完和君)을 생산하자 대원군은 몹시 기뻐하며 완화군을 원자로 삼으려고 하면서 박유붕에게 완화군의 관상을 보라고 하였다.
완화군의 관상을 본 박유붕은 완화군의 명이 짧다고 원자로 삼는 것을 반대했다.완화군은 명성왕후의 반대로 끝내 원자로 책봉되지 못하고 박유붕의 말대로 1880년 1월 12일 13살 어린 나이로 죽자 생모 영보당 이씨도 충격을 받고 마음의 병으로 죽었다.
고종과 대원군은 완화군을 원자로 삼는것을 반대하는 박유붕을 명성왕후의 편을 든다고 관직을 삭탈하고 운현궁 출입도 막고 멀리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에 박유붕의 집으로 여러번 명성왕후 측에서 사람을 보내서 명성왕후의 관상을 봐달라고 사정을 하자 박유붕은 이를 거절하기 위해서 자신의 한쪽 눈마저 불로 지지고 봉사가 되었다.
명성왕후 측에서 관상을 봐주지 않고 맹인이 된 박유붕에게 앙심을 품고 사람을 보내서 박유붕을 죽였다고 전해지는데 언제 누가 죽였는지 또 사후의 일들은 전해지는게 없다.
한국의 관상학은 중국에 영향을 받았다. 한국관상은 백제 이전에도 존재해 있었고 기록상으로는 백제의 왕인(王仁)과 아직기(阿直岐)가 4세기에 일본에 상학을 전수해 준 걸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상법이 전파된 건 7세기 초 신라의 선덕여왕 때 선종이 들어오면서 승려들이 달마상법을 배워 신분이 높은 분들의 상을 봤다. 고려 말 승려 혜징 (惠澄)은 이성계의 기다란 귀를 보고 군왕이 될 거라 예언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세조때 영통사의 한 도승이 한명회를 보고 재상이 될 것을 예언한 일화도 전해진다. 당대 최고의 역학자인 토정 이지함은 17세의 한음(漢陰) 이덕형의 관상을 보고 높은 벼슬을 할 큰 인물이라 점치면서 당시 영의정 이산해에게 사위 삼을 걸 권했다 한다.
실력 있는 관상가가 존재해 왔지만 그중에 가장 유명하고 뛰어난 관상가는 조선말에 활약했던 박유붕이다.
경북 청도태생의 박유붕은 젊은 시절부터 점술과 관상을 공부했으며 결혼 후에는 처가에 내려오는 비서를 접하고 최고의 관상실력을 갖춘다. 박유붕의 처가는 임진왜란 때 이여송 참모로 따라 왔다가 조선에 눌러 앉은 명나라 무장 두사충의 후손이다. 두사충은 당대 풍수, 점술, 관상의 일가를 이룬 사람으로 관상과 풍수의 비서(秘書)가 후손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관상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눈이 애꾸가 되어야 비범한 능력이 생긴다는 걸 알고 스스로 송곳으로 찔러 애꾸가 되었다고 하고 담뱃불로 지져 애꾸를 만들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박유붕은 궁도령(훗날 흥선대원군)이라 불리는 이하응이 천하를 쥘 거라 점치고 출세를 위해 운현궁으로 찾아간다. 운현궁 앞마당에 제기차기를 하던 명복(훗날 고종)을 보고 “운현궁에 왕기가 서려 있고 둘째 아드님이 왕의 상을 타고 났으니 왕이 될 거다‘
이 얘기를 들은 이하응은 박유붕을 불러 언제 왕이 될 건지를 물으니 4년 후에 될 거라 답하며 그때 복채 3만냥을 받으러 오겠다한다.
그의 예언대로 4년 후에 명복은 고종으로 즉위한다.
고종은 이마가 넓고 높으며 반듯하게 서 있는 모양이다. 직위가 높고 명석하며 명예가 드높다. 콧대 또한 도톰하게 힘이 있으며 턱이 둥글고 넓으니 아랫사람을 거느리는 능력을 갖춰 제왕으로써의 조건는 갖춘 관상이다. 하지만 옆광대에서 귀 앞부분까지 들어가 장구형태의 風자형의 얼굴이라 처음은 있느나 끝이 없어 일에 결과를 맺지 못하고 돈도 흩어지고 말년에 어느곳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신세가 될 수 있다.
박유붕은 복채를 받으러 흥선군을 찾아가자 박유붕의 지인지감(知人知監)에 감탄하며 자신의 책사로 두고 운현궁 옆에 45칸 대저택을 하사하고 수선교에서 돈암동까지 넓은 땅을 복비로 준다. 관상가로는 최초로 언양 현감(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으로 시작해 남양 부사를 지내고 정3품 당상관의 품계를 받은 인물이다.
큰 신임을 받고 승승장구하던 박유붕이 흥선군의 신임을 잃고 의문의 최후를 맞는 계기가 두 번 생긴다.
흥선대원군의 관상은 이마의 복덕궁이 발달되어 있어 복과 덕이 죽을 때 까지 이어진다. 윗사람의 도움으로 출세, 성공하거나 권력을 잡는다. 법령이 뚜렷하고 길게 있으니 외골수기질이 강하며 늙어서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한다. 눈이 깊으니 속을 알 수 없고 주변에 사람은 많이 있으니 가정자리가 그늘이 지고 고독하다. 입술에 힘을 주고 있으니 단호하며 아랫입술이 앞으로 나오고 더 두터우니 고집스럽고 반항적인 기질이 나온다. 하지만 자신의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과 정이 깊다.
첫 번째는 중전간택에서 흥선군이 눈여겨 본 민자영(훗날 명성황후)을 흥선군의 앞길을 막는다 해서 세 번에 걸쳐 반대한다. 이에 흥선군은 짜증을 내며 “내 며느리 뽑는 거지 너 며느리 뽑는 거냐”며 역정을 냈다.
두 번째는 흥선군이 귀인 이씨(영보당) 소생인 완화군(고종 첫아들)을 세자로 삼으려 하자 13세로 단명할 상이라며 반대한다. 이렇게 두 번의 대립적인 상황이 생기면서 흥선군의 버림을 받았고 자신의 집에서 칩거하다 죽음을 맞이했다는 설이 있고 또 다른 설은 명성왕후가 중전이 되면서 나머지 한쪽 눈을 지져 더 이상 관상을 볼 수 없게 하고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설이 있다.
개인적인 생각은 아무리 중전이었어도 시아버지 흥선군의 사람을 그 당시 힘이 약했던 중전이 사람을 시켜 없애기는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그의 죽음은 미스테리로 남았고 끝은 비운으로 끝났지만 아직까지도 당대 최고의 관상가로 회자된다.
지금까지도 많은 역술가들은 자신의 호를 지을 때 “백운학 박유붕”의 호를 따서 “백운”이라는 글자를 넣고 호를 짓는다.
박유붕은 자신의 눈을 애꾸로 만들어야 신묘한 능력이 생긴다 해서 일부러 애꾸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과연 관상학적으로 그게 맞는 걸까?
그의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해서 어떠한 연유로 그랬는지 알 수 없으나 우리가 사격을 할 때나 작은 사물을 집중해서 볼 때 한쪽 눈을 감고 보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연유로 한쪽 눈을 멀게 했을 수 있다. 달마가 수행할 때 자꾸 감기는 눈꺼풀을 잘라냈듯이..
하지만 눈은 관상학적으로 왼쪽 눈은 태양. 오른쪽 눈은 달이라 한다. 하늘에 태양만 있어도 달만 있어도 만물은 살아 갈 수 없다. 천지가 아무리 크다 해도 태양과 달빛이 퇴색하면 만물이 소생하지 못하듯 골격과 다른 부위가 아무리 잘생겼다 해도 눈에 빛을 잃으면 운이 쇠락하게 된다. 그래서 시력이 갑자기 떨어진다면 운세가 하락함을 대비하라고 했다.
자신의 눈을 멀게 할 정도의 과도한 욕심이 출세도 하였지만 시대의 상황을 읽지 못해 의문의 죽음을 당하지 않았을까.
허나 중요한건
“박유붕은 애꾸눈 점바치로 끝나지 않고 조선 최고의 관상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