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선생 서거 50주년 추모식을 남북이 함께 한다고 하는데 이는 납득이 안되는 일이다. 왜냐하면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우상화에 따른 유일사상이 지배하는 북한 체제 하에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올바른 평가나 추모사업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평양에서 먼저 일어났다는 3·1운동 왜곡 따라서 김구 선생에 대한 추모식을 남북이 공동으로 한다고 할 때 과연 북에서 3·1운동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항일독립운동사를 어떻게 보고 있으며, 김구 선생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와 인식을 갖고 있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3·1운동이 항일독립의 대의 아래 민족 대표 33인이 중심이 되어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종교인들까지 합심해 궐기한 거족적이고 근대적인 항일독립운동의 효시라고 본다. 그러나 북한에서 83년 펴낸 백과사전에 보면 『역사적인 3·1봉기는 평양에서 대중적인 독립만세 시위투쟁을 첫 봉화로 먼저 타오르기 시작했다. 평양에서 대중적인 반일 독립만세 시위투쟁은 애국적인 청년학생들 특히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이신 김형직 선생께서 일찍이 혁명의 씨앗을 뿌리시고 반일 독립운동의 믿음직한 거점의 하나로 꾸려 놓으신 평양 숭실학교의 애국적 청년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일어났다』고 왜곡기술하고 있다.
김일성家는 모조리 항일운동의 영웅 뿐만 아니라 1971년 나온 북한의 역사사전에는 『조국을 해방하고 독립을 이룩하려는 조선인민의 불같은 지향과 철천지 원수 일제 침략자들에 대한 쌓이고 쌓인 민족적 분노는 러시아 10월혁명의 영향으로 드디어 1919년 전민족적인 3·1봉기로 촉발하였다』고 기술, 민족자결주의가 아니라 볼셰비키 혁명의 영향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른바 민족대표로 자처하던 부르조아 사대주의자들은 투항주의적이고 무저항주의적 립장을 설교하면서 청원과 외세 의존의 방법으로 독립을 얻으려 시도하다가 시민들의 세찬 시위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겁을 집어먹고 즉시로 일제에 투항하였다』고 민족대표 33인을 악의적으로 폄하하고 있다. 북한이 임시정부에 대해서는어떻게 규정하는가. 북한은 김일성의 무장투쟁을 부각시키기 위해 임시정부를 격하시키는 데 광분하고 있다. 다음은 1980년 발간된 <조선전사>의 임시정부 관련 부분이다. 『자산계급 출신의 일부 부르조아 민족운동의 상층분자들은 해외에서 망명단체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표방하면서 사대주의적 매국매족행위를 감행하였다.』 『상해 림시정부 안의 부르조아 민족운동 상층분자들은 파벌싸움만 한 것이 아니라 강대국들에게 독립을 청원하러 다니는 구걸행각도 감행하였다.…파벌싸움 독립청원운동과 함께 인민 수탈을 위한 책동은 임시정부의 반인민적이며 매국매족적인 책동의 주요 측면의 하나였다. …실로 상해림시정부 안의 사대 매국노들이 한 일이란 이른바 정부 틀만 차려놓고 애국동포들로부터 운동자금이나 걷어들여 탕진하며 강대국들에 청원운동이나 하고 서로 물고 뜯고 하는 파벌싸움이나 일삼아 온 데 지나지 않았다. 상해 림시정부의 책동은 3·1 봉기 후 우리나라 부르조아 민족운동의 전면적인 몰락과 쇠퇴과정의 직접적인 반영과 동시에 그의 뚜렷한 표현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의 결과 민주공화제로 세워졌고, 독립운동 방략으로 독립전쟁론, 외교활동론, 교육문화육성론, 의열투쟁론, 독립준비론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나라를 되찾겠다는 단심으로 27년간 싸운 항일독립운동의 총본산이었다. 일제를 이땅에서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전략적 안배에 따라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국제무대에서 외교전을 전개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런데도 북한이 임시정부의 외교독립론을 사대매국이니 매족이니 하여 폄하, 중상하는 것은 항일독립운동선상에 김일성의 무장투쟁론을 절대적인 것으로 내세우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 자신이 우리 민족의 이름 아래 항일을 해본 적이 없고 중국 공산당 동만특위 산하의 항일연군이나 소련의 88국제여단에 소속되었던 비자주적인 처지였으니 북한의 주장은 이를 호도하기 위한 것이며 열등감의 발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일성의 증조부부터 모조리 항일 독립운동 우리는 항일운동사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 아래 국권회복을 위하여 민족의 모든 역량을 동원한 항일운동사로 파악하고 있는 반면 북한은 우리의 항일독립운동사를 김일성 일가의 항일무장투쟁사로 조작해놓은 상태다. 1973년 북한에서 간행된 <정치사전>을 보면 『김성주 일가는 대대로 조국의 독립과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외래 침략자들과 싸워온 애국적이며 혁명적인 가정이다. 그의 증조부 김응우는 1866년 미국의 샤만호를 격침시키는 선두에 섰던 열렬한 애국자다.… 그의 아버지 김형직은 조국의 독립과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전생애를 바친 불요불굴의 혁명투사이며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이고 민족주의 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한 위대한 선구자이다. 김형직은 지원(志遠)을 품고 혁명의 길에 나서 중학시절부터 반일투쟁을 지원했고 1917년 3월에는 조선국민회를 결성했다. 김형직의 지도 밑에 조선국민회는 국내 각지는 물론 국외에까지 조직을 확대, 인민대중을 반일투쟁에 적극 동원했다. 김성주의 어머니 강반석은 자신의 모든 조국의 광복과 녀성의 해방을 위하여 다바쳐 싸운 렬렬한 혁명투사이며 우리나라 조선 녀성의 탁월한 지도자다. 강반석은 김성주가 무송 일대의 공산주의자를 결속하여 조직한 비밀혁명소조의 성원으로 무송과 안도현에서 부녀회 회장의 책임을 맡아 부녀회원들을 맑스 레닌주의 사상으로 무장시키고 조국의 독립과 녀성들의 사회적 해방을 위한 투쟁을 적극 조직, 전개했다. 그녀는 특히 김성주의 조선인민군 창건을 위한 사업을 몸과 맘을 다바쳐 도왔다』고 기술하여 항일독립운동사를 마치 김일성 일가의 가승 정도로 날조해 놓고 북한의 해방도 김일성의 조선인민군이 일제를 쳐부스고 이룩했다는 주장을 한다.
백범을 애국의 길로 끈 위대한 수령님?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와같이 무참히 왜곡 격하시키고 우리민족의 항일독립운동사를 김일성 일가의 가족사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사로 보면서 김일성 부자의 유일사상만이 존재하는 북한인지라 김구 선생에 대한 평가야 자명하다.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우상화와 유일사상에 배치되지 않는 종속개념으로 김정일 부자를 미화하는 악세서리라면 몰라도 우리가 생각하는 김구 선생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1949년 4월19일 김구 선생 일행의 북행길만 하더라도 우리는 김구 선생을 대접하여 거창하게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 운운하지만 북한에서는 남북사회단체연석회의로 명명하여 김구 선생 일행은 각기 소속된 정당 사회단체 대표로 참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 그 당시 북한에서는 북조선 인민회의를 개최하여 이른바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헌법을 심의하고 있어서 남북의 분단을 막아보겠다는 일념에서 북행한 김구 선생에게 이같은 기막힌 현실은 심지어 선생이 자결까지 하시려 했다는 것이 당시 수행했던 분의 증언으로 남아있다. 그러기에 1980년 6월3일자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위대한 수령님이 남조선 좌익정객 김구를 애국의 길로 이끌어 주신 이야기』라 하여 2면에 걸쳐 게재하고 있는데 저들은 선생이 『이 세상 어데를 찾아 보아도 찾지 못했던 위대한 분을 모시고 그분의 뜻을 받드는 행복감이 전신을 감쌌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고 있다. 그 뿐 아니다. 저들은 <위대한 품>이란 영화를 만들어 김구 선생이 그들에게 투항하여 국기는 물론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관인까지 바치면서 『황해도 신천에 과수원이나 하나 마련해주면 여생을 장군님에 의탁하여 살겠다』고 했다는 등 황당무계한 이야기로 김구 선생을 비하하며 김일성 우상화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추앙하는 김구 선생 서거 50주기 추모식을 남북이 함께 하겠다는 발상이 그럴만하지만 이와같이 북한의 김구 선생에 대한 중상과 왜곡선전을 간과한 채 추진한다면 오히려 선생을 욕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김구 암살의 진짜 배후는 좌익 전력자 선생에 대한 북한의 중상과 모함이 이와같은데도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에서 김구 선생 서거 50주기 추모식을 남북이 하자는 발상이 어떻게 나왔을까. 물론 김구 선생에 대한 북한의 이와같은 황당무계한 중상모함과 폄하를 전혀 모르는 천진난만한 발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1995년 8월15일부터 KBS가 방영한 광복 50주년 기념 특집 기획드라마 <백범 김구>식으로 김구 선생 암살범 안두희의 최종 배후로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암시한 반대한민국적 발상이라면 김구 선생 암살의 진짜 배후가 누구인지 다시금 짚고 넘어가야 한다. 93년 발행된 <정평 한국현대사>에 기고한 「백범 암살의 배후는 누구인가」라는 글에서 필자는 김구 선생 암살의 배후로 항간에서 지목한 홍종만, 김지웅, 장은산, 채병덕, 신성모 등이 하나같이 좌익 전력자이거나 간첩과 관계가 있었고, 당시 김구 선생 암살자로 가장 정치적 이익을 볼 당사자가 북이라는 점에서 북한 배후론을 주장한 바 있다. 그런데 98년 12월30일자로 출간된 <맥아더 장군과 계인주 대령>이란 KLO부대 대장 桂仁珠 씨의 회고록에 안두희의 최후의 배후로 지목된 국방장관 신성모와 북한의 조평통 위원장 이주노와 왕래가 기술되어 그 밀통관계가 한층 흥미롭다.
신성모와 이주노는 다같이 백산 안희재 선생의 문하생으로 남과 북으로 갈라진 두 사람이 단순히 인간적인 소식을 주고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張興 장군의 수기에서 볼 수 있듯이 상해 임시정부 시절 신성모가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전위로 이승만 대통령의 맨데토리안 성토에 가장 앞장섰고, 박용만 신숙과 더불어 이승만 대통령 암살 기도까지 했으며, 그가 천거한 내무부 장관 김효석이 6·25 당시 부역 방송을 한 사실이나 그의 생질 김삼수가 간첩이었던 것이 밝혀진 것으로 볼 때 북과 밀통의 개연성을 부정할 수 없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