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이 공소 터는 한국 교회사 안에서 솔뫼나 미리내만큼이나, 아니 오히려 그 이상 가는 귀중한 사적지이다. 하지만 이처럼 중요한 사적지인 은이 공소터가 교회의 무관심 속에 이쑤시개 공장과 잡초만이 무성한 텃밭으로 한동안 변해있었다. 그러던 중 1996년 은이 공소터 530여 평을 매입하고 야외제대와 김대건 신부 성인상을 세우면서 비로소 본격적인 성지 개발이 시작되었다.
은이 마을은 한국 교회 최초의 방인 사제였던 성 김대건 신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간직한 곳이다. 김 신부가 소년 시절을 보낸 골배마실에서 불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은이 마을은 그가 모방 나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간택되어 마카오로 파견된 곳이다.
또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지가 바로 은이 공소로서 "용인 천주교회사"(오기선 신부 감수, 조성희 지음)는 이에 대해 "은이 공소는 조선 교회 사상 최초의 본당"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바로 이곳에서 김 신부는 조선 땅에서는 처음으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고, 바로 이곳이 체포되기 직전 공식적으로 최후의 미사를 드렸던 곳이기도 하다. 한국 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성인으로 추앙받는 김대건 신부가 성소의 씨앗을 뿌렸던 곳이자 그 열매가 가장 먼저 풍성하게 열렸던 곳이 바로 은이 마을, 은이 공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은이 공소와 관련된 또 한 명의 성인은 바로 모방 나 신부이다. 그는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로 조선 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5년 조선입국을 목전에 두고 병사하자 그 뒤를 이어 부주교로서 조선 교구를 맡게 됐다.
당시 몽고에서 한문 공부를 하며 브뤼기에르 주교로부터 이미 모든 사목 권한을 위임받은 모방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준비했던 길을 따라 조선 입국을 서둘러 국경에서 조선 교우들을 만나고 1836년 초 마침내 조선 땅을 밟음으로써 파리 외방 전교회원으로서는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가 된다.
부활절을 서울에서 지낸 모방 신부는 본격적인 사목 활동에 나서 주로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의 교우촌을 방문하고 2백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때 그의 사목 활동의 중심지가 바로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용공에 위치한 은이 공소였다.
모방 신부는 1837년에 이르러서 샤스탕 신부를 맞아들여 함께 사목 활동을 함으로써 조선 교구 제2대 교구장 앵베르 범 주교가 그 해 말 입국할 때 이미 조선 교구의 교세가 두 배 이상으로 성장하는 등 큰 성과를 얻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모방 신부는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앵베르 범 주교, 샤스탕 신부와 함께 그 해 9월 홍주(洪州) 근처에서 스스로 잡힌 몸이 됨으로써 결국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된다.
아직 개발되지 않은 다른 여러 사적지 및 성지들과 마찬가지로 은이 공소 터는 그 땅에 서리서리 얽혀 있는 선조들의 뜨거운 신앙을 기릴 수 있도록 후손들의 정성 어린 손길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은이 공소의 교회사적 중요성을 인식한 양지 성당은 성지 개발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다.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을 맞아 시작된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 건립 추진’ 운동에 이어 2002년에는 은이 성지 주변 5200여 평을 매입하였고, 2003년에는 사제관과 성당, 숙소 건물을 포함한 1200여 평을 매입하면서 그해 9월 성지 전담신부 발령으로 본격적인 은이 성지 개발이 시작되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
한국인 첫사제 김대건 신부와 은이 성지
조선의 교우들은 항상 예고 없이 닥친 박해로 어렵게 모셔 들였던 성직자를 번번이 잃게 되어 쓰라린 슬픔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러던 중에 이미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길에 올랐던 본방인(한국인) 사제를 맞이했던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으리라. 이제 한국인 사제로는 처음 서품되어 귀국 길에 오른 김대건 신부는 고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강경 부근의 황산포(나바위)에 무사히 상륙하여 사목 활동에 임하게 된다.
고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 활동 지역은 은이를 중심으로 용인, 이천, 안성 지역 등지에서 이루어졌다. 은이는 박해 시대 숨어살던 천주교 신자들에 의해 이룩된 교우촌이고, 은이(隱里)라는 말 그대로 ‘숨겨진 동네’, 또는 ‘숨어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김대건 신부는 은이를 중심으로 경기 이천, 용인, 안성지방을 두루 다니며 사목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바로 이 은이성지는 이미 유학길에 오르기 전, 1836년 나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 성사와 첫 영성체, 그리고 신학생으로 선발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처음으로 조선 교회 안에 자발적으로 시작된 성소자 양성의 결실을 맺은 곳이 ‘은이성지’이다. 이렇게 은이는 김대건 신부에게 있어 첫 사목 지역이었고 조선 천주교회의 역사상 본방인 사제가 사목한 최초의 본당이었다. 이 시기에 김대건 신부는 경기지방의 은석골, 텃골, 사리틔, 검은정이, 먹뱅이(묵리), 한덕골, 미리내, 한터, 삼막골, 고초골, 용바위, 모래실, 단내 등지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베풀고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당시에 행하신 김대건 신부의 사목 활동 모습은 1866년(병인박해)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정은 바오로 가문에 정 레오 신부에 의해 다음과 같이 전해 온다. “집안 어른들께서는 김 신부님께 성사(고해성사)받던 이야기를 하시곤 했는데 김 신부님은 항상 밤으로만 다니셨다 한다. 미사 짐도 없이 단내(丹川)에서 10리가 채 못 되는 동산 밑동네(東川里)에서 오시어 고해성사만 주시고 바로 떠나셨다 한다. 김 신부님과 복사가 깊은 밤중에 대문밖에 오시어 ‘정생원! 정생원!’ 하며 증조부 바오로를 찾으시는 소리에 식구들은 모두 잠을 깨었으나 누가 무슨 일로 찾는지 두려워 주저하게 된다. 복사가 작은 목소리로 ‘김 신부님께서 성사 주러 오셨으니 주저하지 말고 빨리 나오시오’ 하는 말에 깜짝 놀라 일어나 증조부 바오로께서는 이웃이 알까 쉬쉬하며 반가이 신부님을 방으로 뫼시고 곧 성사 받을 준비를 하는데 그 준비는 간단하였다. 벽에 깨끗한 종이를 한 장 붙이고 그 위에 십자가상을 정성되이 모셔 건다. 김 신부님께서는 10여명의 고해자들에게 성사를 주시고 다시 배마실(현 용인시 양지면 남곡리 양지성당 소재지)로 가시어 거기서 성사를 주시고 ‘은이’로 가시면 날이 샌다고 하신다.” 이 증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험한 산길을 밤으로만 다니면서 사목 활동을 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렇게 6개월간의 사목 활동을 하시던 중 고(高) 페레올 주교의 명령이 새롭게 주어진다. 그 명은 중국에 체류하고 있는 선교사들과의 연락, 또 곧이어 조선에 입국해야 할 매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토마스 부제의 입국로를 알아보기 위한 임무였다. 따라서 김대건 신부는 또다시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게 되는데, 이때의 이별이 모든 교우들이 예상했듯이 마지막 이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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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년 4월 13일 김대건 신부는 은이 공소에서 교우들과 마지막 미사를 봉헌한 후 조선 교회의 숙원 사업인 성직자 영입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띠고 길을 떠나게 된다. 은이를 떠나시기 전에 김대건 신부는 교우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다.
“험난한 때에 우리는 천주님의 인자하심을 믿어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증거 할 용맹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구합시다. 지금 우리의 주위에는 검은 마귀의 손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일의 삶을 모르는 위급한 처지에 처해 있는 우리들입니다. 내 마음과 몸을 온전히 천주님의 안배하심에 맡기고 주 성모님께 기구하기를 잊지 맙시다. 다행히 우리가 살아 있게 된다면 또 다시 반가이 만날 날이 있을 것이오. 그렇지 못하면 천국에서 즐거운 재회(再會)를 합시다. 끝으로 내 홀로 남으신 불쌍한 어머님을 여러 교우 분들이 잘 돌보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이 말씀을 은이 공소와 용인 지방 교우들에게 유언(遺言)으로 남기시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셨다. 교우들은 떠나시는 신부님의 모습을 은이성지에서 1Km 정도 떨어진 ‘중담’ 모퉁이까지 나와 눈물로 전송했다.
그동안 교회 내에서 잊혀져 왔던 은이성지의 개발은 1992년 6월부터 시작된 서울대교구 주평국 신부의 ‘도보성지 순례’를 계기로 알려지고, 1996년 5월 은이 공소터 530여 평을 매입하면서 시작되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야외제대와 김대건 신부 성인상을 세우고 성상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또한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을 맞아 시작된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 건립 추진’ 운동도 시작되고, 2002년에는 은이성지 주변 5200여 평 매입과 이어 2003년 사제관과 성당, 숙소 건물을 포함한 1200여 평을 매입하면서 그해 9월 성지 전담신부 발령으로 본격적인 은이성지 개발이 시작되었다. [출처 : 은이성지 홈페이지]
수리산, 골배마실, 은이 - 박해 시대의 교우촌
박해의 칼날을 피해 비밀리에 형성된 전국의 교우촌들은 영원한 본향(本鄕)인 천당길을 얻으려는 숨은 꽃(隱花)들의 보금자리였다. 그들은 이곳에서 신앙을 지켰으며, 순교를 향한 오랜 고통과 세월을 참고 기다려야만 했다.
어화 벗님네야 우리 본향 찾아가세. 인간 영복(永福) 다 얻어도 죽고 나면 허사되고, 세상 고난 다 받아도 죽고 나면 그만이라. 아마도 우리 낙토(樂土) 천당밖에 다시 없네. (최양업 신부의 천주가사 '사향가' 중에서)
그러나 그 대부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홀연히 형성되었다가 배교자나 포졸들의 눈에 띄어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 우리 교우촌이었다. 다행인 것은 현재까지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 곳곳에 남아 있고, 신앙 후손들에게 그 신심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1830년대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부친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성인에 의해 교우촌으로 가꾸어진 수리산(修理山, 안양시 안양 3동의 뒤뜸이 마을).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성장한 골배마실(용인군 내사면 남곡리)과 이웃 '숨은 이들의 마을' 은이(隱里) 교우촌. 이 두 지역은 경기도에서도 가장 유명한 교우촌이자 카타콤바와 같은 박해 시대의 비밀 교회로서 신앙을 이어 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1836년 초 수리산에서는 최양업이 교우들의 추천으로 신학생으로 선정되었고, 얼마 뒤에는 골배마실에 살던 김대건도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수리산이나 골배마실 골짜기는 땅이 척박하였으므로 신자들 대부분이 화전이나 담배 농사를 지어 생활을 꾸려가야만 했다. 그러니 생활에 여유가 있을리 없었지만 그들은 언제나 새 신자들을 환영하였고,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들이 생활 터전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 신부의 방문이 있을 때면 여럿이 모은 공소전(公所錢)을 바쳐 교회 사업을 도왔으며, 아침 저녁으로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을 일상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하였다. 이것이 바로 초대 교회로부터 내려오는 나눔과 섬김의 전통이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이곳은 모두 포졸들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당시 수리산의 회장 최경환은 이미 순교를 각오하고 있던 터였으므로 태연히 그들을 맞이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내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에게 음식을 준비하여 대접하도록 한 뒤 교우촌 신자들과 함께 오랏줄에 묶인 채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그리고는 무지한 형벌을 여러 차례 받은 뒤 그 상처 때문에 옥중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반면에 최양업 신부의 모친 마리아는 두 살짜리 막내 자식에 대한 육정(肉情, 모정)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하였으나, 이내 잘못을 뉘우친 뒤 끊어지는 육정을 억누른 채 순교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훗날의 시복 과정에서 마리아는 첫 번째의 배교로 제외되고 말았다. 그러나 어린 자식 때문에 일시 배교했으나 이를 뉘우치고 순교한 사실은 오히려 조선의 전통에서 본다면 모정과 신앙을 모두 지킨 모범적인 순교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앞으로의 시복 과정에서는 마땅히 마리아를 다시 '하느님의 종'에 포함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골배마실에 살던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은 사위 곽(郭) 씨의 밀고로 체포되어 순교하였으며, 아내 고 우르술라는 동냥으로 목숨을 부지해야만 하였다. 그러니 첫 번째 방인 사제가 되어 귀국한 뒤 모친을 뵙게 된 아들 김대건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김대건이 골배마실로 돌아와 모친과 함께 생활하면서 은이 공소를 중심으로 활동한 것은 1845년 말부터 다음해 부활절까지였다. 그러다가 그는 황해도 지방의 해로를 개척하러 나갔다가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최경환과 김제준이 순교한 뒤 그들의 시신은 가족들에게 거두어져 수리산 자락과 골배마실 인근에 각각 안장되었다. 그러나 최경환의 무덤이 후손들에 의해 가꾸어져 온 반면에 김제준의 무덤은 잊혀지고 말았다. 이후 최경환의 유해는 1930년에 발굴되어 명동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치되었으며, 본래 무덤 자리와 교우촌은 1965년부터 사적지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또 골배마실에는 1962년 양지 본당 신자들에 의해 김대건 신부상이 건립되었고, 은이 공소 터는 최근에 일부가 매입되어 사적지로 조성되고 있는 중이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5월호]
[ 순교자]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1821-1846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는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 마을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대건의 아명은 재복(再福)이고 이름은 지식(芝植)이라고 하는데, 그의 집안은 열심한 구교 집안이다. 김대건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Pius)와 아버지는 순교로써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다. 신앙 깊은 순교자의 집안에서 성장한 김대건은 굳센 기질과 열심한 신덕으로 충실히 생활하던 중, 16세 때인 1836년에 모방 신부에 의해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가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 프란치스코는 병사하였으므로, 남은 두 신학생만이 훌륭히 학업과 성덕을 닦았으나 나이가 25세에 이르지 못하여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 무렵 파리 외방 선교회가 조선 교구를 담당하여 주교와 신부를 조선에 입국시켜 전교하고 있는 중이었으나, 조선이 외국과 수호조약을 맺지 않아 종교자유가 없었음으로 프랑스 루이 필립 왕이 파견한 함대의 세실 제독이 그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나섰다. 김대건은 세실 제독의 통역관이 되어 조선이 들어갈 메스트르 이 신부와 함께 에리곤 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세실 제독이 갑자기 조선 항해를 중지하게 되어 김대건은 혼자 육로로 본국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변문에 이르러 조선 사절단의 일원인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본국 소식을 자세히 듣게 되었는데, 성직자를 비롯하여 아버지와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입국을 서둘러 그해 12월 29일 혼자 의주 변문을 거쳐 입국하였으나 중도에서 본색이 탄로날 위험이 생겨 다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김대건은 백가점(白家店)과 소팔가자(小八家子)에 머물며 메스트르 신부로부터 신학을 배우고,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 고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다시 입국을 시도하여 고 주교와 함께 변문으로 왔으나 김 부제 혼자만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1845년 4월 주교와 신부를 맞이하기 위하여 상해에 갔다가 그 해 8월 17일 상해로부터 20리가량 떨어진 김가항(金家港)에서 페레올 고 주교 집전으로 신품을 받았고, 그곳의 만당(萬堂) 소신학교에서 첫 미사를 드림으로써 조선교회의 첫 사제가 되었다.
같은 달 31일 고 주교와 다블뤼 안 신부를 모시고 라파엘호라 명명한 작은 목선을 타고 상해를 출발하여 1845년 10월 12일에 충청도 나바위라는 조그마한 교우촌에 상륙하였다. 김 신부는 선교활동에 힘쓰는 한편 만주에서 기다리는 메스트르 이 신부를 입국시키려고 애썼으나, 의주 방면의 경비가 엄해서 고 주교는 바닷길을 알아보라고 지시함으로, 백령도 부근으로 갔다가 순위도에서 1846년 6월 5일 밤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김 신부가 황해 감사 김정집의 심문에서 자신은 조선에서 출생하여 마카오에서 공부했음을 토로하자 황해도 감사는 황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이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하여 중신회의를 열고 서울 포청으로 압송케 하였다. 일부 대신들은 김 신부의 박학한 지식과 외국어 실력에 탄복하여 배교시켜 나라의 일꾼으로 쓰자고 하는 의견도 있고 해서 배교를 강요했으나, 김 신부는 도리어 관리들을 교화시키려고 하자 사학의 괴수라는 죄목을 붙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는 사제생활 1년 1개월만인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 김 신부의 나이는 26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모방 베드로 신부(1803-1839년)
성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 신부의 한국 성은 나(羅)씨이고, 이름은 세례명인 베드로(Petrus)를 한문으로 음차하여 백다록(伯多祿)이라 하였다. 1803년 9월 20일 프랑스 칼바도스(Calvados) 지방의 바시(Vassy)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세계의 끝까지 가서 우상 숭배자들에게 포교를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1829년 5월 13일 사제로 서품된 그는 선교사의 꿈을 꽃피우기 위하여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중국 사천(四川) 교구로 파견되었다. 포교지로 가던 도중에 그는 조선의 초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주교와 동행하기를 희망하였다. 주교는 그의 경건함과 열성적인 면을 생각하여 기꺼이 조선의 선교사로 받아들였다.
주교가 조선 입국을 목전에 두고 만주에서 선종하자, 그는 당시 주교를 영접하기 위하여 그곳에 와 있던 조선의 교우 5명을 만나 조선에 입국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천신만고 끝에 의주 변문을 통과하여 입국에 성공하였다. 이때가 1836년 1월 12일로 그는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서양 선교사가 되었다.
조선에 입국한 후 모방 신부는 조선어를 배우는 한편 우선 한문으로 성사를 주기 시작하였고, 서울에서 시작하여 다음에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열여섯 곳 내지 열일곱 곳의 교우촌을 돌며 포교를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 해 12월까지는 어른 2백 13명에게 세례를 주고, 6백 명 이상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 또 가는 곳마다 회장들을 뽑아 주일과 축일에 교우들을 모으고, 그 모임에서 공동으로 기도를 드리고 교리문답과 복음 성경과 성인전기들을 읽고 배우도록 지도하기도 하였다.
모방 신부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큰 관심을 두어 최양업 토마스(Thomas), 최방제 프란치스코(Franciscus),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 등 세 소년을 택하여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에게 필요한 덕행을 가르치는 한편, 당시의 상황 하에서 조선 내에서의 교육이 불가능했기에 1836년 12월 2일에는 이들을 ‘마카오’로 보내어 정식으로 신학을 배우도록 하였다.
이듬해 1월 15일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모방 신부는 곧 양평 지방으로 내려가 전교하는 동시에 조선어를 다시 배워 조선어로 성사를 주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미 몸이 쇠약해져 있었고, 그래서 결국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 포교를 하던 중 열병에 걸려 서울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상태가 절망적이었기 때문에 샤스탕 신부로부터 병자성사까지 받았으나 3개월 후에 겨우 회복되었다. 1837년 말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자, 1839년까지의 선교사들의 활동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기해년에 이르러 조정에서는 다시 천주교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선교사들도 그 대상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앵베르 주교의 권유로 자수하여 홍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를 당하여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한이형(韓履亨) 라우렌시오(1799-1846년)
성 한이형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또는 라우렌시오)는 충청도 덕산에 살던 양반의 자제로 태어났다. 그는 성격이 강직하고 헌신적이며 열성이 지극하여, 14세 때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운 지 몇 주일 후 참으로 비상한 열심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는 여러 시간 동안 십자가 앞에서 묵상하였고, 전에 범한 죄를 진실한 마음으로 통회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주일과 축일에는 집에서 10여리 밖에 있는 신자 마을에 가서 그들과 함께 기도하였는데,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거르는 일이 없었다.
그는 21세 때에 신자 처녀와 혼인하고 고향을 떠나 경기도 양지고을 은이 마을로 들어가 숨어 살았는데 신심만 두터운 것이 아니었다. 이들 부부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옷이 남루한 사람을 만나면 자기 옷을 주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집에는 늘 사람들이 몰려와 주막집 같을 정도였다. 사람들이 그에게 지나치게 애긍시사를 한다고 하면 그는 “헐벗은 이웃을 입히고 굶주린 이를 먹이는 것은 거저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때가 오면 천주께서 이자를 듬뿍 붙여 다 갚아 주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 당시 라우렌티우스는 약간의 밭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무리 일이 바빠도 주일 파공을 철저히 지켰으며, 밤에는 날마다 한 시간 동안 묵상하였고, 사순절에는 매일 단식을 하였다.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조선에 들어와 그의 이러한 신덕을 보고는 전교회장으로 임명하였다.
1846년의 병오박해가 시작되자 그는 얼마동안 숨어서 지내기로 하였다. 그러던 중 김대건 신부가 잡힌 후 포졸들은 집주인이 이신규 토마스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잡기 위해 먼저 그의 삼촌을 잡아 조카가 있는 곳을 물으니, 이 토마스의 삼촌이 포졸들을 은이 마을로 안내하였다. 포졸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그 동네 신자들은 도망한 뒤였으므로 그들은 라우렌티우스의 집을 둘러싸고 온 가족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내 놓아주고 라우렌티우스만을 포승으로 묶고 조롱하며 닥치는 대로 때렸다. 특히 그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대들보에 매어단 후 물매질을 하면서 배교하고 동교인들을 대라고 협박하였다. 라우렌티우스가 이를 거절하자 포졸들은 그의 두 다리를 결박하고 그 사이에 깨어진 접시며 질그릇 조각을 끼우고 굵은 밧줄을 발목에 걸쳐서 앞뒤로 잡아당겨 살을 톱질하듯 하였다. 그러나 라우렌티우스가 이러한 잔학한 고문을 잘 참아내며 신음소리 조차 내지 않았으므로 포졸들도 이에 감동하여 다른 신자들에게 “당신들이 정말 천주교 신자가 되려면 한이형과 같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그 후 포졸들은 그를 서울로 압송하였는데, 포졸들이 말을 태워 주겠다고 하여도 이를 거절하였고 또 상처 때문에 신발을 신을 수가 없어서 백 여리나 되는 산길을 맨발로 걸어 서울까지 갔다. 그는 서울에서도 전과 같은 고문을 받았으나 조금도 굽히지 않다가 순교하였는데, 그의 죽음은 교수형 혹은 장살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때는 1846년 6월 20일이요,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이상 가톨릭 성인사전]
[성지순례 기도 예식]
은이[골배마실] 성지를 순례하면서
소년 김대건의 성소를 싹틔웠던 골배마실 성지, 그리고 첫 한국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유일하게 사목자의 삶을 살던 중심지 은이성지는 가히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성소 요람이요, 한국 교회의 성소 요람이다. 모든 한국 교회 성직자의 대주보 성인으로 공경 받고, 103위 성인의 대표격인 김대건 신부의 삶은 초창기 선조들의 피땀과 그 맥이 닿아 있다. 따라서 은이(골배마실)성지는 교회 발전과 교회의 본래 사명인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신 신앙 선조들의 얼을 계승, 발전시켜 나가는 성소의 요람이다.
은이[골배마실]성지를 순례하는 순례자들께 다음과 같은 부탁을 드리고 한다.
첫째, 성소의 귀함을 깨닫고, 성소자 육성과 개발에 앞서 가정에서부터 가정 성화를 이루기 한 구체적인 다짐을 한다(가정기도).
둘째, 우리 가정, 우리 가문에서 성직자·수도자가 탄생하는 은총을 주님께 청하며, 가족이 함께 매일 ‘성소를 위한 기도’를 바치기로 결심한다.
셋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비롯한 신앙의 선조들의 영성을 본받아 성직자와 수도자를 위해 기도하며, 자신의 인생 여정을 순교자적 삶으로 봉헌한다.
넷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영성과 신앙의 선조들의 표양을 본받아 충실한 봉사의 삶으로 교회와 사회 안에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하기로 다짐한다.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시대에 앞선 선각자로서의 김신부님의 모범을 배우며 따를 수 있도록 신앙 수련의 장을 마련하는데 협력하며 기도하자.
다섯째, 한국인으로서는 첫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지니셨던 민족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배우고 익히기 위한 시설을 준비하기 위한 사업에 적극 협조하며, 하느님께 온 삶을 투신하신 신부님의 영성과 삶을 우리 민족은 물론이요, 전세계에 전하도록 노력한다.
성지순례 기도 예식(단체)
1. 시작해설
◈ 해설자 : 형제 자매 여러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신앙 발자취가 서려 있는 이곳 ○○ 성지에서 우리 모두 몸가짐을 바르고 정숙하게 가다듬고 예식에 참여하기로 합시다. 모두 일어서십시오. 이제 ○○본당 ○○회 성지순례 기도 예식을 시작하겠습니다.
2. 시작성가
◈ 해설자 : 시작성가로 성가 283장 순교자 찬가를 3절까지 다함께 노래합시다.
3. 인사와 권고 말씀
† 주례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 아멘.
† 주례자(사제) :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사랑 지극하신 천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주례자가 평신도일 경우 다음의 양식으로 시작한다)
† 주례자(평신도) :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사랑 지극하신 천주를 찬미합시다. ⊙ 아멘.
† 주례자(권고의 말씀) : 우리는 오늘 한국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님의 성소 요람지에서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서 우리 신앙의 선조들과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오로께서 권고하시기를 모든 일에 있어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느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풍부히 내려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세력에서 구원하시어 몸소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우리를 옮겨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를 고맙게 생각하고 우리 신앙의 선조들을 본받아 우리 자신을 미사 성제에 더욱 완전히 결합시켜야 하겠습니다. 미사 성제에 모든 선물이 내포되어 있고 모든 감사의 뜻이 집중되어 있음을 마음 깊이 새기고 다함께 경건한 마음으로 이 예식에 참여합시다.
4. 한국 순교자들에게 바치는 기도
◈ 해설자 : 모두 자리에 앉으십시오. 이어서 기도서 33쪽, 또는 유인물에 있는 ‘한국 순교자들에게 바치는 기도’를 다함께 기도합시다(계, 응을 나누어서 바친다).
○ 이 땅의 모든 순교자여, 당신들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굳은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나이다.
● 저희는 현세에서 악의 세력과 치열하게 싸우며 당신들이 거두신 승리의 영광을 노래하고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찬양하오니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위대한 순교자들이여, 천상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 주소서.
● 지금도 어둠의 세력이 교회를 박해하고 있사오니 하느님의 전능하신 팔로 교회를 붙들어 보호하시며 아직 어둠 속에 있는 지역에까지 널리 펴시도록 빌어 주소서.
○ 용감한 순교자들이여, 특별히 청하오니 우리 나라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 주소서.
● 당신들은 이 땅에서 많은 고난을 겪으며 사시다가 목숨까지 바치셨사오니,
○ 전능하신 하느님께 빌어주시어 교회를 이 땅에서 날로 자라게 하시며 사제를 많이 나게 하시고,
● 신자들이 주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냉담자들은 다시 열심 해 지며 갈린 형제들은 같은 믿음으로 하나 되고 비신자들은 참신앙으로 하느님을 알아 천지의 창조주 인류의 구세주를 찾아오게 하소서.
○ 참으로 영광스러운 순교자들이여, 저희도 그 영광을 생각하며 기뻐하나이다. 간절히 청하오니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빌어 주시어 저희와 친척과 은인들에게 필요한 은혜를 얻어 주소서.
● 또한 저희가 죽을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한결같이 믿어 증언하며 비록 피는 흘리지 못할지라도 주님의 은총을 입어 선종하게 하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5. 성 김대건 신부님 서간문 낭독
◈ 해설자 : 이어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생전에 벗이라 부르시며 사랑하시는 우리 교우들에게 남기신 편지를 봉독 하겠습니다. 신부님의 편지글을 들으면서 신부님의 고귀한 영성의 깊이를 마음에 새기고 그 신앙의 열정을 배우고 따르겠다는 결심을 가지면서 조용히 경청합시다.
◈ 독서자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회유문(廻諭文)
(천천히 큰 소리로) (옥중에서, 1846년 8월 말)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천주께서 무시지시(無始之時)로부터 천지 만물을 배설(配說)하시고, 그 중에 우리 사람을 당신 모상(模像)과 같이 내어 세상에 두신 위자(爲者, 즉 창조주)와 그 뜻을 생각할지어다.
온갖 세상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 같은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 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있어 쓸데없고, 비록 주은(主恩)으로 세상에 나고 주은으로 영세 입교하여 주의 제자 되니,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이 무엇에 쓰며, 세상에 나 입교한 효험(效驗)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배주배은(背主背恩)하니, 주의 은혜만 입고 주께 득죄(得罪)하면 아니 남과 어찌 같으리오.
밭을 심는 농부를 보건대, 때를 맞추어 밭을 갈고 거름을 넣고, 더위에 신고(辛苦)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씨를 가꾸어, 밭을 거둘 때에 이르러 곡식이 잘되고 염글면, 마음의 땀낸 수고를 잊고 오히려 즐기며 춤추며 흠복(欽服)할 것이요, 곡식이 염글지 아니하고 밭 거둘 때에 빈대와 껍질만 있으면, 주인이 땀낸 수고를 생각하고 오히려 그 밭에 거름 내고 들인 공부로써 그 밭을 박대하나니, 이 같은 주께서 땅을 밭을 삼으시고 우리 사람으로 벼를 삼아, 은총으로 거름을 삼으시고 강생 구속(降生救贖)하여 피로 우리를 물 주사 자라고 염글도록 하여 계시니, 심판날 거두시기에 이르러 은혜를 받아 염근자 되었으면 주의 의자(義子)로 천국을 누릴 것이요, 만일 염글지 못하였으면 주의 의자로서 원수가 되어 영원히 마땅한 벌을 받으리라.
우리 사랑하온 제형들아, 알지어다. 우리 주 예수께서 세상에 내려 친히 무수한 고난을 받으시고 괴로운 가운데로조차 성교회를 세우시고 고난 중에 자라나게 하신지라. 그러나 세상 풍속이 아무리 치고 싸우나 능히 이기지 못할지니, 예수 승천 후 종도(宗徒) 때부터 지금까지 이르러 성교 두루 무수 간난(艱難) 중에 자라니, 이제 우리 조선이 성교 들어온 지 5~60년에 여러 번 군난(窘難)으로 교우들이 이제까지 이르고, 또 오늘날 군난이 치성(熾盛)하여 여러 교우와 나까지 잡히고, 아울러 너희들까지 환난(患難) 중을 당하니, 우리 한 몸이 되어 애통지심(哀痛之心)이 없으며, 육정(肉情)에 차마 이별하기 어려움이 없으랴.
그러나 성교(聖敎)에 말씀하시되 ‘작은 털끝이라도 주께서 돌아보신다’하고 ‘모르심이 없어 돌보신다’ 하였으니, 어찌 이렇듯한 군난이 주명(主命)이 아니면 주상 주벌(主賞主罰)이 아니랴. 주의 성의(聖意)를 따라오매, 온갖 마음으로 천주 예수의 대장의 편을 들어, 이미 항복받은 세속·마귀를 칠지어다.
이런 황황(遑遑) 시절을 당하여, 마음을 늦추지 말고 도리어 힘을 다하고 역량을 더하여, 마치 용맹한 군사가 병기를 갖추고 전장에 있음 같이하여 싸워 이길지어다.
부디 서로 우애(友愛)를 잊지 말고 돕고, 아울러 주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난을 앗기까지 기다리라. 혹, 무슨 일이 있을 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하여 위주 광영(爲主光榮)하고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하여라. 여기 있는 자 이 십 인은 아직 주은으로 잘 지내니 설혹 죽은 후라도 너희가 그 사람의 가족들을 부디 잊지 말라.
할말이 무궁한들 어찌 지필(紙筆)로 다하리. 그친다.
우리는 미구에 전장에 나아갈 터이니, 부디 착실히 닦아 천국에 가 만나자. 마음 사랑하여 잊지 못하는 신자들에게, 너희 이런 난시(難時)를 당하여 부디 마음을 허실히 먹지 말고 주야로 주우(主祐)를 빌어, 삼구(三仇)를 대적하고 군난을 참아 받아, 위주 광영하고 여등(汝等)의 영혼 대사(大事)를 경영하라.
이런 군난 때는 주의 시험을 받아, 세속과 마귀를 쳐 덕공(德功)을 크게 세울 때니, 부디 환난에 눌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사주 구령사(事主救靈事)에 물러나지 말고 오히려 지나간 성인 성녀의 자취를 만만 수치(修治)하여 성교회 영광을 더하고 천주의 착실한 군사와 의자가 됨을 증거하고,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긍련(矜憐)하실 때를 기다리라.
할말이 무수하되 거처가 타당치 못하여 못한다. 모든 신자들은 천국에 만나 영원히 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입으로 너희 입에 대어 사랑을 친구(親口)하노라.
세상 온갖 일이 막비주명(莫非主命)이오. 막비주상주벌(莫非主賞主罰)이라. 고로 이런 군난도 또한 천주의 허락하신 바니, 너희 감수 인내하여 위주(爲主)하고 오직 주께 슬피 빌어 빨리 평안함을 주시기를 기다리라.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 대사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천주께서 오래지 아니하여 너희에게 내게 비겨 더 착실한 목자를 상주실 것이니, 부디 설워 말고 큰사랑을 이뤄, 한 몸같이 주를 섬기다가 사후에 한가지로 영원히 천주 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 천만 바란다. 잘 있거라.
7. 응답성가
민족의 구원을 위해 불철주야 신앙의 투신을 마다하지 않으신 신부님 신앙의 열정과 우리를 천국에서 만나 껴안아 주시겠다는 애틋한 정을 마음에 새기며 다함께 응답 성가로 287장,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노래’를 3절까지 노래하겠습니다.
8. 강론 또는 성지 소개 말씀
◈ 해설자 : 이어서 ○○○ 신부님(회장님)께서 성지에 대한 소개의 말씀을 해주시겠습니다.
(강론이나 성지 소개 말씀이 없을 경우에는 곧바로 신자들의 기도를 바친다)
(가능하면 반드시 ‘103위 한국성인 호칭기도’를 바치도록 한다)
9. 신자들의 기도
◈ 해설자 : 이제 우리들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필요한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는 신자들의 기도를 바치겠습니다.
† 주례자 :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의 모범을 본받아 그리스도를 더욱 더 충실히 증언할 수 있도록 하느님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합시다.
○ 주님, 선조들의 순교 신앙을 이어받은 한국 교회가 주님의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 주님, 이 땅의 모든 성직자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를 본받아 세상의 모든 유혹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순교 정신으로 복음을 선포하게 하소서. ⊙
○ 주님, 신학생들이 순교 선열들의 정신을 본받아 굳건한 신앙을 갖게 하시고, 더욱 성실히 사제의 길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며, 많은 젊은이들의 마음에는 주님께 향하는 믿음과 열정을 일으키시어 사제 성소와 수도 성소로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에 응답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
○ 주님, 저희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을 증언한 선조들의 정신을 본받아 주님 말씀에 귀기울이며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
† 주님, 선조들의 순교 정신을 본받아 충실히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저희의 기도를 즐겨 들어주소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의 전구에 힘입어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 아멘.
10. 성지 개발을 위한 헌금 봉헌
◈ 해설자 : 순교자들의 삶을 기리고 기도할 수 있는 성지를 가꾸는 일은 우리 모든 신자들의 의무입니다. 이곳 성지의 개발을 위하여 정성되이 헌금을 봉헌하면서 가톨릭 성가 220장 ‘생활한 제물’을 다함께 노래하겠습니다(봉헌된 헌금은 성지 사무실에 전달하면 성지개발을 위해 유용하게 쓰여집니다).
11. 성소를 위한 기도
◈ 해설자 : 이 땅에 더 많은 성직자, 수도자를 보내 주시기를 청하고, 더 나아가 우리 모든 가정에 성직자, 수도자가 양성되기를 간절히 청원 드리며 ‘성소를 위한 기도를’ 다함께 바칩시다.
○ 좋으신 목자 예수님,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부르시어,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오늘도, 믿음직한 젊은이들을 많이 부르시어, 주님의 제자로 삼으시고, 주님의 일꾼으로 삼으소서.
● 온 인류의 구원을 바라시는 주님, 온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의 빛과 사랑의 불을 갈망하고 있사오니, 많은 젊은이들이 그 갈망에 응답하여,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하소서.
○ 주님, 슬기로운 여성들을 많이 부르시어, 주님께 자신을 봉헌하여 복음의 완덕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 또한 주님의 몸인 교회에 봉사하며, 도움과 사랑을 애타게 바라는 이웃들에게 헌신하게 하소서.
⊙ 아멘.
○ 성 김대건 안드레아
⊙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12. 축복(강복)
◈ 해설자 : 다함께 축복을 받기 위하여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머리를 숙입시다.
† 주례자(사제)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또한 사제와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성자와 성령께서는 여기 모인 모든 이에게 강복하소서. ⊙ 아멘.
(주례자가 평신도일 경우 다음의 양식으로 축복기도를 바친다)
† 주례자(평신도) : 크신 사랑을 저희에게 베푸신 천주 성부와(성호경을 그으며†) 성자와 성령께서는 저희에게 영원한 축복을 내려 주소서. ⊙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 아멘.
13. 마침성가
◈ 해설자 : 이제 성지 순례 기도 예식을 모두 마치면서 마침성가로 가톨릭 성가 286장을 다함께 노래하겠습니다.
성지순례 기도 예식(개인 및 소그룹)
1. 시작기도
2. 시작성가
◈ 성가 283장 순교자 찬가(부록 성가 참조)
3. 한국 순교자들에게 바치는 기도
○ 이 땅의 모든 순교자여, 당신들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굳은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나이다.
● 저희는 현세에서 악의 세력과 치열하게 싸우며 당신들이 거두신 승리의 영광을 노래하고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찬양하오니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위대한 순교자들이여, 천상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 주소서.
● 지금도 어둠의 세력이 교회를 박해하고 있사오니 하느님의 전능하신 팔로 교회를 붙들어 보호하시며 아직 어둠 속에 있는 지역에까지 널리 펴시도록 빌어 주소서.
○ 용감한 순교자들이여, 특별히 청하오니 우리 나라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 주소서.
● 당신들은 이 땅에서 많은 고난을 겪으며 사시다가 목숨까지 바치셨사오니,
○ 전능하신 하느님께 빌어주시어 교회를 이 땅에서 날로 자라게 하시며 사제를 많이 나게 하시고,
● 신자들이 주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냉담자들은 다시 열심해지며 갈린 형제들은 같은 믿음으로 하나 되고 비신자들은 참신앙으로 하느님을 알아 천지의 창조주 인류의 구세주를 찾아오게 하소서.
○ 참으로 영광스러운 순교자들이여, 저희도 그 영광을 생각하며 기뻐하나이다. 간절히 청하오니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빌어 주시어 저희와 친척과 은인들에게 필요한 은혜를 얻어 주소서.
● 또한 저희가 죽을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한결같이 믿어 증언하며 비록 피는 흘리지 못할지라도 주님의 은총을 입어 선종하게 하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4. 성 김대건 신부님 서간문 낭독
◈ 독서자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회유문(廻諭文)
(단체 예식에서 찾아 읽는다)
5. 응답성가
성가 287장,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노래’
(가능하면 반드시 ‘103위 한국성인 호칭기도’를 바치도록 한다)
6. 신자들의 기도
주님, 선조들의 순교 신앙을 이어받은 한국 교회가 주님의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주님, 이 땅의 모든 성직자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를 본받아 세상의 모든 유혹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순교정신으로 복음을 선포하게 하소서. ⊙
주님, 신학생들이 순교 선열들의 정신을 본받아 굳건한 신앙을 갖게 하시고, 더욱 성실히 사제의 길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며, 많은 젊은이들의 마음에는 주님께 향하는 믿음과 열정을 일으키시어 사제 성소와 수도 성소로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에 응답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
주님, 저희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을 증언한 선조들의 정신을 본받아 성소자 양성에 앞장서게 하시고, 주님 말씀에 귀기울이며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
† 주님, 선조들의 순교정신을 본받아 충실히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저희의 기도를 즐겨 들어주소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의 전구에 힘입어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 아멘.
7. 성소를 위한 기도
○ 좋으신 목자 예수님,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부르시어,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오늘도, 믿음직한 젊은이들을 많이 부르시어, 주님의 제자로 삼으시고, 주님의 일꾼으로 삼으소서.
● 온 인류의 구원을 바라시는 주님, 온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의 빛과 사랑의 불을 갈망하고 있사오니, 많은 젊은이들이 그 갈망에 응답하여,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하소서.
○ 주님, 슬기로운 여성들을 많이 부르시어, 주님께 자신을 봉헌하여 복음의 완덕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 또한 주님의 몸인 교회에 봉사하며, 도움과 사랑을 애타게 바라는 이웃들에게 헌신하게 하소서.
⊙ 아멘.
○ 성 김대건 안드레아
⊙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8. 축복(강복)
◈ 크신 사랑을 저희에게 베푸신 천주 성부와(성호경을 그으며 †) 성자와 성령께서는 저희에게 영원한 축복을 내려 주소서. ⊙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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