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출가 하셨어요?”라는 질문은 아마 사람들이 출가자를 만났을 때 가장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인가 보다. 특히 만난 스님이 젊고 잘생겼으면 더욱 그렇다. 그 옆에서 그런건 묻는거 아니라고 점잖게 말리는 사람의 얼굴에도 궁금함이 묻어난다. 나는 잘 생기지도 않았고 딱히 출가사연이랄 것도 없어서 누가 출가동기를 물으면 망설임 없이 대답해왔다. 비밀이랄 것도 없고 딱히 재미있는 대답도 아닌 까닭에 사람들은 심드렁해져서 곧 다른 화제로 옮아간다. 출가라는 주제로 글 청탁을 받았으니 재미는 없지만 나의 출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내성적이지만 공부를 그래도 잘했던 나는 고등학교 때 죽음에 대한 걱정이 생겼다. 이렇게 숨쉬며 존재하는 내가 죽는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정말 죽고 싶지 않았는데 주위를 돌아보니 죽지 않을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사후의 세계를 모른다는 무지의 측면에서는 공포요, 사랑하는 것들과의 단절이라는 측면에서는 안타까움이며, 육신의 허물어짐이라는 측면에서는 아픔으로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사건과 이야기는 많고 많았다. 죽음을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밤낮으로 이어졌다. 나는 스스로 내가 겁쟁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정말 죽기 싫었기 때문에 나는 죽음을 피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죽지 않는 길을 찾고자 철학서적을 들춰보았다. 관념론이니 존재론이니 경험론이니 하는 어려운 말들로 가득한 두꺼운 철학책을 손에 들고 낑낑대었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갔다. 어슴프레하게 느껴지는 철학자들의 결론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이지 “나는 이렇게 확실히 안다”라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책읽기를 그만두고 종교를 찾았다. 교회집사인 형님을 따라 교회를 가서 기도를 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았다. 알고 싶은 이성적인 질문은 모두 감성적인 믿음으로 대답 되었다. 나는 진리를 알고 싶은 사람이지 진리를 믿고 싶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때 다락방에 굴러다니는 길일엽스님의 ‘청춘을 불사르고’를 읽고 무작정 수덕사를 찾아갔다. 책 내용을 이해하고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믿음을 강조하는 교회에 실망한 나는 다른 종교단체를 찾고 있었는데 그 책에서 발견한 수덕사는 내가 아는 유일한 절이었다. 그때는 길일엽스님이 남자스님일줄 알았다. 수덕사에는 설정스님이 주지로 계셨고 별명이 호랑이인 응담 노스님이 뒷방에 계셨다. 왜 출가하려고 그러느냐?고 주지스님이 물었다. “세상이 싫습니다” 전혀 예측하지 않은 말이 내입에서 튀어 나왔다. 그러자 주지스님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후원에 가서 일주일정도 쉬면서 생각을 더해 보라고 하셨다. 그날 응담 노스님과 밤을 새워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어떤 질문이든 대답해주려는 태도는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이분은 믿으라는 답으로 얼버무리지는 않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부터 일주일이 지나고 일년이 지나도 떠나지 않은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행자시절 절에 사는 것이 너무 좋았다. 그 당시에 행자가 20명이 있었는데 모두 너무 좋은 형님들이어서 그분들과 지내는 것 자체가 좋았다. 아침마다 코피를 쏱는 고되고 힘든 생활이었지만 절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은 한 순간도 들지 않았다. 역사를 뒤돌아보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목숨을 버린 용감한 사람들 이른바 영웅호걸들이 많다. 그런데 나는 죽음을 두려워해서, 그것도 한번도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않은 막연한 죽음을 두려워하여 출가했다는 것이 조금 당당하지 못하게 생각되었다. “사나이가 뭐가 죽는게 두려워?” 라고 그분들이 묻는다면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부처님의 출가동기를 보고 위안을 얻었다. ‘노병사’의 두려움 때문에 출가하신 부처님은 나와 똑같은 출가동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부처님의 출가이유를 ‘생로병사의 문제’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출가하는 싯타르타에게는 ‘태어남’에 대한 문제의식은 없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존재의 연속을 원하고 삶의 행복을 지속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지 존재의 단절과 존재의 무화(無化)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출가이유를 말할 때 생로병사에서 해탈이 목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를 다시 쳐다보게 된다. 저 말이 정말 자기의 문제의식인지 아니면 책을 읽거나 누군가에게 들어서 생겨난 문제의식인지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다. 부처님이 ‘생로병사’를 말씀하시게 된 시기는 깨달음을 얻고 나서다. ‘노병사’의 문제를 해결하려다보니 드디어 ‘태어남’이 근본문제인 것을 간파하신 것이다. 이러한 지혜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 12연기의 설명이다. 자유를 구하는 자는 무엇이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지 알아야하고 깨달음을 구하는 자는 깨닫지 못하게 하는 조건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4성제이다. 죽음이라는 첫 스승을 만나고 그 스승의 안내로 나는 부처님이라는 두 번째 스승을 만나게 되었다. 막연한 죽음의 두려움에서 길을 찾던 고등학생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인 사성제와 12연기라는 가르침을 만나게 된 것이다(法燈明). 세월이 꽤 흐른 지금, 점점 허물어져 가는 나의 육신은 묻는다. 그대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생의 마차는 달려왔고 또 달려간다. 어때 재미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