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문관대교 이점 묘갈명(藝文館待敎 李蒧 墓碣銘)
공의 이름은 점(蒧)이고 자는 사성(師聖)이며 영천 이씨(永川李氏)로 호는 천유자(天遊子)이다. 간재(艮齋) 선생의
다섯째 아들이고 어머니는 정부인 영양 남씨(英陽南氏)로 진사인 응건(應乾)의 따님이다. 만력 기묘(1579) 8월 8일에 출생하니 자태와 성품이 총명하고 영리하였으며 한강(寒岡) 정(鄭)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할 때는
선생이 천재라 하며 계몽(啓蒙)의 도서(圖書)를 전사(傳寫)하라 하였고, 또 구전(苟全) 김(金)공을 좇아서 배우니 견문과
지식이 더욱 넓어졌다.
기유(1609)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며, 병진(1616)에 순릉참봉이 되고 이해에 알성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의
학유로 발탁되고 정사(1617)에 검열로 옮겼다. 무오(1618)에 예문관 대교, 세자 시강원 설서로 승진되니 마침 폐모론이
한창 제기된 시기로 공은 시의(時議)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므로 거슬림을 당하여 유곡(幽谷)으로 좌천되었는데
고송(孤松) 박(朴)공이 ‘옛날 귀양온 신선과 같다’는 시를 지어 위로하였다.
계해(1623) 반정 후에 셋째 형에 연루되어 경원으로 귀양가게 되자 공이 이르기를 “비록 나는 폐모의 논의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또한 폐모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지도 않았으니 북방에 귀양감도 관대한 처분이다”라고 하였다. 정묘(1627)에 오랑캐가 국경을 침범하자 공을 불러들여 작전을 세우고 중요한 실무에 종사케 하였다. 오랑캐가 물러간 뒤에
공이 취중에 시를 지어 이르기를 “내 마음은 하늘에 빛나는 해와 같고, 내 생애는 밝은 달과 맑은 바람처럼 깨끗하다”고 하고
갑자기 돌아가시니 그해 11월 14일이었다.
고을의 동쪽 천상(川上)의 묘향(卯向)에 장사지내니 군민이 모두 조문을 하며 몹시 애석히 여기었고
효종 기축(1649)에 벼슬이 회복되었다. 부인은 숙인 야성 송씨(冶城宋氏)로 군자감정을 지낸 복임(福稔)의 따님이며 그해(1627) 8월 24일에 돌아가시니
묘소는 합장하였다.
아들은 영만(榮萬)이고 딸은 김진(金鑾珍)과 이소(李熽)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영만의 양자인 학노(鶴老)는 아들로
석삼(錫三)과 출계한 석중(錫重)과 석구(錫九)와 석항(錫恒)과 석담(錫聃)과 석훈(錫勛)이 있다.
석삼의 양자인 장태(長泰)는 문과에 급제하여 옥구(沃溝) 현감을 지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예원(藝苑)에서 명성을 떨침은 재주가 탁월함이나 황량한 북방에 유배됨은 천명이 인색함일세. 비통한 시를 읊고 별세함은 기개가 격렬함이요, 억울한 죄목이 밝혀짐은 마음이 결백한 때문이리. 아! 옛 사람을 평론하는 자는 여기 새긴 글을 볼지어다.
영가(永嘉 : 安東) 권상익(權相翊)은 글을 짓고, 생원인 진성 이강호(李康鎬)는 글씨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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藝文館待敎 李蒧 墓碣銘 公諱蒧 字師聖 姓李 永川人 號天遊子 艮齋先生諱德弘第五子 妣貞夫人英陽南氏 進士應乾女 以萬曆己卯八月八日生 姿性聰悟 遊寒岡鄭先生門 先生曰 天才也 命傳寫啓蒙圖書 又從苟全金公遊 見識益博 己酉俱中生進 丙辰除順陵參奉 是歲擢謁聖第 附學諭 丁巳遷檢閱 戊午陞待敎說書 時北論方張 公以不附時議 見忤 黜補幽谷 孤松朴公 以舊謫仙之句 慰之 癸亥反正 以第三兄故 坐謫慶源 公曰 雖未嘗與於請廢之論 亦不能上諫廢之疏 投之有北 猶是寬典 丁卯建虜 犯境監兵 邀公從事 贊畫機務 虜退 公醉吟曰 心事靑天白日 生涯明月淸風 遂奄忽就盡 卽十一月十四日 葬郡東川上向卯原 郡皆挽誄 痛惜之 孝廟己丑 命復官爵 配淑人冶城宋氏 軍資正福稔女 同年八月二十四日卒 墓祔 男榮萬 女金李熽 榮萬嗣子鶴老 男錫三錫重出錫九錫恒錫聃錫勛 錫三嗣子長泰 文縣監 銘曰 馳英藝苑 才之卓 斥之狼荒 命之嗇 悲吟就化 氣之激 覆盆照日 心之白 嗟尙論者 視此刻 永嘉 權相翊撰 生員 眞城 李康鎬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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