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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은 통로입니다!
참고말씀: 창5:1,2; 9:1; 13:16; 17:4~6; 22:17; 35:9; 39:5; 48:3; 민6:24~26; 롬4:16,17; 갈3:8.9,29; 엡1:3
읽을말씀: 창12:1~5
주제말씀: 창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 너는 복이 될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2)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그를 무엇이 되게 해주겠다고 하셨습니까? 그를 무엇으로 만들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까? 복(福)입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창12:2 하)
이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복을 스스로 공급하는 주체(主體)로 만들겠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3절의 내용으로 보건대, 오히려 ‘복의 통로(通路)’, 곧 하나님의 신령한 복이 흘러가는 통로로 삼으시겠다는 말씀이 분명합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3 하) 하나님의 신령한 복들이 ‘아브라함을 통해’ 그의 가족뿐만 아니라, 그의 민족, 더 나아가 땅의 모든 족속에까지 흘러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 같은 점은 하나님의 구속사에 의해 분명하게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또한 후일 누구에 의해서 다시 한 번 확인되었습니까?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모든 이방인이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었음을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3:8.9)
이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일하시되 ‘우리를 통하여’ 그리 하신다는 점입니다. 특별히 우리의 무엇을 통하여 그리하십니까? 비전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누차 그로 하여금 큰 민족의 아버지(창12:2), 여러 민족의 아버지(창17:4~6)가 되게 하실 것을 말씀하셨고,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창12:2 상) /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창13:16) /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창17:4~6)
실제로 그리 되게 해주셨습니다. 1차적으로는 그의 후손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과 국가를 이루었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나라와 열방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허다한 후손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3:29) /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롬4:16,17)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복의 주체가 아닌 복의 통로로 부르심 받았음을 깨닫고 있습니까? 즉 비전의 삶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신령한 복들을 우리 가정과 주변, 나라와 열방을 향해 운반하는 통로가 되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까? 마치 달(月, moon)이 스스로 빛을 낼 수는 없지만 태양빛을 반사해서 빛을 비출 수 있고, 또한 파이프 자체가 스스로 뭔가를 만들어서 제공할 수 없지만 여타 공급원에 연결하여 액체를 흘려보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 복의 통로가 되십시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3)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 되기를 간절히 열망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복의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복의 통로가 되려면 누구부터 만나야 합니까?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야 우리도 누군가에게 복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받지 않았는데’ 어찌 흘려보낼 수 있으며, ‘만나지도 않는데’ 어찌 전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셨습니까?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셨습니까?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알기만 하는 것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왕이면 하나님을 제대로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재대로 만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인 ‘예배’을 통해서 입니다. 즉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릴 때 비로소 하나님을 제대로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기 시작하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까?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들을 받게 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1:3)
왜 하나님을 만나면 복을 받게 됩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는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6:24~26)
사실 성경은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내용들로 즐비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창5:1,2) /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창9:1 상) /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창22:17 상) /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창35:9 하) /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39:5 하) /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창48:3 하)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복의 통로입니다. 즉 ‘우리의 비전을 통해’ 하나님의 모든 신령한 복들이 우리 가정과 교회, 학교, 직장 등으로 흘러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 결단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창12:4,5)
한편, 통로가 좁아지면 더디 흘러갈 수밖에 없고, 막혀버리면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흘려보낼 수 없습니다. ‘복의 통로’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불신앙, 게으름과 무책임함 등이 곧잘 우리 비전의 발견이나 성취를 방해하곤 합니다. 즉 이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복이 우리를 통해 더 이상 흘러가지 않거나, 설령 흐른다고 해도 더디게 흐르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복이 우리를 통해 막힘없이 흘러갈 수 있도록 이물질들을 제거함으로써 통로를 확보해야 합니다. 우리가 결단하고 헌신할수록 우리의 비전은 그만큼 더 빠르고 더 풍성하게 이루어지지만 막혀 있지만 아무 것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는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성취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하란을 과감히 떠남으로써 입니다. 만일 그가 갈대아인의 땅 우르에 남아있었거나 ‘경유지’인 하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계획은 그만큼 더디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찌 했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결단하고 과감하게 떠났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창12:4) 그러기에 ‘열국의 아비’라는 그의 비전은 이루어져갈 수 있었고요.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혹 우리의 비전이 왜 이렇게 더디냐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까? 원망하거나 불평하기 앞서 우리의 어떤 점들이 이를 가로막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게으름이나 불신앙, 불성실, 준비 부족, 헌신하지 못함 등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지 않는지를 점검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막히고 좁아지면 더디 이루어지지만, 이물질을 제거하면 그만큼 더 빨리 이루어질 수 있음을 깨닫고, 오늘도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즉 우리의 게으름이나 불신앙, 불성실, 준비 부족, 헌신하지 못함 등이 우리를 가로막지 못하도록 결단하고 헌신하고 있느냔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실지 모르겠다고 푸념하고 있습니까? 낙담하거나 실망하기에 앞서서 우리의 비전이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철로가 깔려 있으면 기차가 어디든 갈 수 있듯이, 통로가 연결된 곳이라면 우리는 어디든지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시선은 어디로 향해 있습니까? 지금 우리의 관심사는 누굴 향해 있습니까? 지금 누군가의 필요가 눈에 들어오며, 누군가의 외침에 귓가에 자꾸 맴돌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곳에서부터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비전은 늘 이렇게 시작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