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안보(1600년)와 고부보(1642년) 사이에 단양우씨족보 간행순서를보면...
먼저 예안보 이전에 퇴계선생이 역동 탁할아버지를 숭모하는 마음에 손수적은 단양우씨족보(퇴계수서보(임란이전))가 있었으나 병화로 인해 소실했다고 합니다. 이후 자료를 모아 거의 복원한 족보가 예안보라고 합니다.
예안보(1600, 미완성)-충주보(미완성)-괴산보(미완성)-공주보(미완성)-속천보(1637, 완성) 순으로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네요. 지금은 예안보 단권만 전하니 안타까울 따름이네요.
그 다음으로 고부보(1642)가 전해지고 있구요.
족보 사료의 가치가 있는 속천수서보는 일부가 전하고 있으나 원본의 발굴은 쉽지가 않네요.
일부파만 기록하거나 자상하지 못하거나 누락된 부분이 있는 곳이나 순서가 잘못되었거나 한 곳을 바로잡아 간행한 최초의 족보입니다.
---------------------------------------------------------------------
참고자료 : 속천수서보=정축보 서문
-전략-
오종(吾宗)이 고려조에 벼슬하신 시중공의 이상이 5세이며 이하(以下)로 지금 십삼사세(13, 14세)가 전하여 내려왔은 즉, 근원은 이미 멀고 먼지라 내 조세(早歲)로부터 수십년간 보계를 밝히고자 하였으나 전질을 얻지 못하였는데 병오년에 엄군께서 심석(沈석)에 얻은 보책을 봉심해보았다. 이 보책은 원래 괴산성장(槐山姓丈)이 간직해 둔것이다.
을축년(乙丑年)에 충주 성장(姓丈) 윤선에게 일본(一本)을 얻어 살펴보니 다만 우리파만 자상히하고 예안파는 빠져있어 완전한 보책이라할 수 없고, 또 예보를 얻어 참고해보니 자기들 파만 소상히하고 우리파는 빼어놓았으니 그도 완전하다고 할 수 없다.
을해년(乙亥年) 봄에 내 서울에 있을때 공주에 사는 성생(姓生) 생원 정래가 와서 보책을 보이는데 이 보책은 충주, 예안 2보를 참고하여 합한 것이다.
생원(生員)의 사람됨이 어질고 또 글을 좋아하며 보책수록에 고(古)와 금(今)을 참고하여 정성을 다하였다.
내 손수써서 봉장하고 우리 족보가 차차 완성할 것이라고 마음속 기뻐하였다.
얼마후에 내연승으로 다시 전직하였데 연은 충주의 역이요, 괴산이 또 이웃고을이라 내 윤선(胤先)을 찾아 앞날에 본 보책을 다시 보아 고증(考證)하고 또 응선(應先)을 괴산(槐山)으로 찾아가서 엄군(嚴君)에게 보이던 보책(譜冊)을 청하여 책정하고 성생 경례, 경필 형제 오인(5人)이 자주 찾아오는데, 이분은 고(故) 감사공(監司公)의 아들이라 감사공(監司公)의 수정 보(譜)를 얻어 참고하여 원근 성생들이 와서 보는자에 혹 그 파는 기록되었으나, 그 차서(순서)가 바르지 않는 자에는 반드시 그 차서를 바로잡아 3년동안 고증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중략-
예인(禮人)의 보(譜)는 한곳은 기록하나, 다른 한곳은 빠졌고
괴인(槐人)의 보(譜)는 2보를 참고하였으나 자상하지 못하고
공인(公人)의 보(譜)도 수보(修譜)를 합(合)하였으나, 역시 누락한데가 많은지라
나는 근세를 살피어 원세를 고증하며 여기저기 질정하고 참고하여
괴보의 미진한 곳을 보완하고 공보의 누락한 곳을 기입하여 단양지보(丹陽之譜)라고
하였으니 이 보책(譜冊)은 내가 완성했다고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후략-
첫댓글 어느 문중이나 문중의 족보 수보시에 주축세력이 그네들 위주로 편찬하는 것은 일반적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을 위 내용 또한 담고 있네요. 사람이 이성보다는 감성이 앞서기에 ... 일처리에 있어서 공평무사를 이루기가 어렵지요. 좋은 자료 잘보았습니다. 귀한 자료라 옮겨 갈게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