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산청에는 매화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산청 3매라고 불리는 단속사지 정당매, 남사예담촌 원정매, 남명 조식 산천재의 남명매가 있습니다. 해마다 봄이면 매화를 찾아서 산천을 다니는데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매화로는 순천 선암사 선암매, 장성 백양사 고불매, 구례 화엄사 들(黑)매, 강릉 오죽헌 율곡매를 우리나라 4대 매화로 손꼽고 있습니다. 하지만 율곡매는 고사(枯死)한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산청의 단속사지 정당매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관리도 부실해서 원목은 죽고 2세의 나무가 자라고 있는 형태이고, 원정매도 겨우 꽃을 피우고 있으나 힘겹게 살고 있는 실정입니다.
전국에 알려지지 않은 수백년 된 노거수 매화가 많이 있지만 제대로 보존 관리가 되지 않아서 방치되고 있지만 그 향기만은 잃지 않고 있습니다.
(한시 소개)
신흠의 상촌집 - 야언 中
桐千年老恒藏曲 (동천년노항장곡) 오동나무는 천년을 늙어도 항상 제 가락을 지니고
梅一生寒不賣香 (매일생한불매향) 매화는 일생 추위에 떨어도 향을 팔지 않는다.
月到千虧餘本質 (월도천휴여본질)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래 모습 남아 있고
柳經百别又新枝 (유경백별우신지) 버드나무 백 번을 꺽어도 새 가지가 돋아난다.
申欽 (신흠, 象村(상촌-朝鮮 中期의 文臣). 朝鮮 1566~1628)
1. 단속사지 동 삼층석탑
『단속사 터의 금당터 앞에는 동서로 두 탑이 서 있는데 그 중 동쪽에 세워진 것이 이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기단의 아래층은 ‘ㄴ’자 모양의 돌을 이용해 바닥돌과 동시에 만들어졌다. 그 위로 기단을 한 층 더 올린 후 몸돌과 지붕돌을 교대로 쌓은 탑신을 올려놓았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머리장식의 일부가 남아있다.
전체적으로 상·하의 비례가 알맞고 위로 오를수록 탑신의 크기가 알맞게 구성되어 있어 그 모습이 아름답게 보인다. 함께 세워져 있는 서탑과 비교할 때 그 규모와 수법이 거의 동일하여 같은 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 후기의 조성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2. 단속사지 서 삼층석탑
『단속사 터의 금당터 앞에는 동서로 두 탑이 서 있는데 그 중 서쪽에 세워진 것이 이 탑이다. 2단의 기단(基壇)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나, 동탑에 비하여 많이 부서지고 안에 봉안된 사리함이 도난당하는 등 많은 수난을 겪었다.
기단에는 각 면의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아랫단은 가운데에 2개씩을 두고 윗단은 1개씩 두었다. 탑신의 지붕돌은 처마를 직선으로 처리하였으며, 밋밋한 경사가 흐르는 윗면은 네 귀퉁이에서 하늘을 향해 살짝 들어 올렸다.
지붕돌을 경쾌하게 처리한 점이나, 탑의 윗부분으로 갈수록 크기가 알맞게 줄어드는 수법에서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을 계승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랫기단의 너비가 넓어지고 4면에 새긴 가운데기둥의 수가 아랫기단은 2개, 윗기단은 1개로 줄어든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수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문화재청 설명
탑이 위치한 단속사는 경덕왕 7년(748)에 대나마 이순(李純)이 창건했다는 설과 경덕왕 22년(763) 신충(信忠)이 창건했다는 2가지 설이 전한다. 신행(神行)의 제자인 삼륜이 헌덕왕 5년(813) 헌덕왕비의 적극적 후원을 받아 크게 성장하였는데, 석탑은 이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 초 유생들에 의해 가람의 일부가 훼손되고 불상과 경판이 파괴되기도 하였으나, 명맥을 유지하다가 정유재란 때 전소된 것으로 전한다. 지금도 최치원이 쓴 것으로 전하는 ‘광제암문(廣濟嵒門)’의 명문이 남아 있다. 김헌정(金獻貞)이 지은 신행선사비(神行禪師碑), 고려 평장사 이지무(李之茂)가 지은 대감국사비(大鑑國師碑), 한림학사 김은주(金殷舟)가 지은 진정대사비(眞定大師碑)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1999년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서 사지 일부를 발굴하여 일부 건물지 확인과 여러 유물을 수습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단속사지 동 삼층석탑
단속사지 서 삼층석탑
단속사지 당간지주
고려시대 단속사는 지리산 산중 사찰 중에서 규모나 위상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인정받았는데 무신정권 때 최우의 서자 2명 중 장남인 만전이 주지로 있었던 사찰로 송광산 수선사(현재 송광사) 2대 사주인 진각국사 慧諶(혜심.전남 화순 출생)이 절친인 최우의 관계를 감안하여 각별히 신경을 썼던 사찰이다.
대단한 위용을 만천하에 떨쳤던 사찰인데 만종이 주지로 있었던 전남 화순의 쌍봉사는 화재로 전소되었지만 곧 복원이 되었는데 아쉬움이 큰 곳이다.조속히 복원이 되어 옛모습을 찾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