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화순, 장흥, 보성의 자료를 찾은 가운데 다음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아침부터 곡성에서 출발을해 사찰들을 돌아보며 서울로 올라간다는 말에 성산이 같이 올라갈 것을 제의한다. 물론 성산은 가본곳이 많지만 또 나름대로의 여행 꺼리를 찾아 같이 가려는 것이다. 우선 내장사를 태인 향교를 거쳐 금산사, 그리고 귀신사와 충청도로 올라가 갑사를 구경한 후 천안역까지 가 둘이 헤어진 여행기는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지금은 2년전 일이라 아스라이 떠오르지만 이렇게 사진을 보며 글을 써나 가니 새록 새록 그때의 일들이 생각이 살아난다.
어느 뜨거운 초여름 우리는 꼬불대는 국도를 즐기며 산 넘고 물건 너 내장사 주차장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따가운 햇살을 피해 나무 그늘 밑에 주차즐 하고 매표를 한 후 하늘이 안보이는 단풍나무 터널로 들어서 일주문을 향해 아이들처럼 뛰어 놀며 걸어갔다. 내장산의 넓은 품안인 계곡옆 단풍나무길은 왜 내장사가 단풍으로 유명한지를 한눈에 알려준다. 봄, 여름에도 이렇게 좋은데 빨간 단풍으로 물들었을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 인다. 내장사는 백제 무왕때의 사찰로 알고 있지만 그때엔 지금 주차장 근처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내장사 오름길은 단풍나루로 터널을 이루고 있어...]
[더위를 식히며 천천이 걸어오르면 먼저 반겨주는 일주문...]
내장산내장사라고 쓰인 현판은 송성용(宋成鏞 1913~1999)의 작품이다. 서예가로서 호는 강암(岡庵), 전주태생이며 전주 톨게이트앞 관문에 쓰인 '호남제일문'등 다수의 작품이 있다. 그리고 양쪽 주련중 우측엔 "력천겁이불고(曆千劫而不古)" 천겁을 지났으되 옛날이 아니로고, 의 뜻이고 좌측엔 "긍만세이장금(亘萬歲而長今)" 만세를 뻣쳣으나 즉, 지금이로다! 라는 뜻이다.
[일주문엔 내장산 내장사라 쓰여있고...]
[내장사 부도군...]
신암(信庵) 또는 해인(海印) 선사로 추정되는 무보당(無保堂) 부도를 비롯해 전체 24기의 부도와 탑비 7개가 현존한다. 1923년 학명(鶴鳴)스님에 의해 경내에 흩어져 있는 부도가 모아진 것이며, 모두 근대에 건립된 것이다.
아직은 정리 정돈이 다 안되 있는 것 같은데 그런데로 자연스럽게 되어있어 보기가 좋았다. 단지 어느 사찰을 가던지 마찬 가지로 느끼는 것이지만 속세의 작은 망인들도 명패를 가지고 있는데, 하물며 부도 안에 잠드신 분들의 성함이나 업적을 기리는 안내문을 자그마하게라도 붙여 주었으면 참배객 들의 눈을 조금....
[내장사 부도군...]
[담장 넘어로 보이는 부도군...]
내장사(內藏寺)는 전북 정읍시 내장동의 "호남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내장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내장사는 636년(백제 무왕 37) 영은조사가 50여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사찰로, 본래 이름은 영은사(靈隱寺)였다. 그 후 몇 차례의 소실과 중건을 계속해 오다가, 6. 25사변 때인 1951년에 방화로 전부 불타버려 현재의 사찰은 1970년대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내장사는 1979년 전라북도 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되었다. 내장산은 설악산에 이어 가장 많은 단풍객이 찾는 곳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하나 아름답지 않은 계절이 없지만, 그 중에서 단풍 비경이 으뜸이다. 내장사는 내장산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그 모습은 마치 벌어진 연꽃의 품에 깃들어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내장사 단풍길은 일주문을 들어서면서 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데, 중생의 108번뇌를 상징하듯 모두 108그루의 세월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단풍나무 터널은 내장사를 찾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도 남는다 하겠다. 라고 코리아템플에서 알려준다.
[내장사 입구 극락교를 건너서...]
내장사의 연혁을 알아보면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이다. 636년(무왕 37)에 영은조사(靈隱祖師)가 창건하여 영은사(靈隱寺)라 하였으며, 이 때의 가람규모는 50여 동이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1098년(숙종 3)에는 행안(幸安)이 전각과 당우를 새로 건립하고 중창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468년(세조 14) 정혜루를 지었다. 1539년(중종 34)에는 내장산의 승도탁란사건(僧徒濁亂事件)이 일어나자 중종은 내장사와 영은사가 도둑의 소굴이라 하여 절을 소각시켰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장사와 영은사는 독립된 2개의 사찰이었다. 1557년(명종 12)에 희묵(希默)은 영은사의 자리에 법당과 요사채를 건립하고 절이름을 내장사로 고쳤으나 정유재란 때 전소되었다. 1639년(인조 17)에는 영관(靈觀)이 법당 등을 중수하고 불상을 개금(改金)하였으며, 1779년(정조 3)에는 영운(映雲)이 대웅전과 시왕전(十王殿)을 중수하고 요사채를 개축하였다. 1923년에는 학명(鶴鳴)이 절을 벽련암(碧蓮庵)의 위치로 옮겨 짓고 벽련사라 하였으며, 옛 절터에는 영은암을 두었다.
1938년에는 매곡(梅谷)이 현재의 자리로 옮겨 대웅전을 중수하고 명부전과 요사채를 신축하였다. 1951년 1월 12일에 불탄 뒤 중건을 보지 못하다가 1957년에 요사인 해운당을 건립하였고, 1958년에는 대웅전을 건립하였다. 1960∼1962년, 1974∼1977년에 중건하였고, 1992년 요사인 향적원(香積院)과 종각을 지었으며, 1997년에 해운당을 중건하였다. 고 백과사전에서 알아보았다.
[내장사 천왕문...]
천왕문은 정면 3칸의 맞배 지붕 건물로 좌우에는 사천왕이 가람을 수호하고 있다. 천왕문은 불국토를 지키는 동서남북의 사천왕을 모시는 문으로, 사천왕은 불법을 수호하고 사악한 마군을 방어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것은 분명히 사천왕상을 네분이나 두분씩이나 찍었을 터인데 자료에는 하나도 없다. 혹시 비어있는지는 아직 미상인데 지난번 전북 흥국사에서도 다시 칠하고 보수하느라 전부 안쪽으로 모셔 천왕문 안에는 안계서서 못찍은 적이 있는데 그런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내장사 정혜루...]
정혜루는 정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이층누각 건물이다. 정부의 '국립공원내장사 복원계획'에 따라 해운당을 헐어내고 극락전과 관음전을 건립하면서 사천왕문을 밖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정혜루를 세웠다. 정혜루는 1466년(조선 세조 12)에 지어진 건물이나, 현재의 건물은 1970년대에 복원된 것이다. 정혜루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면 "定은 禪定이니 마음을 한곳에 머물게 함이요, 慧는 바른 지혜를 일으켜서 理(본체) 事(現家)을 밝게 관조함을 말하는 것이다. 사물을 두어 우주의 눈을 뜨게 하고 울리어 만물의 귀를 열고자 함이다.
[정혜루앞 연못에는 맑은물에 비친 푸른 나무들과...]
[담장밑엔 시원한 감로수가 콸콸 나오고...]
[내장사 해운당, 종무소로 쓰이고...]
[내장사 극락전...]
내장사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2칸의 겹처마 팔작 지붕 건물로, 안에는 11면(面) 42수(手) 관음입상을 중심으로 관음후불탱, 칠성탱, 산신탱이 있으며 전부 근래에 조성된 것이라고 하는데 주련에 보면 내게 아미타불을 뭍지마라, 일념으로 돌이키면, 물은 푸르고 산은 텅 빈 가운데 있네, 맑은 바람에 달 떨어진 가을이구나 하는 문구가 쓰여있다.
[내장사 극락전 내부 불단...]
[내장사 범종각...]
범종각 안에 있는 사물은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이니 범종을 울려서 지옥중생을 구원하고 법고를 두들기어 뭇 축생을 제도하며 목어를 깨워 수중중생을 다스리고 운판을 쳐 허공중생을 일깨우고자 함이다. 네가닥 자비의 소리가 어울려지면 산천이 응답하고 초목이 그 소식을 듣는데 인연중생들이여 모쪼록 자신의 진면목을 볼 줄 알아야 할 것이다. 현판은 서예가 김충현의 작이고, 주련엔 원컨대 이 종성 법계에 울려 퍼지고, 합장귀의 하고 도량에 들어서니, 원컨대 내 일념은 어디에 있겠는가, 말없이 단정히 앉아 고요할 뿐이네 라 쓰여져 있다.
[범종각 안에 목어가 눈길을...]
[내장사 명부전...]
흔히 지장전이라고 도 하는 내장사 명부전은 꽤 큰 건물임을 직시하게 된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명부전은 지장전이라고도 하는데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이다. 현판은 탄허스님이 쓰신 것이며, 주련은 여섯 기둥에 붙어있다. 위대하신 지장보살 위신력은, 수만겁을 설명한들 끝이 없음이여, 한순간 보고 듣고 엎드려 예배하면, 인천에 무량한 이익을 주시네, 지옥중생을 다 건지지 못하면 성불하지 않겠다는, 대원을 세우신 지장보살님이시여! 라고 지장보살님의 애뜻한 불심을 읽을 수가 있다.
[내장사 3층석탑...]
아직은 만든지 얼마 되어보이지 않은 삼층석탑이 대웅전앞 멀리 떨어저 산세를 맞이하며 서있다. 내장사는 1979년에 인도로 부터 석가모니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하였다고 하는데, 경내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삼층석탑은 1997년에 조성된 것으로 1932년 영국의 고고학 발굴 조사단에 의해 발굴된 부처님 진신사리 32과 가운데 인도의 지나라타나 스님의 주선으로 모셔와 이 3층 석탑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내장사 관음전...]
관음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관음전은 관세음보살을 보존으로 하는 전각이다. 이 전각에는 천수천안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관음전의 현판은 작가미상이다. 아마도 판독을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주련에는 백의 관음은 설함 없음을 설하고, 남순동자는 듣지 않음을 들었도다. 병 위의 푸른 수양버들은 삼하(여름)를 지났고, 바위 앞 취죽은 시방에 봄이로구나. 하고 끝나는 관음전 좌측 끝인 네번째 주련에 새겨진 암전취죽시방춘(巖前翠竹十方春) 이 정말 멋스럽게 귓가에 들려오는 듯 하다.
[내장사 경내...]
[내장사 대웅전의 옆모양...]
[내장사 대웅전...]
대웅(大雄)은 커다란 영웅이란 뜻으로 석가모니를 일컽는 말로 법화겨에서 따온 말이라고 하는데 내소사 대웅전을 보면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의 건물이다. 본래 보천교(普天敎)의 정문인 2층 형태의 보화문 건물을 옮긴 것으로, 옮겨 지으면서 2층은 생략되고 단층의 형태로 복원되었다. 안에는 석가불좌상을 비롯해서 영산후불탱, 나한탱, 신중탱, 그리고 금고(金鼓) 및 동종이 있는데, 1768년(영조 44)에 조성된 동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1963년 이후에 봉안된 것이다.
[내장사 대웅전안 ...]
[대웅전, 석등, 3층석탑이 어우러져...]
[내장사 오층석탑...]
경내를 돌다보면 대웅전과 관음전 사이에 오래된 오층 석탑이 있다. 언제 세워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오랜 세월의 흔적과 소박함이 뭍어나고 고풍스럽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자료를 살펴보니 알 길은 없고 단지 내눈으로 보기에는 삼층 석탑으로 보이는데 내장사 홈에는 5층석탑이라 적혀있어 오층 석탑이라 적었다. 그런 것은 상관없다. 보는 사람이 편하고 한 바퀴 두바퀴 돌고 돌아 세월과 함께 지내온 돌과의 아니 석탑과의 생각을 맞추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며 또한 바퀴 돌며 건강을 생각해 본다.
[내장사 정혜루를 안쪽에서 보면...]
[정혜루에 올려진 현판엔 천하명승내장산 이라 쓰여있고...]
[내장사 무설전...]
[무설전 우측으로 향적원 건물이...]
[정면엔 정혜원, 우측엔 만세루가...]
[해운당 뒷편엔 적막이 흐르는듯...]
[정혜루앞 연못에는 여름을 시샘하듯...]
[정혜루와 연못 그리고 종각이 삐꼼히...]
[주차장으로 내려서는 길목에 쉼터도 있어...]
[흐르는 땀 식혀주는 작은 폭포도 정겹고...]
[길가에 핀 섬초롱꽃...]
[탐스러워 건드리기 미안한 뱀딸기...]
[녹음으로 우거진 산속을 걷는 것 같은...]
[멀리 우측 산봉우리엔 전망대가 보이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 '자연 그대로'...]
[우화정 연못...]
내장사 계곡을 내려오면서 시원했던 기분이 주차장에 오면서 완전히 바뀌어 진다. 따가운 햇살이 눈부시게 하면서 등뒤로 뜨거운 물줄기를 한줄기 내려 보낸다. 주차장근처에 정자가 있고 또 연못이 있다. 아직 피지 않은 수련의 잎을 보며 재촉해 본다. 오다가 보니 주암호 주변엔 꽃이 피었는데 넌 왜 아직 이냐 하고 물었더니 이곳은 아직도 봄이란다. 하긴 가끔 불어오는 계곡 바람이 뜨거워진 아스팔트의 훈기를 날려보내기도 한다. 그래서 자연 풍이 좋은 것이고 또 자연을 닮아가려 살아가는가 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