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의 본질은 고통이다. 삶이란 온갖 고통을 감내하며 걸어가야 하는 길이다. 그래서 붓다는 인생을 '고통의 바다'(苦海)라 했다. 태어나는 것, 늙어가는 것,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요, 모든 존재가 필경은 죽어가야 한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임이 분명하다. 어디 그뿐인가. 사랑하는 데도 만나지 못하는 괴로움, 미워하는 데도 만나야 하는 괴로움, 구하는 데도 얻지 못하는 괴로움에다, 무상한 육체가 지닌 온갖 괴로움 등 붓다가 깨달은 뒤에 발견한 사바세계 삶의 실상은 번뇌와 고통으로 가득한 용광로였다. 그리고 이러한 번뇌를 지닌 채 신음하는 중생들의 몸은 그대로 욕망으로 '불타는 집'(火宅)이다. 그래서 붓다는 그 집에서 어서 뛰쳐나오라고 설하였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별 수 없이 온갖 욕망으로 소용돌이치는 사바세상의 고통을 감내하며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려는 소망을 안고 혹은 그리운 대상을 기다리며 근근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수선한 오후
문득 소식이 와도
차분한 오늘 피지 않음은
내가 그대 속에 있지 못함이리
덧없이 목련은 지고
예쁜 수수꽃다리 필 때
그 향기 속에 내 이야기를 묻으리
나뭇잎은 연초록이고
접시꽃 아직은
한 뼘도 못자랐으니
그대가 올 수 있는 시간은 많아라
-[시간] 전문
시의 화자가 꽃이 피어나는 충만한 시간과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함은 '나'와 '그대'가 함께 있지 못하고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절과 소통의 부재는 괴로움을 낳는다. '그대'를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무정한 시간, '목련은 덧없이 지고' 결국 화자는 체념하면서 '수수꽃다리'의 향기 속에 애틋한 그만의 '이야기'를 묻는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말은 '그대가 올 수 있는 시간은 많아라' 이다. 인간사가 하 무상하여 '약속'은 굳게 하지만 잘 지켜지지는 못한다. 그래서 셰익스피어는 비극 [햄릿]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어 '약속은 기억의 종살이'이니 '함부로 약속하지 말라'고 했던가 보다.
매번 약속은 나팔꽃 종소리가 되어
붉은 소리로 울릴 뿐
네게 닿지 못하는구나
-[가을편지] 부분
애별리고(愛別離苦)! 아상(我相)으로 가득한 중생들이 살고 있는 이 사바에서 세상일이 뜻대로 될 리는 없다. '너는 그리도 가깝게 거기에 있는데/ 나는 한 번도 네 속에 들지 못하는지'라는 탄식이 나올 만하다. 현대로 올수록 인간존재는 전혀 별개의 실존적 상황들에 처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인간의 소통이 점점 어려워진다. '매번 약속이 나팔꽃 종소리가 되어' 안타깝고 원통한 '붉은 소리로 울릴 뿐' 약속이 실행되기란 요원한 것이다. 갈구하는 대상인 '너'에게 닿지 못하는 화자의 심정은 안타까움, 곧 번뇌 그 자체인 것이다. 이러한 이산과 단절의 고통은 다음의 시에서 절규로 나타난다.
사람아
창문에 내 소리 혹 비치지 않더냐
이 눈물 소리 들리지 않더냐
지척에 너를 두고
갈 수가 없는 나는
-[이브날 밤의 일기]부분
화자의 이러한 번뇌는 새로운 '사랑법'을 깨우치지 않는 한,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지속된다. 불교에서는 모든 번뇌의 뿌리가 탐, 진, 치 삼독(三毒)으로부터 말미암는다고 말한다. 즉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뿌리를 잘라내지 않고서는 번뇌를 극복할 수 없을뿐더러 '하루의 애증을 삭히기도' 힘든 법이다.
혜가대사는 팔 한 쪽 바쳐
성인 문지방에 들었고
인욕 선인은 육신이 잘려나갔어도
성냄이 없었다는데
하루의 애증 삭히기도
힘들기만 한 내 사랑법
무릎만 시려도 여간 고통스럽지 않네
주워들은 풍월로도 한 고개쯤
쉬엄쉬엄 갈 수도 있으련만
마음은 바빠 숨이 차고 갈증만 더해간다
-[들판] 부분
무릎만 시려도 고통스러운 육신을 지닌 채 애증을 삭히지 못하여 고통스러워하는 사바의 중생인 화자는 팔을 한쪽 잘라 '성인의 문지방'에 든 혜가의 용기와 육신이 잘려도 선내지 않은 인욕선인의 의연함을 부러워하며 스스로의 초라한 모습을 성찰한다. 절집을 드나들며 '주워들은 풍월'만으로도 삶을 더 여유롭게 영위해 갈 수 있으련만, 욕망으로 불타는 마음은 여전히 '숨이 차고 갈증만 더해간다'. 화자는 여전히 '사랑법'이, 혹은 삶을 운영하는 법이 서툴러서 추위에 떨며 이월의 '들판'에 서 있는 것이다.
일용할 양식을 얻는 사람은 참 좋겠다
구한다고 얻을 수 없다는 경험은
숨이 막힐 정도로 서럽더라
-[수묵빛깔이 되어] 부분
그러니 화자는 '일용할 양식'을 얻은 사람이 부러울 수밖에 없다. 구해도 얻을 수 없는 '구부득고(求不得苦)'의 고통으로 점철된 인생은 '숨이 막힐 정도로' 서러울 수밖에 없다. 사람이 희구하는 것은 이상이요 꿈이다. 삶의 희망과 이상이 좌절될 때 인간은 절망하거나 체념한다. 혹은 비애감과 우수에 잠긴다. 걷잡을 수 없는 삶의 우수와 비애로 가득한 세상은 '깜깜한 밤'이다.
우산을 쓰고 비옷을 걸쳐도
이 가을에 내리는 비는
눈만 적시는 게 아니라
금정산 산성길
대신동 저수지 길
해운대 다대포도 젖게 하더니
한강도 젖어 아프게 하고
끝내는 하늘마저 젖어
깜깜한 밤이다
-[가을 비] 전문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삶의 고통과 우수는 '비'와도 같아서 '우산을 쓰고 비옷을 걸쳐도' 막을 수가 없다. 그 비는 촉촉이 세계를 적신다. 그 비는 시공을 초월하여 세상을 적신다. 그러므로 그 비는 화자의 눈만 적시는 게 아니라 부산에 살거나 서울에 살거나 마찬가지로 온 세상과 하늘까지도 적셔서 세상을 '깜깜한 밤'으로 만든다.
2. 자아 찾기, 혹은 비움의 미학
왜 세상은 이렇게도 어두운가? 그것은 아마도 무명 때문일 것이다. 왜 삶은 이리도 괴로운가? 그것은 무명이 쌓여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이 어둠에 포위되어 고통스러워하는 '나'는 누구인가? 어떤 것이 '참나'인가? 화자는 이제 삶의 고통의 실체를 확인하고 '참나'를 찾아 나선다. 그리하여 부질없는 세속의 부귀영화를 뿌리치고 '참나'를 찾음으로써 자신을 구원하고 수많은 중생을 구제했던 '부처'의 미소를 닮으려 한다.
몇 천 년을 따라 해야
저 미소 닮을랑가
이 저승 흐르는 물
얼마나 비워내야
저런 매력 지닐랑가
-[실상사 부처님] 부분
영원의 미소를 지닌 부처야말로 이 시인에게는 최고의 이상적인 인격의 표상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아이상의 모델이 있기 마련이다. 기독교도에겐 예수가, 회교도에겐 모하메드가 그 모델이 될 것이다. 불교도에겐 당연히 붓다의 삶이 그 모델이 될 것이다. 그런데 불교의 매력은 '비움의 충만'에 있다. 이승과 저승을 흐르는 물이란 곧 윤회의 시간 속을 헤매는 존재의 몸일 것이다. 그것을 수 없이 비워내야 그 미소에 이를 수 있다는 것, 이 점이 불교의 특징이자, 매력일 것이다. 비움에 의해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부처의 미소를 닮고 싶은 화자는 끝내 부질없는 욕망으로 '금간 면경'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할 뿐이다.
한 철이라도 이 몸을
허공으로 비워내면
낡은 거울 속
내 그림자 찾을 수 있을까
문지방 넘다 발가락으로
걷어차 버린 아픔
주저앉아 쓰다듬어 보지만
금새 가라앉지는 않고
기다림도 살아내는 일이라
뼛속까지 하얗게 바래져
아득하게 밀려오는 현기증
사랑하는 일도 꿈이라면
호사하는 꿈이고 싶다는
한 생각이 채 마르기도 전에
내 얼굴에 금간 면경
에서 비춰진다
-[얼굴] 전문
삶의 한 경계에서 다음 경계로의 이동! 문지방을 넘기란 언제나 만만치 않다. 혹독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넘을 수 있다. 곰이 사람이 되기 위하여 치러야 할 이러한 과정을 신화학에서는 통과제의(通過祭儀, initiation)라 한다. 한때의 우매함으로 문지방을 걷어차 버리기 일쑤인 중생들, 그리고 그 업보에 신음하며 '뼛속까지 하얗게 바래져' 현기증이 아득하게 밀려오는 아픔을 안고서도 번뇌를 버리지 못하고 '호사하는 꿈'을 꿈꾸는 '금간 면경'과도 같은 자아를 지닌 채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참된 자아 찾기가 미궁을 헤맬 때는 눈 밝은 선지식의 도움이 필요한 법이다. 불교의 인간관은, 사람에겐 누구에게나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 즉 불성(佛性)이 있다고 말한다. 다만 무명의 구름이 가려서 그 광명의 빛이 안 보이는 것뿐인 것이다. 누구나 탐·진·치라는 그 마음의 구름을 제거하면 자기 속의 부처를 볼 수 있다. 즉, 안으로 자기를 들여다봄으로써 자신 속에 내재된 '작고 예쁜 거울' 즉 부처의 자질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험한 강 건너 온 나의 스승은
작고 예쁜 거울이 내 안에 있어
조금씩 나를 들여다보라 한다
내 안에 있는 나는 나의 밖에 있고
생각이 다를 때에도 내 안에 있는 나는
가끔은 아플 때가 있다
세상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새장틀
하나씩을 가지고 살지
하늘만큼 보는 눈에
꽃씨만큼 보는 눈으로
다시 내 거울을 찾아야겠다
입술 연지 곱게 칠하고
하늘 닮은 눈
자꾸만 들여다봐야겠다
-[거울 찾기] 전문
그런데도 '세상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새장틀을 하나씩 가지고' 산다. 그 좁은 새장틀 안에 자기를 가두는 것이다. 자기 안에 작고 예쁜 빛을 발하는 거울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밖으로 세속적인 가치들을 추구한다. 그래서 화자는 '내 거울'을 찾기 위해 '하늘을 닮은 눈'을 하고 있는 거울 속의 자아, 본래자아 혹은 '참나'를 들여다보는 자아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늘'은 동양적 개념어로서 '자연, 본성, 양심'을 의미하는 말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은 본래부터 선정이 들어 있는 것이니 자연에서 우리는 일시적으로 잃어버렸던 우리의 본성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온갖 번뇌와 욕망을 멈추고 放下着! 마음을 잠시 놓으면 '사람의 눈 말갛게 하늘에 길트'는 정화와 깨달음의 순간을 갖게 된다. 본래 청정한 자연에 동화되어 마음의 본성을 보게 된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도랑물
천날 백날 돌 씻기고
쉼 젖은 마음
그대로 놓아두면
사람의 눈 말갛게 하늘에 길 트니
그 가슴
하늘 물들겠다
그 눈
깊은 우물 닮겠다
-[초가을] 전문
예로부터 선현들은 자연현상을 보며 거기에 자아를 투영시켜 인격수양의 근거로 삼곤 했다. 본래 청정한 자연을 바라보며 그 속에서 삶의 지혜를 얻곤 했다. 세상의 먼지를 털어내고 깨끗한 자아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은 진정한 행복에로 가는 지름길이다. 화자는 쉼 없이 흐르며 돌을 씻어내는 도랑물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정화하며 맑은 눈을 틔워가는 자아의 심상을 발견한다. 인위적으로 마음을 내지 않고 물이 흘러가는 대로 무위자연의 마음을 냄으로써 청정한 자아에 도달하여 안심 입명하는 것은 도가적인 마음수양법일 터이나, 인도의 불교문명이 중국의 자연철학이라 할 수 있는 도가사상과 결합하여 만들어낸 새로운 패러다임이 선불교라고 할 때, 그 둘은 서로 닮아있는 게 오히려 당연하다 할 것이다. 여하튼 자아와 대상을 동일시함으로써 본성의 하늘을 발견하고 맑고 넓은 하늘의 마음과 깊고 그윽한 우물의 눈을 갖고 싶다. 본래 자연이 곧 부처이니, 시인은 자연에서 삶의 지혜를 읽어내고 그것을 노래한다. 본래부터 선정에 들어있는 자연을 통하여 자아의 본성을 일깨우는 것은 다음의 시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연초록 나뭇잎은
휘어져도 제 모습이고
모양새가 달라도 바위는
제 이름 하나 가누는구나
꽃들은 잎을
산 깊이만큼 떼어낼 줄 알고
바람도 그만큼
불어낼 줄 아는구나
하늘에 돌다리 걸어두고
망월사 나한님은
편안히도 웃으시는구나
애기 스님 웃음소리
돌돌돌……,
다람쥐가 고걸 주우러 다니는구나
-[망월사]전문
변화무쌍하고 변덕스러우며 이름값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인간과 달리 나뭇잎이나 바위 같은 자연은 언제나 여여(如如)하게 변함이 없으며 저마다 제 이름값을 한다. 그러므로 꽃들은 '산 깊이만큼' 깊고 그윽하게 자연의 이법에 따라 스스로를 버릴 줄 알고 바람도 역시 그럴 줄 안다. 이러한 자연의 실상을 관조함으로써 거기서 자연의 예지를 발견하고 절대평화의 경계에서 빙그레 미소 짓는 '망월사 나한님'의 표상은 어쩌면 화자 자신이 사바의 온갖 번뇌를 떨치고 도달하고 싶은 경지가 아닐까?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의 세계는 우리가 어렸을 때 누렸던 정경, 다람쥐를 잡으러 뛰어다니는 '애기 스님의 웃음소리'와도 같은 천진난만한 평화의 모습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