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없는 들꽃처럼 나라를 위해 숨져간 의병을 생각한다(이혜숙).hwp
이름없는 들꽃처럼 나라를 위해 숨져간 의병들을 생각한다
지난 6월 1일은 의병의 날이였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현충일과 6.25가 있는 달이다. 호국보훈의 달 첫날이 의병의 날로 제정되었다.
2010년 2월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되었다. 임진왜란 시 곽재우가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1592년 음력 4월 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호국보훈의 달 첫째 날인 6월 1일로 선정하였다. 2011년 6월 1일에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다. 의병의 날 제정 된 것은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고 이들의 애국애족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국민통합과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의병(義兵)은 의병이다. 의기로 일어난 민병(民兵)임으로 관군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농사를 짓던 농부이거나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왜놈들에 의해 자기 가족이 죽어나가고 나라를 잃게 생겼으니 몸을 던져 왜군에게 맞서 싸운 것이다. 단 한 번도 무술이나 이런 걸 배워본 적 없었던 의병들의 활약으로 왜군들은 의병들을 무서워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의병들은 그 당시 그 마을에 살던 사람들 그 지역 사람들이였기에 지리를 잘 알고 있어 왜놈들을 싸우기 힘든 곳으로 유인하여 기습공격을 했다고 한다. 부자가 함께 의병활동을 하거나 온가족이 의병이 되어서 나라를 지키다가 죽어나간 사람들이 많았다.
이렇게 몸을 사리지 않고 이름없는 들꽃처럼 목숨을 바친 의병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들을 기리는 의병의 날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유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그런 위대한 선열들이 있었기에 수많은 외침을 물리쳤기에 발전된 현재의 조국이 존재하는 것이다.
왜구는 조선침략 20일만에 한양까지 도달할 만큼 삽시간에 조선이 장악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왜군 행렬에 무수한 칼들이 반사하는 빛들이 햇빛보다 더 눈 부셨고 왜군 깃발들이 들판을 메웠다고 한다. 준비없이 뒷통수를 얻어 맞은 관군은 무력했고 병사들도 도주하여 파죽지세로 밀렸다.
당시 육지의 관군은 줄곧 수성에 실패했고 왜적과 싸워 이긴 장수조차 없었다. 이때 곽재우 의병장은 "나라가 위급할 땐 목숨을 바친다!"는 견위수명(見危授命)을 걸고 의병들을 모집, 스스로 붉은 주단으로 옷을 지어 입어 홍의장군이라 불렀다. 십여명으로 출발한 초기 의병들은 그의 리더쉽 아래 수천명으로 늘었고 그들을 바탕으로 게릴라 유격전술을 펼치며 무패로 왜군을 무찔렀던 것이다. 당시 육지에서 조선의 첫 승리였던 정암진 전투에서는 왜군이 2천명 이상이나 죽었다.
우리지역 전라북도에도 수많은 의병들이 나라를 위해 몸 바쳤다. 일제의 통계에 의하면, 1908년 전라도의 의병은 일본 군경과의 교전 횟수와 교전 의병수에서 전국대비 25%와 24.7% 1909년에는 46,6%와 59.9%를 차지하였다고 한다. 한 연구자에 위하면 의병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1907년~1911년에 활동한 의병은 총14만명 정도이다. 일제는 1907년 7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학살된 의병의 숫자를 약 1만5천명으로 집계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이름과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의병의 숫자는 그리 많지가 않다는 사실이다.
전라북도를 대표하는 이석용 의병장은 7년간 의병전쟁과 독립운동을 주도한 결과 일제에 체포되어 1914년 음력 4월 4일, 37세의 나이로 대구 형무소에서 왜놈들에게 처형되었다. 우리지역 남원 ‘만인의 총’은 이름도 빛도 없이 나라를 지킨 이들이 묻힌 대표적인 역사의 현장으로 나라를 위해 희생한 선열들의 뜻을 기리고 추모하는 곳이다.
선열들은 떠났지만 오늘날까지 그들의 애국정신은 맑은 빛을 발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진정한 애국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한다. 이름없이 죽어간 선열들에게 머리숙여 묵념하며 감사함을 표한다.
(이혜숙 도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