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패부의 역할을 맡은 배우
직환전쟁을 설명하면서, 이게 삼파전인데다 군벌들 다툼이라는게 이상야릇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조금 헷갈릴 여지가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단기서의 환계가 박살이 나면서 이제는 다시 2파전으로 좀 더 간략해졌습니다. 이제 직계와 봉계의 다툼이 시작되었습니다.
한번 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직계, 직예파는 하북성을 근거지로 하고 있습니다. 그 최고 거두는 북양 군벌 원로 풍국장이었으나, 사망 한뒤 조곤이 명목상의 최고 지도자고, 실제적으로 움직이는것은 오패부입니다. 그 뒤에는 영국이 있습니다. 직환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환계를 박살내었습니다.
봉계, 봉천파는 만주 동삼성을 근거지로 하고 있습니다. 길림성, 흑룡강성, 봉천(랴오닝성)을 모두 손아귀에 쥐고 있습니다. 지도자는 장작림입니다. 지난번에 직계와 연합하여 환계를 박살내었습니다. 그 뒤에는 일본이 있습니다.
단기서가 박살나는 모습을 본 대총통 서세창은 기뻤습니다. 그동안 서세창은 사실상 단기서의 꼭두각시 노릇만 열심히 했기 떄문입니다. 하지만 단기서가 물러나고 난 뒤의 모습을 가만히 보니, 직계와 봉계, 장작림과 오패부라는 두 마리의 늑대가 호시탐탐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중간에 끼인 입장이니 몹시 난처했던 것입니다.
서세창
환계가 무너졌으니 그 사후 처리를 해야 하는데, 서세창은 주동자 처벌 등에서 좋게좋게 넘어가자는 쪽이었습니다. 그리고 장작림 역시 자기가 환계랑 원수진 일이 없다 하여 이에 동의했는데, 반대로 환계와 직접적으로 대립한 직계 쪽은 반발이 심해 서로간의 대립이 일어났습니다. 거기다가 장작림이 전투 후에 노획물에 혈안이 되어 마구 수색 하면서 물자란 물자는 죄다 끌고 가버렸는데, 이 모습을 본 직계 쪽이 또 화가 났습니다. 조곤은 어이가 없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작림 이 놈, 정말로 마적 출신이군!"
오패부 역시 몹시 화가 났습니다. 오패부의 생각에 지난번 직환 전쟁 때 장작림의 봉군은 그다지 열심히 싸운것도 아니었는데, 싸움이 끝난 후 승리의 과실은 자기들만 독차지하려고 한다고 여겼습니다. 이렇게 양군은 짦은 동맹관계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대립이 가장 민감한 것은 물론 땅을 가지고 벌어진 대립이었습니다. 지금 몰락한 환계는 안휘성에 세력을 두고 있었는데, 오패부나 장작림이나 그곳을 탐냈던 것입니다. 장작림은 자기 사람인 포귀경을 안휘 독군으로 추천했는데, 오패부는 여기에 태클을 걸고 압력을 넣어 서세창은 장의 요구를 묵살했습니다. 강소성에서도 비슷한 일이 생겨서, 장작림이 자기 사람을 심는데 실패하고 맙니다. 이러는 사이에 장은 오패부, 그리고 직계에 대한 증오심이 깊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겉으로는 조곤과 장작림은 사돈관계도 맺고 같이 다니면서 회의를 하면서 평온하게 지냈습니다. 하지만 그 물밑에서는 계속해서 서로간의 대립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내각에서 재정 문제를 회의하고 있는데, 조곤의 동생인 직예 성장 조예가 발언해서 분란을 일으켰습니다. 말인 즉슨, 내각의 군비 분배가 공정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직계는 모자라는 군비가 연평균 반년 이상인 데, 봉천군은 불과 2개월만 모자랄 뿐입니다. 거기다 최근에 봉군은 나민 원조를 구실 삼아 수령한 군비가 200만원이고, 개발비 명목으로 또 100만원을 타갔습니다. 직계는 어떻습니까? 50만원 뿐입니다."
내각 총리 근운봉(靳雲鵬)은 이런 질책을 받자 곤란해하면서 하소연 합니다.
"형님, 내무 행정 살림살이를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도처에 국세가 걷히지 않고 있는데 오히려 입 벌려 중앙의 군비 타령이라니요? 정 그렇다면 내각의 살림살이를 형님이 한 번 맡아 해 보시구려."
조예는 찻잔을 들어서 근운붕의 머리 위로 날리며 소리쳤습니다.
"당신, 살림 못하면 꺼져! 이 나쁜 놈아!"
근운봉 역시 화가 나서 소리쳤습니다.
"누가 총리냐! 누가 나쁜 놈이냐!"
이게 당시 정부의 모습입니다. 참고로 장작림은 눈치를 보다가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자동차 타고 가버립니다. 아무튼 당시 분위기가 이 정도로 뒤숭숭 하니, 무슨 일이던지 제대로 될 일이 없었습니다. 사실 조곤의 동생인 조예가 이렇게 근운붕에게 시비를 건 이유가 있는데, 이 근운붕 내각을 뒤에서 지원하는것이 바로 장작림이었습니다. 둘은 사돈관계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직계 쪽에서는 저놈들이 서로 붙어먹는다고 비난 할 근거가 있었습니다.
봉계야 당연히 근운봉을 좋게 대했지만, 그것도 미묘해진것이, 근운붕이 장작림이 싫어하는 오패부를 양호(兩湖) 순열사로 임명했던 것입니다. 참고로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오패부씨가 양호 순열사에 임명되었다." 라는 보도가 나옵니다. 장은 이에 몹시 대노했는데, 본래 장작림은 오패부를 일개 사단장 따위로 여겼는데 이렇게 되면 둘은 명목상 동급이 되는 것입니다.
직계와 봉계 양쪽으로부터 미움을 받은 근운붕 내각은 결정적인 패망을 겪는데, 1921년 초부터 전국의 재정 고갈의 추세가 시작되어 전대미문의 재정 위기를 맡은 것입니다. 군비 지출 중단이 8~9개월이나 되어 각 성의 군벌들은 군비를 어서 달라고 독촉하고 발광을 했고, 군비를 주지 못하자 군벌들이 역으로 들고 일어서거나 도적때나 다름없게 되어 각지에서 살인 약탈 강간이 횡행했습니다.
북경 정부는 외극 은행의 차관에 희망을 걸었지만, 이것마저도 수포로 돌아가 정부는 어찌 할 바를 몰랐습니다. 이젠 중앙 정부의 근무 직원에도 바닥난 재정의 영향이 닥쳤습니다.
그러나 직원들도 들고 일어났습니다. 11월 14일 교육부 직원들이 동맹 팡버을 벌였고, 급여를 받지 못한 각 부처의 직원들도 태업에 들어가 행정 업무까지 마비되었습니다. 장관들은 직원들의 급여 독촉에 어찌할 방법이 없어 사직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는 상황에서도 각 성의 군벌들은 세금을 빼돌려 장병 모집과 말을 사는데 동원하는등,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가 벌어졌습니다. 사방에서 정부에 전문을 날리면서 아우성을 치는데, 대답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불난 집에 부채질 한다고, 제국주의 일본은 워싱턴회의에서 중국의 재정은 5개국이 공동 관리한다는 유언비어를 의도적으로 퍼트렸습니다. 이에 중국 은행의 신용도는 더욱 추락했고, 북경과 천진, 한구 등에 있는 중앙은행과 교통은행에서는 예금 인출 사태까지 발생했습니다.
양사이(梁士诒)
결국 근운붕이 내각은 총사직했고, 대타로 임명된 것이 양사이 였습니다. 그리고 양사이를 지지한 사람은 장작림이었습니다.
양사이는 1869년 생이고, 과거에 급제한 진사 출신입니다. 1903년 경제특과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1909년 우전부(郵傳部)의 좌참의(左參議)에 이르러 주로 철도문제를 다루면서 다루었습니다. 1912년에는 교통은행 사장이 되었고, 1913년에는 재정부차장 서리, 1914년에는 세무처 독판등 재정 문제를 전문으로 다룬 재정의 스페셜리스트 였습니다. 거기다가 중국 내의 금융과 재정계에 막대한 인맥을 보유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조곤이나 오패부나, 양사이를 지지한 사람이 장작림이기 때문에 그를 마뜩찮게 여겼습니다. 장작림은 자기는 개인적인 야심이 없다고 둘러대었습니다.
"그저 이 골치아픈 재정 문제만 관심이 있으니, 이걸 어서 해결합니다."
눈치를 보던 양사이도 조곤에게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제가 총리가 되면 직계군의 군비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겠습니다."
이 말은 오패부도 들었고, 오패부는 영 못미더웠지만 일단 한번 승낙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좋아, 잠시 한번 맡겨보지."
해결은 개뿔, 양사이는 재정의 스페셜리스트 답게 온갖 수단을 다해보았지만 상상도 못한 문제가 사방에서 터지면서 긴급 자금의 조달에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총리 취임 전에 약속했던, 직군에 주기로 한 300만원의 군비를 전혀 조달하지 못했습니다.
조곤과 오패부는 결국 속았다는 생각만 들어 화가 머리끝까지 나 버렸습니다. 게다가 장작림이 과거 환계 세력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때 벌을 받았던 인물들에 대한 사면령을 요구했는데, 양사이는 마딱찮았지만 장의 압력을 거부할수도 없음으로 환계 인물들에 대해 대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환계와 봉계야 딱히 크게 원수진 일은 없지만, 환계와 직계는 원수입니다. 직계인 오패부는 분노가 끓어올랐습니다.
더구나 장의 압력과 도움을 받는 양사이는 그 영향으로 친일파 정객들을 끌어들였고, 각종 담보를 주고 일본에 차관을 얻어 급한 불을 끄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패부는 이와는 반대로 영국과 미국의 지지를 얻으며, 그쪽에서부터 무기와 지원, 항공 훈련과 조직 관리를 위한 고문을 제공받았습니다. 그러니 대립이 안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일제는 산동반도에 대한 침략 야욕을 눈꼽만큼도 버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독일에 점령당한 산동을 일본으로부터 되찾으려고 했지만 일제가 워낙 완강하게 나와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일제는 중국 정부가 산동 교제철로를 되찾으려 한다면 마땅히 일본에 돈을 빌려야 한다는 것을 고집했습니다. 또한 차관의 부칙에는 철로를 관리하는 일본인을 고용해야 한다는 내세웠습니다.
관련 논의가 계속 진행되던 중, 일본 공사 오비타는 양사이와 비밀 회담을 벌입니다. 오비타는 교제철도를 되찾으려면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얻고, 철로는 중일 공동으로 운영하면서 차량 운영 책임자와 회계 책임자는 일본인을 초청하자는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양사이는 이 조건에 완전 동의합니다.
그리고 곧 그 문제를 국무회의에 상정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안건이 얼마나 민감한지 깨닫고 제대로 말을 못해서, 토론이 바르게 이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밖으로 흘러들어가, 오패부의 귀에도 들려오게 됩니다. 가뜩이나 양사이에 대해 감정이 안 좋은 오패부인데, 드디어 기회를 잡았습니다.
1922년 1월 5일. 신내각이 성립된지 겨우 13일 째 되는 날. 오패부는 전보를 보냈습니다.
"오패부가 전보를 보냈다고? 축전인 모양이군."
하지만 그 내용을 본 양사이는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 양사이는 기회를 틈타 내각을 차지했다. 일본 대표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전일 의논한 것을 뒤집었는데 동경에서 주중국 일본 대사에 훈령한 것을 보면 외교부에 일본 차관을 요구토록 하고 일본이 추천한 사람을 쓰게 했다. 양사이는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여론을 고려하지도 않고 있다. 외직 경험도 없는 사람이 제멋대로 일본의 요구를 허락하고 철로를 되찾기 위해 마침내 차관을 일으키고 주미 각 대표가 이에 따르도록 훈령하였다. 철로는 일본인 경영으로 귀속토록 하고 수천만 원의 채권을 일으켰다. 역대 내각이 하지 못했던 것을 서슴없이 그가 했다. 지난날 인민들의 통곡이 쌓여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고집스럽게 일을 저질렀다.
국권이 희생되고 운송권이 중단되는 데 어찌 외인을 후대하고 어찌 조국을 원망하지 않겠는가? 양사이는 끼리끼리 무리 짓는 것을 지원하고 조종하며, 외세에 아첨하는 매국으로 이완용, 장방창이 되었으니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남녀노소 전국 인민은 이민족이 우리 강토를 침략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으니 간적을 물리치고 정의를 위해 용감히 앞으로 나가자. 모두가 지혜를 모으고 힘을 합쳐야만 한다. 바로 중국 대표에게 급전을 쳐 원래 계획을 밀고 나가도록 하자.
중국에도 그 명성을 날린 이완용
이것은 양사이 토벌의 격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동시에 후견인인 장작림을 공격한 것입니다. 이제 직봉전쟁의 막이 올랐습니다.
첫댓글 이완용이 완전 매국의 상징이 되었네요.
이완용 ㅋㅋㅋ 여기서 나오다니
이완용은 중국에서까지 이름을 날렸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