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 시인 작품론
씁쓸함의 교훈
전철희(문학평론가)
서정시는 ‘세계의 자아화’를 실현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시인이 외부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내면화하여 표현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누군가 이런 문장을 썼다고 가정해봅시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날, 하늘이 나 대신 울어주어서 비가 왔다.” 이 문장은 너무 상투적인 탓에 좋은 싯구가 되기에는 부족해 보이지만 매우 시적(poetic)입니다. 자신의 내면(슬픔)을 외부 현실(비가 내리는 상황)에 투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문장은 과학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망상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비는 구름이 만들어낸 기후 현상일 뿐이고, “나”의 이별은 비가 내리는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나”의 이별이라는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비는 내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슬픔에 젖은 사람은 비를 보고 하늘이 “나”를 위로해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망상’을 고상하게 일컫는 말이 ‘세계의 자아화’입니다.
사실 요즘에는 ‘세계의 자아화’라는 용어가 거의 쓰이지 않습니다. 모든 시(poem)가 서정시(lyric)여야 한다는 관념이 퇴조했고, 애당초 이 용어가 너무나 추상적이고 애매한 측면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김소월, 한용운, 윤동주, 서정주 같은 유명 시인들의 작품을 설명할 때에는 이 개념이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대학교에서 문학관련 강의를 할 때면 ‘세계의 자아화’라는 용어를 설명해줍니다. 이 개념을 소개할 때마다 제가 인용한 작품은 2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송수권 시인의 「산문에 기대어」이고 다른 하나는 나태주 시인의 「대숲 아래서」입니다. 전자는 죽은 혈육을 애도하던 화자가 싱그러운 자연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는다는 내용이고, 후자는 고민이 많던 화자가 우물가에서 상념에 빠진다는 내용이지요. 저는 둘 다 최고 수준 시인의 준수한 등단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의 독자 정도 되는 분들은 다 익히 알고 있는 작품들이겠지만, 후자는 뒷부분을 인용하고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습니다.
3.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4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가을,
해 지는 서녘구름만이 내 차지다.
동구 밖에 떠드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하기는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찍이 먹고
우물가에 산보 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
「대숲 아래서」 부분
이 시의 화자는 시골로 ‘돌아온’ 사람으로 보입니다. 한국은 모든 것들이 도시에 집중된 ‘서울공화국’이고, 시골로 ‘돌아온’ 사람은 마음 속에 상처라든가 패배감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지요.(사실 지금은 돈이 없는 사람일수록 서울을 떠나기 힘들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적어도 이 작품의 정서에 따르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그의 상처가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도시의 각박한 생활에 지쳤을 수도 있고, 건실한 직업을 구하는 데 실패했을 수도 있고, 가슴 아픈 실연을 겪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 모든 불행을 다 경험했을지도 모르겠구요. 당연하게도 그는 가을 하늘 아래에 “내 것”이 없다는 절망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데 그는 슬픔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해 지는 서녘구름”과 “동구 밖에 떠드는 애들의 소리” 그리고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와 “우물가에 산보 나온 달님”이 “내 것”일 수도 있겠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때의 ‘깨달음’은 과학적인 논증 같은 것이 아닙니다. 구름, 소리, 달님은 애당초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삶이 힘들 때라면 충분히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지요.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런 발상의 전환으로 자기위안의 계기를 마련한 것은 인간만이 가능한 역능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화자의 자기위안은 성공했을까요? 저는 이 시를 읽힌 후에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작중 화자가 어떤 기분일 것 같냐는 질문이 그것입니다. 어떤 학생은 화자가 슬픔을 떨쳐내고 평안할 것 같다고 합니다. 화자가 세상일에 달관하려고 노력했은 했지만 한숨을 쉬면서 허탈해하고 있을 것 같다고 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저는 둘 다 일리가 있는 감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 시의 화자가 ‘세계의 자아화’에 성공했다면, 즉 자신이 자연을 소유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는 마냥 행복해져야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화자가 정말 행복하기만 할까요? 그를 둘러싼 현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세상을 소유했다는 ‘착각’을 한다고 해서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진 않을 것 같습니다. 백석의 작품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과 「흰 바람벽이 있어」의 화자가 마냥 행복하게만 느껴지진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요컨대 「대숲 아래서」는, 자신이 자연과 동화되어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화자가 나오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 행복에 대해서 의심할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이중적 작품입니다. 이런 복잡성은 다른 나태주 시인의 작품에서도 유사하게 변용됩니다. 그의 작품 중 일반 독자에게도 유명한 「풀꽃」만 해도 그렇습니다. “자세히 보아야/예쁘다//오래 보아야/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라는 이 작품의 구절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시인의 천진한 마음을 보여주면서, 또한 ‘풀꽃’처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에게도 각각의 매력이 있다는 위로의 마음을 전하는 것으로 읽힙니다. 아름답고 희망찬 논조이지만, 저는 이 작품 또한 묘한 씁쓸함을 안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애당초 사회에서 소외받으면서 ‘풀꽃’처럼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형상화하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나태주 시인의 작품 중에서는 씁쓸함의 농도가 옅은 편인데, 다른 작품들은 말할 것도 없지요. 이번에 『시현실』에 수록된 ‘대표작’들만 봐도 그 점은 충분히 증명이 되겠지만, 이 글에서는 신작시들을 가지고 분석을 이어가보려 합니다.
2.
일단 「다쿠보쿠 씨여 안녕」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이 작품은 일본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에 대한 마음을 담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쿠보쿠는 1886년에 태어나 1912년에 죽었으니 겨우 26세의 나이로 요절한 시인입니다. 그의 작품은 사후에 더 유명해졌고 오늘날 그는 일본의 국민시인으로 평가받습니다. 한반도의 시인들도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백석은(白石)은 아예 이시카와의 이름에서 ‘석(石)’을 차용해서 필명을 지었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짐작건대 「다쿠보쿠 씨여 안녕」의 화자는 아마 시인 자신의 페르소나일 것 같은데, 어쨌든 그는 다쿠보쿠의 사진을 보고 있는 듯합니다. 그 사진 속의 시인은 한 손을 턱에 괴로 고민거리가 있는 듯 고독하게 있습니다. 화자는 사진에서 그의 흔적을 느낍니다. 모래밭과 바닷 물결에서도 112년 전에 죽었던 시인의 자취가 느껴지는 듯합니다. 화자가 모래에서 타쿠보쿠의 채취를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시집 『한 줌의 모래(一握の砂)』 때문일 것입니다. 이 시집의 첫 작품인 단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동쪽 바다의 조그만 섬 바닷가 백사장에서/나 울다 젖은 채로/게와 어울려 노네(東海の小島の磯の白砂に/われ泣きぬれて/蟹とたはむる)”
굳이 작품을 인용해보기도 한 것은, 이를 통해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작풍을 간단하게라도 짚고 넘어가기 위해서입니다. “한 줌의 모래”라는 시집의 표제는 공허한 느낌을 줍니다. 모래는 자연의 상징이면서 또한 인간의 죽음, 더 나아가서는 무(無)를 상징할 수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쿠보쿠가 요절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이 사실은 더욱 스산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앞의 문단에서 인용한 작품 또한 외롭고 쓸쓸한 정조를 풍깁니다. 앞서 언급했듯 나태주 시인도 씁쓸한 마음을 표현하는 일에 능숙한 시인이니, 다쿠보쿠의 시에 대한 상념을 풀어냄으로써 연대와 공감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다시 「다쿠보쿠 씨여 안녕」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이 작품의 후반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나칠까 망설이다 눈길로 내려가
밟아본 모래밭 잔잔한 바닷물결
한 손으로 쥐어 흘려보는 까끌한 모래의 감촉
거기에 아직도 당신의 슬픔이 남아 있을 줄이야
당신의 동상처럼 지는 해를 등에 지고
흔들려보는 잠시 실루엣의 시간
떠나도 잊혀지지 않겠지요
마음 한구석 오래 서걱대며
한숨 쉬고 있겠지요
이제 당신 더는 만날 수 없을 거예요
이렇게라도 만나 좋았어요
「다쿠보쿠 씨여 안녕」 부분
이어지는 구절들이 전혀 다른 느낌을 풍기고 있습니다. 앞의 연은 모래에서 오래 전 죽은 시인에 대한 ‘실루엣’을 어렴풋이 느끼는 장면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시인이 한 세기 전의 시인에 대한 애틋함을 표현하는 모습이 감동을 주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애틋함은 애당초 만날 수 없었던 존재에 대한 것이기에 씁쓸함이기도 합니다. 인용한 뒷부분에서 이제는 자신이 떠나갈 것이라는 가슴 아픈 석별의 마음이 표현되는 것 또한 그래서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시인은 “다쿠보쿠 씨여 안녕”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어의 “안녕”이라는 말은, 만날 때 건네는 인사이고 또한 헤어질 때 건네는 인사이기도 합니다. 영어 문화권에서는 만날 때 “하이(hi)”나 “헬로우(hello)”라 하고, 일본어권에서는 헤어질 때만 건네는 인사말 “사요나라(さよなら)”가 있는 것과 대조적인 일입니다. 한국인들은 유독 만남과 헤어짐의 거리를 가깝게 느끼는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정신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어쨌든 그런 한국어 때문인지, 이 작품의 화자가 다쿠보쿠에게 건네는 “안녕”이 반가움을 담고 있는 만남의 인사말인지,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아쉬움을 담고 있는 이별의 인사말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렇게 복잡한 정서를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이 나태주 시인의 역능이라는 것을 짐작할 따름입니다.
3.
나태주 시인의 다른 신작시 「겨울 자작나무 숲」도 비슷한 정조의 작품입니다. 일단 ‘자작나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옵니다. 자작나무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보는 나무는 아닙니다. 추운 지방에서 자라는 식물이기 때문입니다. 저만 해도 자작나무를 길거리에서 본 기억은 없습니다.(제가 자작나무를 잘 몰라서 보고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기는 하겠습니다만) 그럼에도 저는 자작나무를 친숙하게 느낍니다. 러시아의 유명한 문학/영화 작품에서 많이 나오기도 하고, 백석을 비롯한 식민지 시기의 시인들 또한 이 나무를 작품에 언급한 경우가 자주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국에 자작나무가 아예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강원도에는 자작나무를 많이 볼 수 있는 숲도 있다 하고, 그래서인지 정끝별 시인을 비롯한 많은 문학인들이 자신의 작품에서 자작나무를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자작나무는 한국인에게 낯설고 이국적인 식물이며, 고리키부터 백석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예술가들을 연상케 만든다는 점을 지적해둘 만합니다.
나태주 시인의 작품도 그런 정서를 이어받고 있습니다. 「겨울 자작나무 숲」의 첫 구절에는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우리 떠난 다음에/과연 무엇이 남을까” 인생을 살다보면 속절없는 헤어짐과 실패들이 있기 마련인데 그것이 아쉽다는 말일까요? 아니면 인생 자체가 허무하다는 뜻일까요?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어느 쪽이든 슬프고 씁쓸한 인식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 뒤에는 또 이런 구절들이 이어집니다.
면사포 둘러쓰고
기도드리는 정숙한 여인들
나무 나무 나무 수풀
바람은 차갑지만
순한 바람
눈에 덮여 한적한 그 길 위에서
우리 만나 좋았는데
스스럼없이 기대어 오는 어깨
망설임 없이 맞잡는 손길
무심히 던지는 한마디 말에도
그만 마음이 열려
깔깔대며 웃다가
두 눈에 눈물이 고이기도 했는데
우리 떠난 다음에
무엇이 남는다 할까
무엇이 남아 그 자리
우리를 기다려준다 그럴까
「겨울 자작나무 숲」 부분
이 시는 나무를 기도하는 사람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경건한 존재와 손길을 잡은 느낌에 화자는 웃기도 하고 눈물이 나기도 합니다. 웃음이 나는 것은 낯선 존재와 마주쳤기 때문일 것이고, 눈물이 고이는 것은 그러나 그 만남 또한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의 결과이겠습니다. 이것은 씁쓸한 인식이고,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고독한 톤으로 끝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가 마냥 허무주의적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자작나무는 화자에게 중요한 만남을 선사했고, 그 만남을 통해 화자는 여러 상념에 젖으며 잊고 살았던 것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독자들 또한 이 작품을 통해 그 만남을 대리체험하게 된 것은 물론입니다.
나태주 시인의 작품은 한국어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가독성이 높고 직관적입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이는 ‘쉬움’에 비해 그 속에 담긴 감정은 단순하지 않다는 점을 저는 이 글에서 편하게 풀어서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 인간의 감정은 워낙 복잡하기에 기쁨 속에서 슬픔이 생겨나고 슬픔 속에 기쁨이 잠복해있는 경우도 있기 마련입니다. 나태주 시인의 작품은 새삼스럽게 그런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전철희
문학평론가. 2010년 대산대학문학상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