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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브레이어(Bréhier, 1876—1952)
- 제6권. 19세기, Le XIXesiècle 507-788
제4장 멘드비랑의 철학과 이데올로지의 쇠퇴 – La philosophie de Maine de Biran et la décadence de l’idéologie 542
제1장 비샤 Bichat 543
의사이며 생리학자인 사비에 비샤(Xavier Bichat 1771-1802)[서른하나]는 1800년에 삶과 죽음에 관한 생리학적 탐구들(des Recherches physiologiques sur la vie et la mort, 1800)를 썼으며, 생명현상에 이원론을 도입했다. 이 이원론은 이데올로지가 활성화 시켰던 정신 일원론과 완전히 단절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유기체의 삶과 동물적 삶을 구별했다. 전자는 소화, 혈액 순환 등의 기능들과 같은 것이고, 후자는 감각적이고 발동하는(motrice) 기능들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하나는 비대칭 기관들에 의해 연속적인 방식으로 행사된다. 이 전자의 기능은 습관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것은 화[성냄]나 걱정[불안]과 같은 정념의 기관이다. 다른 하나는 대칭적으로 위치된 기관들을 근거지(le siège)로서 갖는다. 후자는 수면의 주기들에 의해 간헐적이 되기도 하고 중단되기도 한다. 결국에는 이 후자의 기능이 오성과 의지의 기능이 된다. 이러한 구별의 중요성은 멘드비랑(Maine de Biran), 꽁뜨(Auguste Comt), 라베송(Ravaisson) 등에 의해 숙고되었다. 이 구별은, 심리학을 이데올로지의 일원론에서 벗어나기 위한 심리학의 운명들에 관해서 보면, 절충적 유심론의 영향보다 의심할 바 없이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쳤다. (543) (47LLI)
제2장 멘드비랑 : 인간 - Main de Biran : l'homme 543
멘드비랑(Maine de Biran, Marie François Pierre Gontier de Biran, 1766-1824)의 학설은 반전(l'inversion)의 가장 분명했던 예들 중의 하나였으며, 18세기 사상은 19세기에 이 반전을 감당했다. 꽁디약 방식의 이데올로지는, 감각작용들 속에서 그리고 감각작용의 기호 속에서, 인간 사유를 단지 완전히 외재적으로 파악할 뿐이다. 멘드비랑은 단일한 내부 중심으로 향하였다. 이데올로그들은 매우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단 하나의 방법, 즉 분석을 실행했다. 멘드비랑은 하나의 유일한 문제를, 즉 의식의 자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즉 내적 관찰, 생리학, 병리학 등을 이용했다.
그러한 반전은 틀림없이 그 시대의 일반적 경향이었다. 그러나 그 경향을 구체적이게 하기 위해서는 멘드비랑과 같은 기질의 인간을 필요로 했다. 그는 신체의 불안과 연약함으로 끊임없이 내적 풍경(le paysage)을 향해 상기하는 기질적 인간이었다. 그는 직업적인 철학자가 전혀 아니었다. 그의 외부적으로 드러난 삶은 한 정치적 인물의 삶이었고 또 공무원의 삶이었다. 그는 1766년 [프랑스 남서부 도르도뉴(Dordogne)주의 도르노뉴 강가에 있는 도시] 베르쥬락(Bergerac)에서 [귀족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로베스삐에르가 몰락한 후에도 도르도뉴 주의 행정관을 지냈고(1795-1797), 그리고 500인의회의 의원을 지내기도 하였고(1797-1798), 1806년에서 1812년까지 베르쥬락의 부지사를 지냈으며, 1815년에는 의회의 재무관을 거쳤으며, 1816년에 국가 감찰관을 지냈다. 그리고 1818년에서 1824년에는 베르제락을 대표하는 의원이었다. (543)
그가 기술[서술기법]적인 특성의 저술들을 쓰기로 했던 것은 파리, 베를린, 코펜하겐의 학술원들이 개방된 경쟁의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작업들을 하면서 그는 이데올로그들을, 특히 데스뛰 드 트라시(1754—1836)와 카바니스(1757-1808)를 자주 만나게 되었다. 특히 1802에서 1809년 사이에는 오뙤이 거리에 있는 마담 엘베시우스(Mme Helvétius, 1722-1800)의 사롱의 고정 참여자였다.그는 또한 [전기의 강도를 측정한 물리학자] 앙페르(André-Marie Ampère, 1775-1836)의 친구였다. 그러나 그는 일종의 내적 필연성에 의해 철학으로 옮겨갔다. 그의 내밀한 일기(Journal intime 1792-1824)(1927, 2 vol)는 자신의 방심들(ses distractions, 기분풀이), 즉 자신의 “정신의 자연적 연약함”에 관하여 거의 전적으로 불평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정신의 자연적 연약함은, 유기적인 인상들에게 중단 없이 발동하게하고 흔들어놓는 것에 관하여, 그에게 모든 연속적인 노력을 금지시켰으며, 그 자신에게서 이 노력을 끊임없이 걷어냈다. 이 모든 불편함이 사회생활에서 팽배해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이 세상의 많은 업무들에 알맞지 않다는 것이 나에게 증거 되었다. 그 업무들은 유용하지 않고 나를 성가시게하고, 나를 흔들어 놓았다. 나는 단지 반성에 의하여 그리고 고독 속에서 가치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그럼에도 이 동요는 외적인 어떠한 것에도 연유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내부 속에서 조용함을 지닐 때, 사람들은 세상 한가운데에 있을지라도 세상의 동요에 참여하지 않고, 명상할 수 있고 또 반성적 경험들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적으로 흔들렸을 때, 방심이 이미 이루어지고 또 가장 깊은 고독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잔잔하게 할 수 없으리라.” 이로부터 그의 철학에 대한 정의가 나온다. “철학한다, 그것은 반성하는 것이고, 언제 어디서든지, 세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마치 고독과 독방에서처럼 자기 이법의 용도를 사용하는 것이다.”(내밀한 일기, 1816년 6월, p.233). (543) (47LLJ) (57QLG)
제3절 학설의 형성: 습관 La formation de la coctrine: l'habitude
뷔퐁(Buffon 1707-1788)과 루소(Rousseau, 1712-1778)는 멘드비랑의 초기 스승들이다. 「자연을 활성화하는 일반 힘들에 관한 반성들(Réflexions sur les forces générales qui animent la nature, 1745)」에서, 그는 자연의 이미지를 뷔퐁에게서 빌려왔다. 그 자연의 이미지는 일반화된 뉴턴(Newton)의 체계이다. 이 체계는 [만유]인력(l'attraction)을 물질에 속하는 원초적 힘으로서 간주하고, 그 인력 속에서 천체역학의 현상들의 설명뿐만 아니라 물리적 현상, 화학적 현상, 심지어는 추진력(l'impulsion)[생리적 충동]의 설명도 발견한다. (544)
뷔퐁과 더불어, 초기에 멘드비랑의 진실한 스승은 루소이다. 그 루소는 어느 고독한 산보자의 꿈들(1776-1778)(유작 1782)의 루소이다. 그가 자신의 불안정한 [심적] 유동성, 자신이 자기 지배가 잘 안 되는 것, 자신의 삶을 덧없이 보내면서 침착(le calme)과 정적(la sérénité)의 상태를 유지하는데 무능함,사회에서 자신의 우유부단함 등에 대한 자신의 모든 서술들은 이러한 흔적들을 강하게 표시했다(전집, 1권, p. 37.) 그는 도덕론자들에 대해 그리고 그들의 아름답게 쓴 명세서들에 대해 의심한다. “우리의 감화[애정적]상태들(nos affections)을 인도하려고 애쓰기에 앞서서, 아마도 우리가 이것들에 관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리라. 나는 이러한 것을 어떠한 곳에서 다루었는지를 알지 못했다. 도덕론자들은 인간에게 항상 감화 상태들이 주어져 있다고, 자신의 성향을 바꿀 수 있다고, 자기의 정념들을 되돌릴 수 있다고 가정한다. 이들의 이이야기를 들을 때는 영혼이 주권자이다. 영혼은 감관들에게 주인으로서 명령한다. 그러한 것이 진정 진리인가? 또는 어떤 점에까지 그러한 것이 진리일까?”(전집, 1권, 60.) 그리고 멘드비랑으로서는 자신을 끌고 가는 물결에 스스로를 휩쓸려가게 내버려 두고자 결심했다. “나의 의지는 나의 도덕적 상태에 어떠한 능력도 행사하지 못한다. … 따라서 영혼의 활동성은 무엇인가? 밖에서 오는 인상들의 입맛대로 항상 움직여왔던 영혼은, 공기의 온도에 따라, 또 소화가 잘되거나 못되는 경우에 따라, 침잠하기기도 떠오르기도 하고, 슬프기도 즐겁기도 하고, 조용하기도 흔들리기도 한다.… 만일 내가 정념에 휩쓸리지 않고 순수의식으로 남아서 정신적 만족으로 가끔 즐긴다면, 내가 이 만족을 연쇄고리로 이어가려 애쓰지 않을 것이다.… 그 만족이 [미래에] 올 때는, 나는 그것을 즐기리라.또 나는 그것을 맛보며[느끼며] 항상 유지할 것이다. 나는 나의 과오로 인해서 그것을 멀리하지 않을 것이라. 왜냐하면 나의 활동이란 그것을 얻기 위해서 또는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조금 전에 말했듯이, 정념들과 운동들을 얻으려고 나의 조용한 식사를 떨쳐버리고, 나는 헛된 노력으로 더 이상 나를 소모하지 않을 것이다”(전집, 1권, 59, 61). 나는 신뢰와 용기 상실이라는 번갈아가며 등장하는 치료할 수 없는 것에 마주해 있다. 우리의 활동이 우리에게 속한다는 착각은 곧 사라진다. “나의 두뇌의 섬유질들이 나의 의지의 충력에 양보할 때, 내가 체험하는 쾌락도 마찬가지이며, 내가 그 섬유질들이 마미된 것으로 느낄 때, 내가 빠져드는 용기 상실도 그러하다. 섬유질에 작용하는 나의 영혼이 음악가의 경우에 있을 때, 이 음악가는 자기 악기를 연주하기를 원하면서, 현들을 감아올리지 않아 팽팽하지 않았을 때, 자기 손가락 아래서 현들이 느슨해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나의 기분 좋은 찰나들에서 나에게 시도되었던 설득도 마찬가지이다. 이 찰나들을 받아들인 것은 나(moi, 자아)이다. 반면에 이것은 비교해보면 분명하다. 즉 이 상태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기관들[비의지적 기관들, 소화, 혈액순환 등]의 현실적 배치(la disposition, 재능)에 기인한다.” (545)
가끔 이런 필연의 의식이 나를 아주 스토아적인 침착(un calme)으로 데려간다. 만일 우리의 상태가 우리 기관이 갖추어진 방식에 의존한다면, “우리들 조건에서 잘못들의 근원은 우리와 연관된 외적 사물에서보다 우리들 자신에 훨씬 더 많이 있다. 만일 우리가 이 진리에 잘 설복된다면, 우리는 운수(le sort)에 대해 훨씬 덜 중얼거릴 것이고, 또 우리는 화난 상태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우리 스스로 동요되지 않을 것이고, 또 우리는 체념을 더 많이 할 것이다”(전집, 1권, 84). 이리하여, 자신의 유기체적 상태의 변동들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멘드비랑이 하는 자기 자신의 연구는, 그에게 분석에서 오는 기분 좋지 않는 취향을 회피하게 했다. 그럼에도 이 분석이 끝내는 내적 감정들의 동적인 놀이에서 만족을 얻게 된다. 우리가 유지할 수 있는 행복한 신체적[유기체적] 상태가 아닐 경우에라도, “거친 쾌락을 멀리하는 것, 특히 자비를 베푸는 것, 타인의 불운을 들어주는 것, 한마디로 순수의식과 확고한 건강에 결부된 즐거움들, 이것들만이 우리를 행복에 접근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출전 없음] (545)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과 일치라는 스토아적 이상, 자연에 따르는 스토아적 이상, 그가 읽은 키케로(Cicéron, 전106-43)와 세네카(Sénèque, 전4-후65)가 그에게 반성하게 했던 이상(idéal), 그 이상은 그에게 도달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였다. 행복한 인간이란, 그 인간이 자신의 취향들과 그 역량들을 자기 자신의 주의 깊은 연구에 의해 아는 인간이다. 그 인간은 이것들을 가지고 자기의 삶과 자기 품행을 조화롭게 하는 데 성공한 자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인간들의 일상적 조건에서 최악으로 보이는 것, 그것은 이들이 거의 조금의 예외는 있지만 자기 스스로 자기를 모른다고 단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잠재적 역량들이 감싸여져 있다가, 뜻밖의 상황들이 그들에게 행사하도록 이르기까지 자신들이 이것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지혜의 특징적인 표시(le signe)”는 자기 자신과 일치에 있다. 이 표시는 “거기에 도달하는 것보다, 아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이다. 이는 가장 위대한 실천 철학자에게서 양 점근선들을 갖는 쌍곡선과 같은 것이다.”(전집, 1권, 91) 게다가 우리의 자연[본성]은 우리를 규칙에 맞게 사용할 정도로 충분하게 고정되어 있는 실재성이 아니다[유동성이다]. 루소가 행복에 도달하기 위하여 [인식] 역량들에 관한 과도한 욕망들을 축소하라고, 그리고 권능과 의지를 완전하게 동등하게 하라고 충고할 때, 엘베시우스(1715-1771)가 그렇게 보았던 대로, 루소는 우리 욕망들의 죽음이 우리 역량들의 죽음이라는 것을, 그리고 하나를 축소하지 않고서 다른 하나를 축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결국 세네카처럼 활동적인 삶을 단죄할 필요도 없고, 내적인 후퇴를 설교할 필요도 없다. “행복의 모든 기술은 현존의 가능한 한 최상의 감정을 얻는 데 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대상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지혜는 우리를 대상과 통합하는 연결들을 단절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스스로 제시해야할 목적으로 가는 최상의 연결을 선택하는 데 있다”(전집, 1권, 104). (546)
마지막으로 스토아학자들에게 잘못이 있다고 하는 것, 그것은 우리와 사물 사이에 그 영향이 제거될 수 없는 감정이 있다는 것이다. 몽테스키외(Montesquieu, 1689-1755)는 그의 저술 법의 정신(Esprit des lois, 1748)의 초반에, 인간들이 서로서로 주장하는 연관들에서 결과로 나온 고정된 자연적 법칙에 대해 말한다. 그는 이 [자연적 법칙이라는] 연관들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잊고 있다. “강한 인간은 약한 인간과 동일한 방식의 연관을 느끼지 못한다. 기질[성벽]이 변할 수 있는 것은, 그 변화가 주변의 존재들에 비추어서, 고려할 다른 방식을 끌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인간의 불행한 자연에 관하여 관념들[생각들]을 고정시키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다”(전집, 1권, 118). 그 스토아학자는, 자신 신임이 감각적 중심의 상태에 틀림없이 의존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사물들에 비추어서 자신의 독립과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영광스럽게 한다. 사람들은, 원인들의 인식이 우리를 걱정거리로부터 안전하게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절주[절식]의 유용성을 가장 잘 아는 인간이, 만일 그의 소화액이 많이 활발할 경우에는, 아주 폭음[폭식]을 할 것이다.”(전집, 1권, 118).
그럼에도 불구하고 멘드비랑은 스토아학파의 이상을 따라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었다. 그는 키케로의 투스쿨룸 별장의 논의들(기원전45)이라는 책에 공감을 가지고 주석을 달았다. 또한 그는 에픽테토스(50-125/130)에게는 일리는 있지만, 몽테뉴(1533-1592)와 빠스칼(1623-1662)에 관해서 그렇지 않다고 했다(전집, 1권, 130-136, 139). 그는 스위스 박물학자 보네(Bonnet 1720-1793)의 글을 읽으면서, 자유의 문제를 오랫동안 명상했다. 이러한 연속적인 독서를 통하여, 그의 정신이 이루어지는 데 새로운 빛이 나타났다. 그는 자유의 형이상학적 의문에 완전히 빠져들게 내버려 두기로 마음먹었다. 그 당시 그는 이 해결할 수 없는 의문에 대해 이렇게 썼다. “왜냐하면 [자유의 형이상학에 대한] 이 해결 할 수 없는 의문은 의지의 운동 원리에 대한 인식에, 인간을 혼성하는(composer) 두 실체의 통합에, 이 둘의 상호 영향에, 무매개적으로(immédiatemment)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상호 침투할 수 없는(impénétrable)불가사의들([des] mystères)이 있고,이에 관한 그 많은 위대한 철학자들도 … 무지한 인간보다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전집, 1권, 142) 이것은 또한 쓸데없는 의문인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의문은 도덕에서 보면 어떤 흥밋거리도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내밀한 의미(le sens intime)는 우리가 대상을 향해 우리의 주의를 멈추거나 고정하는 능력을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알게 한다. 그 내밀한 의미는, 우리가 우리의 영혼이 물결치는 대로 내버려 두는 상태들과, 비교하고 계산하면서 우리가 관념들을 줄 세우고 그 연관들을 찾는 상태들 사이에, 차이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우리의 영혼의 진실한 행동[행위]은 없는가? 영혼의 행동이 나를 값어치 있게 하려는 노력 때문에, 내가 그 행동을 따라가는데 무력하다는 것을, 내가 느끼지 않는가?”(전집, 1권, 145). 이 행위의 실재성은 모든 형이상학적 사색과 별도로 독립되어 있는 내밀한 의미의 자료(une donnée)이다. 그리고 영혼 행동의 실재성이 감정의 혼란과 반대로 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경계(警戒, une vigilance)를 가능하게 한다. “이 질서는 내가 나의 관념들 속에 놓아두고자 비위를 맞추었던 질서이며, 내가 [앞으로 누릴] 나의 지복(ma félicité)을 의존하게 하는 것이 그 질서이다.” (547)
이리하여, 1795년[스물아홉] 이 찰나로부터, 요동치는 여러 환경들 가운데에서,멘드비랑의 방법과 학설이 햇빛을 보게 된다. 그 방법은 내밀한 의미의 자료들을 분간하는데 있고, 학설은 항상 조합되어 있는 정신 속에 두 사실들의 계열, 즉 정신이 능동적이라는 사실과 정신이 수동적이라는 사실을, 따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그에게서 이 학설이 어떤 도덕적 선입관[고민]에, 심지어는 어떤 생명적 필요에, 결부되었는지를 본다. (547)
이로부터 18세기 철학에 관한 멘드비랑의 태도가 태어난다. 그는 그 철학적 원리의 귀결로서, 인민주권의 독단과 이 독단으로부터 태어난 혁명적 동요를 18세기 사상에다가 결부시켰다. 이 독단은 정신들의 평등성에 관한 엘베시우스(1715-1771)의 원리와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그의 추론된 철학과도 밀접한 관계에 있는 이 원리는 이법[이치]만이 인민을 이끌 것을 요구한다.(전집, 1권, 166, 303) 그런데 이 철학 자체는 인간 정신의 역량들의 기원과 발전에 관한 꽁디약(1715-1780)의 학설에 분해할 수 없을 정도로 메여있다. 꽁디약은 모든 생각[관념]을 기호들(des signes)의 [교육]제도들에 의존하게 하면서, 가장 고양된 형식 하에서 분석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실행하는 것과 같은 그런 분석으로 회귀라고 주장하면서, 결국 이렇게 결론을 지었다: 그 어떤 정신의 범위에 놓여 있을 수 없는 것은 관념이 아니다 라고 한다. 그러나 두 가지 결함(faux)이 있다. 그 잘못의 하나는, 기호들을 사용함이 없이는 사유의 소질(capacité)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기호들이 [사유의] 작용(une opération, 조합) 없이도 창조될 수 있는가? (전집, 1권, 283, 289). 그리고 왜냐하면 정신이 대상들 사이에 닮음들과 차이들을 심정적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호없이 사유(une pensée)를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인식 속에는 덜 미묘하지만 실재성이 있을 것이며, 덜 표면적이지만 더 깊이 있고 더 연대적인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우리의 인식은 아주 감화적[애정적]이고 또 우리의 품행에 관해 더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 그 잘못의 다른 하나는, 우리 관념들의 기원에 대한 단순한 인식이 우리에게 우리 정신을 인도하고 지배하는 것을 가르쳐준다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 정신의 기능 작용은 예견불가능하고 기대하지 않는 많은 물리적 조건들에 의존하고 있다(전집, 1권, 214). (548)
18세기의 철학의 오류 전부는, 이미 반성적[반사적] 활동과 자발성을 매우 힘차게 구별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이 두 영역을 혼동하는데서 오는 것이다. 꽁디약(1714-1780)은 도처에서 일어나는 반사적 활동을 동물들의 본능에까지 옮겨 놓았다. 그에 따르면 그들의 본능은 지능적으로 획득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신체의 의존성을 숙고하여 옆으로 젖혀 두었다(전집, 1권, 219). 거꾸로 루소(1712-1778)는 사브와 지방 부사제의 신앙선언에서, 반성에서 솟아나는 그 무엇인가를 본능에, 감정에, 선천성에 남겨두었다. 왜냐하면 “만일 내밀한 의미(le sens intime)가 우리의 의무들에 관해서 우리에게 밝혀준다면, 모든 도덕책들은 무용할 것이다. 그러나 느낀다는 방법은 매우 다르기 때문에, …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변화하는 토대위에서는 어떤 것도 확립할 수 없다.”(전집, 1권, 191) (548)
이리하여 이 철학자의 사상을 지배할 주제가 알려지게 된다. 즉 그 주제란 안정된 반성에 상반되는 변화하고 떠도는 감정이며, 능동성에 대립되는 수동성이다. 습관이 사유역량에 미치는 영향(Influence de l'habitude sur la faculté de penser(1802)이라는 그의 명상집 속에서, 습관에 관한 그의 탐구들은 이러한 반대를 표현하고 정확하게 하고자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결국 습관은 우리의 수동적 역량들과 능동적 역량들에 미치는 매우 다른 효과들을 갖고 있어서, 이 역량들을 확실하게 분간해주는 반응물(un réavtif)이다. 감각작용들과 감정들과 같은 역량들도 있다. 이것들은 습관의 영향아래 변질되고 손상된다. 반대로 다른 역량들도 있다. 이 역량들은 스스로 완전화 되고, 지각작용처럼 더 많은 정확성을, 더 많은 속도와 더 많은 편리를 얻는다. “습관의 영향은 분명한 시금석(une épreuve)이다. 우리는 이 역량들을 그것들의 기원의 동일성 또는 다양성을 재인식하기 위하여 이 시금석에 종속시킬 수 있다. 이 모든 역량들은 동일한 방식으로 변형될 것이고, 일종의 용광로를 통과하면서 동일한 분류[집합] 속에서 서로서로 정돈되어야 할 것이다.”(전집, 2권, 301) 멘드비랑이 관심을 갖는 것은 습관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습관을 가지고 만든 용도이다. 그 용도는 떠도는 상태들 가운데서 활동중심에 대한 열정적인 탐구를 위하여 그가 만든 용도이다. 그것이 1802년[서른여섯]에 인쇄되었던 대로, 사람들은 한정된 기억의 평면을 단지 고려하는 것이다. 이 입문(une introduction)은 우리의 모든 인식 속에서 능동(활동)역량의 현전함[현재 있음]을 보여주고 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 지각들 중에서 가장 미미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만일 우리가 밖으로부터 인상들을 받을 경우, 우리는 그 인상들에게 우리의 자신의 것을 덧붙인다.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기분에 따라 수용성의 조건들을 변형시키는 운동을 마음대로 다루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지 않지만, 우리는 쳐다본다.만일 시각과 청각의 지각작용들이 후각과 미각의 지각작용들보다 더 분명하다면, 그것은 지각작용들이 활동 체계에 보다 복잡하게 연결된 활동체계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눈의 근육들과 연결이고, 다른 한편으로 소리를 송신하는 음성체계와 연결이다. 하물며 기억은 이미 체험된 수동적 인상들로부터 오는 단순한 반복과 동화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떻게 우리가 인상들을 구별하기에 이르고, 또 이것들이 새롭게 될 때 이것들을 재인식하기에 이르는가?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자아가 자기의 변한 모든 모습들과 동일시하는 것을 가정하는 것, 그럼에도 자아가 이들과 비교할 수 있고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 이것은 모순된 가정을 만드는 것이다.”(전집, 2권, 49) 이리하여 이 ‘입문’ 전체는 역량들을 마치 변형된 감각작용들로 보는 꽁디약의 주제에, 즉 인식의 기원적인 이중성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멘드비랑은 덧붙인 이 ‘입문’ 부분의 마지막에서, “이 논문 전체는 앞서 나왔던 분석들의 구성일 뿐일 것이다. 만일 그 분석이 적절하다면, 이 논문은 이 분석들을 확정하는데 쓰일 것이다.”(전집, 2권, 66) (549)
이 책의 제1과(la section), 즉 「수동적 습관들(Des Habitudes passives)」에서 멘드비랑은 특히 습관이 인식에서 다루는 활동적 부분을 조금씩 감춘다는 것을 제시하고자 목표로 삼는다. 그렇게 감추어지면, 결국에는, 우리는 습관에 의해 감각작용과 지각작용을, 즉 수동성과 능동성을 혼동하기에 이른다.습관 형성에 관한 탐구들은 우리에게 이런 착각을 분간하게 해주고, 어떻게 이 착각이 생겨나는 지를 제시해 준다. 이 탐구들은 또한 보게[알게] 해 준다: “어떻게 개인이, 자각 작용에서 자신이 다룬 부분[몫]에 완전히 눈 멀게 되어버리는 지…, 어떻게 지각하도록 혼성[구성]된 기능이 - 신속하고 쉽게 그리고 겉보기에 수동적으로 - 소위 말하는 감각작용에게 항상 접근하려 하는지…. 습관은 의지적 행위와 비의지적 행위 사이에 경계를 만든 선을 지워버린다”(전집, 2권, 103) 과학자의 역할은 습관을 반성하면서 그리고 습관이 이루어놓았던 것을 분해하면서 이선을 다시 긋는 일이다. 습관은 감각작용을 무디게 하고, 감관 기관들에 관계하는 운동들을 용이하며 정확하게 하고, 인상들을 용이하게 준비하게 하는 운동들에게 이 인상들을 강하게 연합하면서, 이 습관은 우리가 인식하는 경우에 취한 능동적 부분[몫]의 감정을 모든 노력을 다하여 점진적으로 그만두게 해왔다. 가장 특이한 습관들 중의 하나가 촉각 지각에서 일어난다. “근육 노력은 사라지거나 또는 그것의 생산에서…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개인이 자기의 고유한 힘을 잘 알지 못하면서, 대상에게 또는 저항하는 항목에게 자기의 힘을 전적으로 쏟아 부을 것이고, 그리고 그 대상에게 절대적 성질들, 타성, 견고성, 무게 등을 부여할 것이다”(전집, 2권, 106). 따라서 인식의 조건들이라는 능동적 운동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때에 지각적인 역량은 한편으로는 완전함의 정도에 이르고 다른 한편으로 맹목의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거기에서 지각능력을 습관에 이르게 한다. “개인은 외적 원인들의 - 이 원인들은, 개인이 원인들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서도 종종 움직이게 하는데 - 충력의 전달에서 종종 수동적으로 남아있게 되거나, 또는 유기적 기관들의 배열들에 따라 수동적으로 남게 된다.” (전집, 2권, 120). (550)
제2과에서 능동적 습관들의 연구는, 어떻게 우리가 운동의 통제와 지배를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어야만 했다. 멘드비랑의 만족할 만한 표현에 따르면, 어떻게 이 운동들이 새로이 “다룰 수”(disponibles,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 했다. 그것들[운동들]의 범위를 파악하기 위하여, 멘드비랑은 기호(le signe)의 개념을 가지고 만든 용도를 [사람들이] 주목해야 했다. 사람들은 꽁디약의 전통에서 어떻게 그리고 왜, 사유의 훈련이 언어와 분리할 수 없는지를, 분석의 도구로서 필수불가결한지를 안다. 여기서 멘드비랑은 이 전통을 전적으로 충실하게 따랐다. 그러나 그는 이 기호에서 하나의 특성을, 그에 따르면 원초적 성격(un caractère)을, 돋보이게 했다. 그 성격은 하나의 운동이라는 것이다. 이 운동은 기호로 그 역할을 완수하기 위하여, “마음대로 다룰 수”(disponible) 있는 채로 남아있어야 한다. 한 관념을 불러오기 위하여 운동은 우리의 처분을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간접적으로 말하자면, 운동이 우리를 관념의 주인으로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운동들은 지각작용 속에 있는 우리들의 인상들에 연결되어 있으며, 그 운동들은, 마음대로 다룰 수 있게 되는 한에서, 인상들의 자연적 기호들이다. 그리고 습관이 이 운동들을 의지에서 벗어날 때, 이 운동들은 [의지에 의해] 마음대로 다루어질 수 있기를 그친다. “기호들로부터 나온 운동들의 자연적 기능들은 절대적으로 망각되었거나 또는 잘못 인식되었다. [습관화되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상기(rappel, 불러옴)란 더 이상 없다.” (전집, 2권, 305). 따라서 “언어의 이차적 기호들은 행복하게도 습관의 운동성을 고장나게(enrayer 저지)하러 오고,개인 자신을 여러 측면으로 변형하는데 필요한 종의 제국을 개인에게 알려주러 오며, 개인에게 둘째 기억을 창조하기에 이른다.”[인용 표시 없음] (551)
따라서 제도라는 기호들은 노동을 착수할 준비를 취하는데, 습관은 그 노동의 결과물을 지웠버렸다. 그러나 습관은 마치 선배들[선험자들]처럼 이 기호들을 노리고 있다. 그리고 인류 사유의 역사는 습관이 겪은 낭패[궁지에 몰림]들의 역사이다. 습관이 이런 낭패를 감내하는 데, 그 때는 습관이 이 기호들을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을 유지하고자 원했을(습관과 더불어 자기지배를 유지하고자)때이고, 그리고 습관은 일상생활에 반대로 행해야할 노력들의 서술[기록]을 유지하고자 원했을 때이다. (551) (57QLH)
제4절 자아의 학설: 원초적 사실 La doctrine du Moi: Le fait primitif 551
1805년 도덕과학 아카데미에서 내 놓은 질문, “어떻게 사유하는 능력을 분해할(décomposer) 수 있는가? 거기서 인정해야할 기본적인 역량들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은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제시되었다. 꽁디약 학설의 의미(방향)에서 이데올로그들은 학술원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 의미에서 사유를 분해한다는 것, 마치 멘드비랑이 그렇게 잘 느낀 것처럼, 그것은 다양한 형식[형상]들 열거하는 것이고, 즉 감각작용이 스스로 변형하면서 다루는 다양한 특성들을, 그리고 생각된(pensée사유된) 유적 항목이 표현하는 다양한 특성들을 열거하는 것이다. 멘드비랑은 사유를 분해한다는 것에 기꺼이 아주 다른 의미를 부여였다.그 의미는 자신의 근본적 고민과, 즉 우리들 자신 속에 수동성과 능동성의 구별과, 우리가 감내하는 것과 우리가 실행하는 것의 구별과도 일치한다. 그는 이렇게 도입했던 것, 그것이 결과물에서 뿐만 아니라, 특히 분석의 형식에서 아주 새로운 것이었다. 새로운 분류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균열 도식(plan de clivage)이었다. 그것은 마치 분할에 의한 기계적 해체 대신에, 화학적 분해를 대체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화학적 분해란 겉보기에는 통일된 형태로 된 실재성들을 이질적 요소들로 구분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551)
멘드비랑의 내적 삶은, 상태들의 교대로, 즉 신체의 우위(domination)과 자아의 통제(maîtrise) 사이에 교대로 이루어진다. 이 상태들에서, 우리가 우리자신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드문 찰나들에 대비해서, 사람들은 비의지적 유기체의 성향으로부터 행복 또는 불행을 느낀다. 멘드비랑의 학설은 이원성의 경험에 대한 일종의 일반화이다. 그는 이것을 매우 단순한 겉보기의 의식현상들 속에서 재발견하였다. 내적 의식의 풍경에 대한 서술로부터 그는 심리학적 분석으로 이행했다. 그 내적 풍경에서는 그가 불안감을 가지고, 그로서는 방향을 종잡을 수 없는 감화적 상태들의 행진을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심리학적 분석이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영혼의 삶에 대한 미분(la différentielle)을, 그의 표현 자체를 빌면, 원초적 사실을 [다시 말하면] 모든 의식의 최초의 기원을 재발견하였는데, 그 원초적 사실에서 활동성은 수동성과 통합되어 있는 것이다. (552)
이 원초적 사실은 의식의 기원이자 동시에 무매개적인 내적 경험의 대상이다. 이 두 주제의 연결은 전적으로 마치 씨앗 같은 멘드비랑의 학설이다. “아주 단순한 인식으로부터, 모든 인식들 중에서 가장 분명한 인식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모든 인식들을 획득(체득)하는 것이 정신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 없이는 어떤 다른 인식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고, 이 인식과 더불어 모든 다른 인식들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전집, 나빌 판본, 3권, 341) 따라서 그의 작업은 이중적이라 할 수 있다. [첫째로] 분석적 작업은 원초적 사실을 분간하여 따로 떼어내는 것이고, [둘째로] 질문의 작업은 자신으로부터 의식의 발전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552)
원초적 사실은 근육의 노력이다.그 근육 노력 속에서 자아는, 근육의 운동을 생산하는 과잉유기체적 힘(une force hyperorganique)처럼, 무매개적으로 인식된다. 자아는 자신에게 저항하는 물질에 대하여 활동 원인[작용원인]의 자격으로서만 인식된다. 자기 자신에 의한 자아의 직관도 없고, 행동 밖에는 의식도 없다. 저항을 제거해보라, 그러면 당신은 의식을 제거하게 된다. 자아의 모든 의식 속에는(그리고 모든 의식은 자아의 의식이다) 비물질적 힘과 물질적 저항이라는 이질적인 두 요소들의 내밀한 통합이 있다.자아는, 자신이 생산하는 효과와는 분리할 수 없는 노력(l’effort) 속에서 마치 원인처럼 파악된다. (552)
이점에 관해서 철학자들의 모든 오류들은, 그들이 노력의 내적 경험을 그것의[경험의] 환원할 수 없는 독창성 속에서 파악하지 못한 사실에서 온다. 그 철학자들은 외적 현존의 긍정과 분리할 수 없는 자아의 작동(l'acte, 의식적 활동)을 사유하는 실체에 의해서 대체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는 이 실체가 외부로부터 마치 영속적 사물처럼 그리고 변형을 받아들일 수 있는 물질적 사물의 방식으로 제공된다. 홉스(1588-1679)가 데카르트(1596-1650)에 반대하여 그렇게 보았던 것처럼, 실체(la substance)의 관념은 연장적 기체(un substrat)의 이미지와 분리할 수 없다. 이 생각은 이어져서, 말브랑쉬(1638-1715)는 다음과 같은 귀결을 끌어냈다. 영혼의 모든 변형, 즉 감각, 욕망, 의욕은 영혼의 수동적 양태로서 파악되고, 보편적 원인이 신과 다른 원일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라이프니츠(1646-1716)처럼, 사람들이 내적 원인에게 영혼의 일련의 변형들을 부여했다할지라도, 사람들은 어째거나 영혼과 신체 사이에 원인과 결과의 모든 연관을 부정했고, 그리고 그들 사이의 소통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말브랑쉬의] 기회원인설과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에 힘입은 가설들에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더 많은 것이 있어서, 멘드비랑은 데카르트의 실체주의에서 18세기의 유물론의 원리를 본다. 데카르트가 그렇게 생각했던 대로, 정신적 실체는 물질적 실체와 차이가 너무 적어서 이것과 동화되지 않을 수 없다. (553)
이 모든 결말들은 데카르트의 주도적 방식으로부터, 즉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로부터 유래한다. 그는 신체에 미치는 원인적 행동과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자신에 관한 자기반성을 사유에서 발견했다고 믿었다. 이것은 하나의 사물로서 사유하는 실체를 너비의 실체와 따로 떼어 놓는다고 하는 생각으로 그를 이끌었다. 그러나 이 결말들은 또한 베이컨(Bacon)의 방식에 의해 이미 확정되었다. 베이컨의 방법은 그 본질에 있어서 생산하는 원인들 대신에, 사실들의 분류작업으로 대체하는 데 있다. 그런데 이데올로그들은 이 방법을 영혼의 사실들에 적용하면서, 유사한 방식으로 영혼 사실들을 관찰하고 또, 마치 뉴턴(Newton)이 천상의 모든 사실들을 중력에 귀착시키듯이, 이것들을 일반적 사실들로 귀착시켰다. (553)
따라서 멘드비랑에 따르면, 모든 근대 철학은 내적 경험과 무매개적 자료들을 무시했고, 외적 사물들의 경험을 근거로 하는 표본[모델]에 따라 대상을 그리려 했다. 게다가 이 둘째 경험은 첫째[내적] 경험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데카르트 방식과 반대되는 이 내적 관찰은, 우리에게 ‘가장 분명한 인식과 고함치는 의식’[양심](certissima scientia et clamanta conscientia)이라고, 즉 모든 의식이 외부로 향한 행동이고, [물질의] 저항들을 정복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적 경험은 우리에게 어떠한 실체도 부여하지 않으나, 단지 능동적이고 개별적이고, 그리고 수동적인 항[신체 지칭]과 연계되어 있는 힘을 부여한다. 그 힘은 현실적으로 그 수동적인 항에 작용하고 있기도 하다. 대상없는 주체는 없고, 더군다나 주체 없는 대상도 없다. 이것은 마치 독일 사람들에서처럼 보편적 명제가 아니고, 오히려 개인적이고 공통적일 수 없는 경험의 표현이다. 대상[신체], 그것은 저항이고, 권능[잠재력]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한편, 말브랑쉬, 흄, 이데올로그들에 반대하여, 그는 원초적 사실을 효과인(causale efficace)의 행동의 직접적 확인으로서 해석한다. “나는 이것을[원초적 사실을] 통하여, 자신이 노력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또는 아닌지를 알기위하여, 각성의 상태와 의식의 상태에 있는 또는 ‘자기 통제[조절]할 수 있는’(compos sui) 상태에 있는 인간 각각의 내밀한 감관(le sens)에 호소한다. 그 노력은, 그가 원할 때 그리고 원하기 때문에, 그 자신이 시작하고 중단하고 멈추고 또 계속하는 운동과 같은 운동의 현실적 원인이다. 그리고 그가 이러한 운동으로부터 여러 경우들에서 자신이 느끼고 또는 지각하는 그러한 다른 운동을, 예를 들면 습관에 의한 경련 운동들과 같은 운동들을 잘 구별하는지를 알기 위해서이다.”(미발표문 전집(3권), 나빌 판, 제3권 464) 멘드비랑에 따르면, 의지적 노력의 효능에 대해 말브랑쉬의 가장 일반적 반대는 우리가 근육 운동의 생산에서 복잡한 메카니즘에 대해 무지하다 라는 것이다.(『미발표문 전집』(3권), 나빌 판, 제3권 508-509). 우리가 운동의 현존조건에 대해 명석 판명한 어떤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어떻게 우리가 운동의 원인일 수 있는가? 그러한 것은 이런 물음을 자문하는데 귀착한다: 어떻게 사람들은, 시계를 제작하는 방식을 알지 못하고서, 원했던 운동을 문자판의 시계 바늘들에게 부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 반대의 힘은, 마치 시계공과 시계의 연관처럼, 자아와 신체의 연관을 상상에 의해 재현[표상]하기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온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상상으로 번역할 수 없는 연관이다. 즉 그 번역할 수 없는 연관은 자신의 노력 속에서 자유롭다고 느끼는 자아와 자아가 생산하는 운동과의 연관이다. 말브랑쉬의 반대는, 의지가 그 자체로 그의 신체와 그 신체의 행동수단을 생산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따라서 흄이 요구했던 것은 사람들이 하나만의 경험적 사실에 하나의 효과적 행동을 제시했다는 것인데, 멘드비랑은 또한 흄의 도전에 권리상으로 대답했다고 스스로 믿고 있다.사람들은 그것을 의지적 노력 속에서, 어떠한 변증법적 증거도 귀납법도 없이, 무매개적으로 알아차린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에서 중요한 것은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준비하는 것이고, 편견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 편견들이란 이것을 관찰하는데 필요한 관점에 서는 것을 제거하려는 것들이다. (554)
그럼에도 불구하고 멘드비랑의 노력이란 용어는 아주 특별하다. 노력 항목은 예외적이고 불연속적인 심리학적 상태를 자연적으로 암시한다. 이 심리학적 상태란 상대적으로 간략하게 일시적으로 의식의 흐름을 중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멘드비랑이 이렇게 지칭하는 원초적 사실은 의식이 현존하는 한 모든 순간 동안에, 다시 말하면 모든 각성하고 있는 상태 동안에 현재하고 있다. 이것은 자기 자신과 상대적으로 일정하게 동등하다는 사실이다.우리는 멘드비랑이 의지적 운동들의 다양성(la multiplicité)을, 그리고 처음으로 감각기관들에 의해 인식을, 눈에 띄게 했던 초기철학자들 중의 한사람이라는 것을 상기하자. 그것이 바로 눈의 근육적 체계 덕분에, 우리들의 시각 지각들이 구별된 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복잡한 체계가 우리 발성의 목소리를 의지적으로 생산할 수 있기 때문에, 청각은 외부세계의 인식에서 특히 우리와 닮은 자들의 인식에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멘드비랑에 따르면, 기호(le signe)란 대상의 성질들 일체를 표상하는 직접적 기능이 아니라, 오히려 기호가 의지적 운동이기 때문에 앞선 작업의 검증처럼 항상 다룰 수 있는 고정된 지지점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매번 각성상태 동안에는, 의지에 의해 유지되는 영속적이며 변화하는 긴장이, 즉 전부이든 부분이든 간에 근육 체계의 긴장이 있다. 멘드비랑의 의미에서 노력은 의지적 활동성만을 지칭한다. (555)
계속해서 멘드비랑이 내적 경험에 호소하는 것은, 노력에 대한 그의 학설이 아직 해결되지 못한 여러 문제들을 미해결인 체로 남겨두는 것을 막지 못한다. 신경에너지로 변형되고 또는 적어도 근육의 수축에 필수적인 에너지를 생산하는, 과잉유기체의 힘들의 생각(l'idée 관념)은 또한 그래도 분명하다. 아마도 제한된 힘의 문제일 것이다. 이 제한된 힘의 양은 각 주체에 있어서 항상 동일한 체 있을 것이다. 그 힘 속에가 아니라 힘의 결과들(ses effet, 효과들) 속에 진보가 있다. 왜냐하면 그 힘이 생산하는 첫 운동은 습관 덕분에 점점 더 쉽고 자동적으로 되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 힘을 다른 운동에서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형성된 자동주의에 새로운 작용들이 겹쳐진다. 그러나 그럴듯하게도 가장 단순한 첫 작동에서 만큼이나, 예를 들어 어린이의 능동적 후각 작용 또는 초기 옹알이가 있듯이 이와 거의 마찬가지로, 이미 형성된 자동주의들만을 이용하는 보다 복잡한 작동 속에서도, 이 작동들이 그래도 많이 있다. 노력의 감정들이 생기게 되는 조건들도 동일하게 모호하다. 근육의 저항은 그 저항이 일어나는 순간에 느껴진다. 그것은 마치 감정이 신경 세포의 흐르는 길을 따를 때와 같다. 앙페프(Ampère 1775-1836)는, 사람들이 소비되는 힘의 감정과 있는 그대로 근육 감각작용 자체를 구별하기를 원했다. 이 근육감각작용은 유입되는 것이고 또 의지와 독립적인 근육 수축에 의해 생산되는 감각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멘드비랑은 이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초기[첫] 수축은, 비의지적 수축과 매우 구별된 방식으로 나의 힘의 직접적인 효과로서 느껴진다.” (556)
거기에 많은 수수께끼들이 있다. 수수께끼들은 동일한 생리적인 현상들이(중추신경에서 오는 신경섬유의 전도현상에 의한 운동의 생산) 달리 해석된다는 사실로부터 나온다. 사람들에 따르면, 이 신경섬유의 전도현상에 유기체적 기관 또는 과잉유기체적 기관을 부여한다. 그래서 내적 경험을 생리학적 서술과 결부시키는 것은 매우 어렵다.
만일 멘드비랑의 목표가 자기 학설 속에서 자신의 내적 삶을 스스로에게 제안했던 목표였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사람들은 이 난점들의 의미를 더 잘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목표를 정복하는 것, 적어도 생리학적 숙명을 돌려놓는 것이다. 얼마나 멘드비랑이 [군주제 옹호자인] 보날(Bonald, 1754-1840)에 의해 주어진 인간에 대한 유명한 정의에 대해 적대적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 정의란, 기관들이 지성을 섬긴다. 오히려 실제로 인간은 자기 생의 대부분 유기체의 노예이다. 유기체는 인간이 원하는 것과 관계없이 행복도 불행도 만든다. 중요한 것은, 어디를 통과해서 또는 어떤 정도로 자신의 고유한 행동이 유기체 속에 개입할 수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18세기에 좋아했던 가설들에 의하면, 그것은 복잡하게 이루어진 일종의 내적 진행에 의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견할 수 없는 일종의 쿠데타에 의해서이다. 여기서 내적 진행이란 점진적으로 동물적 삶을 이성적 삶으로 바꾸는 것을 말하며, 쿠데타라는 것에서는 “사람들이 감각적 영혼의 중추(운동신경의 중추)가 자유로운 힘의 방향으로 지나가게 하는 것을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로운 힘이란 인간영혼의 본질이다. 또한 그 감각적[동물적] 영혼 중추가, 동물의 모든 유기체적 작용들을 자기 영향 하에서 실행하게 하는 방식으로, 인간영혼에 종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미발표문 전집(3권), 나빌 판, 제3권, 477) 제구실을 하는(sui juris, 자신의 권리로) 이 힘은 자신을 부추기는 외적인 것도 내적인 것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정확하게 루소에서처럼 사회적 상태는 자연 상태 속에 씨앗처럼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계약의 절대적인 발의(l'initiative)에 있다). 인간은 이중적이다. 즉 동물성에서 단일한데, 인간성에서 이중적이다(simplex in vitalitate, duplex in humanitate). 인간은 기관들에 의해 섬김을 받은 지성이 아니라, 오히려 추론적[이성적] 동물이다. (556)
감각 작용이래로 연속적 진보를 믿게 했던 것, 그것은 소위 말하는 단순 상태들은 실제상으로는 혼재된 양태들이라는 것이다. 꽁디약은 단순 상태들로부터 출발했고, 혼재 양태들은 이미 설명해야할 용어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감각작용, 그것은 자아의 의식이 동반된 감각작용이다. 그런데 멘드비랑의 분석은 의식으로부터 순수하게 유기체적인 감각성(sensibilité, 감성)을 분리하라는 것이다. 이 유기체적 감각성은 동물들에게서만 또는, 의지적 힘을 표출하는 초기 이전의 매우 나이 어린 어린이들에게서만 있다. 그는 특히 앙페르(Ampère 1775-1836)에게 무의식적 감감들의 현존을 인정하게 하는데, 매우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자아 없는 그리고 깨닫지 못하는 무의식적 감각작용들을, 그는 베르제락에 대한 그의 회상록(Mémoire sur les perceptions obscures)에서, 모호한 지각작용들이라 불렀다(비랑 전집, 띠스랑 판, 제5권). 이것은 동물적 감각성이며, “그 부류 속에서 충만한 원초적 사실”이다(미발표문 전집, 나빌 판, 제3권, 400). 그것은 노력과 아주 동등한 것이다. 게다가 두 개의 원초적 사실은 지각들 중에서 최소한의 지각 속에서도 매우 밀접하게 조합되어 있다. 그는 그 최소한 지각들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매우 어렵게 되었다. “자, 이러하다. 왜 감각작용이라는 단어가 불가분이고, 은연중인 방식으로 느끼는 주체의 의식을 가두고 있는지의 이유이다. 이 주체를 제거하면, 감각작용은 주체와 더불어 사라지게 될 것 같은 데도 말이다.” 스스로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도 멘드비랑은 자신이 조각상에서 도입한 첫 감각작용에 관해서, 꽁디약의 유명한 단어를, “조각 입상은 장미 향기를 생성한다(devient)”를 자주 인용한다. 유기체적 감각성의 원초적 사실, 그것은 절대적 수동성이다. 이 수동성이 영혼을 모든 상태들과 차례차례 동일하게 되게 만든다. 이 상태들은 신체로부터 영혼에게 온 것이다. 이 신체에서부터 연결이 없는 다양성(une multiplicité)이 나온다. 이 유기체의 감각성은 쾌락적 또는 고통적인 감화작용과 감각작용보다 못지않는 본능, 욕망, 정념 등 모든 상태들을, 즉 그 속에 자신의 주인으로서 자아는 없고 그 결과로서 의식도 없는 모든 상태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열등한 삶 속에서 감화작용들[쾌락 고통]은 일련의 사라지는 화폭처럼 동시적으로 있으며 또한 현재하는 것으로 표현된다(비랑 전집, 띠스랑 판, 제4권, 202. 노트). 반대로 활동적 삶에서 사실들은 연속적이다. 그것은 항구적이고 지속하는 활동성과 대비를 이루는 일종의 공간화이며 흩뿌리기이다. 이와 비슷한 대립이 프랑스 의사들인 보르듀(Théophile de Bordeu, 1722-1776)와 바르떼즈(Paul-Joseph Barthez, 1734-1806)의 생기론에 연결되어 있다. 멘드비랑은 이 생기론자들과 가끔은 매우 가깝게 여긴다. 프랑스 생기론자 보르듀는 독일 의사인 슈탈(Georg Ernst Stahl, 1659-1734)에 반대한다. 슈탈은 데카르트의 이원론에 부합하여 추론적[이성적] 영혼자체에서 유기체적 현상의 원리를 보았다. 이에 반대하여 보르듀는 생명을 유기체에 고유한 자치 활동성이며, 공동 실체적인 활동성으로 생각했다. 유기체적 현상들의 진실한 기력(le ressort)은 감각성(sensibilité)이며, 특히 생명적 성질이다. 그가 말하기를 “살아있는 신체의 모든 요소들은 그 본질상 감각적이다. 생명은 느끼고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동물 [신경]섬유를 가지고 있는 역량(la faculté) 속에 있다. 거기에 멘드비랑의 생각이 있다. 그는 감각성을 마치 유기적 물질을 가로질러 완전히 혼재되어 있은 것으로서 생각했다. 그 감각성은 스스로 생산되기 위해서는 신경체계의 수축에 대해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행하는 것은 당시 비샤(Bichat), 1771-1802가 (소화의 현상과 같은) 유기체적 생명(vie organique)과 (소위 의지적 근육 수축과 같은) 동물적 생명(la vie animale) 사이에 확립했던 분할을 단죄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근육들의 수축이 의지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습관에서처럼 그리고 정념 또는 감동에서처럼, 유기체의 연결에 또는 비교감신경의 연결에 기인한다고 하자마자, 이 근육수축을 구별된 분류 속에 배열할 어떠한 이유도 없어졌다. 이리하여 결정적으로 두 생명(삶) 사이에, 동물 생명과 인간 생명 사이에 경계를 확립하였다.” (558)
저항하는 신체에 반대하여 자기 노력 속에서 활동하는 자아는, 멘드비랑이 보기에, 인간의 모든 지적 도덕적 삶의 배아이다. 자신의 발가벗은 삶에서 개별적이고 인격적인 자기 성격과 더불어 있는 내밀한 경험의 원초적 사실, 이 사실은 보편적 원리들과 더불어 모든 이론 및 실천이성을 발생하기에 충분한가? 우리는 동일한 시대에 다음을 상기할 수 있다. 자기에게 낯선 그리고 자연에서 떨어져 있는 자아의 감정이 스낭꾸르(Senancour, 1770-1846)에게서는 자살의 변명으로 나가고, 비뉘(Alfred de Vigny, 1797-1863)에게서는 늑대의 죽음(La Mort du loup 1838)에서 고통스럽지만 스토아적인 고요함으로 나아간다. 이와 달리 멘드비랑을 이끈 길, 그것은 아마도 매우 제한되어 있지만 자기가 활동한 영역에서, 자아의 절대적 지배의 감정이다. 또한 그것은 배아로서 모든 이법[이성]이 원인이 된다는 확신이다. 그가 앙뻬르에게 쓰기를, “내가 생각하기로, 지적 관념도 없고, 원초적으로 의지의 행동(une action)과 연결되어 있는 분명한 지각작용도, 또는 소위 말하는 어떠한 지각작용도 없음으로써, 나는 지적 또는 인식적 체계를, 말하자면 의지적 체계 속에 절대적으로 기초된 것으로서 그리고 표현에 의해서만 그것과 다를 뿐인 것으로서, 생각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비랑 전집, 띠스랑 판, 제7권, 400) 이 주제의 증명은 비랑주의의 커다란 난점들 중의 하나이다. 나는, 얼마나 그가 지각작용 속에서 운동 요소들을 높이 평가했는지를,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는 지적관념들 속에서 자연적인 또는 제도적인 기호들을 높이 평가했는지를 이미 말했다. 그러나 이 현상의 의지적 부분이 지성의 보편적 내용이라기보다, 오히려 우리가 지성을 가지고 만든 인격적 용도(l'usage personnel)에 관한 것이 아닐까? 의지적 작용 속에서 우리의 고유한 인과성의 인식 그 위에다가 보편적 주장을 인과성의 원리로서 기초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때, 멘드비랑의 추론에는 결함이 있다. 우리가 실행하고 있다고 스스로 느끼는 활동성으로부터, 우리가 움직이지 않는 찰나들에서 자아의 영속성은 어떻게 결론이 날까? 그리고 우리들 자신이 원인들이기 때문에, 여러 변형들을 만들지 않고서도 우리가 터득하는 이 변형들이 우리의 외부 원인의 결과이라고 우리에게 믿도록 하는 [자아의 영속이란] 유비는 어떤 유비(quelle analogie)를 의심하는가? 인과성의 원리는 우선 수용되어야만 했을 것이고, 그리고 그 원리를 증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도덕적 원리들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자아의 절대적 자유에서 출발하면서 그 원리들에 어떻게 도달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서 도덕적 의식이 생겨난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우리와 닮은 인격들을 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개인적 영역(la sphère individuelle)은 그 자체로 제한된다.”(미발표문 전집, 나빌 판, 제3권, 35) 그러나 왜 이 유비인가? 아마도 이 주제에서, 멘드비랑에게는 자신이 회피하고자 원했던 개인주의와 충돌함이 없이 스스로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심리학과 일치하지 못하는 인류학이 있다. “인류학적 연관 덕분에 어느 대행자도 자기 개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가 자신 속에서 알고 느끼는 것, 그는 그것을 다른 사람과 더불어 또는 다른 사람에 의해서 안다. 인류학적 연관은, 마치 필연적 요소처럼, 인간적 자아의 의식 안에 들어간다.”(미발표문 전집, 나빌 판, 제3권, 36). (559) (47MKA) (57QMB)
제5절 멘드비랑의 만년의 철학 La dernière philosophie de Maine de Biran 559
인격들 간에 일종의 무매개적 소통에 호소는, 보편적 원리들에서보다 새로운 종의 관계 속에서, 개인의 삶을 넘어서는 그리고 일종의 새로운 원초적 사실과 같은 도덕적 삶의 지지기반을 추구한다. 멘드비랑의 생각은, 보편자에 도달하기 위하여 합리주의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비주의로 향하여 방향을 잡는다는 것이다. 「사유의 분해(Décomposition de la pensée)」에 관한 그의 회상에서 보면,그는 데카르트에 반대하여 가상디(Gassendi)와 통합된다. 데카르트는 코기토(Cogito)의 자기반성에 의해 벌거벗은(nue 순수한) 사유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아무 것도 자기 자신에게 작용하지 않는 것이고, 외부의 항(un terme)에 관해서만 행동이 있을 뿐이다.(비랑 전집, 띠스랑 판, 제4권, 194-196) 그가 정확히 지적하듯이, 적어도 각성시의 일상적 삶 속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비적 상태들에서는 열등한 것 이상의 것이 없다. 따라서 원초적이고 환원할 수 없는 사실과 같은 신비의 상태가 코기토의 정확한 자리(la place, 지위)를 차지하러 온다. 이 코기토에 데카르트는 두 개의 삶을, 즉 인간적이고 추론적 삶과 정신의 삶을 적당히 잘못 섞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자는 외부에 관한 행동일 뿐이다. 그러면, [후자에서는] 신 안에 흡수되어 있다. 신 안에서는 영혼이 더 이상 인격성이란 것을 갖지 않듯이, 그 영혼은 동물적 삶 속에서도 더 이상 그것을 갖지 않는다. 동물적 삶속에서 인간이 정념들에게 스스로를 방기했을 때, 인간은 타락한다. 정신의 삶은 신 안에서 절대적 자치이며, 동시에 혼융이다. 왜냐하면 “결국 감각기관과 상상 속에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상상이란 자아에 의해 원했던 것도 아니고, 또는 이미 자아가 스스로 흡수되고자 하는 최고의 힘에 의해 암시되고 영감 받은 것도 아니다”(미발표문 전집, 나빌 판, 제3권, 419). 따라서 정신의 삶이 멘드비랑을 짓눌렀던 무능한 감정들을 오직 그만두게 해주었으며, 그리고 그를 신체의 예속으로부터 분리하게 해주었다. 그것은 오직 의지의 힘에 근거하는 스토아학파로서는 도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로마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 Aurèle, Marcus Aurelius 121–180)는 이 이차적 삶[정신의 삶]에 진실한 삶인 제3의 삶[스토아적 삶]을 적용했다.정신은 본질적으로 사랑이다. 그것은 크리스트교의 의미에서이며, 다시 말하면, “영혼과 소통하는 삶, 그리고 자기 자신의 삶에 첨가로서 밖으로부터 영혼에게 오는 것이며, 영혼보다 더 높은 것에서 오는 것이다.”(미발표문 전집, 나빌 판, 제3권, 541). 사랑은 정신들[인격들] 사이에서 기호들(les signes)로부터는 독립적이고 무매개적인 관계를 창조한다. 정신의 삶은 인간의 노력과는 연속성이 없다. 이 정신의 삶은 신의 부름에서만 생겨난다. 신과 우리의 영혼의 관계는 우리 영혼과 신체의 관계와 같다.영혼은 자신의 고유한 활동 이외에도, “자신보다 훨씬 높은 원리에 기인하는 [인식] 역량들과 [행위 작용] 조작[능력]들을 가지고 있다. 이 조작들은 영혼의 깊은 곳에서 그리고 영혼도 모르게 실행된다.…지적 직관들, 영감들, 초자연적 운동들이 있으며, 이것들에서 영혼 그 자체에 속하지 않는 영혼은 전적으로 신의 행동 아래에 있은 경우이다.”(미발표문 전집, 나빌 판, 제3권, 549) 멘 드 비랑의 작품은 은총의 이론으로 칭찬받을 만하다. (560)
따라서 세 가지 삶, 동물적 삶, 인간적 삶, 정신적 삶은 독립적이다.띠스랑(Tisserand)씨는 이렇게 썼다. “[이 세 가지 삶에서] 서로 간에 논리학적 또는 형이상학적 이행은 없다. 사람들은 이것들의 현존을 확정할 수 있을 뿐이며, 이 현존을 설명할 수는 없다”반대로 멘드비랑의 태도에서는 연속성이 있다. 정신의 삶을 의지에게서 헛되이 요구했던 생리학적 숙명에 관하여 [꽁디약의 견해에 관하여], 그는 정신의 삶 속에서 이 숙명에 관한 승리를 발견한다. (560) (47MKB) (57QMB)
제6절 앙페르 André-Marie Ampère 561
이데올로그들이 너무나 단순화한 개념형성은 [멘드비랑과 마찬가지로] 또한 앙뻬르(André-Marie Ampère, 1775-1836)에서도 지성의 조금 더 보다 복잡한 이론으로 대체되었다. 앙페르는 물리학자이다. 그는 1820년에 전자기학의 법칙을 발견했었다. 그는 1804년 성립한 리용의 신비주의 그룹인 “크리스트교 학회”(la Société chrétienne)의 회장을 지내기도 했고, 1805년에서 1812년 사이에는 심리학적 현상들의 분류에 관한 솔직한 소논문들에 대해 멘드비랑과 편지교환이 있었다. 그는 그의 시대에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즉 이 시대에 많은 사상가들이 광신적인 걸음걸이로 따르고 있었던 부질없는 정치와 철학적 양식에 대해 가장 굴복하지 않는 정신으로서 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고유한 노력으로 또 모든 직접적 영향과 독립적으로, 정신의 분석과 실증과학의 진행과정의 분석을 다시 연결하는 철학적 전통을 발견했다. 적어도 그는 전율할 만한 영혼이었다. 그럼에도 리용에 있는 그의 친구들은 그의 열정을 꺼렸다. “그의 열렬한 영혼은 그에게 적당한 정도에 머물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1815년에 앙페르는 11년간 불신앙의 기간을 지난 후에 크리스트교 신앙으로 되돌아왔을 때, 이렇게 발랑쉬(Ballanche, 1776-1847)가 썼다 “모든 것이 나에게 중요한 종교적 시대임을 알렸다. 그러나 그 시대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방식을 그 시대 자체가 발설하는 것을 보기까지 충분히 살지 못할 것을 생각하면서 나는 비탄에 빠졌다” (561)
사람들은 특히 화학적이고 자연적인 과학 속에서 그 당시에 분류의 절차가 갖는 탁월한 지위를 안다. 모든 사람들은 반대로 18세기의 몇몇 경향들에서 사람들은 존재들의 발생의 질문이 그것들의 분류의 질문 다음에만 온다고, 심지어 결정적으로 미루어져야 한다고 판단한다. 자연사에서 뀌비에(Cuvier,1769-1832)의 고정된 종들은 화학의 단순 물체들에 응답한 것이며, 스코틀랜드 학자들의 환원할 수 없는 능력에 응답한 것이다. 이것이 앙페르가 철학적 과학들에 도입한 것이다. 그 정신은 특히 두 가지 분류작업에서, 심리학적 현상들의 분류와 과학들의 분류에서 알려졌다. 그는 멘드비랑과 서신교환에서 전자의 분류를 계속해서 조정하면서 정교하게 만들었고, 또 그는 후자의 분류를 그는 과학철학에 관한 시론: 모든 인간 인식의 자연적 분류에 대한 분석적 진술(Essai sur la philosophie des sciences, ou, Exposition analytique d'une classification naturelle de toutes les connaissances humaines, 1834)에서 소개한다. 그는 심리학적 현상들의 분류의 범위를 지적하면서, 그는 이렇게 판단한다. “이 현상들의 분류에 알맞은 유일한 수단은 심리학을 다른 과학의 수준에까지 끌어올리는 것이며, 그리고 서로 이해에서 오해가 없이 이 과학[심리학]을 전공하는 자들의 다양한 견해들을 통합하는 것이다. 이 전공자들에게 자신들의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 하는 수단을 제공하고 동시에 어느 날엔가는 동일한 언어로 말하는데 이르도록 하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다” (562)
그러나 심리학적 사실들의 분류는 멘드비랑과 완전히 독립적이고 아주 새로운 주제에 근거한다. 그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멘드비랑에게 훨씬 덜 빚을 지고 있다. 이 주제는 그가 세 번에 걸쳐서 독창성을 주장했던 주제이다. 이 주제가 그의 분류작업을 지배했다. 이 주제는 심리학보다 과학철학에 관한 것이다. 그의 출발점은 “감각적”(sensible) 태양과 “지식적”(intelligible) 태양 사이에서 플라톤-데카르트적 대립이었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인상에 의해서 현상세계를 인식한다. 이 현상세계에서 여러 색깔들은 대상 위에 있다. 또 그 세계에서 태양은 직경의 1피트 거리에 있고, 행성들은 역행한다는 등등, 물리학자들과 천문학자들은 가설적이고 진상(le moumène)의 세계를 생각한다. 그 진상세계에서 색깔들은 광원의 빛살에 의해 느끼는 존재[생명체]에게 자극된, 그리고 이 존재에게서만 있는 감각작용들이다. 여기서 태양은 직경 오십만 칠천 리유(해리, 1 lieue = 약 4 km)의 거리에 있고,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도는 평평한 구체이며, 행성들은 항상 동일한 방향으로 돈다, 등등”(비랑 전집, 띠세랑 판, 제7권, 368). [과학의] 합리적 구축의 기운은 어떤 것일 수 있을까? 앙뻬르는 변형된 감각작용에 대한 꽁디약의 주제를 거부하기 위하여 자기의 철학적 환경과 일치했다. 꽁디약의 것은 일련의 동일성들에 의해서, 모든 관념을 감각적인 것에 환원하였다. 그가 꽁디약의 주제에 반대하여 부여한 근거들(les raisons)은 그의 친구들의 근거들과는 전혀 다르다. 그 친구들이 꽁디약의 주제를 거부한 것은 감각작용이 수동적이라 여기고, 영혼의 능동적 사실들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들은, 멘드비랑이 그 선두의 사람인데, 이 조작을 일련의 동일성들에 환원하는 추론의 이론을 받아들이기에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런데, 앙뻬르에서 보면, 바로 거기에서 꽁디약의 실로 연약함이 있다는 것이다. 이 “우스꽝스런 이론”에, 즉 “인간들이 발명한 것에서 더 이상 거짓스럽고 더 이상 우스꽝스런 것이 없는 것”에, 꽁디약의 “멍청함”에, “우스꽝스런 동일성”에 대해(비랑 전집, 띠스랑 판, 제7권, 506; 500; 520; 521), 그는 실재적인 과학적 추론을, 즉 데카르트와 로크(1632–1704)가 서술했던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단계적인 추론을 대립시켰다. 그 철학자들[이데올로그들]이 로크를 데카르트에 갖다 붙이는 반면에, 앙페르는 결국 관념의 기원에 관한 이론을 옆으로 젖혀두고, 추론의 개념이 로크와 데카르트에서 동일하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 두 사람에 따르면, 추론의 그물코는 직관의 대상인 연관 또는 관계에 의해 앞선 것과 연결되어 있다. 추론은 전적으로 연관들로 된 연속적 계열의 직관들로 이루어져 있다. 연관된 직관들의 각각이 진보이다. 거기에 판단 있으며, “새로운 요소(연관이든 관계이든)는 판단에 결합하면서 집단(그룹)으로 커간다”(비랑 전집, 띠세랑 판, 제7권, 518) (563)
이 직관의 자연(본성)은 무엇인가?여기서도 또한 앙뻬르는 이데올로지 이론에 대립으로 갈 것이다. 이데올로지 이론은 공통 사유의 분석 즉 과학자의 관점으로부터 생겨났다. 꽁디약에서 판단은 서로 닮아가는 관념들의 집단이다. 따라서 판단은 두 항들의 비교에 근거하고, 비교된 사물들의 자연[본성, 원질]에 의존한다. 판단은 사물들이 변할 때 변한다. 그런데 수학자는, 연관되는 중에 있는 항들이 완전히 변한다고 할 때도, 아주 다른 종류의 관계들, 즉 변하지 않는 관계들을 안다. “예를 들어, 나는 오렌지 나무의 두 잎사귀들 사이에 닮음의 연관을 알았다. 만일 그 두 잎들 중에 하나 대신에, 내가 꽃 한 송이를 대체했다면, 잎의 색깔과 꽃의 색깔은 사이의 연관은 앞서 비교된 두 잎들 사이에서와 더 이상 동일하지 않을 것이다. 위치와 수의 연관은 그렇지 않다. 한 가지가 다른 두 가지 사이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한 후에, 나는 세 개의 가지를 대체하거나, 잎과 과일에 의해 이 가지들 중의 하나 또는 둘 다를 대체하고서, 나는 새로운 감각들을 인식하면서, 이 감각들의 본성과 독립적으로 수적 연관, 위치적 연관, 형식적 연관의 관점을 가질 것이다”(비랑 전집, 띠스랑 판, 제7권, 518) 따라서 여기에 바로 통합과 조합의 양태들이 발견된다. 이 양태들은 감각적 인상들과 전적으로 독립적이다. 이 감각적 인상들을 가지고 양태들이 일상적 지각 속에서 통일되어 있다. 류적 연관들만큼이나 너비, 지속, 인과성, 운동, 수, 분할가능성 등은 공리들이나 초기명제들에게 구실을 한다. (536).
이제 만일 사람들이 천문학자와 물리학자에 의해 발견된 “진상의 세계(le monde nouménal)”에 대해 추억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그 세계가 연관들 또는 관계들의 직관들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이 인상들과 이 관계들의 구별은, 자기에 속할 뿐인 제2성질들과 실재성 자체에 속하는 제1성질들 사이에서, 데카르트학파사람들과 로그가 행했던 구별과 다르지 않다. 단지 데카르트는 이 구별을 행할 이유가 있었으면서도 그것을 정당화하지는 않았다. 앙뻬르는 성질들이란 통일된 사물들과 독립적인 통합 양태를 지정한다고 증거를 대자마자, 정당화하였다고 믿었다. 그 당시 그는 완전히 관계 속에 참여했던 현상들 대신에 동일한 관계들을 갖는 진상들을 대체하는 것이 완전히 합법칙적이었다. 진상의 좌표의 법칙들은 현상 법칙들과 동일한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앙뻬르가 이론들이라고 생각했던 대로 물리학의 이론들은, 데카르트의 선천적 물리학과는 아무 연관도 없다. 그는 자신이 칸트의 선천적종합의 원리들과 비교하는 좌표의 법칙의 여러 종류들 인정하면서, 이 법칙들 속에서 물리학자의 이론들의 재료들을 보았다. 그러나 이론들은 프톨레마이오스(100경-168경)와 코페르니쿠스(1473-1543)의 천문학적 가설들에 모든 점에서 닮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가설로부터 결과된 것과 우리가 실재적으로 관찰한 것 사이를 비교하면서 두 천문학자의 가설들을 극단적으로 그럴 듯하게 보이게 할 수 있다. (564)
앙뻬르의 사상 속에서, 그의 주제는 또한 칸트의 주제와 대립된다. 그의 시대의 해석에 부합하여, 그는 칸트를 주관주의자로서 생각했다. 칸트는 좌표의 법칙들 또는 범주(카테고리)들이 나 속에서 나에게서만 현존하며, 현상들에서만 가치 있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든 심리학자들이 좌표연관들을 가지고 감각적 인상들의 의존성을, 그리고 마찬가지로(마치 멘드비랑이 인과성의 법칙에서 그렇게 했듯이) 내적 경험의 의존성을 만들었기에, 칸트주의의 암초를 회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여기에는 비교된 항들(les termes)의 자연[본성]에 의존하고 있는 많은 연관들(des rapports)도 있고, 이 항들과 더불어 사라지는 닮음의 연관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처음에 나타나는 현상들에 전혀 연결되지 않은 항들의 자연으로부터 독립된 연관들이 아니다. (564)
거기에 나머지 것들과 따로 떨어져 있는 과학적 인식의 주제가 하나 있다. 이 주제는 우리가 곧 보게 될 것이지만, 심리학적 분류작업보다 앞서 다루어진다. 멘드비랑은 자아에 의해 깨닫지 못하는 수동적 현상들과 근육적 노력과 더불어 생겨나는 능동적 현상들 사이의 구별을 인정했었다. 그는 능동적 현상에들에 의지뿐만 아니라 이성도 결부시켰다. 앙뻬르는 이 두 분할을 인정했으며, 이 둘을 감각적 체계 그리고 검시(檢屍, autopsie)[미세체계], 즉 에메스떼즈(l'émesthèse)[교감체계]라고 불렀다.그러나 그는 이 분할들을 멘드비랑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했다. 그는 감각적 체계는 병치에 의해 배열되어 있는 현실적 변모들의 진실한 인상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런데에메스떼즈는 새로운 인식으로써 이 인식[감각체계]에 보태진다. 이 새로운 인식은 근육 노력에서파악된 자아의 인과성의 인식이다. 이 순간에 자아에게 [근육의] 힘에 대한 권한 부여[특권]가 생겨난다. 그리고 권한 부여하려 할 때 만나는 저항들에 대해, 외부 사물들에게도 권한부여가 생겨난다. 그러나 이 두 체계에 이것들과 다른 두 가지 체계를 보탰다. 이 두 가지란 검시에 의해 가능하게 되는 것이지만, 검시와 혼동되지는 않는 것이다. 즉 비교 체계와 그 위에 생떼똡시(synthétopsie)[미세종합체계]가 있다. 비교 체계는 논리학처럼 일반관념의 형성작업과 닮음(유사) 분류의 형성작업에 속하고, 생떼똡시[미세종합체계]는 직관처럼 항들에 대한 독립적인 연관들의 형성작업에 속한다. 이 생떼똡시[미세종합체계]는 연관들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넷째 체계는] 이미 따로 떼어 놓았던 현상들에 앞서 있던, 그럼에도 뒤섞여 있던, 세 가지 체계 안에서 연관들의 직관이다. 첫째 체계에서는 너비(l'étendue)가, 둘째 체계에서는 원인성이, 셋째 체계에서 분류화의 연관들이다.첫째 체계는 공리들(des axiomes)을 허용하고, 즉 공간의 3차원 같은 수학적 공리들을 허용한다. 이것은 직관에 의해 주어지지만 두 가지 다른 체계들도 마찬가지이다. 둘째 체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장(une assertion)이 있는데, 즉 노력이란 팔에서 생긴 운동의 원인이며, 첫째와 마찬가지 자격으로써 노력은 직관적 자료이며 하나의 공리이라는 주장이다. 셋째 체계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원리들이다. 즉 류적 진리는 항상 종적진리인데, 반대로는 안 되며, 이러한 것들도 또한 공리들이다. 그러나 진상들의 규정작업(la détermination)은 정신이 사물들과 독립된 좌표양식들의 직관을 가질 때마다 가능하게 된다. 사람들은 이 양식들의 예를 물리학의 이론들에서 보았다. [칸트주의인데] 그런데 진상적 자아와 현상적 자아의 연관 속에서 진상적 자아의 주제 맞추어서 물리학적 이론과 동일한 가치의 이론을 생각할 수 있다. 현상적 자아는 찰나로 된 자아이며, 노력의 일시적 작용에서 파악된 것에 속한다. 그러나 인과성의 관계는 그것이 표출되는 현상으로부터 떨어져 있어서, 우리에게 영속적 자아에 도달하게 한다. 영속 자아는 현실적 표출들의 특별한 조건들에서 잔존한다.(565)
이 분류작업 속에서 마지막 항목, 즉 생떼똡시(synthétopsie)[미세종합체계]는 나머지 모든 것을 지휘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비랑과 서신교환을 통하여 어떻게 앞의 세 가지 분류가 그것들 자체적으로 분석되었다가 조금씩 생떼똡시와 연관 속에서 규정되는지를 보게 된다. 이러한 것은 첫째 분류에 특히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이 첫째에서 멘드비랑은 자아에 의해 깨닫게 된 것이 아니라 감화적(애정적) 현상들에만 주목하고자 했는데 비해, 앙뻬르는 여기서 항들의 좌표를 허용하는 인식을 보았다.그것은 앙뻬르가 그것으로[항들로] 인식의 출발점을, 즉 물리학적으로 진상들을 만들고자 원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노력도, 비랑에서처럼 자아의 실재성 자체에 도달하는 것인 대신에, 현상의 가치를 지닌다. 이것은 영속적 자아의 형이상학적 이론에 자유로운 영역을 남겨두는 것이다. 이 두 철학자는 어렵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인데, 비랑은 항상 내재적 분석에서 방향을 잡았고, 앙뻬르는 과학적 인식의 조건들로 향했다. (566)
따라서 심리학적 분류와 과학들의 분류 사이에 있는 밀접함 연관에 대해 놀랄 필요는 없다. 전자는 영혼의 능력들의 분류이며, 이를 통해 사람들은 과학들을 획득할 수 있다. 후자는 앙뻬르가 과학철학에 관한 시론(1834)에 시도한 것이다. 분류의 법칙들이 분류된 대상들과 독립적이라는 것을 확신한 후에, 앙뻬르는 동물학자 퀴비에(Cuvier 1769-1832)와 식물학자 쥐시유(Jussieu, 1748-1836)의 방법들을 이 문제에 옮겨 놓았는데, 자기 보다 앞선 시기의 학자들처럼 종을 포함하는 류들의 위계 목록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속들(genres, 논리학적 류) 그 위에, 과(les familles), 목(les ordres), 문(les embranchements), 계(les règnes) 등을 도입하였다.우주론적 과학들은 외적 자연을 연구하는데, 진상론(noologiques)의 과학들은 지적인 인간을 연구한다. 그러한 것이 두 가지 계이다. 우주론적 과학은 두 개의 하부계를 포함하는데, 하나는 소위 말하는 우주론적 과학들이고 다른 하나는 생리학적 과학들이다. 전자들은 다시 두 가지 문들로 나누어지는데 수학과 물리학이며, 후자들은 자연과학들과 의학과학들로 나누어진다. 진상론의 과학들은 소위 말하는 진상론적 과학들과 사회과학들로 나누어진다. 전자[진상론적 과학]들은 철학적 과학들과 진상기술학들(nootechniques)로 나누어지며, 철학적 과학들에는 심리학, 존재론, 윤리학으로, 진상기술학들에는 예술 연구를 하는 기술미학(la technésthetique)과 문학연구를 하는 어휘학(la glossologie)로 나누어진다. 후자[사회과학]들에서는 그 자체적으로 인종학, 고고학, 역사학과 같은 인종 과학들과 정치과학으로 나누어진다. (566)
앙뻬르의 의도에서 보면, 이 분류는 기본적으로 “진실한 방법적 백과전서에 쓰여야 하며, 이 백과전서에서 우리 인식의 모든 가지들이 연쇄로 이어져야지, 알파벳 순서에 의해 흩어놓을 것이 아니다.”(과학철학에 관한 시론, 18쪽)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 분류는 과학들의 원론부분과 상위부분을 구별하는 합리적 교육에 쓰여야 한다는 것이다. (567) (47MKG) (57QMD)
제7절 프랑스에서 칸트주의의 확산 La diffusion du kantisme en France
사람들은 멘드비랑과 앙뻬르에서 칸트의 철학적 혁명이 프랑스에서 행해진 인상의 어떤 것을 이미 보았다. 그 인식론은 조금씩 퍼져나갔고, 비이예(Villers Charles-François-Dominique de Villers, 1765-1815)는 1801년에 칸트 철학: 초월철학의 근본적 원리(La Philosophie de Kant ou principes fondamentaux de la philosophie transcendantale, 1801)를 썼다. 그는 같은 해에 동일한 주제로 보나파르트(1769-1821)를 위한 보고서를 썼다. 그는 이 책에서 경험주의의 정복자를 제시했다. 이 정복자는 자신의 인식이론 덕분에, 자유와 도덕을 모든 공격 그 위에다 놓았다. 비이예에 있어서 칸트는 프랑스 풍습과 사유의 개혁자임에 틀림없다. 같은 해 또한 네델란드 철학자인 킨커(Johannes Kinker, 1764−1845)의 네델란드 작품의 프랑스어판 번역, 순수이성비판의 간결한 제시의 시도(Essai d'une exposition succinte de la critique de la raison pure)(fr.tr. 1801)이 출판되었고, 데스뛰 드 트라시는 다음 해에 이것을 도덕과학 아카테미의 한 회합에서 소개했고, 문헌연구가이며 역사가인 삐에르 도누(Pierre Claude François Daunou, 1761-1840)는 여기에 주석을 달았다. 스탈 부인(Staël, 1766-1817)은 자신의 독일에 대하여(De l'Allemagne, 1810-1813)에서 칸트에 관한 장의 자료들을 비이예에게서 빌려온다. (
1809년에 베를린 아카데미 회원인 프레드리히 안킬론(Friedrich Ancillon, 1766-1837)은 한 논문 「현존에 관하여 그리고 독일에서 나타났던 형이상학의 최근 체계들에 관하여(Sur l'existence et sur les derniers systèmes de métaphysique qui ont paru en Allemaggne)」에서, 이 체계들의 하나의 언어로 제기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하나의 언어는 사람들이 그 언어에게 아주 경미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또한 그 언어는 질들, 상태들 또는 행동들을 실체들로 또는 상태들로 변환시킬 수 있게 되어있지 않다. 즉 독일 형이상학자들의 작품들에서 매우 편안하고 매우 공통적인 변신도 될 수 있게 되어 있지 않다.” 비슷한 시기에 셸링(Schelling, 1775-1854)은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언어 때문에 겪는 고립을 불평했다. 또한 여기서 어떤 의미에서 매우 불편한 전수가 작동되었는가를 간단하게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철학사를 총괄하는 것은 보편적 전통[세계사적 전통] 속에 독일체계들을 뭉뚱거리는 것을 임무로 삼는 것이다. (568)
안킬론 자신은 이원론에서 철학적 문제의 출발점을 본다. 그 이원론은 대답으로 전개되어야 할 항들의 여러 짝들로 표현되는 것으로, 주체-객체, 사유-자연, 자유-필연, 정신-물질, 심리학-물리학 등이다. 이 이원론은 구축된 개념이 아니라, 원초적 사실, 오히려 데카르트가 코기토(le cogito)에 의해 재인식했던 원초적 사실이다. 왜냐하면, “자아의 감정과 더불어, 나에게는 내가 아닌 어떤 사물의 감정도 동시에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 두 세계는 이렇게 반성에 의해서 분리되어 있어서, 문제는 이원성 속에서 통일을 회복하는 것이다. 데카르트와 로크는 두 항들 중의 한 항을 부정하면서 통일을 시도했다.데카르트의 태생주의(l'innéisme)는 실재 세계의 의식을 가지고 주체의 내부 원리들의 생산물을 만들었다. 이에 비해 로크는 인식을 외부세계로 환원하면서 원리들의 볼편성을 빠뜨렸다. 결국 칸트가 나오는데, 그는 두 항들의 연결을 유지했다. 그에게 있어서, “감각의 형식들(les formes), 오성의 용어들(les notions), 이성의 관념들(les idées)은 비밀스럽고 불가사의하며 이해할 수 없는 통합에 의해 직관들에 연결되어 있고, 이것들은 경험의 진리를 생산한다.” 안킬론에 따르면, 거기에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실상 무엇이 의문인지를 제기하는 데 있다. 왜 개별적인 것, 우연한 것, 비일관적인 것은 대상의 측면으로부터인가?, 왜 보편적인 것, 필연적인 것, [일관적인 것]은 주체의 측면으로부터인가? 칸트는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우리를 원환(圓環) 속에 내버려 두었다. “사람들은 실재성을 원하는가? [그러면] 사람들은 주체에게 당신을 되돌려 보낸 그 대상에게 말을 걸고 있다. 사람들은 주체를 의문으로 삼는다. [그러면] 주체는 당신을 대상에게 되돌려 보낸다. 사람들은, 해결할 수 없는 두 채무자라고 말할 것이고, 두 채무자는 자기들의 채권자를 조롱하고자 인정하며, 그리고 그들은 채권자에게 결국에는 제3자에 관한 문서를 제공하며, 제3자의 신용은 이 채무자들의 신용에, 경험의 실재성에 속한다.” (568)
후기칸트주의자의 철학들은 첫째 사실 저너머에다가 스스로를 위치시키면서 그 문제를 청산하려는 시도들이다.그 시도 중에 하나는 피히테(Fichte, 1762-1814)이다. 그는 완전히 독립적인 주체, 즉 무한한 자아를 찾는다. 다른 하나는 셸링(Schelling, 1775-1854)이다. 그는 지적 직관을 통하여, 주체도 대상도 아닌 절대자에 도달하고자 사유했다. 이것은 불가능 해결책이었다. 왜냐하면, “원초적 이원론 저넘어에는 어정쩡함 이외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사람들은 완전히 빈 것을 발견한다.” (568)
이리하여 독일 철학은, 게다가 성공하지도 못하였으면서도, 철학적 문제의 가능한 해결을 두루 검토하여 완성한 것으로 소개되었다. 이처럼 제란도(Joseph-Marie Degérando ou de Gérando, 1772-1842)는 철학체계들의 비교역사(Histoire comparée des systèmes de philosophie, 1804)(나중에 전4권, 1822)에서 칸트주의를 소개했다. 그리고 독일에 대하여(De l'Allemagne, 1810-1813)(제3부 6장)에서 스딸 부인(1766-1817)의 해석도 있다.
앙뻬르는 리용의 친구들에 의해 칸트를 이해하였던 사람 중의 한사람으로서, 프랑스 대중에게 접근할 수 있는 자신의 철학을 진술하였는데 매우 평범한 생각을 가졌다. 그는 멘드비랑에게 편지 쓰기를 “당신은, 철학체계들의 비교역사(1804)와 비이예의 작품이 상반되는 동기들에 의해 [칸트 사유를] 훼손하였다고만 생각하고 … 그 외 어떤 생각도 갖지 않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칸트]의 관점을, 즉 드 트라시와 드 제란도 양씨가 그에 대해 말했던 것을, 맹목적으로 신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마치 꽁디약이 데카르트의 관점에서 또한 자주 로크의 관점에서 행한 것처럼 칸트를 다루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말했던 것의 모든 반대를 그를 통해서 말하게 하기 때문에 그의 표현들을 왜곡한 것입니다”(비랑 전집, 띠스랑 판, 제7권, 520). (569) - (47MKI)
(정리, 20:32, 57QLF) (23:26, 57Q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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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6 멘드비랑(Pierre Maine de Biran, 1766-1824), 프랑스의 철학자, 수학자, 심리학의 선구자로, 관념연합 철학과 결별한 이후, 프랑스 유심론 사조에 속하였다.
1771 사비에 비샤(Xavier Bichat, 1771-1802)(서른하나), 프랑스 의사, 해부-병리학자. 삶과 죽음에 관한 생리학적 탐구들(des Recherches physiologiques sur la vie et la mort, 1800).
1775 앙뻬르(André-Marie Ampère, 1775–1836), 프랑스 수학자, 화학자, 철학자. 과학아카데미 회원, 꼴레쥬 드 프랑스 교수.
1800 앙뻬르(Jean-Jacques Ampère(1800-1864), 위의 앙뻬르(André-Marie)의 아들, 중세전문가. 레까미에 부인(Mme Récamier) 싸롱을 출입. 꼴레쥬 드 프랑스 교수,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1848). 내 아버지의 철학입문(Introduction à la philosophie de mon père, 1855),
1805 바르텔미 생 띨레르(Jules Barthélemy-Saint-Hilaire, 1805-1895), 철학자, 기자, 정치가. 나폴레옹의 아들(추측), 외무부 장관, 도덕정치 아카데미 회원, 저술이 많다. 불교에 관한 저술이 4권이고, 다른 종교에 관심도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fr.wiki에는 암페르 작품이 없다.
1860 루이 로네(Louis Auguste Alphonse de Launay, 1860-1938) 프랑스 지리학자, 동물탐험가. 전기 작가, 시인.
1862 델보(Victor Delbos, 1862-1916) 프랑스 철학자. 도덕정치아카데미 회원, 스피노자주의(Le Spinozisme, 1916, 멘 드 비랑과 그 전집(Maine de Biran et son œuvre, 1931 ]
1869 브룅슈비크(Léon Brunschvicg 1869-1944) 프랑스 철학자, 철학사가.
1885 르르화(Daniel Eugène Georges Leroy, dit Georges Le Roy, 1885-1965) 프랑스 배우, 코메디프랑스즈 회원, 파리예술학교 교수, - [르화(G. Le Roy, s.d.) fr.Wiki 없음] fr.wiki에는 라신, 페늘롱, 볼테르, 마르몽텔 작품을 다루었다고 되어 있으며, 멘드비랑 언급은 없다. - L'expérience de l'effort et de la grâce chez Maine de Biran[멘 드 비랑에서 노력과 그냥 됨의 경험], 1937. 이 저술은 Georges Le Roy로 되어 있다. 구글에도 동명이인은 없다.
1894 라크로쩨(René Lacroze, 1894–1971), 프랑스 철학자. 일차대전 참전(croix de guerre 1914-1918)
1897 바질 문테아누(Basil Munteanu, 1897–1972) fr.Wiki 소개(항목없음), 루마니아 문학비평가, 역사가, 대학교수, 루마니아 아카데미 회원(57QLG). 총제 정부하에서 스위스와 프랑스에서 칸트일화들(Episodes Kantiens en Suisse et en France sous le Directoire, 1935). [독일 위키(deu.Wiki)에는 항목은 아직 없고 바질 문테아누(Basil Munteanu, 1897–1972) 루마니아 문학사가(rumänischer Literaturhistoriker)로만 소개되어 있다. 프위키(fr.Wiki)에는 아예 없음 (47MKI) / 총재정부(總裁政府 Directoire 1795-1799) ] ,
1898 구이에(Henri Gouhier, 1898-1994) 프랑스 철학자. 멘드비랑의 전향들(Les conversions de Maine de Biran, 1947).
1902 쉴(Pierre-Maxime Schuhl, 1902-1984) 프랑스 철학자, 고대철학사가. 사비에 비샤와 오른손의 탁월성 이론(Xavier Bichat et la théorie de la prééminence de la main droite, le merveilleux, la pensée et l'action, 1952, 176쪽 이하.
1902 방꾸르(Raymond Vancourt, 1902-1978), 프랑스 철학자, 참사원(chanoine), 멘드비랑에서 인식이론(La théorie de la connaissance chez Maine de Biran, 1941)[방꾸르, (Raymond Vancourt, s.d.) fr.Wiki에 항목은 없음.]
1914 케르하르트 푼케(Gerhard Funke, 1914-2006) 독일 철학자. 1947년 멘드비랑으로 하빌리타치온을 하다.] (47MKI, 57QLG)
(25:33, 57Q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