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같고 사는 사람들...
(겔37:1-5,벧전1;3-7)208.209
2006.10.22(낮)
시온성군인교회, 태안 의료원
남제현목사카페 (http://cafe.daum.net/sangokli)
15세기 말에 유럽 남부는 두 차례 걸친 커다란 지진과 콜레라와 페스트가 휩쓸고 가면서 유럽 사람들은 깊은 절망 속에 주저앉았을 때이다. 이런 절망을 거부하고 희망(希望)의 항해를 출범 시킨 사람이 바로 이 <콜럼버스1451~1506)> 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미 대륙을 신대륙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A.D 64년 7월 여름 어느날 <로마>중심에 커다란 화재(火災)가 발생 했다. 유명 한 <네로>황제가 저지른 방화였다. 불타는 도시(都市)를 바라보면서 춤을 추며 시(詩)를 지어 노래했다.
성난 <로마>군중들의 항의가 시작되자 <크리스챤>들이 방화의 주인공 이라고 몰아세웠다. 줄줄이 <그리스도>인들이 잡혀 원형 경기장으로 끌려가 기 시작한다. 십자(十字)형에 참수를 당하기도하고, 더러는 야생 동물의 밥으로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그리고 대부분의 <크리스챤>들은 로마를 소아시아를 찾아가 바위 굴속에 피신하여 그들의 새로운 삶을 도모를 했다. 굴속에서 피신한 <크리스찬>들은 이 세상 구경을 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때 흩어진 이 <크리스챤>중에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편지 한 장을 썻는 데 이것이 바로 <베드로>전서이다.
(벧전 1:1-2)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그리고 3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 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주목(注目)할만한 한 단어는 산 소망(所望)이라는 단어(單語)이다.
살아있는 소망. 살아있는 희망(希望)이라는 말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굴속에서 살던 <크리스챤>들에게 아직도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나라 적으로 우울하고 절망과 낙심의 분위기가 북핵(核)문제이다. 그간 북한의 식량부족분의 약 50% 우리나라가 지원(支援)해 주었다..매년 정부 7천만 달러, 민간3천만 달러 등 1억 달러를 지원한 것이다..그런데 그들은 핵을 만들어 실험(實驗)을 하고 있다..그래서 우리 국민은 춥고 답답하고 우울한 기분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베드로>사도는 그 당시의 <크리스챤>들에게 편지를 쓴 것처럼 우리도 아직도 희망(希望)을 갖고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성도는 <그리스도>의 부활(復活)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믿으십니까? 우리는 부활(復活)의 주님을 체험(體驗)한 사람들이다. 주일이면 <하나님>전으로 모여 <하나님>을 경배(敬拜)하는 것은 주님의 부활(復活)때문이다..<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주일에 만났다. <메시아>라고 믿고 따르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자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고향(故鄕)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흩어진 무리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복음을 증거(證據)하는 새로운 공동체(共同體)로 태어났다. 부활(復活)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개혁의 말기(末期)에 너무나 지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아 넋두리처럼 이제는 끝났소. 끝났소. 하고 있는데, 지혜로운 그 부인이 상복(喪服)을 입고 <루터>누어있는 방을 들어왔다..<루터>가 놀래 아니 누가 죽었소? 하니, <하나님>이 돌아가셨다. 아니 <하나님>이 돌아가시다니 무슨 소리요. 그 때 부인은 정색을 하면서 ‘아니 <하나님>이 안 돌 아가셨으면 당신이 그렇게 누워만 있어’ 이 아내의 한 마디에 <루터> 실망의 잠에서 깨여 벌떡 일어났다..
미국 어느 교회 청년들이 <나사로>를 주제로 하는 연극에 주연(主演)역할(役割)을 한 청년인데 어떤 사람이 부활한 나사로에게 당신이 죽었다가 살아보니 달라진 것이 뭐요..<나사로>가 대답하기를 ‘나에게는 더 이상 두려움이 없게 되었소..’ 하드란다..두려움이 생기는 이유는 다음 세기(世紀)를 모르기 때문이다..부활하신 <그리스도>을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克復)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영원한 기업을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다..하늘나라의 영원한 기업(企業)이다..기업(企業)이라는 단어이다..그런데 기업의 소리는 기업이 부도났다. 도산(倒産)됐다는 소리들이다..세상을 있는 모든 것은 무너지게 마련이다..인생은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인생이란 참으로 수많은 얼굴을 가지고 산다. 고통스러운 얼굴, 찡그리는 얼굴, 분노하는 얼굴, 펑펑 눈물을 흘리는 얼굴을 가지고 있다.
반대로 환하게 미소 짓는 얼굴, 아름다운 얼굴, 신비스런 얼굴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그 수많은 얼굴들을 바라보는 내 자신의 마음 자세에 달려있다..고통스런 얼굴에 초점을 맞춰 바라보는 사람도 있고, 아름다운 얼굴에 초점을 맞춰 바라보는 인생도 있다. 아름답게 보고 좋게 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행복(幸福)한 사람들이다..살다 보면 가끔 자신에 대해 실망(失望)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나 아무리 부족하고 연약하게 보여도 <하나님>은 우리를 귀하게 보시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필요(必要)하셔서 지금까지 존재하도록 두신 것이다..우리는 <하나님>을 뜻을 이루어 가며 살면 된다..
1908년, 독일에 살던 한 청년이 배고 푸고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결심하고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리려고 하는데 너무 아플 것 같아 못하고, 목을 매려고 혁대를 뽑아 목욕탕 고리에 걸고, 의자 위에 올라가 목을 매단 후 의자를 발로 차버렸는데 혁대가 낡아서 끊어지는 바람에 죽지도 못했다..그러는 중에 생각이 나기를 자기를 죽음 직전에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이 너무 감사함을 알게 되였다. "내가 죽다 살아났구나! 다행이다!"
대학(大學)을 나와 큰 뜻을 품고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한 청년이 있었다. 이 청년이 외모나 성격이나 별로 나무랄 데 없었는데 문제는 아무도 농촌으로 시집을 오려고 하지 않다..그러다가 한 인터넷 카페에서 어떤 여자를 알게 되었는 데 청년의 닉네임은 '바다'였고 여자의 닉네임은 '초록물고기'였다..그래서 이런 인연 때문에 사랑하게 되여 청년이 정식으로 청원을 했다..그때부터 이 여자는 이상하게 점점 멀어져갔다. 오가던 메일도 뜸해지고 오고가는 메일 내용도 말이 아니다...청년은 또 다시 절망하고 말았다..그렇게 얼마 지난 후에 다시 한 번 절박한 마음과 그리운 마음을 담아 메일을 띄웠다.
얼마 후에 그녀가 자신을 멀리한 사연이 적힌 메일이 왔다. 자신이 소아마비이고 얼굴에 화상으로 생긴 흉터 때문에 청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내용이다. 청년은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렇다고 돌아서면 그녀에게도 상처를 입히고, 자신에게도 큰 상처가 될 것 같았고, 육체보다는 영혼이 중요하다고 자부하던 청년이었기에 더욱 마음이 힘들었다.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그녀에게 다시 메일을 보냈다. "초록물고기님! 이제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서 님에게는 건강한 몸을 가진 내가 필요하고, 또한 저에게는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님이 필요하다.
그래서 얼마 후 두 사람은 만나기로 하고 여자(女子)편에서 청년이 사는 걸 직접 보고 싶다고 해서 폐교된 초등학교에서 만나기로 했다. 청년은 한 시간 전에 가서 기다리는 데 여자는 20분쯤 지난 후에 교문에서 웬 날씬한 여자가 나타나더니 점차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상당한 미인(美人)이었다. 그녀가 "혹시 바다님 아니세요?" 청년은 그런데 " 초록물고기님이 못 나오게 되었나요?" 그녀가 바로 초록물고기라고 한다. 그녀는 자기의 외모(外貌)가 아니라 자기의 영혼(靈魂)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잠시 말을 꾸며냈다는 것이다..
꿈이 없고 미래가 없어 절망하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자유를 잃어버리고 속박을 운명처럼 여기는 사람이라 해도, 소망을 잃고 질병(疾病)에서 원망(怨望)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낙심할 필요가 없다...오랜 세월을 땅을 보며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을 향해 주님이 찾아가셨다. <베데스다>라는 연못이었다. 전설과 풍문을 의지하며 한 가닥 희망을 걸어보며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병약한 사람, 앞을 못 보는 사람, 걷지 못하는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등 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다.
38년 동안이나 앓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아시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는 낫고 싶은 마음이 있으나 누가 연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지금까지 낫지 못하였노라 원망스럽고 애달픈 자기 심정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러자 즉시 그는 자기 침상을 들고 걸어갔다. 절망 속에 있는 인생도 소망이 있고 미래가 열린 새로운 인생으로 만들어 주신다. <예수>로 말미암아 축복된 삶으로 변화된 것이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희망을 갖고 산다면..절망(切望)에서 소망(所望)으로, 죽음에서 생명(生命)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변화(變化)가 될 것이다...<하나님>은 친히 우리를 선택(選擇)하고 “너는 내 종이다. 내가 너를 선택하였고, 너를 결코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하셨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