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 영가지.선성지합본
81) 원석헌수시(元夕獻筵詩)
가정 갑인년(1544) 설날에 모이니 집안에 인과 끈 찬 사람이 셋이 있으니,
청송부사 중량(仲樑), 봉화현감 희량(希樑) 의흥현감 계량(季樑)이었다.
이 해에 나의 나이는 88세였다.
일찍이 어버이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중량은 삼척부사로서 청송으로 바꾸었고,
희량은 언양으로써 봉화로 바꾸었으며,
계량은 연산으로써 의흥으로 바꾸어 이 날 각각 자기 고을의 주찬을 가지고 와서 공궤하였는데,
아손(兒孫)들도 모이고 이웃 친척까지 와서 내외 등청하고 종일토록 취하고 즐겼다.
우리 분천(汾川)이 고조와 증조로부터 부친까지 백여년이나 나에게 미처 40년간을 사환(仕宦) 때문에 서울로 다녀 나그네같이 되
었기에 가옥도 자연 퇴락하였다.
아이 문량이 주장하여 공인(工人)을 데려다 중수하고 마침 이 날 여기서 새해를 맞이하여 내가 ‘긍구당(肯構堂)’이라 이름을 지으
니 중아(仲兒)가 절구를 지어 좌석에 올렸다.
끝 귀에 ‘천(天)’자 운을 달았으니 나는 독곡(獨谷) 성석린(成石璘)
1)의 시에 ‘팔십봉춘갱사천(八十逢春更謝天)’이라는 글귀를 생각해서 그 운자로 두 수를 지었고,
또 세 아이가 근읍(近邑)으로 바꾸어 온 것을 모두 왕의 은혜라 하여 이어서 「계자시(戒子詩)」를 지어 좌석에 있는 사람이 다 화
답하여 판말(板末)에 써붙였다.
80 봄을 다시 만남을 하늘에 감사함을
해동의 기로가 시편에 지었다네
쓸모 없는 이내 몸은 더욱 감사하오니
나이가 금년에 와서 또 8년을 더했다네.
몸이 늙어 벼슬을 쉬고 고향에 누워 있으니
세 아이가 격서를 받아 먼 지방에 있었다
일찍 글을 올려 가까운 고을 수령으로 오니
고을 다스리기를 먼저 잊지 말아야 하리.
복차(伏次) 이문량(李文樑)
오문(吾門)의 경복(慶福)은 정말 하늘같은데
하물며 시경(詩經)의 체악편을 �조림에랴
흰 수염 날리며 마루에 모여 노친을 모시고
술잔을 받들어 만년을 축수하네.
2)
대대로 전한 세업으로 수향(壽鄕)이 되었으니
늙음을 물리치는데 오리(五利)
3) 방법이 무슨 소용인고
못난 재주로 집을 긍구(肯構)함은 외람하온데
끼치신 훈계를 가지고 허물 경계하나이다.
복차(伏次) 이희량(李希樑)
마루에 가득한 모임이 노친을 위하고
차례로 잔을 올리고 하편(賀篇)을 지었다
붓을 잡고 서로 화답함이 일을 좋아함이 아니고
성대한 아름다움이 금년으로부터 시작한다.
벼슬을 두고 산수향에 돌아와
정대를 따라 즐김이 많으셨도다
강물이 둘렀고 돌이 걸리어 오는 사람 적으니
시시비비를 다 잊어버림에 부치신 것이라네.
복차(伏次) 이중량(李仲樑)
문장(文章)과 수고(壽考)는 하늘에서 얻은 게고
금고(今古)의 풍류(風流)를 일편에 실었다네
하물며 원석(元夕)에 다 같이 즐기니
뉘라서 태평 세월 만난 줄 모르리.
하늘이 근친을 허락하여 가까운 곳으로 바꾸어 주시니
아침 저녁을 대신하지 않고 봉양함이 방위가 없어라
백성에 임하여 비록 털끝만한 보탬도 없으나
궐문을 향하여 일반(一飯)을 잊지 못하오이다.
복차(伏次) 이계량(李季樑)
형제가 모인 세모에
성회(盛會)를 크게 펼쳐서 각기 글을 짓는다
임금과 어버이 은애(恩愛)는 산같이 중하니
지금으로 같이 백년을 또 축수하리라.
물굽이 치고 산이 둘러 특별한 마을이 되어
나이도 높으시고 지위도 높아 남방에 움직이셨네
집을 새로 고쳐 긍구(肯構)로 훈계하시니
길이 자손으로 하여금 잊지 못하게 하리라.
복차(伏次) 이숙량(李叔樑)
형제가 어버이를 보호하여 섣달을 피하였으니
한집에 즐거운 경사가 신편(新篇)에 넘쳤다
고당(高堂)에 이 모임이 다 할 수 없으니
갑인년으로부터 만년까지 이르렀노라.
셋 고을이 솔밭같이 고향을 끌어안으니
나가 있는 아들은 놀기가 방도가 있다할 것인가
포의(布衣)가 녹으로 기리지 못한 것 한하지 말아라
윤씨의 집 모친 훈계를 맹서코 잊지 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