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무령왕릉
◈ 소재 : 공주시 금성동(金城洞) <옛 지명은 공주읍 송산리(宋山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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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리 고분군은 일찍부터 웅진시대 백제의 왕릉군<王陵群>으로 알려져 왔는데, 1971년 무령왕릉이 발굴됨으로써 왕릉군<王陵群>이라는 사실이 확실하게 입증되었다.
현재, 이곳에 는 1-5호분 등 백제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橫穴式 石室墳>] 5기와 벽돌무덤인 6호분, 그리고 무령왕릉 등 모두 7기가 자리하고 있는데,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이외에 7·8호분 과 29호분, 13호분 등이 더 있어 이곳에 모두 13기의 고분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분들은 모두가 표고 약 120m정도 되는 송산<宋山>을 북쪽의 주산<主山>으로 한 구릉의 중턱 남쪽 경사면에 자리하고 있는데. 계곡을 사이에 두고 동쪽 능선에는 1-4호 분이 자리하고 있고 서쪽 능선에는 무령왕릉과 5호분·6호분 등이 자리하고 있다.
다른 여타 지역에 있는 대부분의 백제 고분이 그러하듯이 이 송산리 고분군의 고분들 역시 대부분이 일제시대 때 조사되었는데, 1-5호분은 1927년에 조사되었고, 6호 전축분은 1933 년 일본인인 가루베(輕部慈恩)에 의해 조사되었다.
이처럼 두 차례에 걸친 조사를 통하여 송산리 고분군에 분포하는 고분의 구조와 형식이 새롭게 밝혀지게 되었다. 먼저, 1-5호분은 모두가 자연할석을 이용하여 축조한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橫穴式 石 室墳>]으로 널길[연도<羨道>]은 모두가 널방[현실<玄室>]의 동쪽에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벽면에는 강회를 발라 요철<凹凸>을 없앰과 동시에 널방[현실<玄室>]안쪽면을 환하게 미장<美粧>하였다. 또한 1-4호분은 널방[현실<玄室>]의 바닥에 냇자갈을 깔아 널받침[관대 <棺臺>]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5호분은 벽돌로 두 개의 독립관대<獨立棺臺>를 구축하였다.
같은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橫穴式 石室墳>]이면서도 이렇게 널방[현실<玄室>]에 설치된 관대<棺臺>가 차이가 나는 것은 양자 사이의 시간차를 반영하는 것으로 믿어진다.
이러한 사실은 분포상의 차이를 통해서도 짐작해 볼 수 있는데, 1-4호분이 고분군 중에서 가장 위쪽에 동서로 병렬되어 있는 반면에 5호분은 이보다 아래쪽에 동떨어져 무령왕릉,6호분 등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들 5기의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橫穴式 石室墳>]은 구조와 규모에 있어서 약간씩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이중 원형으로 남아 있는 것은 5호분 1기뿐이다.
나머지는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기 이전에 도굴되면서 널방[현실<玄室>]을 구성하 기 위해 구덩이를 파고 자연할석으로 네 벽을 구축하였는데, 바닥에서 약 1m 정도는 수직으로 쌓고 그 위부터는 약 25°정도 안으로 기울여 할석을 엇물리면서 맞조여 쌓아올림으로 써 천정의 폭을 점점 줄여 마지막에는 1매의 대판석<大板石>을 덮어 마무리한 궁륭상<窮 륭狀>을 이루도록 하였다.
한편, 이 송산리 고분군에는 1-5호분과 같은 돌방무덤[석실분<石 室墳>]이외에 두 기의 벽돌무덤[전축분<塼築墳>]이 있어 주목된다. 송산리 벽화분으로 불리는 6호분과 무령왕릉이 그것인데, 이 양자는 서로 인접해 있어 특이한 무덤구조와 함께 양 자의 친밀한 관계를 반영해 주고 있다.
이중 6호분은 널길[선도<羨道>]과 장방형의 널방[현 실<玄室>]으로 되어 있으며, 배수구는 약 20m 정도로 역시 벽돌을 쌓아 만들었다. 천정의 구조는 널방[현실<玄室>]과 널길[선도<羨道>] 모두 터널식으로 되어 있으며, 오수전<五銖錢>이 새겨진 벽돌로 정연하게 쌓아올리고 있다.
현실<玄室>의 내부는 바닥 중앙의 동쪽에 벽돌로 쌓은 널받침[관대<棺臺>]이 하나 설치되어 있으며, 벽에는 7개의 등자리[등감<燈龕 >]와 함께 사신도<四神圖>와 일월도<日月圖> 등 벽화<壁畵>가 그려져 있다.
벽화는 그림을 그릴 부분에만 진흙을 바르고, 그 위에 호분<胡粉>으로 그렸는데, 지금은 많이 떨어져나가 퇴색되었다. 벽면은 벽돌로 쌓아올리되 길이모쌓기와 작은모쌓기를 반복하면서 쌓아올리고 있는데, 제일 하단에서부터 10단, 8단, 6단의 순으로 길이모쌓기의 양을 줄여가고 있는 반면에 작은모쌓기는 처음부터 1단으로만 처리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남북의 단벽<短壁> 은 수직으로 쌓아올리되 동서의 장벽<長壁>은 양벽을 맞조여서 터널형을 이루게 하였는데, 이러한 곡선을 처리하기 위해 한쪽이 넓고, 다른 한쪽은 좁은 대패형의 벽돌을 사용하고 있다.
널길은 널방의 중앙 전면에 설치되었는데, 좌우를 맞조임하여 현실과 마찬가지로 터널형을 이루고 있다. 6호분과 마찬가지로 벽돌무덤<塼築墳>으로 되어 있는 무령왕릉은 1971년 7월에 5호분과 6호분의 침수를 방지하기 위해 배수시설을 하던 중 우연히 발견되었다.
역시 경사면의 풍화암반층을 파고 벽돌로 널방과 널 길, 배수구를 만들고 그 위에 분구를 조성한 것인데, 널방의 남북 단벽<短壁>은 수직으로 되어 있는데 비해, 동서의 장벽<長壁>은 터널형으로 되어 있다.
널방은 입구에서 안쪽으로 1.09m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모두가 바닥면보다 21cm 정도 높게 되어 있어 6호분과는 달리 전면관대<全面棺臺>의 형태로 남아 있다. 벽면의 벽돌을 쌓아 올리는 방법은 6호분과 마찬 가지로 길이모쌓기와 작은모쌓기를 반복하고 있으나 6호분이 바닥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길 이모쌓기의 수를 10단, 8단, 6단으로 줄이고 있는데 비해 무령왕릉은 처음부터 끝까지 길이 모쌓기는 4단, 작은모쌓기는 1단으로 되어 있어 평<平>1수<竪>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벽돌은 기본적으로 공적법<空積法>을 사용하고 있지만 벽돌과 벽돌 사이에는 간간히 석회나 진흙이 끼어 있는 것도 있다. 6호분의 축조에 사용된 벽돌이 주로 오수전문<五銖錢文> 이 시문<施文>된 것인데 비해 무령왕릉 축조에 사용된 벽돌은 대부분이 연화문<蓮花文>인 것이 특징이며, 널방의 벽면에는 동서벽에 2개씩 그리고 북벽에 1개 등 모두 5개의 보주형 등감<寶珠形 燈龕>이 설치되어 있다.
널길은 6호분과 마찬가지로 널방의 남벽 중앙에 설치 되어 있는데, 6호분이 이중구조로 되어 있는데 비해 무령왕릉은 하나로 되어 있어 차이를 보인다. 널길 역시 벽돌을 쌓아 완성하였는데, 벽돌 쌓는 방법이 널방과 동일하나 문양을 구 성하는데 있어 8엽연화문이 시문된 벽돌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 주목된다.
널길의 바닥면은 삿자리모양으로 벽돌을 깔아 관대<棺臺>와 동일한 높이로 맞추었으며, 벽돌 아래쪽에는 배수구<排水溝>가 마련되어 있다. 배수구는 널방과 널길의 경계부분에서 시작하여 널길의 가운데 바닥 밑으로 통과하게 되어 있는데, 역시 벽돌로 구축하였으며, 길이는 18.7m에 이르고 있다.
이상과 같이 송산리 고분군에는 굴식 돌방무덤[횡혈실 석실분<橫穴式 石室墳>]과 벽돌무덤이 혼재해 있는데, 이 중 벽돌무덤은 중국 남조의 무덤양식을 받아들인 것이 틀림 없으며, 굴식 돌방무덤은 6호분에 보이는 벽화분과 함게 고구려고분의 영향에 의해 등장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6호분과 무령왕릉은 다같이 벽돌무덤으로 되어 있지만 세부적인 모습에서는 약간의 차이점도 발견되고 있는데, 이러한 차이점이 양자의 축조 시기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양자의 선후관계에 대해서는 6호분이 먼저 축조되었을 것이라는 주장과 무령왕릉이 먼저 축조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엇갈려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지는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