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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09일두아카데미-우청 정병조(鄭炳祖)|의 수필세계
우청(又靑) 정병조(鄭炳祖)의 수필문학 세계
- 수필집 《休講이 있는 曜日》(1963)을 중심으로 -
최원현 nulsaem@daum.net
수필가⋅문학평론가⋅한국수필가협회이사장⋅한국문인협회부이사장⋅월간한국수필발행인
1. 들어가며
한 수필가를 안다는 것은 그 수필가의 인생을 안다는 것이다. 수필은 그만큼 그 사람의, 그리고 그 삶의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필가는 참 많다. 수필기로 활동하다 가신 분도 많고 현재 활동하는 수필가도 많다. 그런데 김윤숭 지리산문학관장으로부터 함양문화제에서 우청 정병조 수필에 대해 얘길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사실 그때까지 우청에 대해서는 이름조차 들어 보지 못 했었다. 아니 내 얕은 지식으로 미처 그 이름조차 몰랐던 것인데 그 분이 수필가라고 했다. 그것도 함양에서 태어난 수필가란다. 함양은 예로부터 빼어난 인물을 많이 배출한 고장으로 특히 일두 정여창을 비롯한 양반고을로 알려져 있는데 우청 정병조 선생이 바로 함양 개평마을 출신이었다. 수많은 인물이 태어난 곳이지만 수필가로 우청(又靑)이 있다는 말에 반갑고 놀라서 우청의 수필집을 구하고자 했는데 51년 전에 나온 책이 지금까지 있을 리 만무 했다. 그런데 참으로 기적적으로 그것을 구했고 우청에 대해, 우청의 수필에 대해 알아보게 되었다. 우청은 1960년대부터 수필을 썼던 것 같다. 1922년생이니 중년의 문학이라고 했던 수필을 적기에 했다고 볼 수 있다.
2. 함양이 낳은 수필가 우청(又靑) 정병조(鄭炳祖)
우청(又靑) 정병조(鄭炳祖)는 1922.10.18. 경남(慶南) 함양군(咸陽郡) 지곡면(池谷面) 개평리(介坪里)에서 출생하여 1997.5.4. 75세로 사망한 번역문학가요 영문학자이며 수필가이다. 중앙중학을 거쳐 1943년 일본 호세이대학(法政大學) 영문과와 1950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영문과를 수료하였으며 1955년 성균관대 조교수, 1959년 서울사대 교수, 1962년 서울대 대학신문 편집국장, 1963년 공보부 차관(∼1964)을 지냈으며, 1965년 숙명여대 교수, 1966년부터 성균관대 영문과 교수로 1988년 정년퇴임 후 1997년까지 명예교수로 있었다. 안양고등학교 교장, 1967년 영어영문학회장, 1970년 성균관대 문과대학장․동 유학대학장 겸임. 1973년 동 박물관장 겸 도서관장, 1983년 심산사상연구회장을 지냈으며, 1984년엔 명예문학박사(한양대)를 받았고, 1986년 성균관대 대학원장(∼1988)으로 정년퇴직을 했으며, 영어영문학회장으로 국제펜한국본부⋅한국미국학회⋅번역가협회 등에도 관여했다.
수필가로서는 1963년 처녀수필집 《休講이 있는 曜日》(동화출판공사)을 냈고, 1988년에 두 번째 수필집 《그래도 아름다운》(1988.범우사)을 냈다.
번역문학가로서 하디의 《운명의 장난》(1955) 《귀향(歸鄕)》(1961) 《테스》(1970)를 번역했으며, 헤밍웨이의 《여자 없는 세계》(1958) 《무기여 잘 있거라》(1964) 《아프리카의 푸른 언덕》(1967)과 스위프트의 《걸리버여행기》(1962), 모옴의 《면도날》(1959), 맨스필드의 《원유회(園遊會)》(1958), 헉슬리의 《천재와 여신(女神)》(1959), 죤 스타인백의 《분노의 포도(葡萄)》(1971), 라이트의 《블랙 보이》(1965), 포스터의 《소설의 양상(樣相)》 등을 번역하여 한국 번역문학에 큰 공헌을 했다.
그 외에도 《영국소설사》 《영한대사전》(공저)과 《영미문학입문》(공저) 등이 있으며,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했다.
3. 우청(又靑) 정병조(鄭炳祖)의 수필집
우청은 두 권의 수필집을 냈다. 《休講이 있는 曜日》(동화출판공사.1963)과 《그래도 아름다운》(범우사.1988)이다. 하지만 《休講이 있는 曜日》은 헌책방을 통해 아주 어렵게라도 구할 수가 있었으나 《그래도 아름다운》은 범우사에 특별히 부탁하여 소장본이라도 있는지까지 알아봤지만 없어서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목차만 복사해 제목만 소개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한데 두 번째 수필집 《그래도 아름다운》에는 첫 수필집에 실었던 작품 15편을 다시 싣고 있었다.
먼저 첫 수필집 《休講이 있는 曜日》(1971.3.30. 同和出版公社. 280쪽. 값650원)에는 총 68편이 실려있다.
머리말과
1. <休講이 있는 曜日>에 13편
작은 행복/유토피아를 찾아서/달리는 인생/사랑의 교훈/樂天 피서법/신문/열대어/鐘/베개/祕苑의 표정/눈이 즐거운 골목/크리스마스 카아드/때로 죽음을 생각하며 등이고,
2 <문득 그리움이>에는 12편
흰 카네이션/少女像/나의 20대/두 눈의 불길/아름답게 살고 가신 분/4⋅19와 나/서울 40년/胡不歸/달라진 고향/방학을 기다리며/여름과 도시/조롱문을 열어 줘도 등,
3 <좀더 빛을>에는 18편
빛/10년/緩行列車/서글픈 이야기/얼굴/가시철망을 둘러 놓고/餘興 餘談/거짓말/감자 고르기/結婚珍景/김장/看板/二重構造/迷信/俗談에 이르기를/딸⋅아내⋅어머니/크리스마스를 맞는 나의 祈禱/이 발길을 어디로 돌려야 등,
4. <못다 이룬 푸른 꿈>엔 4편인데 단편소설 중 장면 묘사 부문으로
敎授 메모/弱肉强食/장날/눈 내리는 밤이,
5. <조약돌>엔 21편인데
雨水/어허/해바라기/남기고 싶은 것들/웃음의 輸入/맥주 한 병, 땅 한 평/모를 일/强者三合/<고맙습니다>와 <미안>/간접살인죄/고사리 손/防音器/僑胞/꽃과 情/아이들 놀이/告發精神/紀念品/自己本位/矛盾(모순)/섯다 판 등이 실려있다.
그런가 하면 《그래도 아름다운》(범우사.1988)도 총 68편인데
머리말-11/
1. <봄을 찾아서>에 7편
봄을 찾아서-16/好也-19/祕苑의 표정-23/정원에 대하여-26/라일락-29/열대어-31/빛-35/,
2. <작은 행복>에 10편
理解와 感謝-40/작은 행복-43/완행열차-48/눈-51/모과-55/포장마차-57/어머니날-59/기쁘게 일하자-61/新入社員에게 주는 글-63/매듭을 지어야-67/과
3. <나이와 함께 오는 생각>에 13편
로빈슨 크루소 이후-72/십년-75/飜譯苦-78/술과 인생-81/나의 직업 자랑-85/방학을 기다리며-88/조롱 문을 열어 줘도-91/停年에 대하여-94/입원-98/허둥거리지 말고 곱게 늙자-101/때로 죽음을 생각하며-104/나이와 함께 오는 생각-108/승부-111/ 등이,
4. <베개>에 5편,
베개-114/신문-118/크리스마스 카드-123/편지-127/至誠-129/이 실렸으며,
5. <잔디와 민주주의>에 9편,
잔디와 민주주의-132/오케스트라-135/異常暖冬-137/악몽-141/保守와 適應-143/車中三態-147/작은 폭력-151/五十笑百-159/歲暮有感-161/이,
6. <이 발길을 어디로>에 9편,
여자는 여자다와야-166/흔들리는 家長의 위치-172/우리 것과 남의 것-179/눈이 즐거운 골목-182/쉽게 돈 버는 데 대하여-189/사는 집에 대하여-192/가시 철망을 돌러놓고-196/뱁새 다리-200/이 발길을 어디로-204/이 실렸고,
7. <그래도 아름다운>에 10편,
카드 섹션-210/도시 아이들-212/人情-214/殘達語-216/마주 앉자-218/음악 공해-220/鐘-222/시골길-225/주례사님-227/그래도 아름다운-230/
8. <유토피아를 찾아서>에 5편으로
反유토피아 小說의 세계-234/유토피아를 찾아서-243/사랑과 순결-252/웃음과 울음-259/극복의 美學-261/이 실려있다.
이 68편 중 15편은 첫 수필집에 실렸던 것을 재수록했다. 그 재수록한 열다섯 작품은
<작은 행복> <유토피아를 찾아서> <열대어> <鐘> <베개> <祕苑의 표정> <눈이 즐거운 골목> <크리스마스 카아드> <때로 죽음을 생각하며> <방학을 기다리며> <조롱 문을 열어 줘도> <빛> <10년> <緩行列車> <가시철망을 둘러놓고> 등이다. ㈜ 《그래도 아름다운》 작품 옆의 숫자는 책의 페이지로 책을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자료적 가치로 넣어둔 것임.
그러니까 《休講이 있는 曜日》 출간은 1971년이니 우청의 나이 49세로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장과 유학대학장을 겸하고 있을 때니 우청 삶의 가장 전성기라 볼 수 있으며, 《그래도 아름다운》은 1988년이니 성균대학교 대학원장을 끝으로 정년을 하면서 명예교수가 된 때 곧 66세 때이니 삶을 정리하는 기분으로 낸 것 같다.
4. 우청(又靑) 정병조(鄭炳祖)의 수필들이 말하는 것
우청은 수필집 《休講이 있는 曜日》 머리말에서
‘수필이란 성숙한 인간의 글이어야 한다. 사람이 설익었으면 좋은 글을 쓰지 못한다.
재치있는 글은 쓸지 모르지만 깊이 있는 글은 쓰지 못한다. 이렇게 생각할 때 내가 수필집을 낸다는 것은 아직 빠르고 외람된 일이다. 그러나 이런 기회에 자기 과거를 정리해 보고 자기가 쓴 글을 다시 읽어 보는 것은 반성을 위해서 좋은 일인 것 같다. 10년이나 20년이 지난 후에도 버리지 않을 글을 쓰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나도 이번 기회에 깨달았다. 그리고 평소에 내가 좋아하는 몇몇 분의 글이 얼마나 값있는 글인가를 새삼스레 느껴보기도 했다.
이것은 나로서는 귀중한 경험이었고 이런 기회를 마련해 주신 동화출판공사 사장 임인규 씨에게 감사한다.(1971)’고 말했다.
우청이 이해하는 수필관은 무엇보다 ‘성숙한 인간의 글이 수필’이기 때문에 사람이 설익었다면 좋은 글도 쓸 수 없다고 했다. 여기서 좋은 글이란 ‘인간의 글’ 성숙한 인간으로서만 쓸 수 있는 글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형식없이 붓가는 대로 쓰는 글이 아닌 최소한 10년, 20년이 지난 후에 봐도 버릴 수 없을만큼 좋은 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우청이 수필을 사랑하고 수필 쓰기를 어렵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작 그가 생각하는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며 쓴 글은 어떤가. 물론 그는 머리말에서 ‘이렇게 생각할 때 내가 수필집을 낸다는 것은 아직 빠르고 외람된 일이다.’라고 하면서 하지만 ‘이런 기회에 자기 과거를 정리해 보고 자기가 쓴 글을 다시 읽어 보는 것은 반성을 위해서 좋은 일인 것 같다.’고 반성적인 차원에서 글을 쓴다고 했다. 그러면서 ‘10년이나 20년이 지난 후에도 버리지 않을 글을 쓰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나도 이번 기회에 깨달았다. 그리고 평소에 내가 좋아하는 몇몇 분의 글이 얼마나 값있는 글인가를 새삼스레 느껴보기도 했다.’면서 글쓰기의 어려움을 피력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나로서는 귀중한 경험이었’다면서 의욕과 열정도 내보인다.
이 지점에서 40여 년을 수필을 써왔다고 하는 나로서 특히 등단 후 10년 이상을 우청(又靑)이 살아계시는 동안 수필과 함께 했으면서도 정작 이런 좋은 수필을 쓰시는 우청 정병조 수필가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죄송스러움과 부끄러움을 함께 느낀다.
우청의 수필은 금아 피천득의 수필과 유사한 느낌을 준다. 작은 것, 사소한 것을 사랑하고 중시하는 정서와 분위기가 많이 닮아있다. 어쩌면 그 시대를 같이 산 분들의 공통적인 감성일 수도 있지만 작품에서 풍기는 분위기나 이미지가 많이 닮아있음에 놀란다. 특히 그의 행복론은 더욱 그렇다. 우청은 1950년 서울대학교대학원 영문과를 졸업했는데 그때는 금아 피천득 선생이 경성대학(서울대학교 전신) 예과 교수로 있었을 때니 금아 선생 수필을 읽었을 수도 있고 그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작은 幸福>이란 수필에서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불행한 일이 너무나 많다’고 전제하면서
모든 사람이 행복을 원하지만 행복은 저 산 너머 먼 곳에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거기가 닿기만 하면 그지없는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행복이란 그렇게 멀리 산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고 손에 닿고,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곳에 있으며 냄새를 맡을 수 있고, 맛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크고 그지없는 즐거움이 아니라 작고 한정된 즐거움인 것이다. 사실은 이런 작은 즐거움을 많이 모은 것이 곧 인생의 행복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곧 행복이란 작고 한정된 즐거움 그런 작은 즐거움들이 모인 것이고 그것이 인생의 행복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청이 생각하는 그런 것에 무엇이 있을까. 그는 먼저 친구를 든다.
마음 맞는 친구가 불시에 찾아오면 어린애처럼 즐겁다. 선심을 쓴 아내가 두부찌개에 따끈한 술이라도 내다 주면 즐거움은 한층 더하다. 정신적으로 아무 부담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잔을 나누노라면 술이 떨어지는 것과 친구가 가려고 일어날 것만이 걱정스럽다. 이런 친구와는 교외나 고궁(古宮)을 거닐어도 좋고, 잔디밭에 뒹굴어도 좋고, 다방에 마주 앉아도 좋다. 친구에게서 얻는 즐거움은 인생의 즐거움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그런 친구에 대한 즐거움을 빼앗긴 지가 이미 오래라고 한탄한다. 또 하나는
즐거움에는 편지나 전화가 오는 반가움을 빼놓을 수 없다. 편지를 가령 비서(秘書) 같은 사람을 시켜 뜯어야 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봉투를 뜯으면서 느끼는 막연한 기대 같은 것을 모를 테니까. 전화는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간 친구가, 자는 사람을 깨워서 혀 꼬부라진 주정을 늘어놓아도 마냥 즐겁기만 해서 껄껄 웃음이 나올 뿐이다.
편지와 전화,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반갑기는 둘이 같다는 것이다. 편지는 편지의 봉투를 뜯으면서 느끼는 기대감을 느껴보지 않으면 그 기분을 모르는 것이고, 같이 있다가 헤어진 술 취한 친구가 혀 꼬부라진 소리로 전화로 주정을 해와도 즐겁다는 그의 행복론은 얼마나 정겨운가. 거기에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는 자유까지를 넣고 있다.
공산치하(共産治下)에 살아 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아무 것도 안 하는 자유마저 빼앗기는 고통이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아무의 눈에도 거슬리지 않고 살겠다는 것도 못하게 하는 데는 질색이었다. 그때 이래로 나는 아무 것도 안 할 수 있는 자유란 정말 귀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자유를 다시 얻고 얼마 동안 몸이 저리도록 그것을 느꼈고 즐겼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그럴 뿐 느낌은 그다지 절실한 것은 아니다.
자유 중에서도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는 자유의 소중함은 그런 세상을 살아 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자유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도 귀하지만 하기 싫은 것 안 하고, 안 하고 싶은 것을 안 하는 자유 또한 귀한 것 아닌가. 하고 싶지 않고 하기 싫은 것을 해야만 했던 공산치하의 삶은 죽기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건 자유를 빼앗긴 것이었기에 우청은 하기 싫은 것을 안 할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행복인가를 말하고 있다.
그는 어머니에 대해서는 그리움과 죄송함을 함께 가지고 있다. 수필 <흰 카아네이션>에서
나는 어머니 날이 돌아와도 카아네이션을 꽂아 드릴 어머니가 안 계시다. 재작년 여름에 돌아가셨다. 생존해 계실 때도 카아네이션을 꽂아 드리기는커녕 항상 몸이 허약해서 걱정을 끼쳐 드렸을 뿐만 아니라 지지리 못난이처럼 일제 말기에는 학병으로 끌려 나가고 6·25 때는 이북으로 끌려가는가 하면, 혁명 직후에는 엉뚱하게 파면을 당하고 구속까지 되어서 얼마나 심려를 끼쳐 드렸는지 모르나. 그래도 자식이라고 핏줄이 켕겼던지 돌아가시기 1년 전쯤 해서는 따로 계시는 어머니를 꼭 내가 뫼시고 싶어서 싫다고 하시는 분을 억지로 모셔다가 1년 남짓 조석을 받든 것을 조그만 위안으로 삼고 있다.
어머니는 딸과 아내와 어머니를 다 합쳐놓은 존재로 봤다. 귀여움, 사랑스러움, 믿어움, 의지함 등.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상(女性像)은 아기를 안은 어머니의 모습이다’(<딸 아내 어머니> 중)라고 했다. 하지만 어려서도 몸이 약해서 걱정만 끼쳐드렸고, 일제 때는 학병으로 끌려갔는가 하면, 6.25땐 이북으로 끌려가고, 혁명 직후엔 파면에다 구속까지 당했다. 그렇게 걱정만 안겨드렸는데 그 어머니가 위암 진단을 받게 되었고 그 때 하필 실직을 했을 때라 제대로 봉양도 못하는 죄스러움에 진단 결과조차 말씀도 못 드렸단다. 그 어머니가 아들이 직업을 다시 얻는 것도 못 보시고 가셨으니 그 안타까움과 사무침이 얼마나 클 것인가. 어머니날이 돌아오면 꽃을 달아드릴 어머니가 계시지 않음을 안타까워하는 수필 <흰 카아네이션>은 그렇게 우리에게 읽힌다.
이처럼 우청의 수필은 단순하면서도 감성에 바로 호소하는 수필이어서 가슴으로 와 닿고 그것이 공감 내지 감동의 추를 흔들어 주어 읽는 맛의 감동까지 주고 있다.
수필 <딸⋅아내⋅어머니>는 상당히 긴 수필인데 딸과 아내와 어머니를 각각으로 다룬다.
① 딸은 머지않아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된다. 이들이 더욱 굳건하고 슬기로와진다면 가정이나 사회는 한결 밝아지고 삶이 더욱 즐거워질 것이다.
② 모자(母子)의 관계는 핏줄의 관계이고 끊을래야 끓을 수 없지만 부부의 관계는 남남 끼리가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이며 사랑이 없어지면 다시 남남 끼리가 되든지, 그보다도 못한 원수의 관계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랑은 핏줄과는 달라서 노력 없이는 오래도록 계속되지 않기 때문에 어머니의 입장보다도 아내의 입장에 더욱 충실하고 더욱 노력해야 함은 스스로 명백하다 할 것이다.
③ 부부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상호 관계 (相互關係)이기 때문에 이 근본이 완전히 무시당했을 때는 그 관계는 해소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상 <딸⋅아내⋅어머니> 중)
이상에서 보듯 우청의 수필은 지극히 감성적인 것이 있는가 하면 이처럼 이지적인 것도 있다. 그것은 그의 교육적 의무감이나 가르치는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느껴지는 것들이 수필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핏줄의 관계인 부모 자식 관계, 혼인으로 맺어진 상호 부부관계, 딸은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기에 슬기로운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우청, 그러나 어떤 관계도 지나치면 안 된다는 점도 강조한다.
나는 오히려 아직도 자식에 대한 사랑에만 얽메어 한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존재 가치를 무시하고 살다가 마는 어머니들이 우리 사회에는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또 이러한 어머니의 사랑이 반드시 아들을 위해서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만은 아니고 때로는 아들의 독립심을 저해하고 생활력을 말살해서 두고두고 어버이의 짐이 되는 예를 허다하게 본다. 이런 때는 어머니의 사랑은 그 보답을 받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노예와 같은 멍에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우청은 자신의 꿈 이야기도 한다. 우청의 꿈은 창작을 하는 문학인이었는데 그렇지 못한 자신에 대해 안타까움을 말한다. 수필 <나의 20대>에서
문학을 하는 가장 영광스러운 길인 창작을 하지 못하고, 남의 문학을 가르친다고 교단에 서야 하고, 더구나 남의 문학을 번역해서 용돈 푼을 얻어 쓰는 자신을 돌아볼 때 꿈이 꿈으로 끝난 적막감을 느낄 뿐이다. 언제부터 어떻게 해서 이렇게 옆길을 걷게 되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아마 창작이 각고(刻苦)의 길이기에 게으른 내가 좀 더 쉬운 길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들어가서 그저 타성(隋性)이 등을 밀어 한 해, 두 해 지나는 사이에 나이를 먹고, 이제는 여간한 배짱 가지고는 내가 쓴 소설이라고 누구 앞에 내 놓을 수 없게 되었나보다.
그러고 보면 우청은 소설가이길 바랐던 것 같다. 사실 우청은 소설을 썼던 것 같다. 우청의 소설을 찾진 못했지만 이미 제2의 창작이라는 수많은 번역을 통해 그의 능력은 이미 발휘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수필집 《休講이 있는 曜日》의 제4부. <못다 이룬 푸른 꿈> 4편은 머리말에서 ‘단편소설로 발표되었던 것 중에서 한 장면의 묘사를 골라본 것이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미 최소 소설 4편 이상을 발표했는데도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못다 이룬 푸른 꿈’이라고 아쉬움을 말한 것 같다. 하지만 이 네 편을 읽어 보니 이것만으로도 소설이 될만 했다.
敎授 메모/弱肉强食/장날/눈 내리는 밤이 등 네 편인데 <교수 메모>는 자기 얘기 같다.
우청의 수필에 <아름답게 살고 가신 분>이란 제목의 수필이 있다. 그런 분이 어떤 분일까 궁금했다. 그런데 ‘이양하 선생님 영전에’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이양하 선생님은 1904년에 태어나 1963년에 돌아가셨다. 아마 우청이 서울대학교에서 공부할 때 교수와 제자로 만났던 것 같다. 그 선생님을 아름답게 살고 가신 분이라고 한 것으로 봐서 얼마나 흠모하고 사랑했던 선생님이었는가가 짐작된다. 회복할 수 없는 상황에 계시면서도 ‘정군은 요즘 건강이 어떻소?’ 하고 허약한 제자를 먼저 걱정 하셨다는 내용을 읽으며 ‘아름답게’라고 말한 저의를 알 것 같다. 수필은 이렇게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로 가슴과 가슴을 따뜻하게 이어준다. 이게 수필의 힘이다.
우청의 수필 속엔 자신의 부끄러움을 솔직하게 펼쳐낸 <4.19와 나> 같은 수필도 있고, ‘베갯모에 수를 놓아 꿈을 그리고 낭만을 엮는 아름다운 풍속이 스러져 가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베개)는 내용도 있고, ‘아름다운 통제’(鐘)를 말하기도 하고, ‘그대로 두어서 더욱 보배로운 것일랑 제발 다치지 말았으면 좋겠다.’(祕苑의 表情)고도 한다.
우청이 ‘우리 집은 지금은 3백여 년이 되었다.’(달라진 故鄕) 고 했는데 알고 보니 지금 경상남도 문화재 제361호로 지정되어있는 1880년에 지었다는 하동 정씨 고가라 해서 놀랐다. 이처럼 수필은 사실을 통해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고 역사적 기록으로도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최원현 nulsaem@daum.net
《한국수필》로 수필,《조선문학》으로 문학평론 등단.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사)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월간 한국수필 발행인 겸 편집인. 사)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사)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조연현문학상·신곡문학상대상·펜문학상 수상,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그냥》《누름돌》등 18권, 문학평론집《창작과 비평의 수필쓰기》등 2권, 중학교《국어1》《도덕2》등에 수필 작품이, 고등학교 《국어1》《문학 상》등에 수필 이론이 실려 있다.
우청 정병조의 수필들>
작은 幸福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불행한 일이 너무나 많다. 생일에 잘 먹으려고 사흘을 굶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재화를 쌓아 큰 영화를 누리려고 평생 한 푼 두 푼 모으다가만 죽은 재산을 그 아들이나 손자가 주색잡기로 탕진하는 예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공자는 『조문도(朝聞道)면 석사가의(夕死可矣)』라 하였지만 길을 닦고 길을 아는 일이 뼈를 깎는 고통일진대 단 몇 시간의 완성을 위해서 그렇게 피나는 노력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 완성에는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느낄 만한 큰 즐거움이 있으리라.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 그동안에 희생된 모든 작은 즐거움이 너무나 아쉬울 것만 같다. 길을 얻고 진리를 탐구하고 지식을 넓히고 인격을 완성함에 있어서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장수(長壽)를 누리고 헛된 부귀를 쌓기 위해서랴.
모든 사람이 행복을 원하지만 행복은 저 산 너머 먼 곳에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거기가 닿기만 하면 그지없는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행복이란 그렇게 멀리 산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고 손에 닿고,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곳에 있으며 냄새를 맡을 수 있고, 맛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크고 그지없는 즐거움이 아니라 작고 한정된 즐거움인 것이다. 사실은 이런 작은 즐거움을 많이 모은 것이 곧 인생의 행복이라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백여덟 가지나 된다는 사람의 번뇌(煩惱)를 모두 욕망(欲望)의 탓으로 돌리고 이 모든 욕망을 벗어나는 것이 해탈(解脫)의 길이요, 법열(法悅), 곧 큰 즐거움을 얻는 길이라 한다. 그러나 법열의 경지는 멀리 범부((凡夫)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다. 범부는 오히려 건전한 욕망을 가져야만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가령 식욕을 잃은 사람은 음식을 맛있게 먹는 작은 즐거움 하나를 잃게 되는 것이다.
인생을 흔히 고해(苦海)라고 하지만 작은 즐거움을 즐기려는 사람에게는 인생은 실로 아낌없는 향연을 베풀어 준다. 어떤 사람은 인생의 가장 즐거운 순간 셋을 손꼽아 보이지만 구태여 셋으로 인색할 필요가 어디 있으랴. 『가장』이라는 제한을 두는 것은 즐거움을 좁히는 부질 없는 짓이다. 사실 작은 즐거움은 그것을 느끼는 마음가짐이나 그때그때의 미묘한 감정의 움직임에 따라 어느 것이 더하고 어느 것이 덜한 분간이 없는 것이다. 그저 즐거우면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마음 맞는 친구가 불시에 찾아오면 어린애처럼 즐겁다. 선심을 쓴 아내가 두부찌개에 따끈한 술이라도 내다 주면 즐거움은 한층 더하다. 정신적으로 아무 부담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잔을 나누노라면 술이 떨어지는 것과 친구가 가려고 일어날 것만이 걱정스럽다. 이런 친구와는 교외나 고궁(古宮)을 거닐어도 좋고, 잔디밭에 뒹굴어도 좋고, 다방에 마주 앉아도 좋다. 친구에게서 얻는 즐거움은 인생의 즐거움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베이컨은 『친구는 즐거움을 배가(倍加)하고 슬픔을 반감(半減)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친구가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즐거움은 더할 것이다. 그러나 내 이 즐거움을 빼앗기운 지는 이미 오래구나.
즐거움에는 편지나 전화가 오는 반가움을 빼놓을 수 없다. 편지를 가령 비서(秘書) 같은 사람을 시켜 뜯어야 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봉투를 뜯으면서 느끼는 막연한 기대 같은 것을 모를 테니까. 전화는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간 친구가 자는 사람을 깨워서 혀 꼬부라진 주정을 늘어놓아도 마냥 즐겁기만 해서 껄껄 웃음이 나올 뿐이다.
대문을 벼락치듯 흔들고 『엄마!』를 요란스럽게 부르며 들어선 막내놈이 『수』를 받은 시험지를 앞에 내미는 것도 즐거움이요, 『수』를 약속하고 학교에 갔던 놈이 돌아와서도 시치미를 떼고 나가 노는 것이 수상쩍어 책가방을 뒤져 보면 교과서 사이에서 『미』를 맞은 시험지가 나오는 것 또한 미소를 자아내는 즐거움이다.
만원 버스 안에서 초등학교 어린이의 고사리 같은 손을 잡아주는 것 또한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길가에서 어떤 군인이 인사를 하며 『선생님 제자입니다』 해서 그 명찰을 읽어 보면 어느 해의 출석부이든가에 그런 이름이 있었던 것 같은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 일 또한 즐거움이다.
양장이 몸에 맞고 용모가 단정한 여인을 아름다운 꽃을 바라보듯 바라보는 것 또한 죄 없는 눈의 즐거움이다.
하루아침 창문을 열면 선듯 가슴에 안기는 첫눈 내린 아침, 남의 집 처마 밑에서 피하는 소낙비, 이슬을 머금고 피어난 장미 송이, 온 뜰에 풍기는 라일락의 화사한 향기, 입술에 간지러운 달콤한 바람, 포도(鋪道) 위에 뒹구는 낙엽, 새벽인 줄 알고 문을 열어 보는 교교(皎皎)한 달밤, 때로 새벽 뜰에 와 앉곤 하는 이름 모를 새, 가을 벌레 우는 소리, 부서지는 파도, 드높은 포플라, 움트는 새싹, 강변의 저녁놀, 따사로운 양지쪽, 아득한 별들, 잎과 풀과 열매와 꽃, 산과 들과 시내와…… 대자연의 향연은 이렇듯 풍성하다. 자연이 주는 즐거움은 때와 곳을 가리지 아니하고 언제나 바로 거기 있다.
어찌 사람과 자연이 주는 즐거움뿐이랴. 마음이 한가로우면 넉넉히 혼자 즐길 수 있다. 독서와 사색은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는 혼자의 왕국이다. 길을 걷거나 전차를 타고 때로는 혼자를 즐길 수 있다. 게으름을 즐기는 것 또한 빼지 못할 혼자를 즐기는 길이다. 혼자 있는 것이 괴롭지 않다는 사람은 혼자를 즐기는 길을 터득한 사람이요, 자기만의 왕국을 가진 사람이다.
즐거움이란, 따라서 행복이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다. 그래서 이 상대성을 뚜렷하게 해보면 즐거움이 될 것 같지 않은 것에서도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는 법이다. 나는 학생 시절에 야행군(夜行軍)이란 것을 해본 일이 있다. 군장(軍裝)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 다리는 아프고 배는 고프고, 얼굴에는 먼지와 소금이 바삭바삭 만져졌으나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운 것은 잠이 못 견디게 오는 일이었다. 그때 지나가는 길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곳에 불이 비치는 네모진 창문이 보였다. 나는 문득 그 불빛이 행복의 상징이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 방안에 저녁을 굶은 부부가 내일을 살아날 궁리에 밤 깊은 줄 모르고 수심에 잠겨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둠 속에 비치는 아득한 불빛, 그 안에는 편한 자세와 잠이 있을 테지 싶었다. 그때부터 나는 불 비치는 창문만 보면 곧 행복을 연상하는 묘한 버릇이 생겼다. 그리고 우리 집 앞길을 지나가는 사람이 내 방 창문을 보고 행복을 연상해줄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공산치하(共産治下)에 살아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아무 것도 안 하는 자유마저 빼앗기는 고통이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아무의 눈에도 거슬리지 않고 살겠다는 것도 못하게 하는 데는 질색이었다. 그때 이래로 나는 아무 것도 안 할 수 있는 자유란 정말 귀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자유를 다시 얻고 얼마 동안 몸이 저리도록 그것을 느꼈고 즐겼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그럴 뿐 느낌은 그다지 절실한 것은 아니다.
가령 나는 이발하고 난 뒤에 개운함은 좋아하지만, 하는 동안은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 고통의 원인은 아무래도 제 몸을 마음대로 못 놀리는 데 있는 것 같다. 앉아 있고 싶은 데도 누워야 하고, 가려운 데를 긁지도 못하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싶은데 바른쪽으로 돌리고 있어야 하니 말이다. 그래서 이발이 끝나면 팔을 휘두르고 고개를 몇 번 좌우로 돌려 보면서 해방감(解放感)을 즐긴다.
그러니 고통스러웠던 모든 경험은 현재를 즐기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란 흔히 너무 교훈적인 뜻으로만 쓰이고 현재고(現在苦)를 무한정 강요하는 데만 쓰이지만 『단맛을 즐기기 위하여는 쓴맛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되느니라』고 나대로는 생각한다.
이제부터 허깨비 같은 큰 행복을 좇아 허둥거리는 어리석음은 버리고 언제나 어디에서나 있는 작은 즐거움을 조용히 맛보며 살련다. 첫눈이 내리려는지 날도 음산하게 춥고 하니 너비 아비를 맛있게 굽는 선술집에 대포라도 하러 갈거나.
흰 카네이션
우리나라에서도 해마다 어머니 날이 돌아오면 가슴에 붉은 카아네이션을 자랑스럽게 꽂고 다니는 어머니들이 있어서 어머니의 은혜를 아는 아들딸들의 착한 마음씨를 엿볼 수 있다.
나는 학생 시절에 읽은 짧은 이야기가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오늘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그 이야기는 대충 다음과 같은 줄거리였다. 어느 대학 교수 집에 한 중년 부인이 찾아왔다. 자기 아들이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은 아무개인데 이번에 전사했다는 통지를 받았으며 자식을 대신해서 평소에 애호를 받고 신세를 진 선생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러 왔노라고 그 몸가짐이나 말투나 음성에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말했다. 교수는 여러 가지로 위로의 말을 하면서도 그 부인의 예의와 의연한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참으로 훌륭한 어머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부인이 자리를 뜨고 난 후에 교수는 마주 앉았던 탁자 밑에서 손수건 하나를 발견했다. 그 부인의 것, 마음의 아픔을 참느라고 비비고 쥐어짜서 많이 구겨졌고 손의 땀이 촉촉이 밴 손수건이었다. 그렇게 예의 바르던 부인이었으나 손수건을 떨어뜨린 것을 모를 만큼 마음은 어지러웠던 것이고 갈기갈기 찢기는 듯 가슴 아팠던 것이다. 이 손수건을 본 교수는 거기서 어머니의 참 모습을 보았다는 이야기다. 간단한 이야기지만 어머니의 사랑을 참다웁게 느낄 수 있어서 지금도 기회 있을 때마다 생각나곤 한다.
우리는 옛날부터 어버이께 효도하는 것을 으뜸가는 도덕으로 알았고 지금도 그런 전통이 커다란 요소로 되어 있다. 그러나 자식이 어버이를 위하는 마음은 어버이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 멀리 미치지 못한다. 그 사랑이란 도덕이 아니고 본능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머니 날이 돌아와도 카아네이션을 꽂아 드릴 어머니가 안 계시다. 재작년 여름에 돌아가셨다. 생존해 계실 때도 카아네이션을 꽂아 드리기는커녕 항상 몸이 허약해서 걱정을 끼쳐 드렸을 뿐만 아니라 지지리 못난이처럼 일제 말기에는 학병으로 끌려 나가고 6·25 때는 이북으로 끌려가는가 하면, 혁명 직후에는 엉뚱하게 파면을 당하고 구속까지 되어서 얼마나 심려를 끼쳐 드렸는지 모르나. 그래도 자식이라고 핏줄이 켕겼던지 돌아가시기 1년 전쯤 해서는 따로 계시는 어머니를 꼭 내가 뫼시고 싶어서 싫다고 하시는 분을 억지로 모셔다가 1년 남짓 조석을 받든 것을 조그만 위안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하늘은 내게 시간의 여유를 주지 않아서 어머니는 곧 위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여러 달을 병석에서 신음하셨다. 진단 결과를 말씀드릴 수도 없고 나날이 악화되어 가는 증세를 지켜보면서 『자식이 봉양코자 하나 어버이는 기다리지 아니한다』라는 성현의 말씀이 뼈에 사무치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나는 또 실직을 했고 돌아가시도록 직업을 얻지 못했으니 병석에서도 늘 그것을 염려하셨다. 얼마 남지 않은 분 앞에서 살림이 궁색해지는 것을 보여 드리지 않기 위해서 몹시 안간힘을 썼으나 그만 눈치를 못 채실 분이 아니었다. 운신하시기도 어려울 때 생신이 돌아왔는데 꼭 절에 가셔서 생신을 쉬시겠다고 고집을 굽히지 않으셨다. 마지막으로 부처님께 빌어보겠다고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웠지만 여러 일가친척이 모여서 자식에게 부담을 지울까 해서 그러시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돌아가시던 전날은 장 속 어디에 돈이 얼마가 있다고 내게 알려 주셨다. 용돈 쓰시라고 한 달에 얼마만큼씩 드린 것을 모아 두신 돈이었다. 그 돈으로 당장 급한 몇 가지 용처를 메꿀 수 있었다.
금년에도 어머니 날은 돌아오건만 꽃을 달아 드릴 어머니가 안 계시구나.
나의 20대
기습 작전으로 서전(緖戰)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이 기고만장해서 날뛰다가 금방 실력의 바닥이 드러나고 패전을 거듭하면서 맥을 못 추고 밀려들어 오는 판국이었다. 아직 공습은 없었지만 저녁마다 방공 연습이었고 날이 갈수록 물자는 결핍해서 통제와 배급으로 명맥을 이어 나갔다. 인심은 흉흉하고 거리는 살풍경했다. 학교에서는 군사 훈련이 판을 치고 배속 장교의 콧대가 이만저만 높은 것이 아니었고 군국주의적인 사고방식이 악마처럼 학생들을 짓눌러 숨도 못 쉬게 했다.
신경이 여간 둔한 사람이 아니면 이런 분위기를 외면하고 공부에 열중할 수 없었다.
아무리 청춘이 꿈을 먹고 산다지만 꿈이 아름답기에는 현실이 너무나 살벌했다. 방공 연습으로 커어튼을 겹겹이 내린 방에서 검은 보자기 밑으로 손바닥만큼 비치는 불빛 아래 그래도 문학책을 펴 놓고 읽던 것은 보람찬 앞날의 꿈을 위한 양식이 아니라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가슴과 미칠 것만 같은 신경을 조금이라도 어루만져 줄까 함이었다.
군사 훈련이 없는 날은 학교에도 가지 않고 친구와 어울려 지향도 없이 무사시노(武藏野) 들판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풀밭에 누워 하늘의 흰 구름에 넋이 팔렸다가 멀리서 들려오는 아름다운 합창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느 여자 대학의 시계탑에 아롱진 스테인드글라스가 오후의 햇살을 받고 어느 동화에 나오는 궁전처럼 찬란했다. 가슴을 파고드는 그리움은 언제나처럼 텅빈 허전함을 안겨 주고 가 버렸다. 나는 또 벌떡 일어나서 들길을 걷는 것이었다.
어느 날 당시에는 이름을 날리던 한국 무희(舞姫)의 무용회 구경을 갔다. 첫날이라 초대객이 많았던지 로비에서 혼다(本多)라는 과 주임교수를 만났다. 그가 끝까지 전쟁에 협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블랙 리스트에 올라 할 수 없이 산에 들어가서 감자밭을 가꿔 연명한 줄은 최근에야 알았지만 그때도 그는 예사롭게 반전적(反戰的)인 말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당시는 영어 공부를 하는 것을 마치 간첩 노릇이라도 하는 것처럼 생각했고 나는 우리 학년에 세 사람밖에 없는 영문과생의 하나였고 내가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소설을 써 가지고 오면 읽어 주겠다기에 나는 우리 말로 써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그는 『오오 참, 그렇군!』 하고는 쓸쓸히 웃었다. 그는 로비 구석에 웅크리고 앉았기도 하고 누구를 만나 이야기도 하는 면면을 저것은 누구 저이는 아무개하고 유명한 문인들의 이름을 대면서 내게 알려 주었다. 나는 마치 넋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문학이, 내가 모든 어려움을 무릅쓰고 정열을 쏟아 보려는 문학이, 거기, 바로 보이는 곳에 옹기종기 서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초조와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나에게도 한 가닥 꿈이 있었다면 나도 소설을 써보겠다는 꿈이었다. 소설을 써서 일가(一家)를 이루고 나이 50~60이 되면 저렇게 위풍이 있고, 아무렇게 차려도 어딘가 감춰진 멋이 있고, 바닥 모를 깊이가 도사린 풍모가 되어 보리라 했다. 나는 그들의 문학을 생각해 보았다. 내가 읽은 구미(歐美)와 고전(古典)들에 비하면 그다지 높은 봉우리는 아닌 것 같았다. 나도 노력하면 그 정도의 소설은 얼마든지 쓸 수 있다고 몇 번이나 자신에게 다짐해 보았다. 그러고는 또 한 번 선망(羨望)의 눈으로 그들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 내 나이는 벌써 그때 그들의 나이를 넘어다보면서 문학을 하는 가장 영광스러운 길인 창작을 하지 못하고, 남의 문학을 가르친다고 교단에 서야 하고, 더구나 남의 문학을 번역해서 용돈 푼을 얻어 쓰는 자신을 돌아볼 때 꿈이 꿈으로 끝난 적막감을 느낄 뿐이다. 언제부터 어떻게 해서 이렇게 옆길을 걷게 되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아마 창작이 각고(刻苦)의 길이기에 게으른 내가 좀 더 쉬운 길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들어가서 그저 타성(隋性)이 등을 밀어 한 해, 두 해 지나는 사이에 나이를 먹고, 이제는 여간한 배짱 가지고는 내가 쓴 소설이라고 누구 앞에 내놓을 수 없게 되었나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동대문 시장에서 양말 장사를 한다든지, 집집이 찾아다니면서 전기세를 걷는 것이 내 직업이 아니고, 그래도 책을 대하고 붓을 드는 것만 해도 다행인지 모르겠다. 무사시노가 아닌 서울 거리를 거닐면서 나는 가끔 이렇게도 생각해 본다.
딸·아내·어머니
가장 아름다운 여성상(女性像)은 아기를 안은 어머니의 모습이다. 스스로의 괴로움과 아픔을 통해서 한 생명을 잉태하고 해산하며, 스스로의 즐거움과 만족을 희생해서 그 생명을 기르고 가꾸는 모습은 비단 인간 세계에서만 있는 현상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 숭고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어머니의 사랑이, 어디까지나 희생을 바탕으로 하는 현상이 유독 동양 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서구 사회에서도 모성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젖먹이를 딴 방에 재우고 부부가 동침하며 아이에게 장난감을 안기고 문을 걸어 잠그고 부부가 외출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부부가 아직 흔치 않다. 오히려 아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 논밭을 팔고 굶주리는 부모가 있고, 청상과부가 난봉군 양자의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평생 삯바느질을 하는 일도 있고, 아들에게는 쌀밥에 고기반찬을 해 주고 자기는 누룽지를 깨무는 어머니가 있다. 아니 이것이 오히려 상식화된 어머니의 모습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여자를 업수이 여기던 유교 사상이 가장 클 것이다.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는 각오 밑에 친정을 나온 여자가 시집에서는 노복(奴僕)과 한가지로 시동생 시누이를, 도련님 작은 아씨로 받들어야 하는 마당에서 어떻게 자기(自己)라는 것을 지키며 살 수 있겠는가? 그들에게 강요되는 유일한 미덕은 인종(忍從)이었다. 이것을 더욱 철저하게 해내는 여자가 열녀 효부로 칭송을 받았고 좋은 어머니라고 하였다.
지금은 이러한 옛 도덕률이 꼭 그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일부 도학자들은 이것을 미풍양속(美風良俗)의 타락이라고 한탄할지 모르지만 시대의 변천에 따라 도덕의 기준도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오히려 아직도 자식에 대한 사랑에만 얽메어 한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존재 가치를 무시하고 살다가 마는 어머니들이 우리 사회에는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또 이러한 어머니의 사랑이 반드시 아들을 위해서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만은 아니고 때로는 아들의 독립심을 저해하고 생활력을 말살해서 두고두고 어버이의 짐이 되는 예를 허다하게 본다. 이런 때는 어머니의 사랑은 그 보답을 받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노예와 같은 멍에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요즘 시대를 보면 어머니 사랑이 비뚤어진 방향으로 줄달음을 쳐서 큰 사회 문제로 등장하고 있는 현상이 있다. 귀여운 자기 아이가 반드시 일류 학교에서, 반드시 일등을 하고, 반드시 일류교에 합격을 하고, 반드시 미국 유학을 하고, 반드시 입신출세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아니 생각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이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한창 성장기에 있는 아동에게 하루 17,8시간의 입시 공부를 강요하고 방학과 휴일을 모조리 몰수해 버릴 뿐 아니라, 아이들에게 무서운 강박 관념과 각박한 경쟁의식을 심어서 허다한 사회 문제점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비록 어머니의 맹목적 사랑 내지 허영에만 그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회 구조와 교육 제도의 탓도 있겠으나, 모든 어머니가 자기 가정의 경제력이나 자기 아이의 소질과 능력도 아랑곳없이 집요한 혈투(血鬪)를 전개해 나가는 것을 보면 먼저 말한 너무나 동양적인 사고방식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는 것 같다.
또 요새 조금씩 표면화되어 가는 문제는 다분히 봉건적이고 대가족 제도적인 인습에서 탈피하지 못한 어머니와 현대적인 사고방식으로 이에 반항하는 자녀 사이에 일어나는 알력이다. 가령 부모는 자녀를 양육했으니까 자녀는 부모를 봉양(奉養)해야 한다는, 지금까지는 당연하던 윤리가 과연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인지 의심스럽다. 적어도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자녀에게 털어 바치고 그 반대급부로 여생을 살아보겠다는 생각은 앞으로 수정을 면치 못할 것 같다. 누가 우리나라에 와 보고 노인들이 위의(威儀)를 갖추고 살아가는 모습이 특별히 눈에 띈다고 했는데 사실 외국에서는 공원의 벤치나 아파트의 베란다에서 초라하게 일광욕이나 즐기는 것이 곧 노인의 모습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벌써 시부모와의 한집에 살기를 좋아하는 며느리가 없고 보면 조만간 외국을 닮아 갈 것 같다. 인생의 낙조(落照)를 너무 쓸쓸하게 지내지 않으려면 자녀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하겠고, 좀 더 자기 개인의 가치를 중요시해야 할 것이다.
여자의 생애의 많은 부분은 한 지아비의 아내로서의 생애이며 남편과 아내가 이룩하는 가정은 사회의 구성단위가 될 뿐 아니라 인생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행복을 꾸미고 쌓아가는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물론 사회봉사나 진리 탐구에 일생을 솔곳이 바치고 독신으로 사는 여성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여성은 아내가 될 운명에 있고 또 아내가 됨으로써 행복하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남의 아내가 되는 것 만큼 어려운 일은 없을 것 같다. 부부라는 것은 예로부터 일심동체(一心同體)라고 하지만 사실은 남남끼리인 것이다. 대개의 경우가 생면부지인 남남끼리가 만나서 가장 가까이 살고, 가장 오래 살아야 하며, 더구나 남녀의 모든 조건이 다르니 이보다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이고, 이런 결합이 시종 화기에 넘친다는 것이 오히려 기적일지도 모른다. 아내가 남편에게 바라는 것도 많을 것이고 남편이 아내에게 바라는 것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바람은 만족스럽도록 충족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따지고 보면 이런 불만을 딛고 사는 것이 부부다. 이런 불만을 참지 못하고 헤어지는 부부도 있고, 체념과 무관심 속에서 편의(便宜)만을 위한 공동생활을 계속하는 부부도 있고, 서로의 바람과 불만을 애써 이해하고 이것을 조정하고 조화시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부부도 있을 것이다.
쌍방 또는 일방이 이런 불만에 부딪혔을 때 좀 더 나은 만족을 찾아서 헤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실 외국에서는 이런 생각으로 헤어지는 부부가 허다하고 그들 역시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면서 『하나님이 정하신 바를 사람이 바꾸지 못할지니라』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 말을 어기고 사람의 힘으로 바꿔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그만큼 현실에 항거할 줄 알고 좀 더 나은 생활에 대한 의욕이 그만큼 강한 것일까? 그러나 현실의 불만에 항거하고 좀 더 만족스러운 생활을 지향하는 노력은 먼저 말한 세 번째 부부의 경우를 이르는 것이고 첫 번째 부부는 오히려 이러한 노력을 포기하고 안이한 탈출구를 택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부부생활이란 처음부터 불만 위에 성립되는 것이고 보면 그 불만을 극복하는 노력을 포기하는 부부가 다른 결합을 얻었다고 해서 곧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쌍방의 협력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이지 결코 일방적인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 형편을 보면 이러한 노력이 아내의 일방적인 노력이고, 아내에게만 강요되는 노력이고, 따라서 불균형을 드러내고 있는 부부관계가 허다한 것 같다. 평생을 타관으로 돌아다니고, 소실을 두고, 아내를 돌보지 않는 남편이라도 불견이부(不見二夫)를 지켜 고스란히 늙은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늙고 꼬부라져 갈 곳이 없게 된 남편이 돌아오면 이를 맞아서 그동안에 애써 모은 전답으로 의식을 받드는 아내도 얼마든지 있었다. 이런 것이 먼저 말한 노력의 일방통행이겠는데, 나는 부부관계라는 것이 이렇게까지 해서 지켜져야 하는 신성불가침의 관계라고는 보지 않는다. 부부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상호 관계(相互關係)이기 때문에 이 근본이 완전히 무시 당했을 때는 그 관계는 해소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체념과 무관심으로 현상 유지를 끌고 나가는 부부도 표면상 풍파는 없을지 모르지만 삭막하기 짝이 없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가장 불행한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사랑의 비극은 죽음이나 이별에 있는 것이 아니고 무관심에 있다고 하거니와, 남편은 아내를 밥도 지어 주고 빨래도 해주고 잠자리도 같이 해 주면서 먹이고 입히면 되는 편리한 존재로 생각하고, 아내는 남편을 심한 불평만 하지 않으면 의식이 보장되고 자기에게 귀찮은 요구를 내걸지 않는 무난한 사람으로 여기고 일생을 살아나간다면, 누가 말한 것처럼 아내는 식모요, 침모요, 창부에 불과하고, 남편은 위선자이고, 사기한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대개의 부부는 결혼 초기에는 먼저 말한 상호 이해와 불만 극복을 위한 노력을 하지만 결혼생활이 오랠수록 무감각해지고 무성의해져서 체념의 세계로 굴러떨어지기 쉬운 것이다. 더구나 아내 편에서는 아이를 하나둘 갖게 되면 이런 노력을 포기하는 좋은 구실을 마련한 셈이 된다. 그래서 차차 뻔뻔스러워지고 게을러져서 상호 이해를 위한 노력은 고사하고 자기 개성의 도야를 위한 노력도 내버리기가 일쑤다. 마치 어머니로서의 입장이 생겼으니 아내로서의 입장은 졸업한 것처럼 안심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은 남편과 가장 가까이 그리고 가장 오래 사는 법이고 그러기에 아내로서의 입장이 언제나 바탕이 되어야 한다. 모자(母子)의 관계는 핏줄의 관계이고 끊을래야 끓을 수 없지만 부부의 관계는 남남끼리가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이며 사랑이 없어지면 다시 남남끼리가 되든지, 그보다도 못한 원수의 관계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랑은 핏줄과는 달라서 노력 없이는 오래도록 계속되지 않기 때문에 어머니의 입장보다도 아내의 입장에 더욱 충실하고 더욱 노력해야 함은 스스로 명백하다 할 것이다.
얼마 전에 여대생들과 좌담회를 가진 일이 있는데 여기서 여성의 멋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서 비롯해서 현대 여대생 기질을 꽤 광범위하게 해부했고 나아가서는 한국적 여성의 이상적인 인간상까지도 생각해 보았다. 나는 여대생들의 활발한 토론에서 새로운 지식을 얻어듣기도 했고 그들의 생각이 비교적 보수적인 것을 알고 새로운 발견을 한 것 같기도 했다.
내 의견을 묻기에 나는 멋의 진수(眞髓)는 어디까지나 넓은 뜻에서의 교양이라고 생각하며 겉멋보다도 속 멋, 스스로 풍기는 멋이라야 하겠다고 말한 일이 있다.
가령 용모나 복장에 관해서 말한다면 제아무리 겉을 꾸미고 발라도 속에 멋이 없으면 눈에 예지가 빛나지 아니하고, 그저 인형처럼 갖고 놀고 싶은 아름다움이지 더불어 이야기하고 서로 넋을 통하고 싶은 아름다움은 만들어 내지 못한다. 반대로 수수하게 차리고 있었더라도 어딘지 은은한 빛이 어리고 마음의 깊이가 풍기는 아름다움이 있다. 향긋한 먹을 갈아 흰 종이에 난초를 치는 여인의 손길이나 가야금을 당겨 가락을 뜯는 여인의 손길은 깎고 다듬어 매니큐어를 칠한 손보다 훨씬 아름답다. 나는 반드시 동양적인 매력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가야금이 아니고 피아노일 수 있고 난초가 아니고 유화라도 좋다. 광란의 트위스트를 추는 여자보다도 음악회에서 심포니를 듣는 여자가 더 아름다울 것 같다. 약학대학생의 흰 가운 포킷에 플라톤의 《대화편(對話篇)》이나 릴케의 《시집》이 들어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여대생 책상에 갖은 화장품이며 인형이며 장신구가 있고 책이라고는 교과서가 몇 권 있을 뿐이라면 여자 대학 앞에 음식점이며 양잠점, 양화점, 미장원, 장신구점만 즐비하고 책사가 눈에 안 띄는 것처럼 섭섭한 일이다. 그들이 만나서 하는 이야기가 옷 이야기, 화장품 이야기가 아니면 갑순이 을순이 이야기라면 한심한 일이다. 책 읽는 시간이 하루에 한두 시간도 못 되고 생각하는 시간은 10분도 못 되며 그 생각이 주름치마나 파라솔을 살 궁리에만 급급하다면 어떻게 대학이랄 수 있겠는가?
해방 후에 우리나라에서도 갑자기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었다. 그것은 향상이라느니보다도 무(無)에서 돌연 얻어진 것이었다. 부인 참정 운동(參政運動)을 해 본 일도 없이 투표권이 굴러들어 왔고 쌍벌죄니 재산 소유권이니 해서 폭넓은 권리가 부여되었다. 남녀동등권이라는 말이 요원의 불길처럼 퍼졌고 여성은 모든 분야에 진출했다. 여자 당수(黨首)가 있고 장관이 있고 야구팀도 있는가 하면 권투, 레슬링까지도 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남녀동등권이라는 것이 이런 사회적 현상만으로 보장되었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남녀동등권이란 남자가 재단사, 요리사가 될 수 있듯이 여자도 권투, 레슬링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 요사이 거리에 범람하고 있는 서구적 유행은 어떻게 보면 아주 다른 형태로 또 더욱 근본적인 형태로 표현된 남존 여비 사상이 아닌가 하는 사례가 얼마든지 있다. 가령 손톱을 길게 기르고 이것을 뾰족하게 다듬어서 빨간 칠을 해 놓은 것은 무엇을 하기에 편리해서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니, 무엇을 하기에도 불편할 것만 같고 유일한 목적이 있다면 남성의 변태적인 욕정을 자극하는 데 있을 것이다. 마치 중국 여자가 발을 졸라매서 부자연하도록 작게 만드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팔목에다 무거운 팔찌를 하느니보다는 토인 여자처럼 발목에다가 하는 것이 덜 불편할 것이다. 복장을 보면 팔을 겨드랑까지 드러내더니 이제는 등과 앞가슴을 될 수 있는대로 많이 보이려는 것 같고 치마 길이는 무릎보다 훨씬 올라가서 앉을 때마다 내려오지도 않는 것을 끌어 내리느라고 애를 쓰는 것을 본다. 끌어 내려야 할 필요가 있다면 처음부터 조금 길에 하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 대관절 어떻게 입고 벗는지 알 수 없는 바지가 있는가 하면 전차나 버스를 오르내릴 때는 묘한 재주를 피워야 하는 스커어트도 있다.
이런 몸치장이 모두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자기의 불편을 참고 남성의 천박한 즐거움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물론 여자가 자기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 여자의 아름다움이 있음으로 해서 인생이 한결 즐거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기를 인형이나 노리개처럼 만들고 자기의 자극적인 부분을 애써 드러냄으로써 남성을 끄는 데 급급한 것이 여자라면 이것은 벌써 남성 앞에 자신을 노예로 갖다 바치는 거와 다를 것이 없다. 이렇게 여성이 스스로를 노예화하는 마당에서는 남녀평등이니 하는 말은 잠꼬대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치장으로 남성을 끄는 것보다 행동거지나 마음씨, 말씨의 여성다움으로 남성을 끄는 노력이 우리나라 여성들에게는 모자라지 않나 한다. 일반적인 경우는 그만두고 의무적으로 남성에게 호감을 사야 하는 자리에 있는 여성을 생각해 보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식당이나 맥주 홀이나 다방 같은 곳에서 심부름을 하는 여자가 실수를 해서 무엇을 테이블에 엎지르거나 했을 때 나는 반드시 내가 『미안합니다』 한다. 내 『미안합니다』는 저쪽에서 마땅히 해야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귀띔해 주는 것이 그 목적이다. 불고기집에서는 앉지도 않고 꾸부리고 선 채 반찬 그릇을 밀어 던지듯 보내오기가 일쑤다. 여성다운 매력의 하나인 미소 같은 것은 차마 추잡스러워서 얼굴에 올릴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다. 이런 매력을 갖출수록 치장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비굴해지지 않을 것이다.
딸은 머지않아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된다. 이들이 더욱 굳건하고 슬기로와진다면 가정이나 사회는 한결 밝아지고 삶이 더욱 즐거워질 것이다.
장날
장날이다. 대목장이다. 장바닥은 둘러 꺼질 듯이 왁자지껄하고 흥성거렸다.
고무신을 땅땅 맞춰 치며 소리소리 떠외는 소리, 울릉도 호박 엿 올기쫄기 찹쌀 엿 철렁철렁 엿장수 가위 소리 뿡빵 뿡빵―. 후생 사업 나온 군용 자동차 『짐이야 짐 짐』 『서 되 하며는 너 되 하고 …….』 캡을 거꾸로 쓴 열대여섯 되는 놈이 양잿물 통을 앞에다 놓고 뚜껑 없는 하모니카로 양산도 노들강변을 막 불어 넘긴다. 생선 장수가 양손에 동태 꼬리를 집어들고 춤을 춘다. 양재기를 땅그랑 땅그랑 두들기며 소리소리, 비단필을 훨훨 내두르며 소리소리…….
슈사인 보이가 해삼을 우물거리고 십 환, 아낙네가 팥시루 떡을 사 들고 돌아앉으며 십 환, 갓 쓴 할아버지가 눈꺼풀을 버르르 떨며 사방을 쭈―욱 기울이고 십 환, 장작을 팔아서 갈치를 묶어 들고, 집 쌀을 내고 설빔을 바꾸고, 계란을 팔아서 석유를 사고, 돈을 들고 돌았다.
장날은 촌놈 생일이다. 볼 일이 있거나 없거나 한 바퀴 갔다 와야 속이 시원하다. 두루마기는 없어도 먼지가 캐캐묵은 갓은 버텨 쓰고 무명옷이라도 새하얗게 빨아 입고, 십 리 이십 리 밖에서 모여든다. 소를 끌고, 지게를 지고, 망태를 걸고, 바구니를 이고, 바구니를 안고 모여든다. 정 볼 일이 없으면 손금을 보고 곡가를 알고 사돈을 만나 인사를 하고 왁자지껄하고 흥청흥청하는 분위기에 한나절 취하다가, 돈이 있으면 장국밥에 막걸리 한 사발을 요기하고, 어슬렁어슬렁 돌아간다.
장날 밤이면 으레 머슴방 같은 데로 찾아간다. 집에 일이 있어 못 간 사람이 묻는다.
「자네 오늘 장에 갔나?」
「어어.」
「곡가가 어때?」
「안 오르데! 파장에는 육십환이여.」
「제―기.」
이런 말을 주고받고, 장에서 구경한 이야기를 신이 나서 늘어놓고, 이러면 하루를 만족하게 넘기는 셈이 된다. 그래야 이튿날부터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는 것이다.
남기고 싶은 것들
요새 부쩍 늘어난 플라스틱 제품이 안 덤비는 곳이 없어 점점 재래식 물건들이 밀려나고 있음은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처음에는 쓰레기통이나 장바구니, 기껏해야 비누곽 아니면 허리띠를 만들더니 이젠 그것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없고, 소위 『아이디어 메이커』의 기발한 두뇌에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방 비에서 옷걸이 못, 그릇 닦는 솔, 신발까지도 플라스틱 제품이 범람하고 있다. 하기야 만들기에 따라서는 건축용 기둥을 만들면 돌보다 견고하고 수도 파이프를 만들면 녹이 슬지 않는다니 머지않아 토목, 건축까지도 휩쓸 날이 올 것이다. 벌써 양철 지붕이니 홈통 같은 것은 대용품이 많이 쓰이고 있으니 말이다. 값이 싸고, 단단하고, 빛깔을 마음대로 낼 수 있고, 뭐니 뭐니 장점이 수두룩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 생활 주변에서 적어도 이것만은 플라스틱 제품이 판을 치지 말았으면 싶은 것이 몇 가지 있고 그런 물건들은 대개가 한국적인 멋이 담겨있는 생활용품이고 우리 생활 감정을 윤택하게 하고 정서를 길러 주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없애고 싶지 않은 것이다.
가령 돗자리는 플라스틱으로 아무리 재주를 부려 보아도 왕골로 짠 옛날 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 매끈한 감촉이며 노르께한 색깔이 삼복 중의 요석으로도 그만이고 대청마루에 깔고 낮잠을 즐기는 데도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다. 문 발만 해도 그렇다. 역시 대나무를 쪼개어 만든 것이라야, 시원한 바람을 부른다. 대나무로 만든 물건은 대평상, 죽부인, 문발, 베개, 부채 등속이 모두 여름 물건이고 그것들은 몸에 닿으면 차고, 눈으로 보아 시원스럽다. 플라스틱 돗자리나 문 발은 색깔이 칙칙하고 감촉이 불쾌하며 오히려 더웁고 답답한 감을 안겨주니 여름 물건으로는 오히려 없는 것과 같지 못하다 할 것이다. 이런 물건들이 우선 값싼 맛으로 우리 생활에 스며들게 되면 옛 물건들은 점점 밀려나고 그것을 만들던 사람들도 참빗이나 망건을 만들던 사람처럼 인간 문화재적인 존재가 되었다가 영영 스러지지 않을지 염려스럽다. 그러지 않아도 사람들의 감정이 거칠어 가고, 생각과 행동에 여유를 남기지 않고, 말씨마저 사나와 가는 세상이니까 이런 생활용품들이 하나둘 없어짐으로써 더욱 정서가 고갈될 테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맥주(麥酒) 한 병, 땅 한 평
얼마 전에 시골에서 농사짓는 친구가 오래간만에 찾아왔기 때문에 맥주를 비교적 싸게 파는 술집으로 안내했다.
「이건 한 병에 얼마씩이나 받나?」
「글쎄, 안주 값이랑 2백 원 남짓 치일 테지.」
「아이구, 논 한 평 값이군.」
우리 고향에서는 상답(上畓)이 한 마지기에 5만 원가량 간다고 했다. 맥주 한 병이 두 잔을 따르고 나니까 석 잔째는 잔이 안 차는 것을 보고 그는 또 이런 풀이를 했다.
「맥주 한 잔이 쌀 두 되로군.」
술맛이 영 안 나는지 글라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주위의 떠들썩한 손님들을 둘러보다가 내게 띄엄띄엄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나도 이젠 논 섬지기 있는 걸 팔아가지고 서울 와서 지게 벌이라도 해야겠네. 대풍(大豐)이 든 대야 사오십 석 되는 거 머슴 주고, 비료 값 내고, 품삯 주고 나면 세안 양식도 못 되는 형편일세, 아마 농사를 백 마지기 짓는 대도 그것만 가지고는 자식 하나 서울 보내서 공부시키기 어려울 걸세. 다 팔면 백만 원은 되는데 은행에 맡겨 둬도 매달 2만 5천 원을 준다며? 그러니 피땀 흘려 가면서 농사짓는 놈만 바보지 뭔가? 그만한 돈이면 우리 식구는 떵떵거리고 먹고살고 자식 공부도 시킬 수 있을 거야.」
나는 인플레의 가능성을 말하고, 파 한 뿌리도 사야 먹는 도시 생활의 맑음을 들어 무턱대고 서울로 올라오는 것이 무모하다고 말렸다.
「판잣집이라도 하나 살 생각이야, 서울 집값이 시골 논값보다 몇 배나 뛰거든. 나중에라도 집을 팔아서 시골 가서 논을 사면 훨씬 더 많이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나는 그 이상 그를 시골에 머물러 있으라고 말하지 못했다. 나 역시 김빠진 맥주잔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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