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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하지 않고 사는 삶. / 思い煩わない人生。 ( 2023년 11월 26일 주일예배)
본문; 누가복음 12:22-31
눅 12:22 ○예수께서 [자기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고,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23 목숨은 음식보다 더 소중하고, 몸은 옷보다 더 소중하다. 24 까마귀를 생각해 보아라. 까마귀는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또 그들에게는 곳간이나 창고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여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으냐? 25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제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 26 너희가 지극히 작은 일도 못하면서, 어찌하여 다른 일들을 걱정하느냐? 27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지를 생각해 보아라. 수고도 하지 아니하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의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차려 입지 못하였다. 28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오늘 들에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풀도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더 잘 입히지 않으시겠느냐? 29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찾지 말고, 염려하지 말아라. 30 이런 것은 다 이방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31 그러므로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22. それから、イエスは弟子たちに言われた。「だから、言っておく。命のことで何を食べようか、体のことで何を着ようかと思い悩むな。23. 命は食べ物よりも大切であり、体は衣服よりも大切だ。24. 烏のことを考えてみなさい。種も蒔かず、刈り入れもせず、納屋も倉も持たない。だが、神は烏を養ってくださる。あなたがたは、鳥よりもどれほど価値があることか。25. あなたがたのうちのだれが、思い悩んだからといって、寿命をわずかでも延ばすことができようか。26. こんなごく小さな事さえできないのに、なぜ、ほかの事まで思い悩むのか。27. 野原の花がどのように育つかを考えてみなさい。働きもせず紡ぎもしない。しかし、言っておく。栄華を極めたソロモンでさえ、この花の一つほどにも着飾ってはいなかった。28. 今日は野にあって、明日は炉に投げ込まれる草でさえ、神はこのように装ってくださる。まして、あなたがたにはなおさらのことである。信仰の薄い者たちよ。29. あなたがたも、何を食べようか、何を飲もうかと考えてはならない。また、思い悩むな。30. それはみな、世の異邦人が切に求めているものだ。あなたがたの父は、これらのものがあなたがたに必要なことをご存じである。31. ただ、神の国を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これらのものは加えて与えられる。
지난 주일에는 믿음의 성장을 위한 여섯 가지 삶의 태도와 방식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 큰 믿음을 구합니다. 믿음으로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말씀 중심으로 일상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에 의지하여 말합니다. 믿음의 훈련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구하고 받을 때 우리의 믿음은 하루에 하루만큼 자라게 되는 것이지요. 저와 여러분이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는 생활습관과 태도, 그리고 마음가짐이 견고해 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믿음으로 사는 일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염려와 걱정을 어떻게 관리하고 대응해야 할 지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아마도 교회에서 듣는 설교의 많은 분량이 염려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라는 주님의 가르침과 관련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염려와 걱정은 복음을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믿음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감정이기 때문이지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서도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속적인 여건에 관하여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특히 염려하고 걱정한다고 해서 사람이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25절에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시지요. 더구나 마지막 때를 산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은 특별히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이 영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눅 21장 34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눅 21:34)
여기서 말씀하시는 “그 날”이란 우리가 다 아는데로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그 날이 맞습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날까지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지키는 이들을 주님께서 기대하고 계시지요.
따라서 정말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지의 여부는 그가 얼마나 염려할 것이나 걱정할 일들을 주님게 맡기며 사느냐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반대말은 불신이 아니라, 염려와 근심 걱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베드로 사도는 벧전 5:7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경계하십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벧전 5:7)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8절에는 너무도 기가막힌 경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 5:8)
원래 성경은 절과 장이 구별되지 않고 쓰여진 편지였습니다. 그러니 염려할 일에 대해서 주님께 맡기고 하는 것은 근신하고 깨어 있는 것이고, 이로써 영적인 전투를 우리가 감당할 수 있다는 뜻으로 기록한 권면인 것이지요. 성도가 믿음을 잃어버리게 하고, 한 영혼이라도 더 지옥으로 끌고가려고 사탄(마귀)은 마치 먹이를 찾아 헤매는 사자처럼 우리 주변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말씀인데요. 그 계략이 바로 사람으로 하여금 염려하고 걱정하고 근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세속적인 생활에 관련된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게 하도록 유혹하고 미혹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개인적인 일로 염려하고 걱정하는 마음으로 시달리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을 위해서 살아가는 여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따라서 사탄은 인간으로 하여금 끝없이 염려하게 하여 사람이 하나님께 집중하거나, 그 나라에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전략을 세우는 것이지요.
염려와 걱정으로 분주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에서 시선을 돌리는 것, 그리고 결국은 영생과 천국의 삶이 아닌 이 세속의 삶에 매몰되어 결국 지옥으로 사탄과 함께 떨어지게 되는 것을 원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개인적인 생활에 대해서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이 실제로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인가 염려하고 걱정하는 일이 생기기 시작하면 주님을 주목하고 바라보는 일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기 때문이지요. 하나의 염려는 두 가지의 걱정을 물고 오고, 두 가지의 걱정은 다시 네 가지의 근심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상생활에서 생겨난 작은 염려와 걱정의 생각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것을 방치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곧바로 주님께 맡기는 연습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경험적으로 아시다시피 염려와 걱정이라는 것은 사람이 노력하지 않고 연습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생겨나는 기분이며 감정입니다. 또한 누군가의 어려움에 대해서 함께 염려하고 걱정해 주는 것이 마치 선을 베푸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요. 이처럼 사람은 자연스레 염려하고 걱정하는 태도와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염려와 걱정을 내가 노력하고 몸부림치며 애쓴다고 해서 사라지고 관리가 되는 것일까요? 아마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거의 없을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베드로 사도의 권면을 통해서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염려는 주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염려나 걱정하지 않으려고 심호흡을 한다거나, 어떤 특별한 내면의 수련을 해서 생각을 비운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너무도 자연스레 밀려들어오는 그 염려와 걱정, 근심을 주님께 배구공을 토스하듯이 고스란히 맡긴다는 것인데요. 이는 우리가 복음을 믿는 사람이 일상의 고난과 고통을 소망의 기회로 삼는 것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믿지 않는 거의 모든 사람은 염려과 걱정이 밀려 들어오면 낙심하고 좌절하여 포기하거나, 아니면 어떻게든 그 문제를 자기 자신이 해결해 보려고 몸부림치며 애쓰고 수고하지요. 그러나 복음을 믿는 우리는 그 염려와 걱정할 문제를 고스란히 주님께 맡겨 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믿는 자의 삶에서 발생하는 고생스러운 일이 소망이 되듯이, 믿는 자의 삶에서 발생하는 염려와 걱정도 주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는 디딤돌이 되는 것입니다. 염려와 걱정 그 자체가 나를 괴롭히러 밀려들어 올지라도 나는 그 밀려들어오는 걱정와 염려의 파도를 주님이 채우시는 은혜로 맞이하며, 주님께 맡겨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 자들은 염려할 일들과 걱정될 일들이 생기면 생길수록 주님을 더 많이 찾고, 주님을 더 바라보게 되며, 주님의 손길을 더욱 분명하게 체감하게 되는 것을 믿습니다. 따라서 염려와 걱정을 대하는 태도도 믿음으로 살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바로미터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염려와 걱정은 믿은 자에게 부담스러운 감정이 기분이 아니라, 주님의 일하심을 기대하고 설레는 마음을 주는 좋은 기회가 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더이상 염려와 걱정이 나의 내면을 지배할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도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염려와 걱정에 흔들리지 않고 평강과 평안을 누리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서 농도가 다를 뿐 염려와 걱정을 느끼는 삶에서 자유롭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믿는 성도인 우리들이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요. 주님의 도우심으로 염려와 걱정의 감정과 기분을 제어하고 관리함으로 참된 평안과 평강을 누리게 되고, 영적 전투에서도 승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우리의 일상생활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의 걱정거리나 염려할 일들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와 발판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임재 가운데 살 때 우리에게 느껴지는 염려와 걱정은 이제 나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길이 필요한 주님의 일도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길이 필요한 주님의 일을 통해 언제나 주님은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사 48:11)
하나님은 절대로 당신의 영광을 다른 어떤 세력에게도 빼앗기지 않으시고, 주님께서 온전히 지키시고 완성하실 것을 그 옛날 구약의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세상의 완성을 약속하시는 계시록의 기록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계 21:23)
여기서 “그 성”이란 지금의 세상에 종말이 오고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실 새 예루살렘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그 새 창조의 도성인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채워져 있다는 말씀이지요. 문학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이 고백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리 지금의 삶에 염려과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의 그림자가 어둡게 깔려 있을지라도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이 승리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반드시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지금의 염려과 걱정과 근심도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주님의 임재 가운데 사는 우리에게는 잠시 동안만 어두움의 그림자 아래에 서는 것에 불과하다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일상에서 염려와 걱정이 느껴질 때 우리는 세 가지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 내 마음에서, 혹은 생각에서 염려가 느껴지면 그것이 사라질 때까지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염려가 느껴질 때 방법을 찾고, 해결점을 알아내기 위한 아이디어를 짜내기 위해 고민하기 전에 염려하는 그 기분과 감정이 사라지기까지 주님의 시선을 의식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우리도 잘 알고 있는 나사로의 자매였던 마르다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의 집에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찾아갔던 날의 기사를 누가복음 10:38-42이 기록하고 있는데요. 마르다는 주님을 손님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손님을 치르기 위해서 분주하게 준비하다가 주님과의 교제와 그 말씀을 듣는 기회를 놓쳐버렸지요.
우리의 믿음이 자라지 않는 이유가 여러가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여기지 않고, 그래서 그 말씀에 주목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느라 주님과의 교제나 그 말씀을 듣는 기회들을 소홀히 여기는 것이지요. 당연히 믿음은 자랄 수 없고, 믿음으로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뜬구름을 잡는 어린아이 동화처럼 여기게 되는 것이지요.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고 산다면 일상에서 사는 것이 그렇게 복잡하거나 고민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스트레스 받을 일이 그렇게 많지 않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염려가 생길 때 기도하면 됩니다. 염려과 근심의 기분이 생길 때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자연스레 기도하게 됩니다. 만일 근심거리가 생길 때 주님을 의식하지 않고 있으면, 그 근심거리를 해결해 줄 것 같은 다른 어떤 방법을 고민하게 되지요. 혹은 경험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가장 먼저 기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방법도 구하게 되고, 주님께서 떠오르게 하시는 경험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요. 주님과 상관없이 내가 찾아낸 방법과 경험과 지식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고, 다시 염려와 근심을 물고 옵니다. 하지만, 주님께 기도하고 받은 해법과 방법은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잠 16:25)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잠 19:21)
그러므로 염려와 걱정과 근심이 느껴질 때는 곧바로 주님 앞에 나아가 구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에게 응답하시고 피할 길을 주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3)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로 염려가 생길 때 먼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힘써 일해야 합니다. 염려하는 순간에도 주님을 바라보면, 자연스레 기도하게 되는데요. 그 때 정말 주님께서 응답하시는 기도의 응답은 뭔가 특별하고 대단한 기가 막힌 아이디어나 기상천외한 묘책이 아닙니다. 물론 때때로 그런 각별한 아이디어가 필요하다고 주님께서 판단하시면 허락하시기도 하지요. 하지만, 대체로 염려를 맡기는 기도를 하면 주님의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마음이 떠오르고, 생각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31절에서도 가르쳐 주고 계시듯이 모든 염려를 이기는 힘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을 구하는 태도로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렇게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염려와 걱정이 생기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일상생활의 욕구를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한 효율적이고 능률적인 묘수를 구하기 때문이지요. 돈 버는 문제, 학업의 문제, 직업 선택의 문제, 장래의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 등등 대부분 우리를 염려하게 하고, 근심하게 하는 일들의 원인은 모두 이 땅에서 순탄하고 평탄하게 살아가려고 할 때 생기는 것들이지요.
어떻게 하면 좀 더 편하게 살고, 즐겁게 살고, 나의 의도대로 살고, 나의 자존심을 세우고 싶고, 괴로움이나 고통은 느끼고 싶지 않고, 다른 사람의 갈등에 휘말리고 싶지도 않지요. 이 외에도 이 땅에서 육신을 가지고 살면서 생겨나는 여러가지 자기만의 격정들이 있습니다. 그 유형들도 모두 제각각입니다. 누구는 물질적인 관계에 좀 더 약하고, 누구는 육신의 재미와 즐거움에 좀 더 약하고, 또 어떤 이들은 말할 때의 어투에 좀 더 민감한 이들도 있지요.
그러나 사람을 근심하게 하고 염려하게 하는 핵심은 이 땅에서의 세속적인 일들을 어떻게 형통하고 유능하게 해낼 것인가에 마음을 두기 때문인 것입니다. 만일 이런 세속적인 일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의 근심과 염려는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거나 유혹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대체로 사기를 당했던 사람들의 경험담을 들어보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유익하고 이익이 되는 영역을 통해 사기꾼의 미끼를 물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내가 뭔가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일은 피해야 하겠다고 관심을 갖는 곳에 이미 사기에 넘어질 미끼와 덫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사기꾼들은 그런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노리는 것이지요.
사탄도 마찬가지 우리를 속여 염려하고 근심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에 순종하며 살지 못하게 미혹하는 것입니다. 그는 거짓의 아비이며, 살인자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 8:44)
염려는 곧 사탄이라는 사기꾼에게 속아 넘어가는 낚시 바늘과 같습니다. 한 번 걸리면 잘 빠져 나오기 힘들지요. 그러니 염려나 근심이 생기면 어떻게든 빠져 나오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할 일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주님을 떠올리고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을 위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알려 주실텐데, 그 일에 순종하십시오.
가장 기본적인 일을 구체적으로 알려드리면 성경말씀과 기도로 일상을 시작하고, 매 주 첫 날을 구별하여 주님께 예배하는 일에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을 위해서 헌신할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의 자리에 참여하기를 소홀히 여기지 말고, 영적인 훈련과 배움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속적인 실력이나 성공, 성취에 만족하지 말고 오히려 주님을 위해 손해보는 일에 두려움 없이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놀랍게도 그렇게 우리가 주님께 순종하면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복된 삶과 평안, 그리고 성공과 성취까지도 주님께서 그 길을 열어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염려함으로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으며, 먼지만큼의 실력도 지켜낼 수 없습니다. 걱정은 걱정을 부르고, 염려는 염려를 끌어 옵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의 대부분 믿지 않는 자들과 일부 모양만 그리스도인인 교인들은 염려하고 걱정하면서 자신이 그나마 문제를 잘 해결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렇게 생활의 염려와 걱정이 반복되는 가운데 주님과의 관계는 멀어지고, 영생과 복되고 아름다운 열매 맺는 삶과는 전혀 상관없는 멸망에 합당한 존재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주님의 가르침은 개인의 일상과 현실을 잘 몰라서 입바른 소리나 하는 뜬 구름잡는 교훈이 아닙니다. 그 어떤 세속의 염려와 걱정도 주님께서 맡아 주심으로 언제나 평안하게 안심하며 일상을 행복하게 살게 하시겠다는 복음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 염려할 시간에, 근심하고 걱정할 마음의 에너지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 뜻을 위해 순종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놀라운 약속의 주인공으로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매일 모든 순간 주님과의 동행 가운데 주님을 바라보며 염려와 근심을 맡김으로 진정한 평강을 실감하고, 용기를 체감하며 안심하며 사는 일상생활로 풍성함을 누리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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