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이 시대 부흥운동이 한국교회에 가져다 준 결실은 복음주의적 연합운동이다. 초대교회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유대인이나 야만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묶어 주는 역할을 했던 것처럼 20세기 초 한국에 발흥한 부흥운동은 한국인들과 선교사들을, 원수와 원수를, 양반과 천민을, 형제와 자매를 하나로 묶어 주는 매개체 역할을 했으며, 더 나아가 선교사들의 본국에서는 가히 상상할 수 없는 장·감의 벽을 넘어 하나의 민족교회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으로까지 발전했다. 부흥운동의 촉매 역할을 했던 사경회에는 장·감이 연합으로 모였고, 장·감은 서로 강단을 교류하면서 한국의 복음화를 함께 염려했다. 원산부흥운동의 발흥과 저변 확대로 장·감이 성령 안에서 교파의 벽을 넘어 하나가 되면서 연합운동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한국에 파송된 장·감 선교사들 모두가 이 일에 적극적이었다.
(1) 연합으로 시작한 한국교회
그 중에서도 연합운동에 처음부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자들은 장로교 선교사들이었다. 네 개의 선교 단체가 입국한 장로교는 오래 전부터 연합하여 한국선교를 추진했다. 1889년 데이비스(J. H. Davies)가 한국에 입국했을 때, 헤론(J. W. Heron), 데이비스(Davies), 알렌(Allen), 언더우드(Underwood), 기포드(Gifford) 다섯 명이 참석한 가운데 ‘미국과 빅토리아 교회 선교회 연합공의회’(The United Council of Missions of the American and Victorian Churches)를 결성하고 회장에 헤론, 서기에 데이비스를 선출했다. 마펫은 두 번째 모임부터 참여하였고, 1890년 4월 데이비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장로교 연합공의회는 모임이 중단되었다가 다시 남장로교 선교회가 한국선교를 시작하는 1893년 1월 28일부터 ‘장로교 정치를 쓰는 선교 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로 재조직되었다. 장로교 공의회로 널리 알려진 이 공의회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장로교 남자 선교사들에게 회원권을 부여했고, 최종적인 목표는 한국에 단일 장로교회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후에 호주 장로교 선교회와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가 입국하면서 장로교 공의회는 한국에 파송된 네 개의 모든 선교회가 참여하는 전국적인 기구가 되었다. 이 네 개의 선교회에 소속된 남자 선교사들은 자동으로 장로교 공의회의 회원이 되었다.
처음부터 연합적으로 한국선교를 위해 협력하던 장로교 선교사들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한국의 복음화라는 거대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감리교와의 협력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협력의 분위기를 고무시킨 것은 양 선교회를 하나로 묶어 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부흥운동과 사경회였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 이후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은 교파를 초월하여 한국교회의 부흥에 관심을 기울였다. 부흥운동의 준비 기간 중에 장·감의 선교사들과 한국인들 사이에 복음화라는 공동의 목적을 위해 긴밀한 협력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1905년 6월 서울에서 열린 북감리교 선교회 총회의 교육 문제 토의회에는 다른 교파의 선교사들도 초청되었다. 이미 남북감리교 두 교단이 연합하여 교육을 실시하고 있고, 서울과 평양에서 장·감이 연합선교를 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1905년 9월 장로교 공의회도 선교 사업을 감리교 선교부와 합동 운영하자는 건의안을 제출하고, 장·감연합공회의 조직안을 승인했다. 장로교 공의회와 두 감리교 선교회의 철저한 준비와 공동보조로 장·감연합공회를 조직하려는 분위기가 무르익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한국에 자리 잡은 4개의 장로교 선교회와 2개의 감리교 선교회는 지금이 ‘대한야소교’(大韓耶蘇敎)라는 하나의 민족교회를 설립하기에 알맞은 시기라고 판단하고 1905년 9월 15일 6개 선교회 150여 명의 선교사들이 모여 장·감연합공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 in Korea)를 조직했다. 언더우드가 초대 의장에, 벙커가 서기 겸 회계에 임명되었으며, 각 선교회 대표자 한 명씩으로 구성된 실행위원회도 조직되었다. 그리고 공의회를 구성한 복음주의 선교회의 전 회원들은 장·감연합공회의 회원자격을 부여받았다.
이눌서 선교사는 단일 한국 민족교회를 설립할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전제하고, ‘ 대한야소교’(大韓耶蘇敎)라는 명칭 하에 단일 교회 설립을 추진하자는 동의안을 제출했다. 이 동의안은 에비슨(O. R. Avison) 박사의 재청에 만장일치로 전원 총 기립하여 채택되었다. 그리고 감리교 선교사 벡크(S. A. Beck)가 개신교 전부가 한국 내에서의 교육 사업을 합동할 것을 동의하여 진지한 토의 끝에 가결하였다. 교파를 초월한 이런 연합운동을 가능케 만든 중추적인 인물은 언더우드였다.
장·감이 교파를 초월해 단일 교단을 설립한다는 공의회의 목적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언더우드의 요청에 따라 1906년 2월 23일 그의 집에서 장·감연합공회 실행위원회가 모였다. 서울에서 장·감이 미션스쿨을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1905년 12월 ‘연합학교 사역’이라는 보고서에서 벙커(D. A. Bunker)는 조심스럽지만 지금이야말로 연합운동이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미션스쿨의 ‘영구적인 연합’도 고려할 수 있는 ‘매우 낙관적인 시기''''라고 평했다. 1906년 9월 10일과 11일에 열린 2차 모임에서는 더 많은 회원들이 모였으며, 분위기도 더욱 고조되었다. 제 2차 장·감연합공의회에서는 한국개신교의 95%에 달하는 196명의 선교사가 참석하여 주요 안건들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서울과 평양의 남학교 교류, 평양의 의료 사역의 협력, 주일학교 공과, 찬송가, 선교지(宣敎誌)의 공동출판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선교지 분할 협정이 실시되지 않은 지역에서 장·감이 선교지 분할을 성공적으로 달성했다는 사실은 연합을 위한 분위기를 한층 고무시켰다. 연합의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 고조되었다. 교리의 조화, 교회 정치의 조화, 선교지 분할에 대한 연구보고서가 제출되어 담당자들의 토의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장·감연합공회는 장·감이 동의할 수 있는 교리를 만드는 한편 장·감이 연합하여 선교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틀을 마련했다. 서로가 동의할 수 있는 교리적인 틀은 복음주의(evangelicalism) 입장이었다. 장·감연합공회의 영어 이름에서 밝혀 주듯이 장·감연합공회는 개신교 복음주의 교단이 한국선교를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 연합선교 전선을 구축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2) 하나의 민족교회 설립 노력
장로교 선교회와 감리교 선교회는 하나의 민족교회를 설립하려는 이상을 갖고 세 가지 안을 두고 의견을 수렴했다.
첫째는 4개의 장로교 선교회가 하나의 장로교회를 설립하고 2개의 감리교 선교회가 각기 하나씩 감리교회를 설립하여 전체 3개의 교회를 조선에 설립하자는 안, 둘째는 4개의 장로교 선교회와 2개의 감리교 선교회가 각기 하나씩 2개의 교회를 조선에 설립하자는 안, 셋째는 4개의 장로교 선교회와 2개의 감리교 선교회가 연합하여 하나의 민족교회를 조선에 설립하자는 안이었다.
이 세 가지 안을 놓고 선교회는 선교사들과 본국 선교부의 의향을 타진했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교파를 초월해 하나의 교회를 조선에 설립하자는 세 번째 안을 강하게 지지했다. 당시 미국의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교파적인 의식이 무척이나 강했다. 언더우드가 졸업한 뉴 부룬스윅신학교나 대부분의 북장로교 선교사가 수학한 프린스턴신학교와 맥코믹신학교도 교단적인 벽이 높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교육을 받은 장로교회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하나의 민족교회를 설립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본국의 해외 선교부는 이들과 의견을 달리했다. 그들은 교파를 초월하여 하나의 민족교회를 설립하려는 한국의 선교사들과 한국 교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교파와 교단을 대변하고 교단의 이익을 앞세우는 본국 선교부는 교단의 신학적인 입장을 떠나 하나의 민족교회를 설립한다는 선교사들의 계획을 반대했다. 교파적인 의식이 강했던 선교부가 볼 때 장·감의 연합은 위험한 일이었다. 본국의 해외 선교부는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반응했다. "그들이 교회 연합사상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노력은 놀라운 것이다. ‘한국기독교회’의 정치 형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새로운 교회의 신조는 어떤 내용일 것인가? 지금 이 나라에서 감리교와 장로교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점에 대한 내용을 모두 포함시킬 것인가?”
만약 본국 선교부가 반대하지 않고 단순히 선교지에 와 있는 장·감 선교사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연합을 추진했다면 연합은 압도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본국 해외 선교부와 마찰을 빚으면서까지 연합을 추진하는 것은 지혜로운 방법이 아니라고 여겼다.
게다가 부흥운동으로 인한 놀라운 교세의 증가는 단일 교회 설립 계획에 어려움을 더해 주었다. 장·감의 각 선교회가 부흥운동을 통해 개교회가 놀랍게 성장하자 자신이 속한 선교회의 교회를 지도하는 일이 더 시급한 사안으로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선교사역의 확장으로 장·감 선교사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선교사역을 감당하기에 바빴다. 장로교는 1907년 독노회를 조직하고 7명의 목사를 배출하였으며, 같은 해 감리교도 협성신학교를 설립하여 독자적으로 신학 교육에 착수했다. 한국교인들 중에도 상당수가 하나의 단일 교회를 설립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다. 부흥운동이 연합운동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각 교단의 교세가 급증하면서 한국교인들 가운데는 그 소속한 교파의 신앙 규례를 중심으로 하는 교파중심주의가 육성되었다. 이렇게 교회가 커 갈수록 교파통일은 더 멀어만 갔다.
(3) 연합의 결실들
장·감 선교사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하나의 교회를 설립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비록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협력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는 사실은 수많은 교파와 교단이 난무하고, 교파이기주의가 한국개신교의 건전한 성장을 침해하는 오늘의 교계현실에 비추어 볼 때 적지 않은 교훈을 안겨 준다.
장·감연합공회가 하나의 민족교회를 설립하려는 계획은 본국 선교부의 반대와선교사역의 놀라운 신장으로 실패했으나 연합선교를 위한 의지마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장·감연합공회가 연합으로 선교를 하려는 노력은 성경번역, 찬송가 발행, 주일학교 교재, 기독교 교육, 문서 선교, 의료 선교, 백만인구령운동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선교지 발행과 성경번역이다. 장·감의 협력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것 가운데 또 하나가 미션스쿨이었다. 장·감연합공회는 1906년 평양숭실대학을 공동으로 운영하였고, 1914년에는 세브란스 병원을, 1915년에는 연희전문학교를 공동으로 설립해 운영했다. 장·감은 교파를 초월해 YMCA를 통해 미션스쿨을 공동으로 운영해 많은 결실을 보았다.
장·감 연합운동이 하나의 민족교회 태동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4개 장로교 선교회는 하나의 장로교회를 설립했다. 남북감리교도 각기 교회를 설립했지만 신학교를 공동으로 운영하여 가장 핵심이 되는 신학 교육부터 연합 사업으로 추진하여 남북감리교 사이에 연합운동을 한층 발전시켜 나갔다. 이것이 1903년부터 1910까지 진행된 원산부흥운동, 평양대부흥운동, 그리고 백만인구령운동이 낳은 결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