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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뜻
1983.05.08 (일), 한국 본부교회
오늘 말씀드릴 제목은 '나의 뜻'입니다. '나의 뜻'이라는 이런 제목을 가지고 말씀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져
'우리의 뜻' 하면 통일교회 교인들은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완성하는 것이 곧 우리의 뜻이다 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본래의 인간이 타락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이냐, 사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반문하게 될 때에, 사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중심삼은 뜻, 창조했던 그 뜻을 두고 보면, 거기에는 피조세계가 있고, 피조세계의 중심 되는 우리 인류의 시조였던 아담 해와가 있습니다. 아담 해와를 통해서 뜻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시작은 하나님으로부터 했고, 만물을 거쳐 가지고, 이 피조세계를 거쳐 가지고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 사람, 남성 여성을 통해서 뜻의 결실을 하게 돼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으로 보면 하나님은 원인적 뜻의 중심자요, 우리 인간은 결과적 뜻의 중심자다,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세우려는 그 뜻과 오늘날 타락 이후의 인간들이 그 뜻을 세우기 위해서 구원섭리의 노정을 가는데, 그 뜻을 보면 하나는 본연의 뜻이요, 하나는 타락된 세계의 구원의 뜻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 구원의 뜻은 본래 우리 인간에게 필요 없었던 겁니다. 그리고 인간의 타락 이후에 되어진 그 역사라는 것도 구원섭리의 역사권 내에 들어가기 때문에, 이 역사도 본래는 우리와 관계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역사과정에는 조상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가 있고, 부처가 있고, 자녀가 있습니다. 그러한 가정이 생겨났습니다. 그 가정으로부터 종족, 민족, 국가를 형성하여 세계라는 이러한 권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 이 세계권도 하나님의 본래의 뜻과는 상관이 없다는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에 있는 인류가 갖추어 놓고 있는 문화나 역사적 배경, 현실적인 환경 전체는 본래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관계를 맺을 수 없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러면 본래의 뜻의 완성 세계와 오늘날 역사과정에서 거쳐 나가는 이 세계와 관계가 있다면, 섭리라는, 구원섭리라는 하나의 매개체적 역사 과정을 통해서만이 관계되어 있지, 구원섭리가 필요 없다는 입장에서 볼 때는 관계없는 역사과정이었다 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인류가 타락한 이후에 자기들만으로 구성되었던 가정이나, 국가나 혹은 자기 나름대로의 사고방식이나, 생활양식, 문화의 배경, 혹은 사상적인 조류, 이 모든 것도 본래의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볼 때에, 뜻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구원섭리의 역사과정과 관계되는 어떠한 내용을 지닌 그 무엇이 하등 필요 없는 자리에 선 사람이 아니냐, 이렇게 결론이 나와요.
오늘 여기 모인 우리들은 한국 사람입니다. 그러면 한국 역사는 예외가 될 수 있겠느냐? 한국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 위에 현존하는 모든 국가의 문화라든가, 혹은 현재 갖추어진 여러 가지의 사회 여건도 마찬가지의 결론을 지을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뜻의 추구자입니다. 이 뜻의 길을 가려면 이것을 초월해야 된다, 이런 결론이 나와요. 뜻의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이것을 초월해야 됩니다. 뛰어넘어야 됩니다. 넘어 가지고 본연의 뜻의 자리에 서야 된다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나라는 존재가 뜻의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역사를 부정해야 됩니다. 알겠어요? 역사 가운데는 문화가 깃들어 나왔고, 거기에는 여러 가지의 민족성이라든가, 여러 가지의 환경 여건이 다름에 따라 가지고 복잡한 내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뜻을 찾아가는 나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 갖추어진 부모와 자식지간은 어떠냐? 이것도 그러한 논리가 성립됩니다.
모든 환경을 부정하고 승리해야 본연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어
그러면 종교가 가야 할 길은 어떠한 길이냐? 종교의 길은 구원섭리를 따라가는 길입니다. 그러면 그 구원섭리의 최종에 가서 도달해야 할 그 자리는 어디냐? 이 모든 것을 부정하고 승리하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만이 본연의 뜻의 자리에 접촉선을 볼 수 있다, 이런 결론이 돼요.
그러면 부정하는 데 있어서 순차는 어떻게 되느냐? 어떻게 부정하느냐? 나로부터 부정해 올라갈 것이냐, 세계로부터 부정해 내려올 것이냐?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은 욕망을 갖고 있습니다. 소망을 갖고 사는데 나로부터 전진적인, 향진적인 차원을 향해 가지고 그 뜻의 확대권을, 그 소망의 확대권을 요구하는 것이 인간들이 갖고 있는 마음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나로부터 부정해서 올라가야 되느냐, 내려가야 되느냐? 이것은 심각한 문제예요.
여기서 보게 될 때에, 나와 하나님편으로 보게 되면 이 중간에 누가 들어가 있느냐? 나라는 차원에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 이 천지라는 차원이 그 사이에 있습니다. 그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은 하나님도 필요 없고, 나도 필요 없습니다. 이것을 초월해서 하나님과 인간이 뜻 앞에 일치될 수 있는 그 자리를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이 과정적 요건이 필요 없습니다. 이것을 왕창 제거해 버려야 됩니다.
그러려면 어디서부터 제거해야 되느냐? 내 욕망부터. 이것은 타락할 때에 천사장이 욕망을 가지고 시작했기 때문에 내 욕망부터 제거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에서는 욕심이라든가, 자기주장을 하는 교만이라는 것은 절대 부정적 요인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뜻의 길을 찾아가려는 사람들은 욕망이라든가, 자기 중심삼은, 자주적인 주장 가지고는 못 갑니다. 오로지 창조이상의 뜻, 창조이상적으로 보는 뜻의 욕망은 가능하고 뜻의 주장은 가능하되, 그외 일체의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부정하는 데는 어떻게 하느냐? 권한을 두고 보면 개인보다도 가정 권한이 더 큽니다. 가정보다도 종족 권한, 종족보다도 민족, 민족보다도 국가, 국가보다도 세계, 세계보다도 천주가 큽니다. 그러면 과정에 있는 이것을 지배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사탄 마귀라는 존재입니다. 그 마귀는 어디에 가 가지고 있으면서 인류의 길을 막고 있느냐 하면, 나를 따라오면서 막고 있지 않습니다. 내 뒤를 따라오면서 막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앞에서 막고 있는 것입니다. 내 앞에서 내가 가야 할 필연적인 길을 막고 있습니다. 그 필연적인 길을 막고 있는 그 기반이 나보다 작은 기반이냐, 큰 기반이냐 할 때, 작은 기반이면 문제가 없지만 큰 기반이다 이거예요. 비례적으로 큰 기반을 가지고 나를 막고 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 사탄 마귀를 부정하고, 이 환경 전체를 부정하는 데는 그냥 그대로 부정되지 않는다 이거예요. 그냥 그대로 내가 부정했다 하는 한마디, 인간들이 무슨 땅에 대한 매매라든가, 주관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을 이양하는 데 있어서 '너와 내가 상의해 가지고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해서 사인하는 거와 같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내가 이것을 거쳐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투쟁이라는 개념이 성립됩니다. 이것을 굴복시켜 가지고 이러한 사탄권한을 제거해야지, 굴복시키지 않고 그냥 그대로 환경의 여건에 순응해서는 뜻의 길 앞에서 나는 전진적인 노정을 찾을 수 없습니다. 전진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큰 무대에 서 가지고 내 길을 가로막고 있으니 이것을 굴복시키면서 나아가야 됩니다.
그런 것을 보게 될 때,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개인이 가는 길 앞에 큰 무대에, 큰 차원에 있어서 가로막는 사탄은 어디를 지키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 개인이 가는 길 앞에서, 가정이라는 기반 밑에서 사탄은 나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내가 가는 길 앞에 있어서 제일 문제점이 될 수 있는 터전이 어디냐? 사탄이 나의 갈 길을, 모든 것을 방해할 수 있는 그 접촉점이 어디냐? 가정이라는 곳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네 집안 식구가 원수다' 하는 겁니다. 원수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저 세계 귀퉁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의 길을 통하고, 종족, 민족, 국가, 세계, 천주를 통해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이 인간이 가야 할 필연적인 노정인데 그 길을 가는 출발의 첫 관문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사탄입니다. 그러면 이 관문이 무엇이냐? 가정이다 하는 걸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오늘날 타락권 내에서 사는 우리 자신들이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내가 지금 사랑한다는 남편이 누구냐? 내가 사랑한다는 자녀가 누구냐? 이거 문제가 심각하다구요. 이들은 사탄의 일선에 무기로 등장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러한 역사적인 노정을 앞에 두고 섭리의 뜻의 완성의 길을 추구하는, 뜻을 따라가는 개인 개인에 대해서 경고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네 집안에 원수가 있다'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는 여기에서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는 겁니다.
타락했을망정 현세의 생활권 내의 우리 자체들을 중심삼고 볼 때 그것은 일대 모순적인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 사회에서 용납할 수 없는 말이다 이거예요. 그것은 사회의 근본을 뒤집어 버렸어요. 오늘날 이 타락세계에 있어서 가정이라 함은 국가 형성의 기초가 되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을 파탄시킬 수 있는 혁명적인 언사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실히 알아야 되겠어요. 그래서 가정을 처리하고 나가야 돼요.
자, 그러면 '사탄의 이 환경을 전부 다 그냥 없앴다. 다 없애 버렸다' 이렇게 말로 통하지 않는다구요. 말로는 안 통한다 이거예요. 사실적 과정에 있어서 하나하나, 차근차근 뜻의 노정의 길을 가야 되는, 전진적인 단계에서 정리해 나가야 되는 길이다 하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우리 통일교회의 술어로 말하면 복귀섭리의 필연적인 노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피해 가면 얼마나 좋으냐? 못 피해 간다 이거예요. 이건 심각한 문제예요.
그래서 예수님 같은 양반들이 제일 치중한 곳이 어디냐? 가정 해결에 지극히…. 이것을 완전히 청산짓고…. 여기에 있는 기반이 사탄무대가 되어 있어 가지고 내가 갈 전반적인 길을 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걸? 객관적인 삼자 입장이 아니라, 직접적인 주체자의 입장에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가로막고 있는 사탄이 얼마나 교활하냐? 역사시대의 인간 타락 이후 지금까지 하나님을 꼼짝못하게 주관해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백방으로 막고, 뜻의 연장을 거듭시켜 나오는 교활하고도 지혜로운 그러한 자가 사탄 마귀라는 것입니다.
복귀의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제일 원수는 내 몸
그러면 이 마귀가 어느때에 굴복하느냐, 어느때에 양보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예요. 그것은 타락 직전 단계, 아담 해와가 하나님과 심정일치 될 수 있는 자리에 섰을 때입니다. 그러면 타락 직전의 아담 해와가 하나님과 심정일치 될 수 있는 그 자리가 어떤 자리냐? 그 자리는 타락권을 통해 탕감해야 하는 탕감권이라는 것이 없는 자리입니다. 사방을 휘젓고 마음대로 행동하더라도 그걸 구속할 수 있는 아무런 여건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제삼자의 반항적인 의지라든가 환경 여건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원치도 않은 엄청난 환경의 몰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 환경 앞에 있어 가지고 거꾸로 누워 있는 피라밋과 같은 입장에 서 있습니다. 이 피라밋과 같은 것을 전부 다 제거시켜서, 헐어서 가야 됩니다. 이것이 복귀의 길이다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그러면 이 복귀의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제일 원수가 누구냐? 가정 이전에 내 몸이 아직까지 청산 안 됐습니다. 내 몸이 아직까지 청산 안되어 있다 이거예요, 내 몸이. 마음은 하늘편에 서 있고 내 몸은…. 둘로 갈라졌습니다. 천지가 갈라졌습니다. 사탄세계와 하나님세계로 갈라졌습니다. 사탄이 외적이라면, 하나님은 내적입니다. 이렇게 안팎이 갈라졌기 때문에 오늘 인간 구조에 있어서도 내적인 구조와 외적인 구조로 갈라졌습니다. 그래서 내 몸은 사탄세계의 무대가 되어 있고, 내 마음은 하늘세계의 무대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전반적인 무대가 아니예요. 초소입니다, 초소.
다시 말하면, 사람 형태는 이렇게 크게 되어 있는데, 그건 뭐라고 할까요? 바늘 같은 전기선인데 마음의 세계에는 하늘나라의 전기선이 들어와 있고, 몸의 세계에는 사탄세계의 전기선이 들어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늘나라에서 오는 전기선이 플러스라면 사탄세계에서 오는 전기선도 플러스입니다. 그러니 플러스와 플러스는 반발합니다. 그렇게 돼 있다구요.
그러면 반발하는 내 일신에 있어서 벌어지는 이 투쟁의 현상, 투쟁의 작용을 누가 제거할 것이냐? 누가 제거해야 될 것이냐 이거예요. 그걸 하나님이 전부 다 제거해 주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렇게 안 돼요. 하나님은 전기선을 통해 가지고 몇천만 볼트의 전기의 힘은 연결시켰지만 통할 수 있는 선은 가늘다 이거예요. 제거할 수 있는 하나의 비법은 이 선을 굵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적 기반이 되는 마음세계의 생활을 확대시키라는 겁니다. 순수한 마음, 여기 이 무쇠와 같은 쇠가 아니라 순수한 백금과 같은, 순수한 황금과 같은, 금과 같은 저항이 없는 순수한 마음 환경을 전체화시키라는 겁니다. 그걸 누가 해야 되느냐? 하나님이 아닙니다. 인간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 같은 데서는 마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찾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무(無)의 경지를 추구합니다. 몸도 부정하고 마음도 부정하는 무의 경지, 무의 경지에 들어간 순수한 나의 자각을 필요로 합니다. 이러한 모든 요건들이 그러한 의미에서 필요했다는 겁니다.
마음이 절대 하늘편에 선 그러한 부동자세, 내 스스로가 부동자세인 동시에 어느 누가 이걸 움직일 수 없는 절대적 자리에 서 있느냐? 이게 문제입니다. 여러분들 마음이 왔다갔다하지요? 마음이 왔다갔다해요, 안 왔다갔다해요? 「왔다갔다합니다」 마음도 왔다갔다합니다. 왔다갔다하는데, 왔다갔다하는 마음 중심이 뭐냐? '나'라는 것이 무엇이냐? 마음이 왔다갔다하면 몸뚱이도 왔다갔다하고, '나'라는 사람은, 가만히 있나요? 마찬가지로 왔다갔다한다구요. 왔다갔다하는데, 좋은 곳을 왔다갔다하면 좋겠는데 나쁜 곳을 왔다갔다하게 됩니다. 그걸 알아야 돼요.
내가 자각을 하는데 그 자각은 무엇이냐? '나는 절대 중심이다. 천지가 요동하고, 천하가 뒤바꿔지더라도 내가 서 있는 모양은 오뚜기 모양으로 내가 앉고 서는 자리는 부동하다. 마음 자리의 확립! 하나님이 밀어내더라도 내 본연의 위치는 하나님이 원하는 위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밀어낼 수 없다' 이럴 수 있어야 됩니다. 그 무엇도 제어하고 방어하며 그 자체 모습의 주체성이 피해를 받지 않을 수 있는 그러한 자리에 서 있어야 됩니다. 마음 자리의 확립! 이게 절대 필요합니다.
마음 자리를 확립하는데 어떻게 확립하느냐? 남쪽으로 가야 할 텐데 북쪽을 향해서 확립되면 큰일납니다. 방향을 갖추어 가지고 확립해야 됩니다. 그런 방향의 설정을 필요로 한 자체의 자리에서 스스로의 완전한 정착지를 갖추어야 됩니다. 부동하는 자리에서 내가 작용하기 시작하면 그 부동한 자리에 따라 가지고 내 몸이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고, 내 자세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나'라는 원칙적인, 본래적인 나의 개념에 일치될 수 있는 나의 발견 현상이 벌어집니다. 이건 심각한 문제예요.
몸 마음이 완전히 하나되어야 하나님이 임할 수 있어
그러면 '나'라는 것은 어떤 것이냐? 그 '나'라는 것은, 내가 앉아 있을 수 있는 동그라미의 자리라면 고착될 수 있는 자리요, 내가 섰다 하는 동그라미의 자리라면 그 자리는 바로 하나님이 뜻으로 세우고자 하신 자리다 이거예요. 우주가 뜻을 통하여 세워 나오던 것을, 타락한 이후에 상실하였던 것을 비로소 찾아진 자리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추구해 온 결론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민경식이도 왔구만. '당신 누구요?' 하고 물어 보면 '민경식이요' 할 겁니다. '민경식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할 때 '마음을 갖고 몸을 가진 사람이요' 할 것입니다. '그 마음은 어떻게 된 거야?' 할 때 제멋대로 왔다갔다하는 민경식의 마음이 아니라, 본래 하늘이 이상했던, 창조이상적인 그 주류 내관을 통해서 볼 때, 그 초점에 설 수 있는, 나의 자리를 확립하여 설 수 있는 그러한 자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그런 자리에 서야 됩니다. 그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 가지고 그런 자리에 선 민경식이다 할 때는, 그 민경식 가운데는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아시겠어요?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태어난 민경식이가 될 수 있다 이거예요. 민경식이 알겠어? 「예」
몸과 마음이 완전히 하나 안 된 자리에 있는 민경식 가운데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수 없습니다. 누가 있느냐? 사탄이 있습니다. 사탄물이 있다면 사탄물 가운데 빠진 자입니다. 사탄의 경계선에 걸려 있는 겁니다. 사탄의 필요에 의해서 거기서 작용하면 그 작용권 내로 나는 할 수 없이 끌려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신자들이 '기독교를 믿는다'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믿으면 어디에서부터 믿느냐? 기독교를 믿는 신앙의 출발이 어느 기점에서부터 출발하느냐? 이게 문제예요. 오늘날 '통일교회를 믿는다. 오늘 선생님이 여기 와서 말씀하신다. 가 보자' 할 때 '가 보자' 하는 그 기준이 어느 자리냐? 영점 자리에서부터 도수를 따지고 높이를 따질 때, 백도가 있다면 한 80도 자리냐, 영점 자리냐, 영점 이하 자리냐? 어떤 거예요? 이게 문제입니다.
영도에서 백도까지 올라갔다면 그것이 수직선이냐, 혹은 45도 선이냐, 90도 못 되는 88도 9부 선이냐? 그거 심각한 문제예요. 이것이 완전히 90도를 갖춘 자리에, 수직선의 자리에 서 가지고…. 아무리 여기에 180도권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필요 없어요. 단 하나 영점 기준이 될 수 있는 중앙에, 중앙선의 영점 자리, 새로이 좌우로 하나, 둘 서 나온 그 영점 자리에, 그 센터에 연결될 수 있는, 내가 고착될 수 있는 본연의 뜻의 자리인 그 무엇이 있을 겁니다.
그 자리에 있어서 그 뜻을 중심삼은 마음이 일원화된, 성화된 나를 갖추어 가지고 그 마음 가운데 있는 눈, 마음의 눈도 있을 거예요. 그 눈도 성화요, 귀도 성화요, 팔다리도 성화요, 우리에게는 영적 오관이 있는데 그 오관의 모든 기관이 성화된 기관입니다. 여기에 반항 없이 백 퍼센트 순응할 수 있는 나, 그런 마음─영인체의 사촌이라면 사촌이예요─을 중심삼고 몸이라는 것이 완전히 그냥 그대로 딱 90도라면 수평선을 완전히 구성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우로 갈 때, 몸뚱이는 좌로 가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우로 가려고 할 때부터 몸뚱이도 우로 가려고 하고, 마음이 좌로 가려고 할 때 몸뚱이도 좌로 가려고 해야 됩니다. 그것이 상반된 자리에 서지 않고 하나의 일체적인 자리가 될 수 있는 나인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선 나, 그런 나라면 하나님의 뜻에서 찾고자 하는 나라는 본래의 개념의 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봐야 되는 거예요.
이러한 자리를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다 잃어버리고 이것과 상관없는 자리가 되어서 여러분의 속사람은 뭐 내 나라, 대한민국 사람, 아들딸, 남편, 뭐 너더분한 부모, 너더분한 환경 가운데서 어정어정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본연의 뜻의 그 원칙적인 기준으로 볼 때 그 얼마나 복잡하고 얼마나…. 하나님이 그걸 바라보고 '소망이 네게 있다' 할 수 있는 마음적 심정을 지닐 수 있겠느냐? 그거 심각한 문제예요.
나라는 것은 어디서부터 출발했느냐? 오늘날 나를 주장하는 그 기점이 어디냐 하는 것을 재천명해야 됩니다. 어떤 영통한 사람들은 '내가 영계를 통해 보니 아버지가 이러고 이런다. 내 말 들어라' 이래요. 이렇게 말하는 것이 나를 완전히 확정지은 자리에서 받은 명령이냐, 확정짓지 못한 자리에서 받은 명령이냐? 심각한 문제예요. 요사스러운 나, 더럽혀진 나, 역사적인 한을 탕감하여야 할, 구원섭리 과정의 통과가 필요한 나 자신 위에 임한 하나님의 명령이겠느냐? 그 명령은 본연의 나와는 먼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알아야 됩니다.
오늘 제목이 나의 뜻, 내 뜻인데, 나라는 개념이 문제 되는 거예요, 언제나. 여러분이 어디에 서 있느냐? 어디에 앉아 있느냐? 오늘날 대한민국 안에 서 있어도 안 돼요. 구원섭리는 본래 필요치 않았어요. 세계 안에 앉아 있어도 안 된다구요. 여러분의 부모를 생각하는 그런 터전 위에 앉아서도 안 된다 이거예요. 남편과 아내의 사랑을 지닌 자리에서 '뜻이 있다. 여기서 뜻을 이루어 천국가자' 한다 해도 말로는 천국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사실 천국은 요원합니다.
불변의 마음, 우선 내게 필요한 것은 불변의 마음이예요. 이 불변의 마음을 어디서 가져올 것이냐? 이게 문제라구요. 불변의 마음을 어디서 가져올 것이냐? 내 개인을 넘어 가지고, 가정을 넘고, 국가를 넘고, 세계를 넘고, 천지라는 것을 넘고, 하나님이 있다면 하나님 세계에 일치될 수 있는 불변의 심정적 진로, 주류노정은 어디뇨? 이건 심각한 문제예요. 방향을 어떻게 잡고 가야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구요. 이런 것을 생각할 때 뜻을 찾아가는 사람은 자기를 주장할 수 없다 이거예요. 하나에서부터 백·천만사가 아무리 많아도 나를 주장할 수 없는 겁니다. 나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 하는 인식을 확실히 가져야 되겠어요. 이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입니다.
내 눈이 보고 좋아하는 이 나, 나는 누구냐? 내가 먹고 놀면서 좋아하는 그 자리가 어디냐? 내가 살고 있는 현재의 생활무대, 그 무대가 어디냐 할 때에, 구원섭리를 거쳐가는 과정의 자리지 구원섭리의 자리를 초월한 자리는 아닙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부정해야 할 자리인데 그 부정할 자리를 시인했다가는 뜻의 부정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이거 확실히 알아야 돼요. 뜻의 부정, 본연의 뜻의 부정의 자리에 자처해서 서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이게 근본 문제예요.
그렇기 때문에 뜻을 대하는 그 마음에 있어서 하나님이 영원불변한 뜻을 세워 나오느니만큼 나는 그 뜻을 내 뜻으로 전수받을 수 있는 것이 구원섭리의 길을 넘어서의 희망의 초점이라 할진댄, 현실에 나서서 불변적인 자체 확립을 마음세계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텐데 불변된 내 마음 자체는 어디에 있느냐? 이것이 여러분의 당면 과업 중에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인들 뭐 누가 안 알아주기 때문에 통일교회에 못 가고, 뜻의 길이 이렇게 힘들어서 갈 수 있느냐 하는 사람이 있어요. 벌써 그 말 자체는 결정적인 자리에서 나를 생각하지 않고 하는 말입니다. 설까 말까, 섰다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사람이지, 확정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죽더라도 이 자리에서 죽는 거야. 미련 없이 죽는 거야' 이래야 돼요. 여러분, 그래요? 「예」 대답은 잘하지. 그거 간단하지 않다구요 '예'라는 말이 그 내용을 분석하면 얼마나 복잡한지 알아요? 이건 생각할 문제예요.
본래의 원칙적인 뜻의 기준은 하나
지금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는데, 두 눈으로 보고 있고, 귀로 듣고 있고, 느끼고 있는데 그 자리가 몸과 마음이 하나된 자리에서, 뜻이 원하는 그 하나의 영점, 본래의 정착지, 고착된 자리에서 보고 듣고 느끼느냐? 복잡하게 이거 끌어당기고, 제삼 비교, 혹은 제사 비교하며, 높고 낮음을 측정하며 보고 듣고 느끼느냐? 그 비교하는데 어떠한 상대적인 형태가 있다면, 그 형태는 어떤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냐? 본연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냐, 타락권 내에, 구원섭리권 내에 존재하는 것이냐?
문학을 하는 사람은 '아이구, 뭐 저렇게 딱딱하고 그러냐! 저것도 종교라고…. 시적 감정이 풍부해야 될 텐데, 형용사의 표현 방법이 좀 풍부해야 될 텐데 저렇게 딱딱하구나' 이럴 거예요. 문학을 하는 사람은 그럴 거예요. 그 문학이라는 것이 어디의 문학이예요? 내가 갖추고 있는 지식을 중심삼고 '저 양반 뭐 논리적인 말을, 이론적인 말을 하나도 못 하는구만. 이건 이렇게 하고 저건 저렇고 해야 할 텐테…' 할지 모르지만 이거 어디를 중심삼고 하는 말이냐? 본연의 요건을 갖춘 나의 자리에 서 가지고, 갖추어진 그 지식 기준을 중심삼고 평가하는 거예요? 뜻을 대해 가는 사람은 아무것도 없이 가는 거예요. 뜻만이 중심이어야 되고 뜻만이 전체여야 된다는 거예요. 그 자리에 못 서 있으니 여러분은 뜻과 일치된 사람이 못 된다구요. 그건 뭐 환경은 제쳐놓고, 내가 문제예요, 내가.
여기 36가정 양반들은 어때요? 협회장은 어떤가? 자기 자신의 마음과 몸이 복잡한가, 단순한가? 「복잡합니다」 얼마나 복잡해? (웃음) 그건 잡복점과 마찬가지예요. 조그마한 것이지만 백화점에 있는 모든 것을 갖다가 집약해서 모아 놓은 것을 잡복점이라고 한다구요. 그래, 잡복점 같아? 이거 심각한 문제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조정하기 위한 조정장치, 조정하는 기간, 조정하는 때가, 조정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구요. 맞춰 놔야 돼요. 이 시계도 맞춰 놔야 됩니다. 표준시계가 있지요? 표준시계와 같게 맞춰 놔야 돼요. 저울도 말이예요, 표준저울이 있습니다. 하나 있다구요. 그건 세계에 하나 있다구요. 미터면 미터의 원기라는 것은 둘이 아니고 하나예요. 둘이요, 하나요? 「하나입니다」 하나예요.
그러면 본래는 인간의 조정 기준이 있을싸, 없을싸? 「있을싸」 있을싸. 그러면 인간의 그 절대 기준하고, 현재 제멋대로 된 내 기준이 영점 조정으로 자연스럽게 맞는 나예요, 억지적으로도 맞지 않는 나예요? 억지적으로 맞추어도 안 맞아요. 억지적이라는 말은 없지만 말로 표현하려니…. 그래도 알아듣긴 한다구요. 억지적으로도 맞지 않는다구요.
이런 내가 본래의 원기, 미터면 미터 원기와 같이 나 인정해 달라고 한다 이거예요. 그거 인정해 주는 놈이 미친 녀석이지. 그 녀석 때려잡아야 돼요. 하나님이 '야, 이 녀석아! 너 생긴 꼴이 그런데 인정해? 이 자식아! 부정하고 때려 패야 할 텐데, 동정하고 협조해? 이 자식아!' 한다는 거예요. 오늘날 축복가정이라는 무리들, '가정이 아니냐! 가정' 하면서 가정이라는 명사는 존중하고 가정의 내용은 무시하는 패들이 많다구요.
다들 눈이 졸리는구만. '아이구,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 아침에 오지 말걸! 아이구, 말을 안 들었으면 내가 사기를 치더라도 용서를 구할 수 있지만 눈을 말똥말똥하게 바라보고 깨깨 들었는데 용서하라는 말도 못 해, 양심상. 오늘 아침에 오지 말걸!' 그렇지요? (웃음) 「아닙니다」 오지 말걸 왜 나타났어, 민경식이? (웃음) 민경식이는 그 이름이 좋다구요. 민─ 경─ 식, 공경하고 심는다. 부작용 없이 공경하는 자로서 모든 것이 커 간다, 되어진다 이거예요.
그래, 잘왔어요, 못왔어요? 「잘왔습니다」 새벽같이 뭘하러 와요? 기성교회나 찾아가지 뭘하러 새벽에 왔어요? (웃음) '통일교회는 주일날 되면 네 시 반에 일어나는 것이 제일 싫어!' 할 거예요. 여러분도 싫지만 나도 싫어요. (웃음) 왜 싫은 놀음을 구태여 만들어 가지고 해야 돼요? 아이구, 나는 동쪽 밝은 데로 가고 싶은데, 반대로 어두운 데로 가라, 어두운 데로 가라 한다 이거예요. 영점에 조준하려면 왔다갔다하면서 좋을 수 있는 길을 취해야 합니다. 그 방법 외에는 영점에 조준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렇지요?
대한민국에도 저울 하게 되면 본래의 저울은 몇 개예요? 「하나입니다」 둘이지요, 둘? 둘 있다고 하면 선생님 대해서 미친 사람이라고 한다구요. 본래의 원칙적인 저울은 하나지요? 세상 모든 것의 기준은 하나예요.
그러면 본래의 원칙적인 저울은 하나 있는데 본래 뜻의 기준에 있어서 원칙적인 뜻의 사람이 둘이겠어요, 하나겠어요? 「……」 하나겠어요, 둘이겠어요? 「하나입니다」 쌍것들! 쌍것이라 하면 싫어하지? '아이구, 저런 공식석상에서 쌍것이란 말은 목사님은 안 하는데. 통일교회 레버런 문이라는 사람은 참 이상도 하지? 저 공석에서 욕을 무자비하게 퍼붓는다' 할 거예요. 그건 내 식인 동시에 하나님이 좋아하는 식이예요. (웃음) 그럼 되는 거예요. 레버런 문 식은 식인데 하나님이 좋아하는 식이라면 됩니다. 임자네들이야 좋겠으면 좋고 말겠으면 말고.
뜻길을 가는 데는 본래의 자리에서 출발해야
자 여러분, 어떤 때는 밥이 맛있지요, 밥? 밥이 맛있지요? 「예」 어느때가 밥이 맛있어요? 배가 고플 때, 밥하고 먼 시간을 갖게 될 때는 밥이 맛있게 마련입니다.
고향을 중심삼고 보면 말이예요, 고향에서 어머니 품안에서 잘 때, 안방 건너방 다닐 때는 말이예요, 엄마 아빠 코 고는 소리가 원수예요. '엄마 아빠는 왜 저렇게 코를 고나?' 한다는 거예요. 우리 어머니도 그런다구요. 선생님이 고단하면 코를 고는데, 코를 고는 데도 아마 세계 제일 가는, 넘버원 코를 곤다 이거예요. (웃음) 고단해서 코를 고는데 그 동기를 생각해 보면, 뜻에 대해 밤새껏 얘기하고, 며칠 동안 쉬지 못해서 곤드레만드레되어 떨어져 가지고 코를 고는데, 씩씩 하고 고는 게 아니예요? 왕왕 골아댄다는 거예요. (웃음) 와…앙, 어…엉 사자가 영각하듯이 불어 제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어머니는 말이지, 보따리를 싸 가지고 딴 방으로 갑니다. (웃음) 그것도 생각할 문제가 많습니다. 생각이 단순하지가 않아요. 자, 왜 갔을까? 남편이 거기서 한마디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서 말이예요, '아이구, 이거!' 하며 코를 막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되기 때문에, '고단해서 코 고는 남편을 깨우면…. 얼마나 고단한데 내가 도와주지는 못해도 그럴 수 있나' 해 가지고 보따리를 싸 가지고 딴 방으로 갈 때는 오케이예요. 그건 괜찮다 이겁니다. (웃음) 그렇지만 '아이구, 나 잠 못 자게 저렇게 매일같이 코를 고니 살아 먹겠나! 아이고, 될 대로 되라!' 할 때는 그것은 낙제예요, 낙제. 만사가 그렇게 되어 있다구요.
싫다 해도 그를 위해서 싫어할 때는 하늘이 봐 줄 수 있는 것이지만, 자기를 위해서 싫다 하게 될 때는…. 세상만사가 그렇게 되어 있어요. 비슷한데 출발도 달라지고 목적도 달라집니다. 그것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문제에서 갈라집니다. 알겠어요?
또 그러면, '나'라는 사람은 코를 골아도 눈을 떠서 여편네가 옆에 없으면 절대 참지 못하는 남자다 이거예요. 없으면 야단이 벌어지는 남자인데 눈을 떡 떠 보니 엄마가 어디 갔거든요. '왜 갔소?' 하고 찾아본다구요. '아이구, 당신 나발 부는 소리에 잠을 자겠소? 듣기 싫고 화가 나서 갔소' 하면 야단이 벌어진다구요. 그러나 '나 당신이 너무나 고달픈 것을 알면서도 그거 듣고 손을 대지 않고는 못 견디겠고 해서 그래서 당신 더 자라고 할 수 없이 저 옆방에서…' 할 때는 '응 그래!' 한다는 거예요. 그건 손 못 대는 거예요. 암만 손을 가지고 피스톤 작용을 잘한다 하더라도 말이예요.
자, 밥 좋아하지요? 밥 좋지요? 고향도 멀리 떠나면 멀리 떠날수록 그리워지는 거예요. 멀리 떠나 가지고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멀리 가 가지고 그리워하고, 가고 싶어하는 그 자리는 만사가 환영한다는 겁니다. 고항 땅에서 전체가 환영한다는 겁니다. 멀리 가면 갈수록 부정적이 아니고, 멀리 가면 갈수록 긍정적인 도수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情)의 세계라는 겁니다.
그것을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느냐 하면 말이예요, 밥 먹는 것에 비유할 수 있어요. 밥은 언제 맛있느냐 할 때는, 밥 먹은 시간이 가까울수록 맛이? 맛이 뭐요? 있다, 없다? 「없다」 없다! 가까울수록 맛이 없습니다. 언제가 제일 맛이 없느냐? 배가 불러 가지고 숟가락을 놓을 때가 제일 맛이 없습니다. (웃음) 끝났다 이거예요. 더 먹으라고 하면 '아아─'그래요. 숟가락을 놓고 한 시간쯤 되면 한 술은 먹지요. 그런 이치예요.
그러면 그 밥의 조상이 누구냐? 밥의 조상이 누구예요? 밥의 조상은 쌀이라는 것입니다. (웃음) 이 쌀님이 이제 마나님에 의해 소쿠리나 혹은 함박에 담겨져서 일어지는 겁니다. 쌀을 담아다가 이는데, 그거 좋다고 하겠나요, 싫다고 하겠나요? '아이구, 나 가만히 있어도 귀찮은데 이거 왜 자꾸 볶아쳐!' (웃음) 그럴 겁니다. 사람하고 바꾸어 생각해 보라구요, 얼마나 여러분이 몹쓸 사람인가? 내가 얼마나 잘나지 못하고 얼마나 동정받지 못할 패인가 생각해 보라구요.
아, 이거 참 새벽같이 덜거덕덜거덕, 따뜻하게 새벽잠을 자고 있는 나를 깨워다가, 더운물이면 모르는데 찬물에다, 동삼삭 12월이 되었는데 찬물에다 철썩 집어넣고는 사정없이 비벼대나? 싹싹싹! 그저 비벼댄다구요. 동정이나 해요? '찬물에 들어가게 되면 죽는다'고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데 등을 차고, 배를 차고 막 흔들어 댄다 이겁니다. 그거 좋겠어요? 좋겠어요, 나쁘겠어요?
또 그것으로 그만두느냐? 그다음에는 일어 놓게 되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저 불을 때고, 물이 펄펄 끓는 데다가 사정없이 곤드레만드레 뭐라고 할까요? 빳빳하게 얼어 가지고 고슴도치같이 되어 있는데 이것을 더운물에다 철썩 집어넣는 겁니다. 그럴 때 '악' 하고 소리를 지르겠어요, '흐흐' 하고 좋다고 웃겠어요? 틀림없이 '아이구, 나 죽는다' 할 거예요. 이건 뭐 천지에 대지진이 난 셈이라구요. 대변동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다음에는 울룩울룩 끓어대네요. '아이구, 내 옷이 전부 다 녹아나는구만. 아이구, 제1의 깝대기가 녹아난다. 제2의 살이 녹아난다. 제3의 힘줄이 녹아나는구만. 아이구, 제4 뼈다귀가 녹아난다' 이거예요. 그래서 물렁물렁해질 때 그 쌀님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그거 생각해 보라구요.
그래 놓고는 이건 또, 밥 푸는 것이 뭐예요? 주걱인지 무엇인지 하는 걸 가지고 탁탁탁…. 이거 달라붙은 걸 때려 가지고 제멋대로 갈라지든 말든, 가루가 되든 말든 탁탁탁 해 가지고 그릇에 퍼서 끽─ (웃음) 입안에다 집어넣는다 이겁니다. 또, 집어넣어 가지고는 존경도 안 하고, 존경은 커녕 고맙다는 생각, 미안하다는 말도 안 해요. 그다음에는 도적놈 손길로 주워다가 마구 찧는다 이겁니다. 갈밭에 가면 갈게라는 것이 있다구요. 똥을 싸 놓으면 막 헤쳐뜨리며 산다구요. 그렇다는 거예요. 고맙다고 인사나 해요?
그래도 가만히 있다는 거예요. 그거 말을 못 해서 그렇지, 얼마나 데모를 하겠어요? 그래, 쌀이 데모하며 가라사대 '인류는 망할지어다. 아멘' 그런다는 겁니다. 이 강도단 같은 인간 세상이라고 보는 거예요. 만사가 그렇다구요, 만사가.
여러분, 공기를 왜 그렇게 많이 잡아먹어요? 공기님이 가라사대 '우리는 인간 코에 들어가지 않기로 결정했소. 오늘부터 데모요' 할 때에 인류는 어떻게 되겠어요? 다 뻗을 거예요. 일시에 다 뻗어요. 5분 이내에 다 뻗는다 이겁니다. (웃음) '그러한 위력을 가졌으면서도 그 위력을 자랑하지 못하는 원통함이여!' 공기가 그럴 겁니다. 태양빛도 그렇지요? '이런 특권적인 우리의 능력을 인간 하나 때문에 무시를 당하고, 점령을 당하고, 파괴를 당하는데 천리의 대주재 되시는 신이 있다면, 신이 어떤 연고로 그것을 보호해 주지 않느냐?' 할 거예요. 문제가 복잡하다구요. '그렇게 권세 당당하던 내가 복귀라는 뜻 앞에 서 가지고 이렇게 쫄딱 망할 줄이야!' 할 거예요. 거 분하지요? 분해도 할 수 없다구요. 할 수 없어요.
뜻길을 어디서부터 출발할 것이냐? 심각한 문제입니다. 뜻길은 본래의 자리에서 출발하지 않고서는 십년, 백년 세월이 가도 소용이 없습니다. 일생을 갖추어 가지고 가야 합니다. 보라구요. 내가 여기서부터 비행기를 타고 워싱턴에 간다고 했다구요. 왕왕왕 열여섯 시간 날아가 가지고 도착했다, 내리라고 해서 내려 보니 모스크바다 이거예요. 어떻게 해요? 레버런 문이 모스크바에 왔다고 환영대회 해주겠어요? '잘왔다' 하는 겁니다. KGB요원들이, 아이구, 무엇이 굴러들었다구? 제대로? 「제물」 제물, 제물이라고 해서 제사드리는 제물인지 모르겠지만, 제물로 걸려들어 왔다고 할 겁니다. 그럴 수 있는 사정이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이거 심각한 문제예요.
그래서 여러분 자신이 오늘 아침에 '너는 어디서부터 출발하여 어디로 가고 있느냐?' 하고 물을 때 가느라고 갔고, 티켓도 샀고, 돈도 썼고, 모양새, 모든 것을 갖출 대로 다 갖추었는데, 난데없는 결과의 자리에 섰다는 결론이 난다면 누구를 원망할 거예요? 그걸 청산해야 돼요. 이를 악물고 다시 가야 돼요. 누구를 원망할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하늘을 대해서 원망해도 소용없고, 비행기를 대해서 원망해도 소용없고, 시간을 걸고, 무엇을 걸고 아무리 큰소리해도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문제는 자기를 걸고…. 맞아요, 안 맞아요? 나라를 걸어도 안 되고, 세계를 걸어도 안 되고, 나라의 대통령을, 사랑하는 남편, 아들딸을 걸더라도 그건 상관이 없습니다. 안 통한다 이겁니다, 안 통해요. 그렇게 행동한 것을 싫더라도 또다시 부정해 가지고 본연의 자리에 올라가야 됩니다. 그래야 제2의 출발을 해서 제1의 출발의 목적지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심각한 문제예요. 어디로 가고 있느냐? 여러분이 떠 가지고 나는데 제1의 착륙지가 어디냐? 그게 문제예요.
몸 마음의 하나된 나를 세우지 않고는 내 뜻이 없어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대한민국의 주체성 확립' 그러는데, 주체성 확립이 뭐냐? 대통령을 중심삼은 주체성 확립이 민족이 천년 만년 요구하는 주체성 확립의 자리와 일치하느냐, 안 하느냐? 일치 안 하게 될 때는, 민족이 천년 만년 원하는 주체성 확립의 전통적인 기준 앞에 일치되지 않을 때는 시대적 과정에서 대통령이 주장하는 주체성은 여지없이 끽!' 날아간다 이겁니다. 그런 주체성은 암만 해도 필요 없어요.
그러면 대한민국 역사가 필요로 하는 주체성을 모든 세상이 오케이 하느냐? 천주가 오케이 하느냐? 아니예요. 세계가 갈 수 있는 영원한 주체성의 정착지는 어디냐 하는 것이 문제예요. 대한민국의 주체성이 영원하다고 해도 그 주체성은 보다 큰 천주·우주 ·세계가 가는 주체성 앞에서는 이동해야 되는 거예요. 그 주체성하고 세계가 가는 주체성하고 하나님이 바라는 주체성이 상치되지 않고 일치가 되어야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인간들의 주체성을 논하기 전에 하나님이 거동할 수 있는 주체성은 뭐냐? 이런 문제가 큰 문제라구요.
뜻의 본연의 자리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출발의 자리인 것입니다. 뜻의 본연의 자리는 거룩한 것입니다. 그곳은 만유의 모든 단계를 초월해 가지고 사방에서 측정하더라도 자기의 위치가 몇 도라는 것이 확실히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틀리게 될 때는 모든 것이, 내가 볼 때 180도인데 그 원점 기준이 다른 데에 가 있으니 돌려서 맞추기 전에는 180도를 찾을 길이 없는 겁니다. 그러한 결과에 부딪쳐 있다 하는 것이 역사과정이 타락권 내에 있다고 하는 이 개념 아래에서는 불가피한 결론이 아니겠느냐.
사방으로 나를 조준해 가지고 영점자리를 찾아야 되겠습니다. 찾는 데는 본연의 영점자리를 중심삼고 원기의 모든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된다는 것을 알고 그 이론에 일치시킬 때 나도 그렇게 된다는 거예요. 그 사실을 찾기 전에는, 우리 자체가 제2의 결과적 존재로서 출발할 수 있는 뜻의 일치점의 자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론적으로 맞다 이거예요. 이의가 없다 이겁니다. 이거 알겠어요? 「예」
내 마음이 출발해서 움직일 때, 혹은 '전도하자' 할 때, 원해서 하는 사람이 있고, 그저 그래서, 마지못해서 하는 사람, 죽을까 두려워서, 무서워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느냐? 환영해서 하느냐, 마지못해서, 죽지 못해 할 수 없이, 무서워서 하느냐? 어떤 거예요? 그것은 다 낙제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몸과 마음이 주체와 대상이라면 그 환경 여건이 상대의 뜻에, 상대형 자리에 일치하게 될 때는 기쁨으로 출발하는 겁니다. 슬픔으로 출발하게 되어 있는 게 아니라 기쁨으로 출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쁨의 내용이 첫번이지 슬픔의 내용이 첫번이 아니예요. 타락은 뭐냐? 슬픔의 내용이 첫번이고 기쁨의 내용은 시작도 안 했다 이겁니다. 그러므로 복귀의 운명길을 찾아가는 우리로서는 뜻을 기쁨의 내용으로 출발해 가지고 기쁨의 과정으로 소화시켜 나와야 됩니다.
그러한 내가 되어서 보는 눈이 변치 않고, 듣는 귀가 변치 않고, 일년, 십년, 일생 동안 변치 않고 가 가지고 죽더라도 '나는 변치 않고 뜻의 길을 걸어왔으니 너도 변치 않는 뜻의 길을 가라'고 유언할 수 있는 어버이가 되어야 합니다. 친구가 있으면 친구에게 '이렇게 뜻의 길을 불변으로 가는 것이 원칙인데, 너는 왜 그러느냐? 불변의 뜻의 길을 가자'고 권고하는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아내와 남편, 그런 아들과 딸을 가져야 됩니다. 왜? 그 과정이 개인에서 천주 과정까지 단계가 많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그런 남편이 필요하고, 그런 아내가 필요하고, 그런 자식이 필요하고, 그런 부모가 필요하고, 그런 일족이 필요하고, 그런 형제가 필요하기 마련입니다.
오색 인종으로 구분된 것을 초월할 수 있는 세계적인 인류의 뜻의 길이 닦아져야 된다는 것은 틀림없는 이론입니다. 또, 하나님의 뜻이 필히 그걸 바란다는 겁니다. 그럴 수 있는 나를 바라는 거예요.
나를 찾아 세우지 못하면 내 뜻이 어디 있어요? 안 그래요? 여기 문 아무개가 있지만, 문 아무개란 사람은 내가 아니예요. 문 아무개는 이름이예요. 팻말이예요. 그러므로 안팎으로 뜻을 중심삼은 마음과 몸이 하나된 자리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본연의 뜻과 일치된 자리에서, 상대적 기준이, 대상의 위치가 결정된 그 자리에서 출발이, 혹은 동작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런 나예요.
박공서, 여기 와 앉았구만, 그래 뜻이 중요해, 뜻을 중심삼고 하겠다는 극(劇)이 중요해? 「뜻이 중요하지요」 뜻이 중요하지요? (웃음) 박공서의 뜻의 출발점이 어디야? 극이라는 것을 중심삼아 가지고 출발의 기점을 삼았어? 내가 묻는 게, 극을 중심삼고 나가는 것이 뜻길이냐는 거야? 그것은 하등의 관계 없는 거야. 뜻을 위한 효과라는 것이 사람도 없이 나오나? 자기 혼자 되나? 환경도 없이 되어 나오나? 뜻은 강제로 안 된다구요. 자연적인 환경, 순리적인 환경에 그것이 척척 접어져 가지고 앞놓아 나가면서 그렇게 돼야 세상에 발전적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모순과 상충이 없이 소작용은 대작용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런 걸 보게 될 때, 문제가 크다구요.
우주주관 바라기 전에 자아주관 완성하라
여러분들이 신앙하고 지금까지 믿었던 그 자체가 엉터리 왕국이예요, 엉터리 왕국. 엉터리 왕국 내에 있는 것들은 엉터리 왕국 잡복동산이예요. 그래서 나이만 많아져 가지고 '나 통일교회 얼마 믿었소. 나 통일교회 40년 믿었소! 나 통일교회 뭣이요! 협회장이요! 나는 협회장 부인이요! 뭐 어머니 삼위기대요!' 이러고 뭐 어떻고 한다구요. 요사스런 그런 놀음 하자는 것이 아니예요.
어디서 출발했느냐? 출발이 문제예요. 그런 사람은 아직까지 출발기점도 잡지 못하고 흘러 나가떨어지고 만다는 거예요. 이만큼 얘기해 주고 가르쳐 주면 그것을 고맙게 소화하고, 뒤로 돌아라 하면 돌 수 있는 길을 취하지 못하고 일방통행하겠다는 그 논리는 용서가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통일교회는 그런 길을 가고 있어요. 레버런 문 자신도 그런 길을 가고 있습니다. 가다가 '180도 꺾어' 하면 꺾어야 돼요. '뒤로 돌아' 하면 돌아야 돼요. 그럴 수 있는 자세를 정성을 들여서 시간 차이 없이 순식간에 기리까에(바꿔치기)할 수 있는, 전환시킬 수 있는 자주적인 능동자라야 섭리의 길을 갈 수가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이런 말 해서. 어르신네들! 미안들 하십니다. (웃음)
나에 대한 재발견! 나 오늘 여기 떠나요. 이제는 통일교회가 고개를 넘어야 할, 정상을 넘어야 할 길에 있기 때문에 과거지사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반성해 보고, 정상에 올라가, 천하를 바라볼 때에 부끄럽지 않은 내 자신, 본연의 나의 자세로 히말라야 산정을 올라가서 그 만경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허허!' 하며 환희와 기쁨으로 노래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되어야 됩니다. 숱한 사연이 흘러갔지만 이 한 시간을 찬양할 수 있는 조건으로 수습될 수 있어야 돼요.
아무때 고빗길에서 미끄러지면 천야만야한 벼랑에서 떨어져 옥살박살될 수 있는 그런 자리를, 한 발짝 잘못 디디면 죽을 수 있고 한 발짝 잘 디디면 살아날 수 있는 그런 자리를 거쳐 그 모든 사연들이 자기의 기쁨을 자극시킬 수 있는 내용으로 승화되어야 되는 겁니다. 어려웠던 사실이 그 자리로 올라가 가지고 영광의 자극을 주어 승화시켜 줘야 돼요. 과거를 돌아보며 '아이쿠, 잘못했구나!' 해 가지고 한탄했댔자 그건 늦은 거예요. 그런 때가 가까왔어요.
통일교회를 만국이 전부 다 환영할 때, '아, 레버런 문!' 하면서 궁전 문을 열어 놓고, 대통령 저택의 비밀실을 열어 놓고 언제든지 환영하게 될 때 이 통일교회 패들은 어떻겠어요? 오래 됐다는 너더분한 패들 무슨 탈을 쓰고 다닐꼬? 하나님이 옆에 와 서 가지고 전부 다 감정하고 있다면 내 자신부터 감정을….
재차 자아비판을 해야 됩니다. '너는 누구를 위해서 지금까지 통일교회를 믿었느냐'고 반문할 때 '누구를 위해 믿긴, 통일교회를 위해 믿었지' 그런 소리 하지 말라구요. '내가 통일교회를 믿은 것은 선생님을 위해 믿었지!' 하지 말라구요. 선생님 통일교회예요? 내가 누구를 위해 믿어요? 누구를 위해 믿는 거예요? 선생님도 아니고, 통일교회 교인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니예요. 하나님도 아니예요. 아무도 아닙니다. 나를 위해 믿는 겁니다, 나를 위해. 불평할 수 없는 겁니다. 출발을 자기가 했고, 결정을 자기가 해 가지고 출발했기 때문에 1년, 10년이 지나 돌아설 때 불평하는 사람은 도의 세계는 물론이요, 인간세계에서도 낙제예요. 자기의 요건을 들어 줄 사람은 천지에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그 따위 녀석들은 흘러가 버려요. 빨리 흘러가 버려요. '내가 통일교회 들어온 것은 축복받기 위해서, 선생님이 축복해 주는 그것을 위해서 왔소!' 그래요? 그것을 위해 왔어요?
내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으며, 내 감각, 내 사고방식과 내 듣는 소리, 내 느끼는 맛, 행동하는 모든 일체는 어디로 가느냐? 제멋대로예요. 똘똘 뭉쳐 가지고 하나의 다마(둥근 것)와 같이 굳어진 근원이, 눈 근원, 입 근원, 코 근원, 귀 근원, 촉각 근원, 전부가 한 포인트에 결집되어 거기에서 올 스타트해야 돼요. 삐쭉삐쭉, 얼룩덜룩해요. 여러분 밑창을 들여다보면 순수해요, 불순해요? 어때요? 시간이 많이 갔구만. 자 이젠 알겠어요?
자기를 찾아야 됩니다. 선생님도 수양 도중의 표어가 '우주주관 바라기 전에 자아주관 완성하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표어였어요. 우주는 아주 먼 것이예요. 먼 것이예요. 우선 나 자신이 문제예요. 자신의 출발을 어디서 하느냐?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상적인 정착지, 이상적인 하나의 점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인간이 요구하는 최고의 이상적 포인트가 있으면, 그 포인트는 내가 찾아 맞춰야 할, 내 최고의 가치를 세울 수 있는 출발의 자리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맞추느냐? 심각한 문제더라 이겁니다.
본연의 내 마음을 찾고, 내 마음과 일치될 수 있는 몸이 되어서 완전히 공적인 내 자신으로 떠올라서, 어두운 자리가 아니고 광명한 자리에 들려져 가지고 자기도 모르게 몸과 마음이 합해져야 합니다. 마음이 말하기를 '야, 몸아! 나와 같이 말을 해' 하는 게 아닙니다.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말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요'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결국은 몸과 마음이 하나된 자리예요.
그런 자리에서 그런 사랑이, 몸과 마음이 하나된 그 가운데에 있는 사랑이 흘러나와 가지고 '내 몸과 마음이 완전히 하나된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는 간절한 흠모의 심정이라면, 거기에 흠모의 촛대가 있고, 초가 있고, 초의 심지가 있다면 불이 안 켜지는 심지가 아니라 불이 켜지는 심지, 불길 가운데서도, 맨 안에 있는 파란 불길과 맞닿을 수 있는, 접촉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겠느냐?
좋은 날을 바라고 나가는 것이 인간의 욕망
하나님의 사랑을 플러스라 한다면, 나는 마이너스 입장에서 플러스 마이너스의 사랑의 전류가 흘러 가지고, 거기에서 접촉하여 스파크가 되어 가지고 빛을 발해야 돼요. 그러면 천지는 다 아편에 취하듯 취합니다. 아편에 취하듯 취해요. 그럴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야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랑은 어떤 자극의 사랑이냐? 어떤 자극을 필요로 하는 사랑이냐? 천지가 다 아연실색할 수 있어 가지고 다물어졌던 입이 벌어지고, 감겼던 눈이 떠지고, 막혔던 귀가 열리고, 막혔던 코가 뚫리고, 내렸던 손이 춤을 추고, 사지백체가 흔들흔들, 능글능글, 스스로 자연히 박자에 맞출 수 있는 그런 자극이예요. 표현하기 어렵지요? 그럴 수 있는 경지를 하나님도 추구하실 것이 아니냐?
하나님도 너무 좋아서 흐들퍼지게 웃고…. 옛날 성자들은 웃음 보따리가 흐들흐들하다고 했는데, 나 그 말 참 좋아해요. 웃음 보따리가 흐들흐들한 게 아니라 와르르 쏟아지고 말이예요, 마음 보따리가 뭐라고 할까, 불꽃놀이할 때 불꽃이 '핑' 하면서 '꽝 꽈꽝 꽈꽝꽝!' 하듯 하나님도 그런 경지, 하나님도 사람과 같은 인격적 신이라면 그럴 수 있는 기쁨의 환상경이 없을소냐, 있을소냐 이거예요. 있을소냐, 없을소냐? 「있습니다」 없을소냐, 있을소냐? 「있습니다」 어떻게 알아요,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 닮았다고 했기 때문에, 내가 그러니 하나님은 본연의 주체니까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좋아 가지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기쁨의 눈물을 뚝뚝 흘릴 때 그 눈물을 바라보는 아들딸이 있으면 행복해요, 불행해요? 「행복합니다」 눈물을 보는데 행복해요? 「예」 왜? 「기쁨의 눈물이기 때문에요」 기쁨의 눈물이기 때문에. 눈물에는 기쁨의 눈물이 있고, 그다음에 슬픔의 눈물이 있습니다. 기뻐도 눈물 나지요? 왔다갔다하는 눈물이예요.
하나님이 가슴을 열어 놓고 '참 좋다' 할 수 있는 그 말을 언제 할 것이냐? 하나님이 천지창조한 것이 타락이라는 원한의 미궁의 사연 가운데로 사라졌기 때문에 한탄을 하고, 고심하는 그런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궁의 안개를 다 치우고 광명한 가운데서 뚜렷한 궤도, 철로와 같이 올라타면 천 번 왔다가도 그 길을 가야 되는 궤도를 타고 아침 태양에 만우주가 활짝 개어 가지고 환희에 꽉차 있는 걸 바라볼 때, 하나님도 '아, 참 좋다!'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고는 '그렇지?' 하고 돌아다 보니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좋다' 하고 아무도 없을 때는 그거 뭐예요? 기가 막히는 거예요. '참 좋다!' 할 때 옆에서도 '참 좋습니다', 또 하나님이 '그렇지?' 하면 '그렇고 말고요!' 그래야 그 좋은 것이 열매 맺히는 거예요.
그래 여러분, 뜻길을 걸어오면서 복귀섭리노정의 한 단계를 넘어설 때, '야, 좋다. 이제는 가정적 단계를 넘고, 종족적 단계를 넘어가자' 그래서 넘어갔을 때 '종족적 소원성취. 또 넘어가자! 국가적 소원성취, 좋았다' 할 수 있는 그런 과정을 거쳐서 맨 나중에 '영원히 좋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좋은 한날은 천하만상이 보장할 수 있는 기쁨의 날로 연속할 수 있습니다. 그 좋은 곳으로 전진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 아니냐 이겁니다.
인간에게 그런 욕망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런 욕망이 없겠어요? 있다구요, 있다구. 그러면 하나님에게 그런 기쁨을 만들어 줄 수 있고 찾아줄 수 있는 것이 하나님 자신이예요, 인간이예요? 「인간이요」 인간인 나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자체를 다시 뒤돌아보고, 확실한 나, 몸과 마음이 하나된 내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마음 따로 두고 몸 따로 둔 별의별 요사스런 여자들이 많지요? 구미호인가? 나 한국말 많이 잊어버렸어요. 요사스런 여자를 뭐라고 그러나? 마귀 같은 여우를 뭐라고 그러나? 구미호라고 그래요, 귀미호라고 그래요? 그거 잘 모르겠다구. 뭐예요? 구미호라고 그래요? 하여튼 나는 모르겠어요. 그런 여우가 있다 이겁니다. (웃음) 마음이 열 개도 더 되지요? 아침 마음, 점심 마음, 열 시 마음, 열한 시 마음, 한 시 마음, 두 시 마음, 세 시 마음이 있어요. 24시간 마음이 다르다구요. 그런 여우 같은 여자들이 많다 이겁니다. 남자보다 여자가 많아요, 요사스런 여자가.
남자가 많소, 여자가 많소? 나 여자들한테 한번 물어 보자구요. 여자가 많소, 남자가 많소? 뭐 오색 가지 칠면조 같은 7면이 아니라 24면조식의 그런 요사스러운 구미호들이 있어요. 구미호, 구 자 붙이기가 싫어 악여우들이라구요.
자, 그런 여자, 아주 뭐 화장술은 천지에 제일 뭐라 할까요? 구루무 보따리를 뒤집어쓰고, 모습은 세상에 추상화가들도 그릴 수 없는 미녀의 모습이 되어 가지고, 걷는 모습은 남자가 허리를 구부려 가지고 한번 바라보고는 눈이 감기지 않는 그런 걸음걸이를 하고, 봄바람에 맞춰가지고 제비가락에 놀아나는 그런 한 여인이 종로…. 아니 요즈음은 어디가 제일 번화가인가? 서울은 어디예요? 「명동이요」 명동? 「예」 명동이예요? 거 내 이름 자가 들어가서 나쁘다. (웃음) 그래 명동 네거리를 걸어가는데 모든 시선이 집중하여 나의 걷는 자세와 모습을 볼 때 그 기분이 얼마나 좋을까요? 미친 자식들은 보고 좋아할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볼 때는 벼락의 불덩이가 꼭대기를 향해서 저 위에서부터 출발했어요.
이 우주가 얼마나 크냐 하면 말이예요, 몇억 광년이예요. 빛은 1초 동안에 30만 킬로미터를 가는데, 그 30만 킬로미터가 얼마냐 하면,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을 돌 수 있는 거리예요. 그 거리를 1초 동안에 달리는 빛이 1년 걸려서 가는 거리를 천문학에서는 1광년이라 합니다. 그런 광년을 단위로 삼아 가지고 출발한 빛이 몇억 광년이 되어도 아직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그렇게 큰 우주예요. 알겠어요?
그런 거리인데, 그걸 때려잡기 위해서 벼락 같은 불덩이가 '출발!' 발사시켰다 이거예요. 오는 시간이 조금 길 뿐이지 틀림없이 옥살박살되는 것입니다. 어느새 와서 딱, 도킹이 아닙니다, 부딪치는 날에는 옥살박살, 뭐 뼈다귀건 고기 짜박지건 하나도 없이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좋아요?
그것보다 통일교회 패들 말이예요, 보기에는 뭐 허리가 구부러지고, 여자들 얼굴을 봐도 뭐 화장을 할 줄 아나, 차림차림을 봐도, 우리 엄마는 내가 교육을 잘해서 그래도 세련되었지만 말이예요, 제멋대로 되어 가지고 걷는 모습을 보더라도 뭐 궁둥이를 그저 팔도 강산에 냄새를 피우며 걷고, (웃음) 이건 뭐 여자로서는 아무것도 없지만, 그 마음은 멋집니다. 그 생각은 멋집니다.
하나님이 볼 때에 어느 편을 좋아할 것이냐? 천지에 요사스럽게 바람을 피우고 24시간 칠면조같이 변화무쌍한 그런 미모의 여인과, 무뚝뚝하고 밤에 봐도 꼴불견이고 낮에 봐도 꼴불견이지만 그 마음과 몸이 하나되는 것만 생각하면서 '흐흐 허허, 욕이야 하겠으면 해. 복 중에 요것이 복이요, 좋은 것 중에 요것이 좋은 것이다' 하는 무니의 처량한 여인하고, 어느 쪽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을싸? 어떤 게 좋을싸?
요사스러운 여자가 좋을싸, 뭐라 할까 미욱하다고 할까, 못났다고 할까, 한국말에 적당한 말이 뭐 있나, 미욱하고 어리석고 둔하고 곰 같은 여자하고, 어느 게 좋을까요? 하나님은 어떤 게 좋을까요? 「후자요」 대답하면서도 얼굴에 화색이 안 도는구만. '미운 사람이요' 이러고 있어요. 기분 나쁜 모양이지? 당신들은 기분 나쁠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기분 좋다는 겁니다.
어둠이 지나가면 광명한 아침 햇빛이 나와
여기 서 있는 문 아무개가 욕을 많이 먹었어요, 안 먹었어요? 일생동안 가는 데마다 손가락질하고, 담너머에서도 이러고 저러고 손가락질하고, 뒤에서도 이러고 저러고 별의별, 내 사지백체 전부에 손가락질 안 당한 곳이 없어요. 대한민국은 이 정권시대부터 나를 반대하지 않은 사람이 있어요? 여기도 다 반대한 사촌 아들딸 시시껍절한, 소금 가마니 친 바처럼, 소금 가마니 친 바는 쩝쩔하다구요, 그런 모든 이웃 사촌, 물들은 패의 후계자들, 후손, 관계되는 사람들이 여기에 들어왔지요. 한패라는 거예요.
선생님이 좋다구? 좋긴 뭐가 좋아요? 언제부터 좋아했어요, 언제부터? 욕을 먹고 쫓겨 다니고, 별의별 비참한 일을 다 당했지만 생각 하나 달랐다는 거예요. 생각 하나 봐 가지고 하나님은 누구를 좋아하겠어요? 천하 만민이 있고, 세계 40억 인류가 아무리 잘나고, 아무리 훌륭하고, 학박사가 많고, 뭐 어떻고 하더라도 다 제쳐놓고 레버런 문만 좋아한다 이거예요. 어때요? 무엇을 보고? 얼굴 보고? 아니예요.
내 얼굴 잘생기지도 못했지요? (웃음) 세상으로 살았으면 지독한 사람이라구요. 눈이 조그맣고, 보는 것이 예리하거든요. 눈두덩이 나오고, 코가 나오고, 고집이 세고, 한번 한다 하게 되면 그걸 갈라 치우든가, 없애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예요. 내가 관상장이는 아니지만 나를 잘 안다구요.
성격으로 볼 때 하나님이 흥흥하든 아무래도 좋아요. 결국은 마음 자세가 문제라는 거예요. 욕을 먹고 다니면서 등에 지고 다니고, 가슴에 품고 다니는 그 보따리가 하나님에게는 구수한 뭐예요? 구수한 맛이 뭐예요? 팥 삶은 맛. 팥 삶은 물은 말이예요, 여기 들어가도 말썽이고, 어디든지 말썽이예요. 그거 보게 되면 늙은 노친네들 힘이 없이 싸 놓은 똥 같다구요. 이건 어디 가든지, 색깔로 봐도 문제고, 맛으로 봐도 텁텁하고 별것 아니라구요. 팥 삶은 맛, 팥 삶은 맛. 거기에 쓱 설탕을 조금 치면 그것을 일본 사람들은 제일 맛있는 것으로 칩니다. 젠자(단팥죽)인지 무슨 소자인지 나는 모르겠다구요. 구수한 뭐 삶은 냄새? 팥 삶은 냄새. 상을 찡그리는 것 같지만 좋다는 거예요, 이게. 흐들퍼지고 텁텁하고….
엄덕문이 잘 알지? 뚝배기 밥이 맛있다구요, 뚝배기. 해장국은 무엇에다 담아야 돼요? 「뚝배기요」 뚝배기. 뚝배기란 그 이름은 울툭불툭하다는 거예요. 그런 구수한 맛은 하나님 앞에 있는 거 같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세상 사람은, 기독교인들은 그저 빼고 이래 가지고 그냥 그대로, 간판 그냥 그대로 백 퍼센트 나타낸 다음에는 점점점 검어집니다. 그렇지만 레버런 문은 맨 처음에는 부옇지만 점점점 밝아지면서 조금씩 나타난다 이겁니다. 그래서 기성교회는 물러가고, 통일교회는 등극하고. 어때요? 「좋습니다」 새벽 미명을 좋아해요, 해지는 저녁 땅거미를 좋아해요? 그 땅거미가 뭘까? 황혼. 미명이 좋아요, 황혼이 좋아요? 「미명이요」 나는 미명을 좋아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황혼을 좋아하는 거예요.
황혼을 좋아하면 칠흑 같은 자정의 어둠이 찾아올 것이고, 미명을 좋아하면 광명한 오정의 햇빛이 환희의 품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때요? 「맞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의 악마의 대왕이 어서 오라며 입을 벌리고 삼키려고 하고, 여기는 천하를 품고 자랑할 수 있는 하나님이 활개를 펴고 희색이 만면하여 환영을 바라는 오정이 기다리고 있다! 어때요? 어디로 갈 거예요?
나는 자정의 어둠을 거쳐 여명을 향해 가는 길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러니 그 자정을 넘어설 그때는 말이예요, 그 순간에는 검은 빛이나 흰 빛이나 같아요. 도리어 흰 빛이 더 검을 수 있습니다. 반대예요.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자정에도 검은 것이 더 검지, 흰 빛이 더 검어?'하고 말할 겁니다.
여러분, 밝은 것, 휘황찬란한 것을 척 보게 되면 그다음에는 눈이 깜깜해져요, 더 밝아져요? 「깜깜해집니다」 마찬가지 이치예요. 밝은 것은 어둠과 직결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휘황찬란한 흰옷은 자정에 더 깜깜한 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자리에서는 제일 선한 사람이 제일 악마가 될 수 있다 그 말이예요. 세계 역사상에 없는 악마 대장이라고 몰아칠 수 있는 그런 때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자정이 지나서 한 시가 되어 올 때는 점점점…. '저 사람은 나와 같지 않고 다르네. 옷이 왜 저래? 우리는 새까만데. 그거 뭐 거무틱틱하구만. 아이구, 저렇게…. 나는 그래도 전부 다 새까만 게 일색인데, 세 시쯤 되니까 희미하네. 왜 저래? 나는 아직까지…' 이렇게 돼요. 네 시가 되고, 요즘은 네 시 반만 되면 밝지요. 다섯 시면 다 밝지요. '날이 밝았는데 보니 옷이 자꾸 하얗게 변하네, 나는 같은데, 네가 가짜고 내가 진짜지' 할 수 있어요? 왜 진짜냐? 할 때 '나는 밤중을 거쳐 오면서 변함이 없는데 너는 몇 번 변했어? 그러니 변하지 않은 내가 진짜지' 그럴 수 없다 이거예요. 그래, 흰 것이 변했어요, 안 변했어요? 흰 것도 안 변했어요. 환경에 나타나고 비추어 보니 달라졌지, 환경이 달라진 것이지, 그 자체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래서 통일교회가 이제 여명이 되어 가지고 사람들이 보게 됐다 이겁니다. 요전에 우리 협회창립 30주년 기념 뱅퀴트할 때도 한다는 사람 앞에 선생님이 쓱 나타났어요. 거기서 선생님이 명배우가 됐다구요. 우리 이재석 형님도 말이예요, 아주 훌륭하신 분인데, 쓱 얘기하는 것을 보니까 잘 하던데, 아주 뭐 간단히. 그다음에 선생님이라는 사람이 나와 가지고 쓱 얘기했는데 어쨌든 선생님이 스타가 되다시피 했다 이겁니다. 내가 얘기했더니 그저 너무나 심각해 있어서 농을 했다구요. (녹음이 잠시 끊김)
글쎄 용하다구요. 통일교회에서…. 난 그런 의미에서 소담씨한테 좋은 미국 영감님을 하나 얻어 주려고 고르고 골라도 맞는 사람이 없어서 못 골라준다구요. (웃음) 왜 웃어요? 아, 이름도 소담하고 통일교회 역사상에 있어서 태도도 소담스러운데, 소담스러운 영감을 얻어 줘야 소담이라는 것이 맞지요.
무엇이 닮아야 돼요? 「마음이요」 마음이 닮아야 돼요. 변치 않는 마음, 그 마음은 뜻밖에 없어요. 뜻에서 맺고, 뜻에서 엉클어지고, 뜻에서 자리잡은 마음이예요. 나는 복귀노정을 가야 돼! 모든 것을 희생시켜서라도 가야 돼! 그게 선생님식입니다. 모든 것이 반대해도 가야 돼요. 마음이 그러면 그다음에 몸뚱이는 흐들흐들해져서 따라가는 거예요.
그래 소담씨, 요즘에는 늙으니까 섭섭하지? 선생님도 몰라주고, 상대도 없이 혼자 가만히 있으니까 여기 협회장도 알아주지 않고, 가만히 보니까 이제는 죽을 날이 가까와 오고 처량하시지? 죽을 때는 그럴 거라. '나 죽을 때 선생님 죽어야 돼요' 할 거야? (웃으심) 아, 물어 보잖아? 어떤가? 아니면 '선생님 죽을 때 나 죽을래'야? 어떤 거야? 그래 소담씨는 빨리 죽고? (뭐라고 답변함) 그 말은 뭐냐 하면 '선생님 만수무강하세요'입니다. 나는 이미 지내 놓고 만수무강하는 것을 바라는 그 자리에서 선생님도 만수무강이야, 나는 만수무강이 필요 없고 선생님만 만수무강이야? (웃음) 물어 보는 거예요. 「뜻이 이루어지면…」 뜻이 이루어지는 걸 보고 죽겠다는 것이 만수무강보다 더하다는 거예요. (웃음)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할 것 없이 자기라는 것은 언제나 남아 있는 거예요. 그거 물을 게 뭐 있어요? 자기라는 것이 이런 것에도 남아 있고, 저런 것에도 남아 있어요. 이래도 자기가 요동하고, 언제나 자기라는 것이 요동하기 마련이고, 자기라는 것이 자기를 파탄시키기 마련이고, 자기를 그저 망신시키기 마련입니다. 자기라는 것이 이래요. 그래서 그런 마음 앞에 그런 몸이 필요합니다.
타락한 인간세계에서 제일 복된 말은 참부모
복귀의 길을 가는 사람은 45도 아래를 내려다봐야지, 45도 위를 올려다보면 전부 사탄편이 됩니다. 복받겠다고 하게 돼 있지 않아요. 복받겠다고 하는 사람은 탕감길이 싫다는 말입니다. 벌받겠다고 하며 가는 길이 복귀의 길입니다. 세상에서 빨리 망할 자리를 패스하기 위한 것이 복귀의 길입니다.
그걸 안 하려고 하니, 그걸 하지 않고는 넘어설 수 없으니 하나님은 핍박이라는 것을 세워 가지고 통과시키는 거예요, 핍박. 세계가 전부 반대하는 거예요. 전부 부정하는 거예요. 내가 부정하지 않으니까 세계가 나를 부정해 가지고 부정하는 자리에서 그래도 변치 않고 꿋꿋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가 전부 다 반대해도 그 자리를 넘어가야 되는 거예요. 거기서 반대하는 환경을 참고 넘어가게 되면 내가 세상을 부정하고 넘어선 것으로 인정하는 겁니다. 그래서 종교의 길은 핍박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아시겠어요?
이것이 종교세계의 비밀입니다. 사탄과 하나님 전술에 있어서 하나의 비밀노정이 되어 있는 걸 알아야 돼요. 레버런 문이 나와서 이런 걸 폭로하니 사탄은 죽을 지경이지요. 그래서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핍박을 받아 나왔어요. 레버런 문은 핍박의 첨단에 선 거라구요. 여러분들도 선생님이 어려울 때 눈물도 흘려 봤지요? 기도도 해봤지요? 그게 필요한 거예요. 먼 나라 있는 곳은 다르더라도 마음의 세계에서는 일방통행을 갖추어 간다 이거예요. 그게 귀한 거예요. 이런 말을 왜 하느냐? 나는 마음과 몸이 하나된 그 기반 위에서 본연의 기준의 자리는 어딘지 모르지만 선생님만 붙들면 된다는 겁니다. 그 선생님이 어디서 출발했느냐? 부모라는 이름을 가지고 출발했습니다. 무슨 부모예요? 참부모라는 겁니다. 그게 놀라운 말이예요. 알겠어요?
선생님이 잘생기지는 못했지만 말이예요, 훌륭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상적인 목적의 기준, 그 정착점이 뭐냐? 참부모예요, 참부모. 알겠어요? 참부모예요. 하나님의 뜻의 완성이 뭐냐? 창조이상 완성이 뭐냐? 아담 해와가 사랑이상을 이루어 가지고 직접주관권 내에서 부모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이 이상적 기준이 아니겠느냐? 뜻의 완성의 자리가 아니겠느냐? 그러므로 선생님이 이 땅 위에 참부모라는 이름을 가지고 온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알아야 된다구요. 아시겠어요? 참부모라는 말, 세상의 말 중에 제일 복된 말이 타락한 인간에게 있어서는 그 나라를 잃었다가 찾는 것보다도, 세계를 잃었다가 찾는 것보다도 참부모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천지의 그 무엇보다도 귀하다는 걸 알아야 된다구요.
왜 그러냐? 내 출발의 기점이 거기서부터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의 무엇에서부터? 거기의 사랑으로부터. 자식이라는 것은 부모의 사랑의 맥박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그 사랑에 동참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나'라는 사람입니다. 아들딸이라는 거예요. 동참잔데, 부모의 사랑은 원인적 사랑이고 나는 결실적 사랑의 실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인적인 사랑은 결실된 자식을 떼어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부모의 사랑의 원칙적인 논리가 여기서 성립되는 거예요. 알겠어요? 그래, 생명이 먼저냐, 사랑이 먼저냐? 사랑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참사랑에서 났기 때문에 참사랑을 위해서 죽을 수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아까 말한 개인적 자리를 확정지을 수 있는, 하나님이 바라는 뜻의 완성의 이상적 기점, 그 중심점의 기준이 뭐냐 하면, 참부모의 자리입니다. 참부모가 이루어진 자리인데, 오늘날 '나'라는 사람은 그러한 참부모로부터 태어났다는 자각이 필요해요. 그러므로 참부모의 자식은 참부모가 가는 길을 영원히 반대할 수 없고, 영원히 이의가 없이 걸어야 됩니다. 자연적인 길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아시겠어요, 무슨 말인지? 좋은 말이나 나쁜 말이나, 어려운 일이나, 쉬운 일이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백 퍼센트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것이 효자가 가는 길입니다. 알겠어요? 효자가 가는 길이예요.
이번 3년노정에는 뜻을 내 것으로 소화해야 해
통일교회 교인들은 지금까지 복귀도상에서 선생님이 걸어온 역사노정을, 제시한 모든 것을 이의 없이 백 퍼센트 받아들여야 되는 겁니다. 알겠어요? 왜? 어째서? 효자의 길을 찾아가려니. 그거예요. 효자의 길을 찾아가면 어떻게 되느냐? 왜 효자의 길을 찾아가야 돼요? 부모님의 상속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효자는 상속을 받기 마련입니다. 억천만금 전체를 갖춘 귀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 귀한 것은 효자가 물려받기 마련이다 그 말이예요. 알겠어요? 「예」
지금까지는 효자가 못 됐지만, 나라에서도 깡패가 되고, 가정에서도 깡패가 되고 이랬지만, 가만히 보니까 하나님이나 참부모가 소원하는 것이 세계 전쟁에 나가 가지고 승리를 가져오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이겁니다. 지금까지는 못 했지만 하나님의 모든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최후의 세계 전쟁에 나가 가지고 아무리 고통과 죽음이 있더라도 기쁘게 맞아서 여기에서 승리를 가져오면 세계적인 효자의 자리에 나갈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알겠어요?
그러면 본래는 세계적 효자의 자리를 어떻게 상속받느냐? 개인적 효자가 되어 가지고 종족적 기반에 나가서 효자가 되어 가지고 가정을 물려받고, 민족적 효자가 되어 종족을 물려받고, 국가적 효자가 되어 민족을 물려받고, 세계적 효자가 되어 국가를 물려받고, 천주적 효자가 되어 세계를 물려받는다는 논리가 성립돼요.
그러면 형님들이 다 못 했는데, 지금까지 효자였던 사람들이 다 못 했는데, 불한당 같은 망나니 불효자식이 국가기준까지는 전부 다 반대했지만, 세계기준에 있어서 효도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에 말하기를 '너는 세계의 대승리자가 됐는데, 네가 지금까지 지은 죄로 말하면 몇십 년 형을 받아야 되지만 감형이야, 용서야' 이러겠어요, 부모가 아들딸 모두 앞에서 '너희 형님 동생들이 전부 다 참소하니 안 되겠다'고 그러겠어요? 형님 동생들보다 못한 자리에 있다면 부모가 그 자식을 세워 가지고 '과거는 잘못되었지만 세계적 승리의 길을 간 동생이니 이 동생을 사랑해야 되겠나, 사랑 안 해야 되겠나' 할 때에 그 형제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사랑하지 말아야 돼요' 그럴 것 같아요, '사랑해야 돼요' 그럴 것 같아요? 「사랑해야 된다고…」 왜 그러느냐 하면, 그로 말미암아 세계의 복을 상속받는 데 동참하니까, 그 형제들은 책임을 못 했지만 그 동생으로 말미암아 세계의 복을 상속받을 수 있는 동참 권한을 소유할 수 있으니까. 알싸, 모를 싸? 「알싸」
3년노정을 정한 것도 그런 의미에서예요. 오늘날 통일교회 사람들이 탕감노정을 가고 뭐 한다지만 다 몰랐어요. 모르고 따라왔다 이겁니다. 그렇지만 이제 때가 다 되었습니다. 넘어갈 때가 되었으니 부모님은 최후에 가서는 돌아서는 겁니다. 돌아서는 데는 최후의 정상에서부터….
이러한 때를 갖추어서 부모님이 다 가려 가지고 부모님의 모든 것을 상속해 주기 위해 이런 논리 원칙에 일치될 수 있는 기반 위에, 여러분을 한때라도 고생시켜 가지고 전체 과거지사를 망각시키고, 전부 다 용서해 가지고 승리의 영광에 서슴지 않고 동참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싶어서 특정 기간을 마련했다는 사실은 지극히 고맙고 감사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듣기는 듣고 있구만.
자, 그러니까 이제 '아이구, 선생님! 내 여편네는 어떡하오?' 묻지 말라! 마음대로 하라구. 이제는 모른다는 사람 한 사람도 없을 거라구. '아이구, 내 아들딸 어떡하오?' 하고 묻지 말라! 묻기 전에 다 알고 있는 거예요. '내 가정 어떡하오?' 하고 묻지 말라! 그건 내가 어떻게 해야지. 그렇다는 거예요. '아이구, 나 통일교회에서…' 하겠지요? 통일교회와 관계를 맺지 말라! 알겠어요? 다 맺지 말라는 거예요. 선생님하고 관계를 맺지 말라! 이것만은 여러분의 것이예요, 여러분의 것. 이것만은 여러분을 위해서 여러분의 것으로 부여하는 특권입니다.
지금까지는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았고, 선생님이 가는 뜻으로 알았고 교회가 가는 뜻으로 알았지만, 이제는 내가 가는 뜻으로 소화하지 못했던 원통한 과거지사를 아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때만은 내 뜻입니다, 내 뜻. 이때만은 내 싸움이예요, 내 싸움. 여러분의 싸움이예요. 제삼자의 것이 아니예요. 갑과 을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예요, 내 것. 내 것으로 소화할 수 있는 자주적인 확고한 신념을 세워 가지고 이 고비를 넘어가면서, 부모님이 이미 넘어갔던 길이니 환경을 순응하여 넘어가서 다시 돌아와 가지고 부모님을 내가 모시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된다구요.
부모님은 넘어갔다 와 가지고 여러분들을 데리고 가려고 이 놀음 하고 있는데 여러분들도 이제 이 고개를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와 가지고 부모님을 모시고 거기서 살겠다 해야 됩니다.
지금까지는 선생님에게 끌려왔지마는 이때만은 내가 부모님을 모시고 가겠다 할 수 있는 그런 자세를 가짐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주체의 권한을 상속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뜻은 선생님의 뜻으로 소화해서는 안 된다 이겁니다. 내 뜻으로 소화해야 됩니다. 아시겠어요? 「예」 통일교회 뜻이 아니예요. 하나님의 뜻이 아니예요. 그 누구의 뜻이 아니예요. 내 뜻이예요.
여러분 사정이 많지요? '아이구, 새끼들하고 여편네 어떻게 해?' 할 거예요. 선생님도 그런 사연이 있었다구요. 통일교회 여러분들은 선생님보다 행복하다고 본다구요. 자식을 버리고, 여편네를 버리고 뜻을 위해 가야 되는데 '이놈의 간나야, 뜻길을 가야지' 하게 되면 '그래요, 가야지요' 하는 말이라도 할 수 있지. '나를 버리고, 자식을 버리고 당신 가야 돼. 애기들을 얼러 업고, 고아원에 넣고라도 가야 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미 아비가 죽어. 죽게 되면 애기들까지 비참해. 한때에 헤어지지만 살기 위해서 살아 돌아온다면 너를 데리고 천국에 갈 거야' 하는 그것이 원래의 원칙적인 부모의 심정이 아니냐 이거예요. 그 길을 가야 할 운명길을 남긴 복귀노정에 선 인간들이라구요. 복귀노정에 선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싫으나 좋으나 가야 돼요. 이것이 가정적 운명이 아니라, 필연적 운명으로 나에게 부딪치고 있는 거예요.
선생님도 그 길을 간 옛날이 있는 거예요. 성진이 어머니가 선생님 넥타이를 졸라매고, 신을 거꾸로 쥐고 '나를 버리고는 가지 못한다'고 반대했어요. 반대했을 때 주저앉았으면 통일교회가 남았겠어요? 오늘날 이와 같이 천리 앞에 서 가지고 탕감노정, 복귀의 노정을 거쳐서 승리를 논할 수 있는 이런 시대를 맞이했겠어요? 비참하다는 겁니다.
부모를 버리고, 처자를 버리고, 길을 닦아 가지고 사인을 해 놓고 시민권을 갖고 와 가지고 데리고 가는 거예요. 여러분은 시민권을 안 받았다구요. 알겠어요? 족보가 없어요, 아직까지. 족보가 없다구요. 여러분,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졌어요? 무슨 지파예요? 여러분은 무슨 지파예요? 뭐라고 할까? 두루뭉수리 지파지. 그거 없다구요.
그런 고개를 넘어간 사람만이 지파편성이 가능합니다, 지파편성. 알아요? 가나안 복귀를 한 후에 열두 지파에게 땅의 분깃, 책임적인 소유권이 비로소 주어진 거예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으로부터 민족적 소유 분배를 받은 거예요.
오늘날 세계이상을 찾아 가나안 복귀노정을 가고 있는 통일교회는 세계 가나안 복귀를 완료해 가지고 세계 만국에 대한 소유권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시겠어요? 거기를 넘어가 가지고 이제 자리를 잡고 종족편성을 하고 민족편성을 하고 새로운 국가편성을 해 가지고 일원화된 단일세계, 하나님을 중심한 통치세계로 넘어갈 것이라고 보는 거예요.
이번 3년노정에 세계가 환영할 수 있는 기반을 닦자
이것은 민주세계도 아니요, 공산세계도 아닙니다. 민주와 공산의 과정의 지팡이 같은 주의요, 심정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의 주의를 말하자면 하나님주의입니다. 그 내용으로 말하면 심정의 세계입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효자로부터 시작하여 저 지옥 밑창까지 적용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 적용된 사랑이 하늘로부터 돌아올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어요. 언제든지, 어느 길을 향하든지 거기에는 막는 부작용이 없는 심정권의 세계입니다. 아시겠어요? 「예」
이 길을 넘어갔다 와 가지고야 내 뜻의 자리에 설 수 있는 여러분의 자기주장권이 생깁니다. 여기를 넘어가서야 비로소 여러분의 생활도 자유가 될 수 있어요. 여러분의 아들딸을 위해서 피땀 흘려 벌어 가지고 잘살 수 있는 걸 부여할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여러분을 부모로 높일 수 있는 효자를 데리고 그 효자와 더불어 부모의 자리에 서서 참부모 앞에 자랑해 보일 수 있는 여러분의 가정이 편성되는 것입니다. 참부모는 그렇게 편성된 가정을 연결시켜 족속과 민족과 국가를 형성하여 하늘나라에 데리고 들어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시일을 거쳐 한 세계의 사랑권에 일족으로 화해 버리는 겁니다. 거기에는 문화의 차별이 없습니다. 그런 아담 이상문화의 세계로, 심정문화의 세계로, 태평왕국의 세계로 전진할지어다! 아멘. 「아멘」
전진하는 데는 내 뜻을 가지고 전진해야지, 아버지의 뜻 가지고는 안 돼요. 그런 사람은 자주적인 사람이 못 되는 겁니다. 알겠어요? 이제 최후의 장벽에 서 가지고 이 담을 허물고 3년 동안 내 목숨 바쳐 가지고 세계 대신 대한민국을 샅샅이 뒤져라. 도 책임자는 도 전체가 세계의 축소판이고, 대한민국의 축소판이라 생각하고 샅샅이 뒤져라 이거예요. 군 책임자는 군 전체가 대한민국과 세계와 도 전체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부모님이 거친 모든 것을 조건적으로 탕감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홈 처치 운동이예요. 홈 처치는 조직 편성단위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 세계가 환영할 수 있는 기반을 3년노정에 전부 다 이루어 놓거들랑 홈 처치 시대는 전쟁 없이 환영의 홈 처치권 시대로 넘어간다고 보는 거예요. 알겠어요?
3년 동안 핍박받는 홈 처치보다도, 3년 동안 세계에 환영받을 수 있는, 히말라야 산정에 올라가 승리의 깃발을 꽂고 넘어서게 된다면 어느 나라에 가든지 히말라야 정상을 정복한 자로서 환영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승리의 권한을 갖고 내려와야 된다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그다음에는 그 등정했던 사람들을 중심삼고 모든 조직편성이 벌어지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 이치도 그렇고 하나님 세계도 마찬가지라는 걸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내 일가, 내 일족, 내 일국, 내 세계, 내 천국은 부모님이 갖춘 것이기 때문에 내 것이다 이겁니다. 아시겠어요?
내 뜻으로 출발해야 돼요. 내 가정과 내 나라와 내 세계를 부모님으로부터 인수받았기 때문에 내 세계를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내 세계를 만드는 길이 홈 처치를 중심삼고 360가정을 완전히 하나 만드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홈 처치를 거치게 될 때는 지상천국 천상천국 어디든지 환영하는 기준, 부모님이 역사 시대에 탕감한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 탕감했다는 기준이 됩니다. 이 3년노정은 이스라엘 민족으로서 가나안복귀를 넘어가기 위한 통고 기간이예요. 이걸 넘어가서 여러분들의 뜻의 소유물을 결정받아야 돼요. 그럼으로써 승리의 천국 소유를 갖고 하나님 앞에 당당히 사랑의 대상자로 서 가지고 만유의 참부모의 권한을 대신 완전히 상속받은 승리의 하늘나라의 아들딸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아시겠어요?
그러니 내 뜻으로 소화시켜야 돼요. 선생님이 이렇게 지시했기 때문에 한다는 생각은 그만두라는 겁니다. 내가 원해서 한다고 해야 돼요. 아시겠어요? '3년노정이 역사적으로 필시 있어야 할 것이어늘 선생님이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해서 한다. 선생님은 그러한 때를 가르쳐 줄 뿐이다. 이때만은 내가 넘어야 되겠다. 내 것으로서, 내가 원해서 이런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정지어 가지고 출발하여 3년 동안 대한민국 전부 다, 거지굴까지 전부 다 가서 가르쳐 줘야 됩니다, 3년 동안.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내가 미국에서 말하기를 '이 3년 기간에는 감옥생활 하던 이상 해라' 했습니다. 감옥생활 이상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그건 누구의 명령에 의해서? 「내 명령에 의해서요」 내 자진 명령에 의해서, 자원 명령에 의해서. 선생님 명령, 하나님 명령이 아닙니다, 자원 명령에 의해서. '너 박공서 몸뚱이는 갈지어다' 할 때는 몸뚱이가 '아멘' 해야지. 물론 여편네 생각도 나겠지. 그러나 '이놈아!' 명령하면서 가야 돼요. 여편네는 그 길을 가라고 격려해야 돼요. 그러지 않으면 사탄이 되는 거예요. 자식들도 그래야 된다구요.
그래서 오늘 제목이 무엇인가요? 뭐예요? 「나의 뜻」 나의 뜻, 나의 뜻이 되어 가지고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부터 결실했다는 자리를 넘어서지 않고는 상속을 받을 수 없다구요. 아시겠어요? 효자가 되기 전에는 상속을 받을 수 없습니다. 부모님이 명령해서 하는 것은 진짜 효자가 아니예요. '야, 내가 오늘 고기가 먹고 싶으니 좀 사와라' 할 때 '예, 그러지요'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예요. 부모님이 말하기 전에 미리 해야 된다 이겁니다. '오늘 시장에 나가 보니 좋은 고기가 있는 걸 보고 어머니 아버지 생각 나서 얼마 안 되지만 사왔습니다' 하는 것이 천번 만번 사오라고 명령해서 사오는 것보다도 더 귀하다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누구 명령에 의해서? 자진 명령에 의해서. 그거예요. 자진 명령에 의해서. 부모님은 원하지 않더라도 내가 이렇게 원해서 한다는 입장에 서 가지고 함으로 말미암아 효자의 이름을 지녀 부모님이 갖춘 모든 상속을 받기에 부끄럽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과정이라는 말입니다. 그럴싸, 말싸 「그럴싸」 '그럴싸'라고 대답한 사람은 쌍수를 들어 하나님 앞에, 부모님 앞에 맹세할지어다! 아멘. 「아멘」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통일교회 역사를 생각할 때에, 멀고 먼 과거지사와 같이 안개 속에 또 안개 속에 흐려 버리고 싶은 사연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날까지 당신께서 섭리의 뜻을 세우기 위하여 수많은 선지선열들과 선조들을 이 땅에 보내어 죽음의 골짜기에 몰아넣기도 한 것도 당신의 뜻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뜻의 자리를 결정짓기 위한 엄숙하고 엄연한 내용이 있는 것을 땅 위에서 당신을 추앙하고 있는 모든 종교인들은 알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연들을 품고 이 어린 것을 불러 일깨우시어 소명의 길에 서게 하시고, 천신만고의 수난길을 거치게 하여 안팎으로 닦아 사연 사연들을 전수하면서 이끌어 주신 아버지의 노고 앞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날 이때까지 통일교회가 남긴 승리의 실적이 있다 할진대는, 하나님께서 부모의 자리에서 자식을 사랑하시는 그 후대 후애하신 사랑의 동기로 보호 육성하고 지도해 주신 연고인 것을 진실로 진실로 진실로 감사를 드립니다.
지나간 날들이 역사의 한과 더불어 저희들이 가는 통일교회 길을 물고늘어졌지만 이미 다 흘러간 역사로 남아졌습니다. 이제 자정이 지난지 이미 오래 되었고 저희 앞에는 새로운 광명한 아침이, 먼동이 트기 시작하는 여명기에 처해 있사오니 자신이 자신을 분간할 수 있는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시선을 갖추어 높은 자는 높은 자대로, 낮은 자는 낮은 자대로 주목하는 시점에 우리가 섰습니다. 우리의 거동이 아무리 추하고, 아무리 부족하다 하더라도 부모님을 위한 효성의 마음이 불타는 연고로 이런 결과가 되게 될 때는 그 모든 환경적 요건은 일시에 해소되는 놀라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통일교회 무리들이 가는 길에 부모님이 그리워 부모님 가시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나도 모르게 솟구치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인연은 지금 이때에 몇 년 통일교회 믿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천추만대 인류역사의 원한의 골짜기를 더듬어 오면서 생명의 인연을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의 연속으로 연결시켜 맥을 이어 가지고 오늘날 접붙여져서 현현한 역사적인 자신인 것을 자각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내 일신의 승리는 역사의 승리요, 내 일신의 패망은 역사의 패망과 직결된다는 그러한 엄청난 자신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에 들어오게 된 것도 자기의 소이에 의해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소명의 소이에 그 방향이 일치하여 많은 희생의 대가를 치른 연유인 것을 생각하면서, 겸손히 머리 숙여 선조들 앞에, 혹은 하나님 앞에, 혹은 부모님 앞에 짐이 되지 않겠다고 몸부림치는 갸륵한 자녀의 모습을 하늘은 동경하고 있고, 인류는 그런 효성의 형제를 사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사옵니다.
지상의 통일교회로 말미암아 참부모의 인연을 알고, 이제 최후의 정상의 고개를 넘어야 할 이때에 있어서 비로소 부모님 앞에 서 가지고, 이 정상을 넘고 넘어 가지고 승리의 예물을 가지고 피로한 부모님을 모시고 넘어갈 수 있는 한때의 효성을 잊어버리는 불쌍한 무리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음의 문을 열고 당신의 소명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일신으로 알았사옵니다. 내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당신의 소명 앞에, 분부하신 명령 앞에 스스로를 다짐하여 승리의 왕자가 되겠다고 선서할 수 있는 엄숙한 시간이 되었사오니, 여기에 아버지께서 좌정하시어 일일이 체크 하시사 당신의 자녀된 명분을 그 마음에 다시 한 번 재인식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나머지 최후의 정상 고개를 넘는 데 있어서 과거지사 모든 실수와 부족한 것을 잊어버리고 이 한때의 승리의 기록으로 전체를 대신할 수 있게 하시옵고, 후대하신 당신의 섭리의 승리권이 저희에게 연결되게끔 축복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나의 뜻으로 소화시킬 수 있는 승리의 한날을 맞음으로 말미암아 부모님이 갖추고 하나님이 갖춰 준 영원불변한 천국 기업을 상속받을 수 있는 놀라운 사실 앞에 감루(感淚)하면서 부복할 따름인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무 말 없이 황공하고, 감사하는 눈물의 생활, 핍박의 와중에서도, 고독한 자리에서도 당신을 위해서 눈물지으며 마음에 행복의 희열을 체휼할 수 있는 하늘 족속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출발을 예고하는 이 순간 위에 이들의 소망과, 이들의 마음에 울부짖는 벅찬 결의의 심정이 다시 폭발되게 하시옵소서. 민족의 환경을 넘어 아시아로, 아시아의 환경을 넘어 세계로, 세계의 환경을 넘어 천주의 아버지를 이 땅 위에 모셔 들이어 하나의 왕국건설의 대도를 밝힐 수 있는 하늘나라의 정병임을 자각하는 이 시간이오니, 아버지, 부디 각 개인을 붙드시사 스스로의 뜻으로 소화할 수 있는, 주체인 당신 앞에 자녀로서 사랑을 중심삼고 대상권을 갖출 수 있는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날들 앞에 부끄럽지 않고, 찾아오는 인류와 세계 앞에 부끄럽지 않은 효성지조를 갖추어 놓은 오늘 여기에 모인, 서울 지구에 있는 오래된 식구들이오니, 아버지, 축복하시옵소서.
한국 서울을 빛내 삼천리반도 만방에 그 인연을 넓힐 수 있게 그 역사의 자료를 모든 나라 나라 위에, 민족의 가슴 가슴 위에 심고 남아질 수 있게끔, 아버지,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만만사의 은사와 사랑이 영원히 영원히 이들과 이 한국과 세계 위에 같이 하시길 바랍니다. 이날 이 시간 이곳을 향하여 바라고 있는 전세계에 널린 통일의 무리들의 간곡한 마음과 이날의 말씀과 연결되는 자리 위에 풍성한 부활의 승리가 같이 찾아오고, 사랑의 심정의 인연이 엉길 수 있는 하나의 기원을 이루어 주시옵기를 재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축원하였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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