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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비폭력 직접 행동
시민의 불복종은 비폭력 직접 행동의 교과서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비폭력 직접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교하는 과정을 거쳐보면 됩니다.
폭력 비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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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0) 테러 집회, 시위, 조세, 병역 등 불복종
직접 행동 ------------------------------------------------
대상(x) 묻지마 살인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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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 전쟁, 청부 폭력 다양한 회의, 협정, 법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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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 대의 정치가 원활하게 개인 삶의 직접적 요구를 풀어갈 수 있으면 폭력과 비폭력의 나머지 영역은 빈번하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폭력 대의정치 기능이 본질을 상실하고, 형식적 민주주의에 그칠 때 다양한 행동이 자기 정당성을 가지게 됩니다.
가. 테러
폭력 직접행동의 대표적인 방식이 테러입니다.
테러는 모순을 일으키는 개인이나 집단에 대하여 직접적이고 효율적인 공격을 통하여 문제를 단숨에 해결하는 행동입니다.
테러의 정당성은 모순의 위험성이 너무 커서 신속한 해결 외에는 다른 방법을 찾기 힘들 때 받아들여집니다.
테러는 깊은 내면적 성찰과 자기를 넘어선 더 큰 존재에 대한 신뢰가 깊을 때 가능합니다.
테러는 흔히 민족, 종교, 이데올로기 이런 가치에 지배받는 직접 행동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테러한 안중근 의사 경우를 보면 민족 독립, 동양 평화, 하나님에 대한 믿음 이런 요소가 고르게 겸비된 테러리스트입니다.
나. 묻지마 살인
묻지만 살인 형태의 폭력 직접 행동은 형식적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능한 대표적인 폭력 양식입니다.
자신이 엄청난 모순에 빠져서 도저히 헤어날 길을 찾지 못하겠는데, 지금 이 상황에 대해 누구를 원망해야 할 지 찾을 수 없는 경우에 나타납니다.
테러가 구체적인 대상과 목표가 있고, 뚜렷한 자기 결정인데 반하여, 묻지마 살인은 증오의 대상을 찾을 수 없고, 상당히 많은 경우 자기 결정이 아니라 내면의 혼란에서 발생합니다.
다. 자살
자살은 사회적 모순을 고발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청소년이 죽을 경우 대부분은 자살이고, 원인은 태반이 시험 성적과 친구 관계의 폭력입니다.
왕따 문제의 폭력성은 꾸준히 개선하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 지고 있고, 다양한 프로그램이 개발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자살 원인인 시험은 아무도 답이 없습니다.
시험을 강화시키는 구조는 자살을 확대하는 것인데도 이걸 막아내지 못하는 우리 사회는 청소년에게 자살 권하는 사회입니다.
아직까지 한국의 청소년들은 자살 정도를 선택하는 선에서 그치고 있지만, 지금 상태가 조금 더 계속되면 미국에서 흔히 보는 교내 총기 무차별 살인과 자살이 혼합되는 상황으로 갈 지도 모릅니다.
라. 불복종 행동
대의 정치의 주체인 국가가 권력을 위임한 국민의 양심에 반하여 침략 전쟁을 일으키거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한 목적으로 대의 권력을 사용할 경우 권력의 주체인 국민이 국가에 대해 저항하고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소로의 시민 불복종은 이런 저항이 어떤 정신적 가치를 배경으로 가지고 있는 지를 성찰한 내용입니다.
아래의 내용은 주로 시민불복종의 정신적 가치입니다.
2. 애국심과 수치심
< 오늘날 이 미국 정부에 대하여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한 인간으로서 올바른 자세일까?
수치감없이는 이 정부와 관계를 가질 수 없다. 나는 노예의 정부이기도 한 이 정치적 조직을 나의 정부로 단 한 순간이라도 인정할 수 없다.>
< 나라에 도가 있는데도 가난하고 천하다면 부끄러운 일이요. 나라에 도가 없는데도 부하고 귀하면 부끄러운 일이다.
- 논어 14편을 소로가 시민불복종에서 인용함>
한국이 일본에 지배받은 시기에 대한 느낌을 어떻게 표현하는 게 좋을까요?
이런 건 모욕감이라고 표현해야 정확할 겁니다.
모욕은 상대로부터 내가 받는 것이지만, 수치심은 내 행동이 가지는 부끄러움입니다.
그런데, 이 수치심을 느끼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국가의 이익이 자신의 이익과 연결될 때는 완전히 가치관의 혼란이 발생해 버립니다.
이라크에 한국군을 파견할 때 가장 중요한 논리는 ‘국익’이었고, 국익 앞에서 대부분의 국민은 침략 전쟁에 참여하는 수치심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이해 방식은 경쟁 교육을 유지하는 게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국익을 위하는 길이라는 생각, 거짓일 수 있지만 국익을 위해 황우석의 연구를 지원해야 한다는 생각 등등 우리 삶의 거의 모든 부분을 지배하는 생각입니다.
실체가 없는 국익 앞에서 수치심을 느끼지 못한 국민은 결국 자기 삶이 다 파괴되는 지경에 이르러도 뭐가 부끄러운 일인지 모른채 아귀다툼에 골몰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3. 각자 다른 책임
<만약 불의가 정부라는 기계의 필수불가결한 마찰의 일부분이라면 그냥 내버려 두라. ....
그러나, 이 불의가 당신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하수인이 되라고 요구한다면 분명히 말하는데, 그 법을 어겨라. ....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려는 중요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좋든 나쁘든 그 안에서 살기 위해서이다. 한 사람이 모든 일을 다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중 어떤 일만 하면 된다. >
촛불 시위에 대한 진압 거부를 선언한 이길준님의 경우를 예를 들어 봅시다.
자기 양심에 따른 이 행동은 중요한 저항이었는데, 이 행동은 전경으로 시위 현장에 투입된 사람이 가능하지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기회가 아닙니다.
내가 국가에 저항하기 위해 시위 진압을 거부하고 싶다고 해서 내게 주어지는 기회가 아닙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시위 진압 거부’가 아니라 다른 형태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이 다르고, 책임도 다릅니다.
내가 나에게 주어진, 나의 양심에 따른 행동을 하기만 하면 되지 그 이상까지 모든 일을 다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캄포님께서 대추리에서 만난 친구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천명 정도가 모이는 대규모 집회가 있어서 무대를 만들고 있는데, 한 친구가 왜 천명이라는 사람이 다 각자 자기 생각을 가지고 이 자리에 모이는 건데, 한 곳으로만 시선을 모을려고 하는 지 모르겠다. 자기가 가진 생각만큼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방식을 우리는 왜 생각을 못하는가? 이 말을 듣는데, 열심히 무대를 만들고 있던 자신이 왠지 머쓱해 졌대요.
대추리 투쟁이 어느 정도 정리되는 상황에서 대추리 지킴이들이 떠나고 있는데, 한 친구가 이제 대추리는 끝났다, 지금 중요한 투쟁은 한미자유무역협정 반대 투쟁이다. 우리는 그 투쟁에 합류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어요.
캄포님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FTA 반대 투쟁이 중요하니까 그 일을 하세요. 저는 지금 여기에 있고 싶어요.
흔히 이렇게 말하면 분열이라는 말을 듣곤하는데, 이렇게 봐선 정확한 해석이 아닙니다.
‘각자 다른 책임’ 이렇게 볼 때 상황을 풀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그 동안 해오던 운동의 모습이 한 인간에게 너무나 큰 책임을 지게 하는 방식이고, 그걸 지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는 지도 모릅니다.
4. 한 사람으로서의 다수
<정의가 자신들을 통해 승리하도록 노력하지 않고, 한 표 앞선 다수가 될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된다.
만약 그들이 하느님을 자기편으로 두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며, 다른 사람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더욱이 어떤 사람이든지 그가 자기 이웃들보다 더 의롭다면 그는 이미 ‘한 사람으로서의 다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만은 알고 있다. 즉, 이 메사추세츠 주 안에서 천 사람이, 아니 백 사람이, 아니 내가 이름을 댈 수 있는 백 사람이, 아니 단 한명의 정직한 사람이라도 노예 소유하기를 그만두고 실지로 노예제도의 방조자의 입장에서 물러나며 그 때문에 형무소에 갇힌다면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
촛불집회는 한 장의 사진으로 무수한 말을 하는 사진들이 참 많았습니다.
인상적인 사진 중의 하나가 한 소녀가 청와대 앞에서 ‘촛불이 길입니다.’ 손팻말을 들고 있고, 그 주위를 전경이 에워싼 사진이었습니다.
나중에 이 소녀에게 기자가 무섭지 않았냐고 물었습니다.
이 소녀의 대답입니다.
“헐”
‘한 사람으로서의 다수’라는 역설은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데 이 사진 한 장으로 말 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앞에 아무리 많은 전경이 있어도 이 소녀에게는 더 많은 지지자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혼자가 아님을 알기에 내면에서 솟아나는 당당함이 있습니다.
비폭력 직접 행동의 당당함과 발랄함은 이런 기초에서 나옵니다.
5. 위험한 명상 (사회적 명상)
< 나는 6년 동안 인두세를 물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는 하루 밤을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나를 단지 살과 피와 뼈로 된 존재로만 여겨 잡아 가두는 이 제도의 어리석음에 그저 경악할 뿐이다. ... 나는 잠시라도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감옥 벽의 돌과 회반죽을 공연히 낭비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 그들이 나의 명상의 문에 열심히 자물쇠를 잠그는 것을 보고 나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나의 명상은 허가나 방해를 받지 않으며 ... 나의 명상이야말로 정말로 위험한 존재였던 것이다. ... 정부는 뛰어난 지능이나 정직성으로 무장하지 않고 강력한 물리력으로 무장하고 있다. 나는 누구에게 강요받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숨을 쉬고 내 방식대로 살아갈 것이다. >
우리 시대에 왜곡이 심하게 된 언어 중의 하나가 ‘명상’입니다.
명상은 개인의 몸과 마음을 중심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많은 명상 프로그램이 건강 상품으로 소비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명상의 정말 중요한 의미는 관계성의 이해입니다.
불교의 연기론이 이야기하는 ‘그대가 있음을 조건으로 내가 있음’을 이해하고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명상입니다.
동학의 ‘천지만물 막비 시천주 - 세상 모든 것이 하늘님 모시지 않음이 없다’ 이런 깨달음도 깊은 명상의 산물입니다.
내 삶의 과정과 결과가 어떤 인과 관계를 만들어 내는지 깊이 바라보면서 그 인과의 악연을 끊어가는 힘을 얻는 게 명상입니다.
소로가 세금을 내지 않고 감옥에 갇히기 까지 한 이유는 자기가 내는 세금으로 인해 죄없는 이웃 나라 멕시코의 민중이 죽어가는 인연의 고리가 보였고, 그 고리를 끊기 위해 선택한 길입니다.
명상은 기본적으로 위험합니다.
무수한 저항과 생태적 각성은 명상으로부터 오는 축복입니다.
6. 더 진보한 민주주의
< 낮은 관점에서 볼 때 미국 헌번은 온갖 결점에도 불구하고 매우 훌륭하고 법률과 법정 또한 존경할 만하다. ... 그러나, 조금 높은 관점에서 볼 때 주 정부나 미국 정부는 무수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 그리고, 그 보다 더 높은 관점이나 가장 높은 관점에서 볼 때에 그 정부들이 무엇이라고 그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조금인들 볼 가치가 있거나 생각할 가치가 있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은 민주주의가 정부가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단계의 진보일까?
국가가 개인을 보다 커다란 독립된 힘으로 보고 국가의 권력과 권위는 이러한 개인의 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인정하고, 이에 알맞은 대접을 개인에게 해 줄 때까지는 진정으로 자유롭고 개화된 국가는 나올 수 없다.>
<일부 소수의 사람들이 국가에 대해 초연하고 국가에 대해 참견하지 않고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살더라도 이웃에 대해 지킬 것을 지키면 그들이 국가를 헤치는 자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국가, 내가 상상만 했지 결코 보지는 못한 그런 국가가 탄생하는 걸 상상해 본다.>
공산당 선언은 마지막을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라는 선동과 구호로 마칩니다.
시민의 불복종은 ‘더 진보한 민주주의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으로 끝을 맺습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길을 찾은 확신에 차 있던 공산주의는 조직하고 단결하는 과제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시민의 불복종은 합리적인 길이 아닙니다.
시민의 불복종은 직관적이고 초월적 가치가 지배하는 글입니다.
저는 지금도 이해가 안되는게, 소로가 살던 당시는 프런티어 정신이라고 하는 미국의 가치가 거의 모든 미국인들을 지배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골드 러쉬와 함께 서부 개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미국은 자유와 희망의 기쁨이 넘쳐 흘렀던 곳입니다.
제도 면에서도 당시의 세계에서는 가장 앞선 민주주의를 실험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투표권의 확대는 당시 전 세계 모든 민중 운동의 현실적 과제였습니다.
그런 사회의 가장 앞 선 민주주의 현실을 살던 사람이 ‘투표는 도박이다.’ 이런 명제를 제시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다른 북소리를 들으며 걷는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다른 북소리라도 너무 차이가 많이 나면 논쟁의 대상 자체가 되질 않습니다.
그가 들었던 북소리는 사실 21세기에서 들려오는 북소리였습니다.
소로가 상상했던 21세기의 민주주의는 지금 우리의 과제입니다.
민주주의가 한 단계 진보하는 과정마다 혁명적 변화의 과정을 거쳐갑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새로운 주체성이 창조됩니다.
80년 광주민중항쟁은 ‘민중’이라는 주체성을 창조했습니다.
다양한 노동자, 농민, 학생 등 조직된 민중 운동이 시작됩니다.
87년 민주시민혁명은 ‘시민’ 이라는 주체성을 창조합니다.
시민은 도시적이고, 합리적이고, 절차적 과정을 중요한 민주주의 과제로 받아들입니다.
2008년 촛불 봉기는 어떤 이름을 붙이는 게 좋을까요?
저는 ‘촛불 다중 봉기’ 이렇게 이름을 붙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촛불 봉기는 ‘다중’ 이라는 주체성이 현실 공간에서 진보된 민주주의를 이끌 주체로 모습을 명확하게 드러낸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로가 생각한 민주주의의 주체는 ‘다중’에 가까웠습니다.
그는 상상했고, 우리는 지금 그가 상상한 다중 그 자체입니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고, 저는 촛불 시위 현장에 가 있으면서 여기에도 소로, 저기에도 소로가 보였습니다. 사람들 하나 하나가 아무런 의식없이 하는 행동 하나 하나 속에서 소로가 살아서 돌아다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소로는 이제 설명하거나 이해하지 않아도 삶에서 실천될 수 있는 행동 내용이 되었습니다.
100번째 원숭이 이야기가 있습니다.
첫 번째 원숭이가 엄청나게 고민하고 연구해서 고구마를 물에 씻어 먹는 걸 찾아냈습니다.
두 번째 원숭이가 그걸 하기까지는 엄청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려 100번째 원숭이가 고구마를 씻어 먹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100번째 원숭이가 고구마를 씻어 먹게 된 이후 세상의 모든 원숭이가 고구마를 다 씻어 먹게 되는 겁니다.
운동이 일정 정도 양을 채우기(임계물량) 까지는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 이후에는 시간과 노력의 물리적 양이 아니라 비약적 진화가 일어납니다.
이런 건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 상상력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가을학기 다지원에서는 여러 강좌가 촛불봉기를 해석하는 강좌입니다.
그 내용 중에 소로와 네그리 강좌가 아래 위 강의실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걸 그냥 그렇게 되었지, 짜다 보니까 그렇게 된거야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촛불봉기가 일어나기 전부터 소로 강좌를 하기로 계획했습니다.
다지원에서 공부하면서부터 소로의 상상력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꾸준히 들었습니다.
지금 이 상황을 이렇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와, 어떻게 이런 일이, 정말 놀라워.’
초월적 상상력은 현실에서는 잘 이해되지 않지만 지나보면서 이해되게 됩니다.
소로를 공부한 결과는 그런 초월적 현실을 즐기면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소로를 이해하는 방법은 평범한 일상과 자연을 바라보면서 다가오는 느낌을 현실의 삶과 연결하는 상상력입니다.
다음 4,5,6강좌는 소로의 가장 중요한 책인 ‘월든’을 공부합니다.
2-3개 장은 조금 꼼꼼히 읽고 나머지는 직관적 읽기를 할 생각입니다.
소로는 하루에 4시간 이상 자연을 관찰하는 산책을 했습니다.
6강은 소로처럼 산책하면서 일상과 자연 속에서 다가오는 느낌을 해석하는 과정을 직접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