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독립운동가의 서훈 등급, 재평가 필요하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22.09.26ㅣ주간경향 1495호
임진왜란 발발과 함께 의주로 줄행랑친 선조의 말을 끌던 마부 오연이 호성공신(3등)으로 선정되면서 받은 교서 /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소장
‘쑨원(孫文), 장제스(蔣介石), 쑹메이링(宋美齡), 천치메이(陳其美), 천궈푸(陳果夫)….’ 이분들이 누구냐고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1만7588건) 중에서도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을 받은 33건 중 외국인 명단인데요.
5명 모두 중국인입니다. 이중 중국 혁명의 아버지인 쑨원(1866~1925), 중국 국민당 주석이자 중화민국 총통을 지낸 장제스(1887~1975)와 그 부인인 쑹메이링(1897~2003) 정도는 알 것이고요. 세 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쑨원)와 독립운동(장제스·쑹메이링)을 지원한 공로로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을 받았답니다.
독립유공자 1·2등급에 포함된 중국인 15명
그런데 같은 ‘대한민국장’ 수여자인 천치메이(1878~1916)와 천궈푸(1892~1951), 두 사람은 좀 낯설죠.
천치메이는 1910년대 신규식(1879 ~1922) 선생과 함께 신아동제사를 조직해 한중 혁명 활동을 전개했답니다. 천궈푸는 1913년 조소앙(1887~1958) 선생 등과 함께 대동당을 조직해 항일 합동 투쟁을 전개했고요. 1942년 중국 정부의 중앙조직부장으로서 광복군과 함께 항일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중국 땅에서 펼쳐야 했던 항일투쟁에서 쑨원이나 장제스, 쑹메이링 같은 중국 지도층의 협력과 지원은 절대적이었죠. 또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천궈푸와 천치메이 같은 분들의 도움도 컸을 겁니다.
역시 같은 이유(독립운동 지원)로 대통령장(2등급)을 받은 92건 중 중국인이 10명(11%)이나 됩니다. 대한민국장(33건)과 대통령장(92건) 등 1·2등급 서훈대상자(125건) 중 12%(15명)가 중국인이라는 얘기죠.
헐버트와 베델의 서훈
제가 간과했던 문제가 얼마 전에 제기됐는데요. 호머 헐버트 박사(1863 ~1949)의 73주기 추모식에서 “헐버트 박사의 서훈 등급(3등급·독립장)을 하루빨리 1등급(대한민국장)으로 높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겁니다.
헐버트 박사가 누구입니까. 1886년 왕립 영어학교(육영공원) 교수로 입국한 이후 한국을 위해 평생을 바친 분이죠. 최초의 한글 세계지리서인 <사민필지>를 펴냈고, 한글의 우수성을 미국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렸죠. 또 세 번이나 고종의 특사로도 활약했습니다. 이 헐버트 박사에게 고작 3등급인 독립장이 수여됐습니다.
어니스트 베델은 1904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통감부의 탄압에 맞서 한국의 국권수호를 위해 필봉을 휘둘렀다. 특히 호머 헐버트와 함께 일본 궁내부 장관 다나카 미쓰야키의 경천사 10층탑 강탈사건을 집요하게 파헤쳐 반환을 이끌어냈다. / 어니스트 베델(1872~1909) / 국가보훈처 소장
영국 출신의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1872~1909)은 어떨까요. 1904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분이죠. 이후 통감부의 탄압에 맞서 한국의 국권수호를 위해 필봉을 휘둘렀죠. 헐버트와 함께 일본 궁내부 장관 다나카 미쓰야키(田中光顯·1843~1939)의 경천사 10층탑 강탈사건을 집요하게 파헤쳐 반환을 이끌어냈고요. 그런 베델은 독립유공자 서훈에서 2등급(대통령장)을 받았습니다.
결단코 베델의 서훈 등급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고요. 한글 연구와 보급, 한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헐버트 박사가 3등급이라는 게 잘못됐다는 얘기입니다. 또 두 분의 등급이 같은 외국인으로서 1등급 대우를 받은 천치메이, 천궈푸에 견줘 왜 낮은 건지도 의문이 듭니다.
들쭉날쭉한 서훈 등급
아닌 게 아니라 서훈 등급의 문제점이 계속 지적돼왔는데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낸 이동녕(1869~1940) 선생과 독립협회 부회장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던 이상재 선생(1851~1927), 역사학자이자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조직에 참여한 신채호(1880~1936), 대한광복회의 총사령관을 지낸 박상진 선생(1884~1921) 등도 2등급(대통령장)을 받았습니다.
의병장 유인석(1842~1915)과 신돌석(1878~1908),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진 이봉창(1901~1932), 매국노 이완용을 습격한 이재명(1887~1910), ‘여자 안중근’ 남자현(1872~1933) 선생 등도 대통령장을 받았습니다. 6형제가 전재산을 팔아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펼친 이회영 선생(1867~1932)은 고작 3등급(독립장)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정부가 독립유공자의 명단 208명을 발표한 때가 1962년 2월 23일이었는데요.
이때 김구·안창호·안중근 등 18명이 1등급, 신채호·신돌석·이위종·이상설 등 58명이 2등급, 유관순·김도현·김마리아·장지연·이회영 등 132명이 3등급을 받았습니다. 심사는 <조선독립운동혈사> 등 문헌자료 12권을 바탕으로 했는데요. ‘국시(國是) 위배’, ‘정치적 과오’, ‘납북’, ‘변절’, ‘해방 후 월남하지 않은 자’, ‘확인할 만한 기록이 없는 경우’ 등 6가지 예외 규정을 두었답니다.
1962년이라면 해방된 지 20년도 채 지나지 않은 때였습니다. 해방~한국전쟁~4·19혁명~5·16군사정변 등 어수선한 정국에서 정확한 자료에 의한 심사가 제대로 이뤄졌겠습니까.
3·1운동의 상징인 유관순 열사가 왜 1등급 대우를 받지 못했는지도 의아한 대목이고요.
더욱이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음에 따라 친일행적이 드러났거나 의심스러운 자들이 유공자로 신분세탁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 분단과 전쟁, 냉전의 와중에 상당수 독립운동가가 공산주의자와 부역자의 낙인이 찍혔고요. 세월이 지나 새로운 자료가 나오고, 정세도 바뀌면서 등급의 재심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됐는데요.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동일한 공적에 대해서는 훈장 또는 포장을 거듭 수여하지 않는다”는 ‘상훈법’ 제4조가 걸림돌입니다.
그래서 등급 조정 여론이 거셌던 유관순 열사와 여운형 선생(1886~1947), 2021년 카자흐스탄에서 유해가 송환된 홍범도 장군(1868~1943) 등 세 분은 기존의 대통령장(2등급) 외에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가’했습니다. 현행 상훈법에 따라 재심사 절차가 마련돼 있지 않아 ‘공적 추가’의 형식을 쓴 겁니다.
2022년 9월 현재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1만7588건 가운데 1등급(대한민국장)과 2등급(대통령장) 대상자는 125명이다. 그중 외국인은 대한민국장 5명, 대통령장 11명 등 총 16명인데 중국인이 15명이다. 전체 1·2등급 대상자의 12%에 달한다. 그들의 공적은 ‘독립운동 지원’이다. / 국가보훈처 소장
내시·마부가 공신록 오른 이유
이 대목에서 조선조 선조 때의 공신 서훈을 둘러싼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선조실록> 1604년(선조 37) 기사를 볼까요.
“호종공신이 80명이 넘는다니 과하다. 그중 내시가 24명이며 미천한 자들이 또 20여명이다”(6월 25일)라 했는데요. 이날 발표된 선조의 공신 교서 내용을 전한 사관의 논평이 의미심장합니다.
“임진왜란 때 정인홍(1535~1623)·김면(1541~1593)·곽재우(1552~1617)는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김천일(1537~1593)·고경명(1533~1592)·조헌(1544~1592)은 충청과 호남에서 죽었다. 그들의 공적은 너무도 찬란하고 열렬하여….”
사관의 논평을 정리해보죠. 하나는 공신 중에 허접한 인물이 너무 많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곽재우 등 의병들의 공이 너무 폄훼됐다는 겁니다. 대체 어떤 내막이 있었을까요.
이날 발표된 공신은 세 부류로 나뉘었는데요. 임진왜란 때 선조의 의주행을 수행한 86명은 ‘호성(扈聖)공신’이 됐습니다. ‘임금(聖)을 호위(扈)한 공신’이라는 거죠. 또 전쟁터에서 왜적을 토벌한 장수 등 18명은 ‘선무(宣武)공신’이 됐습니다. ‘무공(武)을 떨쳤다(宣)’는 의미죠. 또 전란 도중(1595) 터진 이몽학(?~1596)의 반란을 진압한 5명은 ‘청난(淸亂)공신’이 됐습니다.
어째 좀 이상하죠. 7년이나 전쟁을 치렀는데, 전장에서 공을 세운 선무공신(18명)보다 의주로 도망간 임금을 수행한 호성공신의 숫자(86명)가 5배 가까이 많으니까요. 특히 호성공신 중에는 신분이 낮은 인물이 많았습니다.
내시가 24명이 포함됐고요. 임금의 어가를 모는 마부 6명, 의관 2명, 왕명을 전달하는 하급관리 2명이 들어갔습니다. 의관 중에는 <동의보감>을 편찬한 허준(1539~1615·호성 3등)도 포함됐죠.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삼십육계 줄행랑을 택했죠.
“임금이 경성을 떠날 때… 명공 대신들이 임금 곁을 떠났고, 의주까지 따라간 문무관은 겨우 17인이었다. 그밖에 환관 수십명과 어의 허준 등이… 떠나지 않았다. 임금이 ‘사대부가 너희만도 못하구나!’ 하고 한탄했다.”(<선조수정실록> 1592년 6월 1일)
선조는 임진왜란 공신책록이 끝난 지 1년 만인 1605년 무려 9060명에게 ‘선무원종공신’의 작위를 줬다. 이때 곽재우 등 의병장들도 대거 포함됐다. 그러나 선무공신이 아닌 선무원종공신은 선심성 대접에 불과했다. / 국가보훈처 소장
선조는 의주 도망길에 ‘명공대신’과 ‘사대부’의 배신을 목도했습니다. 그랬기에 어려운 시기에도 임금을 끝까지 지켜준 측근들에게 공신의 직위를 내리고 싶었겠죠. 비록 천한 신분이었지만 제 몸보신을 위해 줄행랑친 지체 높은 자들보다 훨씬 의리 있는 사람들이죠. 그런 면에서 사관들의 비판은 과한 측면이 있습니다.
의병장 홀대한 못난 임금
사실 선조의 공신 서훈이 문제가 된 것은 따로 있습니다. 무공을 세운 장수와 의병장들을 홀대했다는 겁니다.
즉 선조는 공신 책록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이상한 말을 합니다.
“이순신(1545~1598), 원균(1540 ~1597), 권율(1537~1599) 등은 다소간의 전공을 세웠다…. 적을 평정한 것은 오직 중국 군대의 힘…. 조선군은 제힘으로는 적병 한명도 베지 못했고, 적진을 한곳도 함락시키지 못했다.”(<선조실록> 1601년 3월 14일)
다음 말이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중국 군대가 지원군을 보낸 연유가 무엇인가. 과인을 호종한 신하들 덕분이다. 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따라 의주까지 갔기 때문에 내가 중국에 호소할 수 있었다. 그래서 왜적을 토벌하고 강토를 회복하게 됐다.”
이것이 호성공신(86명)이 선무공신(18명)을 압도한 이유입니다.
기가 찬 발언이죠. 따져봅시다. 전란이 일어나자 임금은 줄행랑치기에 바빴죠. 그러나 어떻습니까.
전국 각지에서 못난 임금을 향한 충성심 때문에, 부모형제를 위한 효심 때문에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죠.
이분들이 사대부를 중심으로 천민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에서 활약한 의병들이었죠. 다급했던 선조는 처음에는 의병장들에게 관직을 제수하면서 의병의 봉기를 크게 북돋아주었죠. 의병장 곽재우에게는 “내가 그(곽재우)의 이름을 늦게 들은 것이 한스럽다”고 했고, 또 다른 의병장 고경명·김천일의 서울수복 의지를 담은 보고를 접한 뒤에는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라고 했습니다.
선조는 “전국의 백성은 분연히 왜적과 맞서야 한다”면서 “너희(의병)가 힘을 합해 경성에 들어와 나(선조)의 행차를 맞으면, 너희는 아름다운 이름을 누리고 그 은택은 대대손손 미칠 것”(<난중잡록> 1592년 8월 4일)이라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어떻게 했습니까. “너희(조선군대와 의병)가 한 일이 뭐냐”고 깔아뭉갰습니다.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요. 못난 임금은 전란으로 피폐해진 백성이 의병장의 지휘 아래 무능한 조정을 향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했을 겁니다.
곽재우의 공이 9060분의 1?
18명의 선무공신 명단에 들지 못한 곽재우 등 의병장들은 이듬해(1605) 4월 16일 선무원종공신 명단에 이름을 올립니다.
그러나 정공신(正功臣)이 아니라 원종(原從), 즉 ‘공신대우’의 대접을 받았습니다. 이때 인정된 원종공신의 수가 무려 9060명입니다. 아무렴 곽재우를 비롯한 김면·김천일·고경명 등 의병장들의 공이 고작 ‘9060분의 1’이라는 말입니까.
그런데 선조가 원종공신 교서를 내리면서 또 한 번 대못을 박습니다.
“너희들의 공은 작고, 중국의 은혜는 크다…. 그러나 그대들의 공이 작을지라도 갚지 아니할 수 없기에….”
독립운동가들이 유공자 서훈을 받으려고 투쟁을 벌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분들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해야 하는 것이 후손들의 몫이다. 첫 번째 명단을 발표한 것(1962)이 꼭 60년이 지났다. 이제 재평가 작업을 벌여야 할 때가 됐다. / 국가보훈처 소장
참으로 속 좁은 군주의, 참으로 지긋지긋한 ‘중국’ 타령이 아닙니까.
이후 여러차례 조정에 나와 출사하라는 명령에 곽재우 장군의 언급이 심금을 울리죠.
“신은 왜적의 토벌로 관직에 제수됐습니다. 왜적이 물러갔으면 신 역시 마땅히 물러나야 합니다. 훗날 국가에 변란이 있을 경우 마땅히 다시 나와 사졸들의 선봉이 되겠습니다.”(<광해군일기> 1617년 4월 27일)
지금 이 순간, 독립유공자 서훈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분들이 무슨 등급이나 잘 받으려고 독립운동을 했겠습니까.
하지만 친일파가 호의호식할 때 나라의 국권 수호와 독립을 위해 피를 흘린 분들이 아닙니까. 그분들의 자취와 흔적을 찾아주고 제대로 대접하는 것이 후손의 몫이겠죠. 독립유공자들의 명단을 첫 번째 발표한 후 꼭 60년이 지나고 있네요.
재평가 작업, 반드시 해야 할 과제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