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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타스님 자경문 - 시작하는 마음 제 20 강
지적으로 살자 하니까 모가 생기고,
정적으로 살자 하니 흘러가고,
자기 뜻대로 살려고 하니까 막히고 따분하다.
어쨌든지 이 인간세상은 살기가 상당히 어렵다.
살기 어렵다, 어렵다 하는 생각이 자꾸 차다가 보니까 훅 날아
가버리고 싶다. 떠나고 싶다.
어디에 가더라도 인간 세상은 똑 같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거기에서 시도 되고 그림도 되는 것이다. ←이런 글이 있어요.
내가 밟고 섰는 것은 땅인 줄 알기 때문에, 팍 꺼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생길 수 가 있고,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은 하늘인 줄 알기 때문에, 번갯불이 와장
꿍뚝딱하고 내 볼때기를 탁~ 때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날수가
있다.
銀線(은선=소낙비)이 (햇빛이 조금 있을 때 소낙비가 쏵~ 쏟아지면 은선 아닙니까? 직선으로 내리는 것이 아니고, 바람결에 사선으로 비껴서 내립니다.) 비껴서 쏵~ 쏟아지는 그 속에, 푹 젖어가지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나를, 내가 나를 내 모습인가 하고 생각 했을 때, ←이것이 명치유신 때,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대철학가의 시입니다. 제가 중학교 때 외운 시입니다. 그러니까 50년 전에 외운 시들입니다. (일타스님 1999. 열반) 제가 이런 시를 100개쯤 외우는데요. 옛날에 제가 학교 다닐 때는, ‘내가 철학자’ 라고 생각 했거든요.
이런 얘기가 보조스님은 이 두 줄 글 가운데 그것이 다 함축 되어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욕구불만 탐욕ㆍ재물 욕ㆍ색욕ㆍ이런 모든 것을 염불과 참선으로 승화시킬 수 있어야 된다 이 겁니다. 이것을 승화 시키지 않고, 지 움직이는 대로 그냥 놔두면 눈 감고 뛰는 말과 같다는 겁니다. 눈 감고 뛰는, 지 다리 힘만 믿고 뛰는 말과 같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천방지축이지요. 말이 다리는 힘이 세거든요. 눈이 없어보세요. 지까짓 놈이 길을 골라갈 줄 아나요? 무조건 뛰는 것이지요. 우리 인생이 그와 같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정신 딱~ 차려서 갈길, 가지 아니할 길을 잘 분별해서, 가고 싶은 길이라도 가지 아니할 길은 안 가야 되고, 가기 싫은 길이라도 가야할 길은 꼭 가야 하는 것이고요. 이것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별 것 아닌 말 같지만, 상식적인 얘기 같지만 그런 심오한 이치가 여기에 다 담겨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일 처음에 欲盖(욕개). 욕심과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 이것이 마음대로 되지 아니하니까 瞋恚(진에). 짜증이 생겼지요? 恚→흙 土(토)가 두 개 쌓인 마음이니까, 마음이 흙 쌓이고 쌓이듯이 자꾸 쌓이고 쌓여서 “무더기로 뭉쳤다.” 이 말 아닙니까? 그 다음에 掉擧(도거). 마음이 자꾸 들먹거려서 흔들려진다 이 겁니다. ←散亂攀緣(산란반연). 그래가지고 疑法(의법). 법을 의심한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되는 건가? 안 되는 건가?’ 하고 법을 의심하고요. 그러다가 별 수 없으니까 昏睡(혼수). 잠이나 자는 겁니다. 수면이라는 말이지요. 이것이 五蓋障(오개장)인데요.
여기서 어찌해야 되느냐? 참선과 기도를 찾아 들어가야 된다는 겁니다. 참선과 기도의 길로, 정신집중 하는 길로 찾아 들어가지 않으면 소용이 없어요. 찾아 들어간다고 해서 금방 찾아지는 것도 아니고, 금방 찾아지는 것도 아닐 뿐만이 아니라, 그것도 거기서에서도 산란이 자꾸 생겨요. 기도가 잘 안 돼요. 여기 앉아서도 서울 집에 열두 번도 더 갔다 오고, 부산도 갔다 오고, 온갖 곳에 왔다갔다, 왔다갔다한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尋(심)자인데, 찾기는 찾지만 잘 안 찾아진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거기에서 잘 살펴야 된다 이 겁니다. 살펴서 골똘하게 찾아가야 된다 이 말입니다.
살필 伺(사)자라는 것이 있어요. 尋伺(심사). 잘 살펴 들어간다 이 말입니다. 살펴 들어 갈 때도 집중력을 말하는 겁니다.
이 두 가지가 제일 중요해요. 찾아 들어가고ㆍ살펴 들어가고, 찾아 들어가고ㆍ살펴 들어가고, 처음에 화두든지 기도든지 딱~ 하니 잡아가지고 하되, 이것을 집중력 있게 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집중을 하다보면, 한 시간만 잘 집중을 해도, 할 적에는 괴로웠는데 하고나면 무엇인가 마음이 조금 후련해지고 편안해지고 콧노래도 슬슬 나오고, 조금 즐거워질 수가 있어요. 그것을 法喜(법희)라고 그래요. 법의 기쁨이라고 그래요. 법의 기쁨이 자꾸 찾아 들어가고, 살펴 들어감으로써 법의 기쁨이 커지면 禪悅樂(선열락)이라고 그래요. 즐거움이 생긴다 이 말입니다. 마음이 완전히 즐거워지기만 하면, 수행이 좀 된 사람이지요.
그것 하루 이틀 가지고는 안 되는 겁니다. 적어도 10년 20년 해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10년 20년도 슬쩍슬쩍 해서는 안 되고요. 그러니까 중 물이 푹~ 들어야지요. 적어도 몇 10년, 3~40년 해서 노장님이 떡~ 될 것 같으면 잘 변함 없이만 해나가면 그 때는 ‘기쁘구나.’ ‘즐겁구나.’ 가 항상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입가에는 미소요, 가슴에는 태양입니다. 언제든지 기쁘고 즐거운 것뿐입니다. 나쁜 것 봐도 껄껄 웃고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래?” 이러고요. 참 그야말로 좋은 일을 보면 “좋을 수도 있는 것이고...” 이렇게 나오고요.
그러니까 밥이 되면 구슬구슬 해서 좋고, 질면 물썽해서 좋고, 짜면 짭짤해서 좋고, 싱거우면 삼삼해서 좋고, 전부 그런 것뿐이지요.
그냥 다 좋은 것뿐입니다. 안 좋은 것 없어요. 이 세상이 본래 다 그런 것이니까요. 이렇게 悅樂. 즐거움이 생긴다 이 겁니다. 그래도 자꾸 찾아 들어가고, 살펴 들어가고 끈 끊어지지 않아야 됩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一 心(일심) 경계가 오게 되거든요.
일심경계가 오게 되면 저 欲界(욕계)의 경계가 타파가 되고, 悅樂(열락)의 경계가 오게 되면, 즐거움의 경계가 오게 되면 瞋恚(진에). 성냄의 짜증스러운 그것이 깨지게 되고요. 죄 없다거나 짜증스럽다거나 그런 것이 없어지지요. 항상 즐거운 겁니다. 안 되더라도 “그럼 내 안 될 줄 알았지. 어쩌면 될랑가 싶어서 해본 것뿐이지 뭘, 세상이 다 그런 것이지 뭐.”이렇게 하고 그냥 마는 겁니다. 그 다음에
기쁠 喜(희)자. 기쁨의 경계가 생기게 되면 掉擧(도거). 도거가 파괴되는 겁니다. 散亂攀緣(산란반연)이 없어지는 겁니다. 散亂攀緣할 턱이 없지요. 마음이 딱 안정이 되었으니까요. 그 다음에는
伺(사). 살필 伺자의 경계를 완전히 잘 살펴나가면 疑法(의법). 이럴까 저럴까하는 생각이 없어져 버립니다. 백 번 죽어도 이것 밖에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완전히 그만 선정삼매의 경계 속에 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제일 처음. 찾을 尋(심)자의 경계를 찾아 들어갈 것 같으면 욕계의 경계는 타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煩惱盡時에 愁火滅(번뇌진시수화멸)이요, 번뇌가 다 했을 때 愁火. 근심불이 꺼지는 것이고, 恩情斷處에 愛河枯(은정단처애하고)라. 恩情. 모든 인정 사정하는 그런 색욕심. 이런 것이 다 없어질 때에 愛河枯. 사랑의 물결이 말라버린다. 중생이 다 하는 것이지요. 중생심이 다 해버리는 것이지요. 그것을 여기에 다 표현한 겁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우리 수행해서 정신승화. 승화시키는, 종교의 힘으로써 중생의 모든 번뇌 망상을 승화시키는 경로를 이렇게 다섯 가지로 말한 겁니다.
愼人事往還(신인사왕환)하며,
愼見他好惡(신견타호오)하며,
愼貪求文字(신탐구문자)하며,
愼睡眠過度(신수면과도)하며,
愼散亂攀緣(신산란반연)이어다.
이것은 상식적인 말인데요. 상식적인 말이라기보다도, 그런 정신 수행의 경로를, 승화하는 경로를 말씀한 것이다 이 말입니다.
참선하는 것이 수행이지, 참선 말고 수행이 어디 있습니까?
住社堂(주사당)호대, 社堂이라는 것은 禪堂(선당)에 주 할 적이라고 했잖아요. 참선하고 앉았다고 해가지고 참선이 그냥 잘 되고, 모든 반연이 끊어지고, 선정삼매에 들어가느냐 하면 그렇지 않거든요. 선방에 앉았어도... 어떤 사람이 장가 가가지고 참선법이 좋은 줄 알고 마누라 보고, “내가 3년 동안만 참선해서 도통해가지고 오께. 집에 있으라.” 이렇게 하고선 왔거든요. 와가지고 참선한다고 앉았으니까 마누라가 흥ㆍ응흥ㆍ흥ㆍ자꾸 이런대요. 자꾸 마누라가 앞에 와서 막 알랑거리니까 “떽. 가라고 하니까” 참선하다가 소리를 지르니 곁의 사람들이 “와 그라노?” “응?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요.” 그러는 중이 있다고요.
그러니까 그것은 身出家(신출가)나 心不出家(심불출가)라서 그렇지요. 몸뚱이는 출가 했지만 마음은 아직 출가를 못했으니까 그렇지요.
마누라가 계속 옆에 와가지고 알랑 알랑 알랑 24시간 떨어지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참 나원, 그것도 할 짓 아닐 겁니다. 장가를 안 갔으면 괜찮을 것인데, 장가가서 아직은 신혼기거든요. 지금 한참 좋을 땐데, 재미있을 땐데 와버리니까 그렇게 알랑거리더랍니다. 그랬다는 소리가 장가 가본 사람이나 알지 안 가본 사람이야 알겠습니까? ㅎㅎㅎㅎㅎㅎㅎㅎ 어쨌든 간에 정신을 승화시키는 것이 수행의 길이고, 공부해서 말하자면 화두를 성취하는 길이니까 모두 거기에 대한 주의사항이잖아요.
若遇宗師(약우종사)의 陞座說法(승좌설법)이어든
切不得於法(절부득어법)에 作懸堐想(작현애상)하야
生退屈心(생퇴굴심)하며 或作慣聞想(혹작관문상)하야
生容易心(생용이심)하고 當須虛懷聞之(당수허회문지)하면
必有機發之時(필유기발지시)하리니
不得隨學語者(부득수학어자)하야 但取口辦(단취구판)이어다
所謂蛇飮水(소위사음수)하면 成毒(성독)하고
牛飮水(우음수)하면 成乳(성유)인달하야 智學(지학)은
成菩提(성보리)하고 愚學(우학)은 成生死(성생사)가
是也(시야)니라.
若遇宗師(약우종사)의 陞座說法(승좌설법)이어든,
만약 종사가 陞座說法함을 만나거든, 이랬거든요. 宗師라고 할 적에는 마루 宗자인데, 마루라고 하는 것은 산마루ㆍ등마루ㆍ용마루. 제일 꼭대기라는 뜻입니다. 제일 높은데ㆍ가장 근원지ㆍ근본이라는 뜻입니다. 집당마루ㆍ용마루라고 그러지요. 또 “산마루 턱” 그러지요? 제일 꼭대기ㆍ근본이라는 뜻이고ㆍ최고라는 뜻이고 그래요.
그래서 宗師라는 뜻은 최고되는 스승이거든요. 종사ㆍ대종사 이렇게 계급을 먹이는데, 태국 같은 데서는 大宗師(대종사)를 쏜백이라고 그러는데, 6명의 쏜백이 있어요. 쏜백 여섯 사람에게는 왕과 장관이 절을 합니다. 그 6명 중의 한 사람이 僧王(승왕)이 됩니다.
태국에는 왕이 둘입니다. 人王(인왕)이 있고, 僧王(승왕)이 있는데 6명의 쏜백 중에서 僧王을 뽑아요. 인왕은 국민의 왕이고, 승왕이 宗師입니다. 마음의 근본을, 최고의 경지를 깨달은 고승이라는 말이지요. 그런 높은 스님께서 陞座說法(승좌설법)이라. 자리에 올라서 설법을 한다. 율장 가운데 낮은데 앉아가지고 높은 데를 보고 설법을 하지 말라. 길 아닌데서 길에 있는 사람에게 설법을 하지 말라. 서서 앉은 사람을 위해서 설법을 하지 말라. 그러니까 연설을 해도, 대종림이라는 것이 있고 소종림이라는 것이 있어요. 소종림이라는 것은 앉아서 좌담하는 것이 소종림이고, 대종림이라고 하는 것은 높은 단 위에 올라서 내려다보고 설법하는 것을 대종림이라고 그래요. 많은 사람 앞에서 설법하는 것을 대종림이라고 그래요.
법상에 올라앉아서 주장자를 짚고 가사장삼을 턱 하니 법복을 수하고 하는 설법하고, 연단에 그냥 서서 책상을 두드리면서 “여러분”하고, 연설 하는 것하고 다르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웅변이 있고 강의가 있고 강좌가 있고 강설이 있고 설법이 있습니다. 부처님법문은 그냥 앉아서 하지 말고, 높은 자리에 올라앉아서 턱~ 내려다보고 위엄을 갖춰가지고 이래야 부처님 법이 존중된다 이 겁니다.
僧輕則佛輕(승경즉불경)하고, 승이, 중이 경망스러울 것 같으면 부처도 가벼워지는 것이고, 가치가 없고,
僧重則法重(승중즉법중)이라. 승이 존중 스러우면 불법도 존중 해지는 것이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 자신이 대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고, 불법을 존중하는 뜻에서 높은 자리를, 법좌를 만들어서 법좌 위에 올라앉아서 如法(여법)하게 설법하라 그 말입니다.
제가 지금 이렇게 다리 뻗고 앉아서 얘기를 하니까 손짓을 하고 이러지, 법상에 올라앉아서 손짓 해가면서 얘기하겠습니까? 떡~ 점잖게 앉아가지고 말도 해야 되고, 게송도 읊어야 되고 이런 것이니까 하는 식이 각각 다른 겁니다. 그것이 陞座說法(승좌설법)입니다. 그런데 이 陞座說法법은 우리 불교에만이 아니고, 인도 힌두교에서도 전부 법좌를 차려놓고 올라앉아서 하고 듣는 사람은 땅 바닥에 앉아가지고... 서서 얘기하는 것 하고 앉아서 얘기하는 것 하고 다릅니다. 법좌를 차려놓고 하는 것 하고 그냥 좌담하는 것 하고 다릅니다.
陞座說法이라. 자리에 올라가서 설법을 할 때에, 이 法이라는 법 법자가 삼 점(氵)변에 갈 去(거)자를 했거든요. 氵←이것이 물 水(수)자거든요. 물이 흘러간다 이 말입니다. 물이라 이 말입니다. 흘러가는 물이라 이 말이거든요. 물 水자가 삼 점(氵)입니다. 물로 씻겨 간다는 말입니다. 물로 씻어버리면 깨끗해지잖아요. 법적으로 다룰 것 같으면 모든 것이 청정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깨끗하게 씻겨가고, 모든 업장을 깨끗하게 씻어버리고, 모든 번뇌가 다 깨끗하게 씻겨가고, 그래서 그런 법을 설하는 것. 말씀 說(설)자가 말씀 言(언)변을 썼잖아요. 말을 이리저리, 이리저리 입을 놀리는 것이 說자거든요.
切不得於法(절부득어법)에, 切 ←이것은 “절” 이라고도 읽고, “체”라고도 읽어요. 일체라고 그럴 적에는 체라고 읽고, 모두 체자ㆍ전체라고 하는 전체체자ㆍ온통체자.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할 적에는 온통이라는 말이거든요. 간절 切자ㆍ끊을 切자 이러는데, 切不得於法 ←이것은 체부득어법에, “체부득어법에” 이렇게도 안 될 것은 없어요. “온통”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간절히” 하면 “제발”이라는 뜻도 되니까 “절”해도 안 되는 것은 아닌데, “체”해도 틀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을 새길 적에는 “부디” 그래요. 제발ㆍ부디 이렇게 해달라는 말입니다. 부디 이 부처님 법에 대해서 법문을 듣고,
作懸堐想(작현애상)하야 生退屈心(생퇴굴심)하며,
낭떠러지에 매달인 것 같은 생각을 지어서 退屈心을 내지 말며, ‘아이고 억만 불법이다. 그거 어떻게 그렇게 하겠노? 아이고 우리사 그거 못 하겠네.’ 이런 생각이 懸堐想을 짓는 것이다 이 말입니다.
저 낭떠러지에 매달 것 같은 생각이다 이 말입니다. 어렵다는 생각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生退屈心하며, ‘우리는 한 번에 치워버려야 되겠다. 안 되겠다.’ 이런 퇴굴심을 낸다거나, 또 그 반대로
或作慣聞想(혹작관문상)하야 生容易心(생용이심)하고,
慣聞想. 익혀들었다는 생각, ‘이 까짓것쯤이야 천하 쉽다.’이 겁니다. 너무 많이 귀에 못이 배도록 들은 소리니까 ‘용이하다.’ ‘천하 쉽다.’이 겁니다. 그래서 容易心을 내지 말라. 용이하다. 쉽다는 생각도 내지 말라. 이랬거든요. 이렇게 되면 이 두 가지가 다 실패의 원인입니다.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수목나 존자라고 하는 스님이 부처님당시에 있었는데, 수목나 라고 하는 말은 聞億耳(문억이)입니다. 아주 부자, 거부 장자 집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나자마자 그 아버지가 “이 놈한테는 돈을 억만금이다.” 이랬거든요. 억만금 재산을 물려준다 이 겁니다. 억만금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그래서 문억이입니다. 어릴 때부터 얼마나 귀엽게 키웠는지 발바닥으로 땅을 안 밟고 별로 살았기 때문에, 발바닥에서 털이 났대요. 참~ 나, 발바닥에 털 나는 사람이 있나요? 어쨌든지 하도 귀엽게 커노니까 발바닥에 털이 났대요. 아주 귀한 집 자식이고 머리가 그렇게 좋아요.
나중에 커서 인물도 좋고 머리도 좋고 하니까 이런 아이를 부처님만 한 번 친견하게 하면, 아주 큰 인물이 될런지 모르겠다고 부처님 계시는데 까지 운하를 팠대요. 운하를 파가지고 배를 띄워서 부처님한테 가서 법문을 듣고 중이 되었어요. 이 세상에서 최고 학문ㆍ최고의 인격을 완성 시키자면 스님이 돼야 되겠다. 스님이 돼야만 오직 공부만 할 수 있고요. 스님이 돼야만 도를 통할 수가 있고요. 세속에서 이것저것 끄달려가지고는 안 되니까요.
거짓말로 했는지 참말로 했는지 몰라도, 모 가수가 결혼 했다가 이혼 하면서 신문기자가 물으니까 “예술과 결혼생활하고는 말하자면 사람 사랑 하고는 겸할 수가 없더라. 나는 예술만을 사랑해야지, 사람 사랑하면서 예술 하면서 이것 안 되겠더라.” 두 가지를 하려니 안 되겠더라 이 겁니다. 사랑을 하려면 여자 뜻을 잘 맞춰줘야 되는데, 시간 없고 거기에 골몰하다 보니까 여기에 맞춰 줄 수가 없다 이 겁니다. “자꾸 쥐어 뜯어대고, 꼬집어대니까 기분이 확 풀리지 않으니 작품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고, 그래서 할 수 없이 한 가지를 포기 했다. 내가 타고 난 것을 포기 할 수는 없고, 새로 만들었던 것을 포기 한다.” 신문에 그랬더군요. 그것도 좋은 말입니다. 얘기는 좋은 말이지요? 실지는 그랬든가 안 그랬든가 좋은 말입니다. 그 뒤에 일본 가서 다시 결혼해서 산다니까 그것도 거짓말인 셈이 되었지만 아무튼 말은 옳은 말이 된다고요. 한 가지만 골몰해야지 두 가지를 다 할 수는 없다 이 겁니다.
그래서 이 문억이비구도 세속을 버리고 출가를 해서 스님이 됐다 이 겁니다. 공부를 얼마나 애를 써서 했는지 발바닥이 아파서 죽을 지경입니다. 발바닥에 털 난 놈이니까 발바닥이 얼마나 부드럽겠습니까? 길에 다니니까 갈 바닥은 험하고, 삐쭉삐쭉한 돌 그런 것을 밟으면, -저도 어릴 때 그렇게 발바닥이 얇아가지고 단거리를 반쯤 뛰면 발바닥이 아파서 떨어져요. 제가 공부도 잘하고 100m는 1등 하는데 400m는 떨어지거든요. 중간에 발바닥이 아파서 그냥 발바닥이 막 쓰리고 따가워 가지고 못 뛰고 그랬는데 지금은 발바닥이 많이 굳어졌어요. 옛날에는 길 가려면 발바닥이 아파서 살짝살짝 그랬다고요.
그런데 문억이비구는 발바닥에 털 났으니 말 할 것도 없지요.
발바닥이 전부 터져가지고 짐승 잡아끌고 다닌 것처럼 온 도량에 피가 흘렀다 이랬어요. 그래서 부처님이 그 사람한테는 가죽신을 신으라 그랬어요. 그래서 피혁곤도라는 것이 있어요. 그 사람을 위해서 가죽신이라는 법이 있어요. 그렇게 잠을 안자고 안 먹고 애를 써도 공부가 안 되니까, 해도, 해도 안 되니까 ‘아이고 나는 도하고는 인연이 없는가보다. 우리 집에 가면 돈이 억만금이 있는데 도하고는 인연이 없고, 나는 돈하고만 인연이 많은가 보다. 그만 할 수 없다. 도는 포기해 버리고 집에 가서 돈 가지고 이 어렵게 공부하는 스님들한테 복이나 지어야 되겠다. 이 스님들 전부 잘해드리고, 시중이나 해드리고, 길도 잘 만들어 드리고, 사는데도 편안하게 갈도록 해드리고, 내 재산 막 풀어서 스님들 잘 해드릴 수 있으니까 그래야 되겠다. 속환해가야 되겠다.’이런 생각을 딱 먹고 가려고 준비하고 있으니까 부처님이 다 알았어요.
부처님이 딱~ 아시고, 壯士屈伸微境間(장사굴신미경간)에, 장사가 팔 하나 착 폈다 오그리는 사이에 그 자리에 나타나나지고,
“수문나야”
“아이고, 부처님 어쩐 일이십니까?”
“네가 마을에서 무엇을 제일 즐겼던고?”
“거문고 타기를 즐겼습니다.”
“거문고 줄이 팽팽하면 어떻게 되느냐?”
“거문고 줄이 팽팽하면 터집니다.”
“거문고 줄이 느슨하면 어떻드냐?”
“느슨하면 소리가 안 납니다.”
“공부도 거문고 줄을 고르는 것과 같으니라. 너처럼 그렇게 억지로 밥도 안 먹고 잠도 안자고, 그렇게 용쓴다고 공부가 금방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 발바닥 다 터지고 네 몸이 피로해서 못 하겠다는 생각 밖에 안 난다. 그렇다고 해서 슬금슬금 자가면서, 놀아가면서 하자고 하면 그것도 깨울깨울해서 게으름에 빠져서 안 되는 것이다. 如調絃而法(여조현이법)하야, 거문고 줄을 고르는 것과 같아서 妙在手中(묘재수중)이니, 묘한 것이 손가락 끝에 달려있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 공부도 不可緊(불가긴)하고, 너무 긴하게도 하지 말고 不可緩(불가완)이니, 너무 늘어지게도 하지 말고 妙在其中(묘재기중)이니라. 묘한, 신묘한 법이 그 가운데 있느니라.”←이것이 거문고 법문입니다.
그 법문을 듣고 수목나가 아주 크게 깨달음을 얻어가지고 딱~ 하니 제 몸과 마음에 맞추어서 공부해가지고 아라한과를 증득했다.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退屈心(퇴굴심)도내지 말고, 慣聞想(관문상)도내지 말고, 容易心(용이심)도내지 말고, 떡~ 하니 妙在其中(묘재기중)이라. 이 말입니다. 묘한 것이 그 가운데 있도록 중도를 취하라. 이런 말입니다.
當須虛懷聞之(당수허회문지)하면, 마땅히ㆍ모름지기ㆍ적당하게ㆍ반드시 그 말이지요. 當須할 적에는... 다 형용사입니다. 虛懷聞之하면 생각을 텅 비워버리고 들으면, 속효심도내지 말고ㆍ나태심도내지 말고 슬금슬금 가다보면 해 돋을 때 아니올까? 그랬잖아요. 속효심도내지 말고 나태심도내지 말고 슬금슬금 가다보면 해 돋을 때 아니올까? 해 빨리 뜨라고 부지런히 간다고 해가 빨리 뜨나요? 또 깨울깨울 해서도 안 되는 것이고요. 虛懷聞之라. 생각을 텅 비우라 이 말입니다. 구정물이 꽉 찼는데 다른 물 부어봐야 그것이 들어가나요?
넘어버리지요.
속을 텅 비우라 이 겁니다. 비워야만 거기에 담을 것이 있잖아요.
비울 생각도 아니 하고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폭 엎어놓으면, 아무 것도 안 담기는 것이고요. 구정물 독이라고 엎어놓으면 뭐가 담기나요? 햇빛도 아니 들어가고요. 그러니까 아무리 다리가 아프고 허리가 아파도 슬금슬금 기도를 빠지지 말고 해야 돼요. 다 낫고 나서 하려면, 해제하고 나서도 나을랑가? 말랑가? 내년에나 나을까 말까 언제요? 젠장 맞으리. 이거하고 저거하고, 저거하고 다 하고나서 하려고 하면 되나요?
옛날에 장조류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스님의 친구입니다.
“야 이 사람아 장조류, 자네도 염불 좀 하게. 참선 좀 하게.” 이렇게 하면 만날 한다는 소리가 “우리 막내 장가보내놓고.” 막내 장가보내놓고 나면 어쩔건가? “손자 낳고 부자 되는 것 봐야 될 것 아닌가?” 세 가지거든요. 막내 장가보내고ㆍ손자 낳고ㆍ부자 되고... 그것 언제 부자 될 겁니까? 吾友名爲張曹流(오우명위장조류)하니, 내 친구가 장조류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勸伊念佛說三頭(권이염불설삼두)라. 그 사람에게 염불하라고 권하니까 만날 三頭를 얘기하더라 이 말입니다. 세 가지 다 하고 나서 한다 하더라 이 말입니다. 可怪閻公無分曉(가괴염공무분효)하야, 가히 괴상스러운 일이로다. 염라대왕 그 사람이 분수가 없어가지고 三頭未了에 便來鉤(삼두미료변래구)라. 三頭를 마치지도 않은 사람을 와서 갈고리로 콱 끌고 가버렸다 이 겁니다. 다 마치기도 전에 죽어버렸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속히 될 마음도ㆍ느즈러질 마음도ㆍ무엇이 잘 된다는 생각ㆍ못 된다는 생각ㆍ일체번뇌 망상 다 비워 버리고, 虛懷(허회). 생각을 텅~~ 비워 버리면 거기에 감로수가 담길 수가 있는 것이거든요. 當須虛懷聞之(당수허회문지)하면 必有機發之時(필유기발지시)하리니, 반드시 機緣(기연)을 발할 때가 있을 것이다. 이랬거든요.
機자를 보통 기틀을 발할 때가 있을 것이다. 이러는데, “기틀” 이라고 하면 잘 못 알아듣잖아요. 기틀 이라고 할 것 같으면 기계를 “틀” 이라고 그러잖아요. 옛날에 비행기를 “날틀” 이라고 그랬어요. 織造機(직조기)를 “짤틀”이라고 그러고요. 틀은 기계라는 소리지요. 기틀이라고 하면 말이 좀 덜 된 것이지요. 機緣이라고 그러는 것이 좋아요. 챤스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기회는 달아나기 쉽고 기연은 탁 마주칠 때가 있다. 그 기연이 마주칠 때가 있다는 소리는 무슨 소리냐 하면, 見性(견성)할 날이 있을 것이다. 이런 말인데요.
이 見性하는 기회가 보통 꾸준히 애쓰다가 볼 것 같으면 네 가지의 인연으로, 네 가지 기연으로 말미암아서 見性成佛(견성성불)하고, 感應(감응)을 받고 기도를 성취하는 기회가 나타난다 이 말입니다.
첫째는 一機法門(일기법문)이 있어요.
그 다음에는 一境(일경). 한 경계라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一言(일언). 한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一句(일구). 한 마디라는 말입니다. 한 마디 글귀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一機一境上 一言一句下(일기일경상일언일구하)에 크게 琢磨(탁마)를 하게 된다. 탁 마주치는 때가 있다 그랬거든요.
一機法門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이 일기법문이냐 하면,
하루는 부처님이 떡 법상에 앉아 계시는데 외도가 찾아와서 부처님에게 떡~~ 절을 하고 하는 말이 “敢問世尊(감문세존)하노니, 감히 세존에게 묻습니다. 有言不問(유언불문)하고 無言不問(무언불문)입니다. 有言으로서도, 있는 말로도 묻지 않고, 無言으로도 묻지 않습니다. 일러주십시오.”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앉아 계시다가, 據座(거좌)라. 의지할 據자, 자라 座자. 자리에 기대 앉으셨어요. 볼 적에는 말씀은 아니했으니까 有言으로 대답한 것은 아니고요. 無言으로 대답한 것 같지요? 자리에 그냥 據座라. 자리에 기대앉으니까 그 외도가 턱~ 깨달아가지고 절을 하면서 “세존은 대자대비 하시사 開我迷雲(개아미운)하시나이다. 저의 미한 구름을 확 벗겨주셨습니다.” 참 감사하다고 하면서 無數拜禮(무수배례), 절을 하고 가거든요. 가니까 거 참 이상스럽다 이 말입니다.
아란존자가 그 때 부처님 시봉을 20년 한 때입니다. 아란존자가 곁에 있다가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거든요. 그 외도가 가고 난 뒤에, 부처님한테 절을 하고 묻기를“부처님이 자리에 기대앉은 것뿐인데, 그 외도가 깨달아 간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알아봤기에 그렇게 세존 대자대비라고 하고서 절을 하고 갑니까?” 이러니까,
良馬는 見鞭影而走天理(양마견편영이주천리)어늘, 良馬는, 적토마 같은 좋은 말은 채찍 그림자만 삭 보면 벌써 천리를 달아난다 이 겁니다. 阿難依存世尊前(아난의존세존전)이구나.
아난은 20년을 세존 앞에서 그냥 지척거리고 나만 의지하고 있느냐?
네 똥은 네가 싸야지, 날더러 네 똥 싸달라는 소리냐? 그 말씀입니다. 阿難依存世尊前이구나. 말하자면 그 외도는 一機法門(일기법문)에 깨달은 겁니다. 一機法門. 한 기연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목주스님이라고 하는 스님은 방안에 앉아가지고서는 사람을 안 만나요. 사람을 안 만나니까 운문스님이 법문을 듣고 싶어가지고, 법을 알고 싶어가지고 그 스님한테 갔는데, 목주스님은 기운이 천하장사입니다. 문을 철문을 해다 달았어요. 철문을 쾅 닫고 들어가면 보통 사람은 그 철문을 열지도 못해요. 목주스님은 자기 어머니를 항상 모시고 다녔대요. 어머니를 모시고 다니면서 寺衆(사중)밥을 먹이면 안 된다고 그래가지고, 저녁마다 자기가 짚신을 삼아요. 짚신을 삼아가지고 짚신을 저 남대문 앞에다 걸어놔요. 걸어놓고 있으면 신 떨어진 사람들이, 짚신을 가져가면서 거기다 돈을 몇 푼 자루에다 넣어놓고 가거든요.
그 돈으로 쌀을 한 되 사오면... 자기 어머니의 쌀값은 그렇게 냈대요. 그런데 어떤 나라에서 목주스님이 있는 나라를 치러 왔거든요.
趙(조) 나란가 그래요. 조 나라를 치러 들어왔는데 그 나라 장군이 남대문 앞에 걸려 있는 짚신을 보고, “아, 有道自在(유도자재)로다.” 도인이 이 안에 있다고, 우리 여기 들어갔다가는 큰일 난다고, 도인이 계신 곳은 쳐들어가면 안 된다고 물러갔답니다. 그 군인들을 다 끌고 물러갔답니다. 그 만큼 말하자면 위신력이 있는 스님입니다.
운문스님이 들어가면 그냥 멱살을 잡고 저 마당 한 가운데로 휙~ 던져버려요. 기운이 천하장사니까요. 목주스님 방에 도무지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래가지고서는 ‘에이 떠그랄 것 내일은 멱살을 잡고 집어 던지기 전에, 발부터 먼저 들여놔야 되겠다. 발부터 먼저 들여놓고 봐야 되겠다.’싶어가지고서는 문 반쯤 열었는데, 멱살을 잡으려고 하자 확 발부터 확 들여놨거든요. 들여놨더니 철 대문을 쾅 닫으니까 다리가 뚝 부러져버렸어요. 다리가 뚝 부러지는 찰라에 그냥 확철대오를 했거든요. 깨달았어요. 그것도 일기법문입니다. 다리는 부러졌지만 도를 깨쳤으니까 그까짓 것, 구루마가 바퀴하나 탈 난 것 상관있나요? 그런 것이 다 일기법문입니다.
임제 할. 덕산 방. 임제스님은 사람이 부르기만 하면 무조건하고 소리를 왝 하고 소리를 질러버려요. 소리 지르는 소리에 그냥 깨치는 사람이 많아요. 그것이 임제스님 할. 덕산 방, 덕산스님은 누가 부르기만 하면 방망이로 한 대 때려 올리거든요. 한 대만 맞으면 그냥 깨달아요. 그것이 덕산 방입니다. 그것이 다 일기법문입니다. 그러니까 죽비를 친다든가ㆍ불자를 든다든가ㆍ할을 한다든가ㆍ방을 한다든가ㆍ이것이 다 일기법문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법문을 입으로 말하는 것도 아니고, 딴 소리 하는 것도 아닙니다. 게송을 읊는 것도 없고, 오직 그저 한 방에 그냥 탁 탁 깨치는 것이 일기법문입니다.
그 다음에는 一境法門(일경법문)이라는 것이 있어요. 한 가지 경계라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최초에 6년 고행을 하시다가 턱~ 납월 팔일에 見明星悟道(견명성오도). 동쪽에서 돋아오는 별빛을 보고, 확철대오하셨잖아요. 그렇지요? 그것이 일경법문입니다. 경계를 봤다 이 말입니다. 샛별 돋아오는 경계를 보고 깨달은 것이 일경법문입니다.
소동파가 길을 가다가 보니까 닭이 울거든요. 닭이 꼬꼬댁 꼭꼬~~~ 새벽에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그냥 홀연히 깨달았거든요.
깨달아가지고는 턱~ 하니, 溪聲이 便是廣長舌(계성변시광장설)인데, 溪聲. 골짜기 시냇물 소리가 이대로 廣長舌상이라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廣長舌상인데, 淸山이 豈非淸淨身(청산기비청정신)가? 청산이 어찌 청정법신이 아닌가? 푸른 산이 어찌 청정법신이 아니겠는가? 흐르는 시냇물이 그대로 부처님의 법문일진대, 저 푸른 산 그대로가 어찌 청정법신이 아니겠느냐? 이 말입니다.
夜來八萬四千偈(야래팔만사천게)를, 밤중에 길을 가다가 홀연히 들이닥친 나의 八萬四千 그 게송을 如何他日擧似人(여하타일거사인)가? 어찌 다른 날에 누구한테 이것을 들어바쳐서 보일 것인가? 이것이 소동파의 오도송입니다. 그것이 일경법문입니다.
한 가지가 몰라서 애를 쓰고, 애를 쓰고 화두 한 생각만 일념삼매에 들어서 챙기던 사람이,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고, 또 앉아서 떡~~ 한 생각 공부하고 있는데, 옆에 자던 친구가 어떻게 잘못 해가지고, 세워놨던 목침이 탁 떨어졌거든요. 목침이 달그닥 떨어지는 소리에 그냥 확철대오를 했어요. 그것도 일경법문입니다.
또 어떤 스님은 본래면목 공부를 했거든요.
如何是本來面目(여하시본래면목)인고? 어떤 것이 본래면목인가~~~? 나의 참 본래면목이 어떤 것인가~~~? 이 몸뚱이야 겉껍데기 자동차인데, 이 자동차를 끌고 다니는 본래면목. 본래 참 나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그 생각을 삼매에 들어서 그냥, 가나오나 그 생각 하나 뿐인데, 아따 어디 가다가 장 앞을 지나가다가, 술 먹은 두 사람이 싸움을 해서 눈 탱이가 밤 탱이가 되고, 이맹이가 도맹이가 되고, 어쨌든지 간에 싸움을 해서 난리가 나고 코피가 터지더니, 나중에는 화해를 해가지고 둘이 한 잔 먹으면서 악수를 하면서 “이 사람아, 자네하고 나하고 그런 사이가 아닌데 내가 참 면목 없네.”
“이 사람아, 내가 면목 없네.” 둘이 서로 면목 없다고 그러거든요.
“면목 없네.” 소리에 그냥 확철대오를 했어요. “면목 없네.” 하는 소리에 확철대오를... 그것도 일경법문입니다.
이런 것이 부지기수지요. 일경법문에 깨달은 스님들이 제일 많아요. 이것은 어떤 스승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삼매 속에 들어가서 홀연히 그냥 어떤 기현상에 깨달은 겁니다. 그것이 機發하는 겁니다. 그것이 必有機發之時(필유기발지시)입니다. 機發之時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기틀을, 기연을 발한다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一言法門(일언법문). 一言之下(일언지하)에 頓忘生死(돈망생사)라고 그러지요? 一言之下에 頓忘生死. 한 마디 말씀 아래에 몰록 생사를 벗어난다. 옛날 큰스님들은 10년 동안을 스님 시봉을 해도 법문 한 마디 안 일러 주거든요.
“스님, 저 가렵니다.”
“어디 가려고? 왜 가려고?”
“스님시봉 10년 동안에 법문 한 마디 아니 일러 주니, 가야지 여
기 있으면 뭐 합니까?”
“법문이 뭔데?” 법문이 뭐냐고 물으니 참 기가 막히지요.
“불법 말입니다. 불법.”
“아 불법? 불법이라면 나한테도 조금 있지. 여기 있다.” 호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자, 이것이 불법이다.” 이러거든요. 빈주먹입니다. 거기서 깨쳤어요. 一言之下에 頓忘生死. 한 마디 말씀 아래에 깨치는 겁니다. 이런 법문들 많지요.
또 한 사람은 ‘에~이, 이 스님 밑에 있어봐야 소용없다. 도망 갈란다.’ 하고 막 도망갑니다. 조실스님이 도망간다는 소리를 듣고,
“시봉하고 여기 오래 살았는데, 10여 년 동안이나 살았는데 차비나 좀 줘야 될 것 아닌가? 아나 이것 갖다 줘라.” 꼬깃꼬깃한 종이 한 장을 주는데, 돈이 한 푼 들었는지 어쨌는지 주니까 받긴 받았는데, 부아가 나서 펴볼 생각도 없이 그냥 한 10리쯤 가다가 노장이 돈을 얼마나 줬는가 싶어서 펴고 보니까, 돈은 안 들었고 글이 떡~ 적혀 있는데 뭐라고 적혀 있느냐 하면,
可笑尋牛者(가소심우자)여, 가히 우습다. 소를 찾는 자여,
騎牛更覓牛(기우갱멱우)아? 소를 타고 소를 찾느냐?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느냐? 識得無影樹(식득무영수)하야사, 그림자 없는 나무를 알아 베어서
銷盡海中漚(소진해중구)하리라. 바다 가운데 거품을 다 태워야 하리라.
이 게송입니다. 이 글귀 한 마디에 그냥 확철대오 했거든요. 그것이 一句下(일구하)에 깨친 겁니다.
一言之河(일언지하)는 말씀 한 마디 밑에 깨치는 것이고,
一句下(일구하)에 깨치는 것은 게송 한 마디 밑에 깨치는 것이고, 이것이 다 機發(기발)하는 겁니다. 機發. 機緣(기연)을 발 한다 이 겁니다. 기틀을 발 한다 해도 되고요. 어쨌든... 必有機發之時(필유기발지시)하리니, 반드시 그 기연을 발할 때가 있을 것이다. 하는 소리가 바로 그 겁니다. 不得隨學語者(부득수학어자)하야 但取口辦(단취구판)이어다. 말 배우는 자를 따라서 다만 입으로 판단하는 것을 취하지 말지어다. 입으로 판단을 해서, 판단한다는 소리는 어쨌든 간에 입으로 처리한다는 소리지요. 입으로 그냥 이렇다 저렇다 입으로 그냥 처리해서 치워 버린다 이 말입니다. 실지는 아니고요. 실지는 가짜이고, 어쨌든지 간에 입으로 한 몫 하는 사람 숱하잖아요.
국회의원 저 사람들, 다 입으로 한 몫 하는 사람들이지 뭡니까?
아무것도 아니지요. 입으로 한 몫 하는 사람들. 그래서 옛날에 어떤 사람이 지옥 구경을 갔더랍니다. 한 곳에 가니까 주둥이만 수북하더랍니다. “웬 주둥이가 이렇게 많으냐?” 하니까 입으로만 까발리던 사람들은 주둥이만 갖다 놨다 하더래요. 한 방에 가니까 귀만 수북하더랍니다. 듣기만 하고 실천 아니한 사람들은 귀만 톡 톡 떼어가지고 수북이 갖다놨더랍니다.
所謂蛇飮水(소위사음수)하면 成毒(성독)하고,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을 이루고 牛飮水(우음수)하면 成乳(성유)인달하야,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가 된다 이 말입니다. 智學(지학)은 成菩提(성보리)하고, 愚學(우학)은 成生死(성생사)라. 지혜롭게 배우는 사람은 보리도를 이루고, 깨달음의 길을 이루고, 보리라고 하는 것은 지혜 智(지)자의 뜻도 있고ㆍ깨달을 覺(각)자의 뜻도 있고ㆍ길 道(도)자의 뜻도 있고, 길 道자가 옛날에는 도이고, 요새 표현으로는 진리이고 그렇습니다. 요새는 진리라고 표현을 하고, 옛날에는 도라고 표현을 하고 그랬어요. 보리라고 하는 뜻이 그런 뜻입니다. 智ㆍ覺ㆍ道.
愚學(우학)은 成生死(성생사)라. 愚學은, 어리석게 배울 것 같으면 생사를 이룬다. 생사라고 하는 것은, 정신 못 차리는 것이 생사입니다. 愚癡(우치). 우치한 것이 생사입니다. 바로 그 말이 그 말이다 이 말입니다. 成生死하는 것이 是也(시야)니라. 바로 이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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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不得隨學語者(부득수학어자)하야 但取口辦(단취구판)이어다...말 배우는 자를 따라서 다만 입으로 판단하는 것을 취하지 말지어다. _()()()_
어디에 가더라도 인간 세상은 똑 같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거기에서 시도 되고 그림도 되는 것이다..._()()()_
고맙습니다. _()()()_
釋대원성 님! 수고하셨습니다.._()()()_
退屈心(퇴굴심)도내지 말고, 慣聞想(관문상)도내지 말고, 容易心(용이심)도내지 말고, 妙在其中(묘재기중) 묘한 것이 그 가운데 있도록 중도를 취하라.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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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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