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절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한다.
그는 우리의 유월절 양이다(고전 5:7).
십자가에서 그는 구원받아야 할 각 사람을 위한 대비를 하였다.
그러나 십자가 자체로는 아무도 구원할 수 없다.
그것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만 열어놓은 셈이었다(참조 요 1:12).
양의 죽음은 구원의 수단을 제공하였다.
피를 발라야만 제공된 수단이 효력을 발휘했다.
양의 죽음과 피 뿌림이 함께 필요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의 속죄는, 비록 모든 사람에게 필수적이며
충분한 것이기는 하지만 피를 개인적으로 적용하기까지는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다.
피뿌림은 양의 죽음만큼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도 충분하지 않았다. 고기를 먹어야 한다
그것은 명시된 조건에 따라 먹어야 한다(출 12:11).
그리고 이것도 충분하지 않았다.
모든 누룩을 치워 버려야 한다.
지극히 사소한 것에 대한 부주의가 비극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출 12:13, 19, 23).
죽음에서 구원받는 것과 생명을 유지해 주는 수단을 갖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후자는 적극적으로는 양의 고기를 먹음으로써,
소극적으로는 누룩을 먹지 않음으로 제공되었다.
(입으로만 구원받았다!고 해서는 안됨)
그리스도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요 6:51)이며,
사람은 “영생”을 원하면 이것을 먹어야 한다.
양은 완전히 구워야 했다(출 12:9).
양의 모든 고기를 먹을 수 있을 만큼 사람이 충분히 있어야 했다(출 12:4).
어떤 것도 집 밖으로 가져가서는 안 되었고 어떤 것도 아침까지 남겨두어서는 안 되었다.
먹을 수 없는 부위들로 남은 것은 모두 태워야 했다(출 12:10, 46).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양으로 대표된 분의 생명에 완전히 동화되어야 한다.
이것은 신자와 그리스도의 완전한 하나됨을 의미한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과 성품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유월절에 상응하는 것을 신약의 주의 만찬, 곧 성만찬 예식에서 발견한다.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에는 그의 오심을 예표한 유월절 양을 잡는 일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러나 갈바리의 희생과 그것의 유지하는 능력을 기념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 때문에 우리 주님은 상징적인 성만찬을 제정하였고,
그 목적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제공된 것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성만찬은 원형과 마찬가지로 전(前) 방향과 후(後) 방향을 가리킨다.
우리는 갈바리를[전 방향] ,
“[그가] 오실”(고전 11:26) 때까지[후 방향] 기억해야 한다.